25화. 각성 (1)
두근두근.
심장이 제멋대로 날뛴다.
숨은 거의 쉬어지지 않고 심장박동수는 너무나 불규칙적이다.
흑객은 지금 자신에게 벌어지는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데스나이트의 감정의 변화를 알 수 있는 회색 눈빛, 그것이 기묘한 모양으로 변한 건, 아마도 그 역시 당황하고 있다는 것.
-오오오오!
데스나이트의 부러진 검에서 다시 어둠의 힘이 모이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두렵지가 않았다.
모든 내공이 소진된 이 상태에서도 흑객은 비늘 모양처럼 변해 버린 왼팔만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쩌어어엉!
다시 한번 같은 동작을 반복한 검을 수직으로 내리찍던 데스나이트.
흑객이 횡으로 이동하자.
휘릭.
그의 검 역시 순간적으로 좌로 이동하며 흑객을 쫓았다.
콰아아앙!
거력의 힘이 흑객의 왼팔을 강타했다.
강력한 폭발과 함께, 지면을 흔드는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커억!”
흑객의 몸이 주르륵 밀려 나갔다.
사라지지 않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데스나이트의 마력은 좀처럼 견디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패애애액!
이미 지척에서 데스나이트의 대검이 사선으로 내리긋고 있었다.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였다.
쩌어어어엉!
데스나이트의 눈빛이 다시 한번 변했다.
방해꾼이 또다시 그의 앞에 나타났다.
비늘처럼 뒤덮인 왼팔이 그의 대검을 잡아 버린 것이다.
“이 따위 것…….”
-……!
데스나이트의 치솟은 눈빛.
댕강.
그의 대검은 흑객의 의해 파괴되었다.
온통 이빨로 변해 버린 왼팔.
그 팔로, 마력의 근원이라는 데스나이트의 검을 강제로 부러뜨려 버렸다.
“이제 반격이다.”
핏빛으로 변한 눈동자를 본 데스나이트의 눈빛이 다시 흔들렸다.
팟.
이번엔 흑객이 공중으로 도약했다.
급히 고개를 올린 데스나이트는 마력을 검에 주입했다.
나름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런데.
-……?
흑객은 곧장 내려오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높이 뛴 것인지 데스나이트가 잠시 당황할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올려다보던 데스나이트 눈에 흑객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마력을 가다듬고 검을 뻗으려는 그때.
-……!
또 한 번 멈칫했다.
이번 역시 상대가 예상을 벗어나는 속도로 떨어져 내렸기에.
퍼어어억!
-그아아아.
데스나이트는 처음으로 비명을 질렀다.
흑객의 변이된 손이 그의 머리를 정통으로 내려찍자. 그 충격의 고통을 토해 낸 것이다.
얼마나 압력이 강했던지, 타고 있던 뼈 말의 다리가 부러졌고, 데스나이트는 말에서 떨어지며 머리를 처박았다.
퍼억!
이번엔 흑객은 말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말의 머리통은 그대로 박살이 났고, 더는 일어서지 않았다.
-그으으으.
언제 물러섰는지 데스나이트는 흑객을 피해 몇 걸음은 뒤에서 흑객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통을 느끼는 건지 그는 괴이한 비명을 계속 지르고 있었다. 그에 반해 흑객은 한 점도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그를 향해 다가갔다.
“……?”
싸움을 끝내기 위해 다가가던 흑객이 멈칫했다.
갑자기 데스나이트 바닥에서 사이한 기운이 솟아올랐고,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는 이전처럼 모습을 되찾았다.
“저 녀석인가.”
고개를 돌리던 흑객.
때마침 네크로맨서와 대치하고 있는 천마가 눈에 들어왔다.
* * *
콰아아아앙!
무더기로 모여 있던 몬스터의 몸체가 일시에 박살이 났다.
뇌전의 기운은 스켈레톤의 뼛조각을 죄다 터뜨려 버렸고, 레이스와 밴시도 한순간에 소멸시켜 버렸다.
심지어 스톤 골렘은 가루가 되어 바닥에 흩뿌려졌다.
“이건 내공 소모가 심하네…….”
천마는 주변의 몬스터들을 혈수마공으로 불에 태워 버린 후, 자전마공(紫電魔功)을 이어 사용하여 몸체를 터뜨려 버렸다.
염화공은 내공 소모가 극심해 임시방편으로 다른 무공을 끌어온 것이다.
-크으으으.
