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26화 (27/310)

26화. 각성 (2)

1갑자(甲子).

산술적으로 보통 무인이 6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온종일 심법을 운기했을 때, 쌓이는 양의 내공을 말한다.

그럼 하루도 빠지지 않고 60년간 수련을 하면 1갑자는 누구나 달성 가능한 것일까?

그건 아니다.

내공을 쌓을 때마다 찾아오는 벽. 세상 만물을 굽어보고 내 몸을 이해하는 과정 즉, 깨달음도 함께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인이 1갑자를 쌓을 때, 8번의 거대한 벽을 만난다고 한다. 즉, 8번이나 벽을 넘고 나서야 비로소 1갑자를 모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2갑자인 경우는 어떨까?

1갑자 때보다 더 많은 벽을 만나고 더 거대한 벽을 부숴야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1갑자와 2갑자, 두 내공의 차이를 단순히 2배라고 정의할 수 없다.

내공, 갑자의 높아짐은 단순히 길이가 아닌, 너비에 더욱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현재 소드 마스터라고 불리는 자들의 내공은 3갑자. 화경은 5갑자 이상.

그에 비추어 보면, 7갑자란 양은 소드 마스터를 넘어 화경도 상회한다는 말과 진배없었다.

물론 내공만 많다고 해서 무조건 경지가 높아진다고 말할 수는 없다.

깨달음으로 내공이 오르기도 하지만, 영약을 섭취하거나, 타고난 무골과 재지만으로도 내공을 증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동반하지 않으면 내공의 비대칭이 일어날 뿐이다.

여튼 중요한 것은.

네크로맨서가 말한 7갑자는 천마에겐 극마까지 급상승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

파파팟.

천마가 움직였다.

단번에 적진의 중심으로 날아들며, 네크로맨서를 향해 돌진했다.

“키키키익”

“치잇!”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천마가 지나간 뒤 반응했다. 그만큼 빨랐고, 저돌적이었다.

-그아압!

데스나이트의 뼈 창에서 암흑의 기운이 실렸다.

다른 몬스터와 달리, 그는 천마의 움직임을 포착해 정확히 정조준했다.

-……?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일격을 가하리라 여겼던, 암흑의 기운이 천마에 닿기도 전에 되돌아온 것이다.

건곤대나이.

천마는 호교신공(護敎神功) 극의라 불리는 수법으로 상대의 기운을 되돌려 버린 것이다.

쩌어엉!

데스나이트는 스스로의 기운에 폭사당하며 또다시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잡았다!”

네크로맨서의 거의 지척까지 다가선 천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네크로맨서는 동요하지 않았다.

-Confusion Sense(감각 혼란).

그저 가볍게 마법구를 만지며 무언가를 읊조릴 뿐.

‘어……?’

멈칫.

곧장 상대의 목을 부러뜨리려던 천마의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했다.

눈앞에 적들이 간헐적으로 사라졌다 나타나는 괴이한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캬아아아.

-스아아아.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음파(音波).

형형색색의 빛깔이 귓속으로 들어오는 이명 현상.

소리가 보이고, 빛이 들리는 기현상이 천마에게 벌어지고 있었다.

‘감각을 교란한 건가?’

모르긴 몰라도 네크로맨서가 발현한 저주 중 하나일 것이다. 수업 시간에 나오지 않은 까닭은, 보편적이지 않은, 이놈만이 가진 특별한 능력이라서 그렇고.

-피이이익.

붉은빛 하나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순간, 천마의 몸이 휘청였다.

어느새 가슴어림을 훑고 지나간, 갈고리 손톱 형태의 상처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아마 스켈레톤의 공격이었을 것이다.

-사아아악.

그리고 괴이한 소리와 함께 움직이는 푸른빛.

천마가 급히 몸을 뒤로 움직였지만, 이번엔 소리는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귓가에 맴도는 빛이 감각을 흔들 뿐.

“이거 꽤 성가신데?”