-으흐흐흐.
압도적인 위력에 천마에게 접근하던 몬스터들은 주춤거리며 경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능이 없는 것들인 만큼, 여전히 공세를 멈추지 않을 것이 뻔했다.
“물러서라.”
어둠 속, 수천의 군세에서 몬스터 하나가 말발굽 소리를 내며 걸어 나왔다.
히이익. 하아악.
그의 등장에 주변의 몬스터들이 일찌감치 물러섰다.
“해골 대장인가?”
그걸 본 천마가 피식했다.
기이한 기운을 뿜어내는 데스나이트.
한데, 자세히 보니 흑객과 싸우던 놈과 어딘가 달라 보인다.
둘 다 뼈 말을 탔지만, 천마의 눈에 보이는 놈은 가슴에 갑주와 반달 모양으로 삐져나온 투구를 쓰고 있었다.
또한, 들고 있는 게 대검이 아닌, 뼈로 된 창이었다.
“확실히 보통 놈은 아닌 것 같은데…….”
화르르륵.
천마의 검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전과 달리 무려 다섯 자나 길어졌고.
지지지지직.
불꽃 주위로 뇌전의 힘까지 중첩되었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
쩌어어엉!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검을 휘두르자 두 공력이 허공에서 폭발했다.
그런데 소리는 크지 않았다.
흑객과 데스나이트의 격돌과 달리 양쪽의 기운은 폭발 없이 그 자리에서 소멸된 것이다.
“여기다.”
-……!
부딪친 두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기도 전에, 어느새 데스나이트 옆으로 다가온 천마가 말을 걸었다.
그리고 상대의 시선이 반응하기도 전, 천마는 이미 두 번째 공격을 시도했다.
쩌어엉!
연거푸 생성된 자전마공이 데스나이트를 복부를 강타했다.
한데 강력한 일격이 격중됐음에도, 놀랍게도 그는 베어지지 않고 튕겨 날아갔다.
파팟.
천마는 경공술로 재빨리 따라붙었다.
데스나이트는 천마의 움직임에 도저히 따라가지 못했다.
그런데 변수가 있었다.
이히이잉!
그가 타고 있던 말이 튀어 올라 천마의 일격을 대신 막아 낸 것이다.
쩌엉!
그로 인해 말 머리 일부가 반파되며 바닥에 처박혔고, 데스나이트가 안장에서 떨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운이 좋았… 뭐야?”
다시 검을 휘두르려는 천마는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동시에 급히 자리에서 도약하며 뒤로 물러섰다.
촤아아아악!
그 순간, 천마가 딛고 있던 지면에서 수십 개의 가시 뼈가 솟아올랐다.
한 끝 차이로 피해 낸 것이다.
투욱.
지면을 밟은 천마는 턱을 들어 옆을 바라보았다.
방금 공격은 데스나이트가 아닌 다른 이의 공격, 아마도 머리를 덮은 장포를 둘러쓴 그일 터였다.
아니라 다를까, 그가 걸어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레스토레이션(restoration, 복원).
“허어.”
네크로맨서가 해골 지팡이를 어깨높이만큼 올리자 천마가 짧게 신음했다.
갑자기 몬스터들의 눈빛에서 사이한 빛이 감돌더니, 이내 쓰러졌던 몬스터들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일격을 맞은 뼈 말이 다시 본래대로 복구되었다.
부서진 데스나이트의 갈비뼈도 다시 붙었다.
“마법이란 건가?”
천마가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보았다.
“저기, 괜찮습니까?”
흑객이 다가오자 천마가 그의 팔로 시선을 내렸다.
“아, 이거.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소. 당신의 도움으로 이놈을 깨울 수 있었소. 감사하오. 내 이 은혜는…….”
“얼마 못 가.”
“예?”
흑객은 고개를 갸웃했다.
천마가 한 곳을 향해 슬쩍 눈짓했다. 그 모습에 흑객은 그가 자신의 팔을 가리킴을 깨달았다.
“지금 네놈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그 팔에 기생하는 놈이 너의 수명을 갉아먹으며 움직이고 있어. 체내의 피를 흡수해서는 숙주가 위험하다는 걸 아니까.”
“아…….”
“그렇다고 저놈들이 피를 토해 내는 놈들도 아니고. 어찌 됐든 그놈은 결국 미쳐 날뛸 거다. 그러면 너도 곧 미칠 수밖에 없지. 네 몸은 그놈 게 되니까.”