천마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사실, 이 정도 수준의 저주를 파훼하는 방법은 천마에겐 무수히 많았다.

주변 적들을 염화공으로 전부 태워 버리거나, 강제로 피를 내어 임시 제단을 만드는 방법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의 무공 수준으로는 어느 것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여 천마는 살기를 느끼는 ‘직감(直感)’에 집중했다.

-키이이익.

감각계를 의도적으로 흔든다고 해서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청각과 시각을 교란시키고, 다른 감각들을 마비시킨다고 해도 이 또한 감각일 뿐.

그렇다면 감각에 지배되지 않고, 다른 감각을 깨우면 그만이다.

-우우웅웅!

이번엔 녹색 빛이 다가왔지만, 천마는 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지나갔고.

-패애애액.

제각각의 소리가 귓가를 타고 울어 대자 천마는 검을 들어 그 빛을 없애 버렸다.

그 순간.

-패애애액. 시이이익. 사아아악. 패애애액. 시이이익. 사아아악. 패애애액. 시이이익.

그 시점으로 무려 수십, 수백 개의 빛과 소리가 섞여 천마를 파고들었다.

“이거군.”

천마는 눈을 감은 채로.

한 곳으로 모여든 수많은 빛과 소리들을 향해 들고 있던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 * *

“대체…….”

흑객의 시선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어느샌가 고용주 머리 위에 나타난 붉은 빛.

짐작이 맞다면 저건 컨퓨젼 센스(Confusion sense)란 마법으로 감각을 흔드는 고위 마법 중 하나다.

“뭐 하는 놈이야! 저거?!”

아무리 네크로맨서라고 해도, 대인 최고의 저주인 감각 혼란을 사용하다니.

이 던전은 흑객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시각이 청각으로 바뀌고, 청각이 시각으로 바뀌는 건 범인에겐 평생을 가도 극복 못 할 장애다.

절정, 초절정의 고수라 해도 꼼짝 못 하고 두들겨 맞게 될 뿐. 한데, 우려가 기우로 바뀌는 데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파바바바밧!

몇 번의 교전 후, 천마는 적응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수없이 달려드는 몬스터들의 목을 날려 버리고 있었다.

불끈!

흑객은 괜히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던전의 네크로맨서도 분명 상식을 벗어났지만, 저 고용주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놈이었다.

고서에서나 보아 오던 천마신교의 전설이, 이한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제법 믿는 구석이 있었던가.

지켜보던 네크로맨서의 눈빛은 영롱하게 변했다.

상대는 감각 혼란의 마법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정확히는 어떤 원리를 파악하고 극복해 냈다고 봐야 했다.

-가거라.

네크로맨서가 손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데스나이트 둘이 움직였다.

하지만 이미 천마는 그곳에 없었다.

몬스터들을 베는 속도가 몇 배나 빨라지더니, 이내 몸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이내, 네크로맨서의 눈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본 월!

네크로맨서는 급히 마법구를 휘둘렀다.

카드드득!

천마가 주먹을 뻗는 동시에, 바닥에서 뼈들이 솟아오르며, 네크로맨서의 주변을 보호했다.

본 월(Bone Wall).

말 그대로 뼈의 벽을 만드는 것으로, 물리 공격만이 아니라, 외기(外氣)와 마법까지 막아 내는 절대 방어.

“흥!”

쩌저저적!

천마는 단번에 본 월을 부숴 버렸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콰창!

“쳇.”

연거푸, 강대한 힘을 견뎌 내던 자신의 검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그럼에도 천마는 멈추지 않았다.

반격하는 네크로맨서의 마법을 쉽게 피해 내고,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렸다.

천마잠형술(天魔潛形術).

천마신교의 최고의 보법 중 하나로, 육안으로는 결코 감지할 수 없는 수법.

이는 단순히 움직임이 빨라서가 아닌, 상대의 시야를 감지해 항상 그 지역에 벗어나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항상 상대의 뒤에 있다는 말이다.

“컥!”