흑객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굉장한 도움을 받고 있던 이놈이 이젠 자신을 먹으려고 하고 있다니.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필멸자여, 여기가 어딘지 알고 왔는가?”
때마침 저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고위 마법사라 그런지 저놈은 중원어를 할 줄 아는 듯했다.
“어. 알고 왔어.”
천마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았다.
-자신감이 넘치는 자로구나. 하긴, 다들 처음엔 그랬지. 네크로맨서 사냥이란 명목하에, 중원 놈들이 이렇게 한 번씩 나를 찾아오곤 했었지.
“그런데도 용케 살아 있었네?”
-너는 그 이유가 뭘 것 같으냐?
“달리 이유가 있나.”
천마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을 가리키고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본좌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지.”
-허허허. 과연. 그 자신감만은 이제껏 상대한 놈들과 달라 보이긴 하구나.
네크로맨서는 자신의 지팡이를 스윽 매만졌다. 지팡이 위에 덮인 수정 구슬이 희미하게 빛이 났다.
그리고 그 빛이 작아질 때쯤 그는 입을 열었다.
-참고로 나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다. 너희들의 힘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지.
“지금 상황에 그게 중요한가?”
-그럼. 매우 유리하게 싸움을 이끌 수 있지. 어디 보자. 네놈의 내공은 총 크기는 1갑자 반. 지금은 반 이상이 날아가, 반 갑자보다 조금 높은 상태다. 옆에 있는 놈의 내공 역시 1갑자 반.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군.
“…….”
-여기까지 온 건 축하해 줄 일이다만, 이 상태로는 내 옆의 데스나이트와 비슷한 수준이다. 나와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이 말이지.
“…….”
천마는 담담하게 바라보았지만 속내는 그리 편치 못했다.
처음 염화공을 사용하자마자 반 갑자의 내공이 한 번에 날아갔다.
그리고 곧장 천심내괴공(天心內怪功)을 운기했다.
소진한 내공의 절반가량을 되돌려 주는. 이른바 역류 현상을 일으켜 내공을 채운 것이다.
‘생각보다 내공 회복이 빠르진 않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었다.
이 심공은 원래 탈마의 경지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 탈마가 못 된 지금 상태로는, 그의 모든 내공을 단번에 채워 주지 못했다.
단기간 내공을 지속적으로 채워 주는 천극대기공(天極大氣功) 역시도 그랬다.
미궁 전역에 둘러쳐진 사이한 결계가 그 위력을 반감시키고 있었다.
「일각(15분) 안에 끝낸다.」
“……!”
흑객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천마가 자신에게 전음으로 말을 걸고 있었다.
「아무리 길어 봤자 그 시간을 넘지 못할 것이다. 네놈 팔에 있는 그놈은 언제 너의 육신을 가져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니까.」
“…….”
「다만,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일각 안에 데스나이트라는 놈을 쓰러뜨리고, 그놈의 마력을 흡수하는 것. 다시 내공을 채워 그를 억누를 수 있다면, 발작도 멈추게 될 거다.」
“제가 어떻게 저들의 마력을 흡수…….”
-얘기는 다 끝났나?
확실히 보통의 몬스터는 아니다.
전음으로 대화하는 걸 눈치챘는지, 네크로맨서가 말을 걸어 왔다.
그걸 본 천마는 이번엔 대놓고 말했다.
“별것 없어. 저들의 단전을 찾아 손바닥을 대고 평소 주로 쓰던 심법을 운기하면 된다. 상대의 기를 뺏는 탈마흡기공의 원류도 거기서부터 시작이거든.”
“탈마흡기공……!”
흑객은 경악했다.
잔혈마공도 놀라운데,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탈마흡기공도 알고 있단 말인가.
-그래? 그럼 어떻게 죽기로 결심했나?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다.”
-……?
천마는 흑객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리고 네크로맨서를 다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놈의 힘은 어느 정도냐? 내공으로 치면 말이다.”
-…….
네크로맨서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요량인지 잠시 침묵했다.
그러곤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7갑자가 조금 넘지.
“7갑자? 정말이냐?”
천마의 눈이 번뜩였다. 오래 기다리던 뭔가를 발견한,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
천마의 반응을 본 탓일까.
네크로맨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곧 죽을 놈의 눈빛에서 생기가 감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리고 뒤이어 이어진 말은, 그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다.
“단번에 극마에 오를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