움직임을 쫓지 못한, 네크로맨서의 신형이 흔들렸다.

본래는 몸이 반파될 정도의 강력한 위력의 일격.

다행히, 본 월 다음에 본 아머(Bone Armor), 뼈의 갑옷으로 본신을 방어했기에 미미한 피해를 입는 데 그쳤다.

퍼퍼퍽!

“큭! 큭! 컥!”

하지만 몇 번의 공격이 거듭되자 네크로맨서의 골갑(骨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달려든 천마.

퍼억!

그러나 타격을 주지 못했다. 갑자기 네크로맨서 주위를 감싼 본 골렘이 대신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래. 생각해 보니 소환의 능력도 있다고 했지.”

천마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며 감탄했다.

분명 일격에 끝낼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좁은 공간에서 대여섯의 본 골렘이 순식간에 나타나 공격을 대신 맞았다.

이것만 해도 보통은 넘는다고 쳐 줄 수 있었다.

“제법이지만 재롱은 여기까지…어?”

천마의 몸이 급속도로 굳어 버렸다.

꽈드득!

본 암(Bone Arm). 어느새 네크로맨서가 거대한 뼈 손 넷을 소환해 천마의 두 팔과 다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찰나간의 경직. 그 틈을 네크로맨서는 놓치지 않았다.

“용행구천(龍行九天).”

“…뭐?”

파아아아앗-.

어느새 거리를 좁힌 네크로맨서는 몸을 굽히고 있었다.

전삼후칠. 중원인에게 익숙한 마보를 취한 놈의 손아귀에서 기포(氣抛)가 터져 나왔다.

그 수는 무려 아홉 개.

그것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천마를 향해 치솟듯 파고들어 갔다.

콰아아아앙.

미궁 안에서, 엄청난 폭발이 터져 나왔다.

스스스스-.

한바탕 태풍이 쓸고 지나간 듯한 광경이었다.

네크로맨서는 어중간한 자세로 서 있었고, 그 앞으로 지면이 무려 1장 깊이로 파헤쳐져 있었다.

충격이 휩쓸고 간 방향으로 몬스터 잔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어둠과 빛의 경계 끝에, 피를 머금고 주저앉은 천마의 모습이 보였다.

“고용주! 괜찮소이까?”

흑객이 다가와 천마의 상태를 살폈다.

상식을 벗어나는 충격적인 무위.

하지만 그보다 놀란 것은 그 힘을 찍어 누르는 네크로맨서의 마법이었다.

철벅.

‘이런.’

천마의 상태를 살피던 흑객의 표정이 굳었다.

바닥에 토한 핏속에 엉켜 있는 이물감.

방금 일격을 맞음으로써 필시 내장 조각까지 섞여 나온 것이다.

“곤륜파의 무공을 어찌… 저놈, 중원 놈이었던가… 크읍. 컥”

“곤륜파라니? 그게 무슨… 설마!”

흑객은 고개를 돌렸다.

자신들을 바라보고는 네크로맨서.

설마하니, 140년 전, 최초 침공 시 지도상에서 지워졌다는 곤륜파 사람이 몬스터가 된 것인가?

‘무림인이 네크로맨서가 되다니…….’

-고작 필멸자 따위가!

한편, 천마의 일격은 받은 네크로맨서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가 허공 위로 손을 휘젓자, 몬스터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끄득끄득. 꺼덕꺼덕.

그리고 조금씩 변화하는 몬스터들.

스켈레톤은 덩치가 2배나 커졌고, 스켈레톤 메이지의 주변을 덮고 있던 마력의 농도가 더욱 짙어졌다.

“어이, 용병.”

정신을 차린 듯, 천마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흑객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 각만 버텨 봐라. 그 정도라면, 어떻게든 될 테니.”

“내가? 아니, 제가요? 어떻게 말입니…….”

터억.

흑객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천마의 팔이 축 늘어졌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눈가에 초점도 갑자기 사라졌다.

“어… 어…….”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알게 해 주마.

쿠드드득. 쿠드드득.

천마가 늘어진 직후. 네크로맨서가 한 손을 뻗쳐 올렸다. 뼈로 된 손바닥에서 대나무 마디만 한 것이 솟구쳐 올랐다.

까락까락. 까락까락.

누르튀튀한 인골.

140년을 묵은, 한때 곤륜파 장로였던 자신의 뼈로 만들어진 홀(笏 :Ward)이었다.

-고한다.

덜덜덜덜! 빠득빠득!

뼈가 진동했다. 누렇게 색이 바랜 늑골에 자글자글 잔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와르륵. 무너져 내리고 속이 드러났다.

-세상 만물이 내 손끝에서 생멸을 반복하니라. 산 자 죽지 않을 수 없으며, 죽은 자 내 부름을 받지 않을 수 없노라.

솨아아아!

인광을 받은 인골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네크로맨서는 부정(不淨)한 홀을 들고 던전 전체에 대고 외치고 있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생명의 흔적에 명하노니. 생피(生皮)에 걸쳐진 1층에서 5층까지. 사멸(死滅)하여 뻗어 내린 6층에서 10층까지. 심연(深淵)에 닿은 11층에서 14층까지. 옛 필멸자의 흔적이여 드러나라!

목소리는 와앙 하고 메아리치며 사방으로 번졌다.

처음에는 불경을 외는 고승의 독경처럼 낭랑한 목소리였다. 하나 그 본질은 끔찍한 저주였다.

드드드드득!

일순, 어마어마한 진동이 층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츄아악!

14층 지하 전체가 강렬한 빛을 뿜었다. 그 빛은 천정으로 솟구쳤다.

‘이건, 미궁의 결계?!’

바닥에서 무수한 문자와 기호들이 빛을 내고 있었다.

“큭!”

흑객은 급히 천마를 들어 안고 몸을 피했다. 어찌 봐도 맞아서 좋을 것 같지 않은 빛이었다.

츄아악! 츄아악! 츄아악! 츄아악!

“커억!”

그러나. 애초에 피할 수가 없었다. 천장으로 솟구친 빛은 십여 개가 되어 다시 바닥으로 내리꽃혔다. 흑객은 땅을 뒹굴며 바들바들 경련했다.

“제, 제길. 이건……!”

혼돈, 우울, 죽을 것 같은 공포와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감.

아까까지만 해도 극복했다 여긴 심마가 다시 살아났다. 아마도 네크로맨서가 발동시킨 저주 마법일 터.

지역 전체를 뒤덮은 다양한 저주는, 심지어 원래보다 훨씬 더 증폭되어 있었다.

까닥까닥. 까각까각.

그리고 죽었기에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 뼈들. 주변에서 서서히 몰려드는 몬스터들.

곳곳에 포진해 있던 스켈레톤 메이지는 구동어를 외치는 지, 얼음 냉기가 그들의 마법 봉에 맺히고 있었다.

밴시와 레이스들도 허공에서 차츰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밑지는 장사야. 이건…….”

흑객은 가슴에서 유리로 되어 있는 병 네 개를 꺼냈다.

그리고 뚜껑을 열고 단숨에 들이마셨다.

아끼고 아껴 왔던 2개의 힐링 포션(Healing Potion)과 2개의 마나 포션(Mana Potion).

30년 전, 무림마력연구소(武林魔力硏究所)에서 개발한 신약으로, 소진된 체력과 내공의 일정 부분을 채워 주는 단발성 영약이다.

무려 한 개당 금 100냥에 달하는 물건.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단단히 보상을 받아 내겠다!”

타닥!

흑객은 몸을 날렸다.

이제부터 그저 반 각. 버티기만 하면 된다.

탈출이라는 얇은 구명줄은 이미 끊겼다.

그럼에도 그는 고용주를 단단히 둘러메고 놓지 않았다.

앞으로는 그가 자신의 황금 동아줄이 될 거라 믿으며 죽어라고 뛰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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