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27화 (28/310)

27화. 혈교의 수법 (1)

드드드득! 드드드득!

“전원 엄폐하라!”

처음에 토벌대를 덮친 것은 진동이었다.

10층을 막 통과하려던 천무학관 일행들은, 갑작스레 던전 전체가 뒤집어질 듯한 흔들림에 휩싸였다.

“진을 형성하라!”

“머리 위를 방어해!”

쿠드드등!

천장이 일부 무너졌다. 경계하고 있던 토벌대는 재빨리 피해 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일당백. 천무학관에서 가려 뽑은 인재들이었다.

“던전에 지진이라니. 이 무슨…….”

진동이 잦아들자 남궁호가 중얼거렸다.

“기관이 발동한 게다.”

방패를 높이 든 남소천군이 말했다.

“기관이 말입니까?”

“그래. 아마도… 이런!”

한데 막 대답하려던 그의 얼굴이 굳었다.

츄아아악!

어마어마한 빛이 솟구쳤다.

섬전처럼, 바닥에서 천장으로 벼락처럼 솟구치는 빛.

창졸간 빛을 뒤집어쓴 무인 다섯이 곧장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악! 으아아악!”

“마법이다! 끌어내!”

한 교관은 눈이 뒤집혔고 다른 이는 간질환자처럼 발작했다. 어떤 이는 혈관이 부풀어 오르고, 혀를 깨무는 자도 있었다.

“대체… 이게 뭐냐!”

“당황하지 마라!”

교관들조차 난생처음 보는 기괴한 현상에 질렸다. 그때 제운비가 나섰다.

툭. 툭. 으윽!

그는 혀를 깨물고 피를 뿜는 단원을 점혈했다. 죽음으로 이어지는 극단적인 상황을 막으려는 것이다.

“수석 교관님!”

“알았네!”

뒤이어 치유학 교관이 나섰다. 그는 뻣뻣하게 몸이 마비된 단원에게 구동어를 외웠다.

“치료될지어니!”

우웅!

수정이 박힌 지팡이가 하얗게 빛났다. 연한 하늘색의 섬광이 주변으로 퍼졌다.

동시에 꺽! 꺽! 하며 발작하던 단원 중 일부가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살을 에는 통증이 사라지니, 겨우 호흡이 재개된 것이다.

“대단하군요……. 저게 힐(Heal)입니까?”

“조용.”

감탄하는 남궁호에게 남소천군이 입을 다물라고 지시했다.

토벌대의 수뇌들이 모여들었다. 지금 상황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이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제운비가 물었다. 던전학과 교두 월산이 턱을 쓰다듬다가 결론 내렸다.

“저주 계열인 것 같습니다. 효과는 아마도 통각 폭주 증상으로 짐작됩니다.”

“통각 폭주?”

“몸에 닿는 모든 감각이 통증으로 느껴지는 악랄한 저주지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통각의 최대치를 몇 배로 넘어섭니다.”

고통이 심해지면, 그저 아픈 것만으로도 사람이 죽을 수 있다. 당연히 임무는 속행 불능.

그저 빛을 쐰 것만으로도 무인 다섯을 잃게 되자 제운비가 혀를 찼다.

“일개 네크로맨서가 그런 고위급 저주를 쓰기도 하는 거요?”

“등급 추정치를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이 안에 있는 녀석은 그동안 우리들이 경험했던 네크로맨서와는 여러 면에서 다릅니다.”

루위가 말을 받았다.

등급에 대한 의견은 분분했지만, 최근에 보고받기론 리치(Lich). 위험 등급 12급의 출력을 보인다는 게 교관들의 얘기였다.

뒤이어 월산이 제운비를 보고 말했다.

“사전 준비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잖아도 이 던전 내에 바닥 돌이…….”

“바닥 돌이 어쨌다는 거요?”

핼쑥.

말을 하다 말고 월산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운비가 짧게 물었다.

“왜 그러시는?”

“또 옵니다!”

월산의 말에 다들 눈을 떴다.

“뭐?”

드드드득! 드드드득! 드드드득!

또 한 번 층이 뒤흔들렸다.

복도 곳곳에서 천장이 백열했다. 벽을 구성하는 뼈 기둥, 바닥에 널린 뼈 조각들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꺼어억! 꺼억!

아직 저주에서 회복하지 못한 단원들은 몸이 흔들리자 그 통증으로 숨이 넘어갔다.

“이런, 저주 따위에게…….”

제운비가 빠드득 이를 가는 순간.

“위, 위에서 내려옵니다!”

하청청의 비명과 함께 천장에서 빛이 쏟아졌다.

츄아악! 츄아악! 츄아악! 츄아악!

좀 전처럼 바닥에서 올 거라 예상했던 제운비도 허를 찔렸다. 그조차 이어진 사태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스우우우욱.

사방의 뼈란 뼈에서 전부 하얀 가루, 혹은 연기 같은 것이 날렸다. 척 보아도 불길하기 짝이 없는 기운이었다.

“이럴 수가. 이건…….”

월산 교두는 이를 따다다닥 마주쳤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이 중에서 저주에 대한 이해가 가장 높은 그는, 악몽이라도 꾸는 듯 가장 끔찍한 얼굴이었다.

“월산 교두! 대책을!”

제운비가 충격에 휩싸인 그를 채근했다. 망연해져 있던 월산이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방법이 없습니다! 최소 다섯 겹의 복합 저주입니다!”

우울(Depression), 무기력(Lethargy), 공포(Panic Disorder), 적아 혼동(Confusion), 감각 착란(Sense Confusion).

책에 나오는 저주란 저주는 다 뿌려진 듯했다. 하나를 막아도 다른 것에 걸린다.

이대로라면 싸움 한 번 없이, 토벌대가 전멸한다. 믿을 수 있는 것은 개개인의 집중된 의식뿐.

“전원! 호심공을 외워라! 진기를 도인(導引)해서 백회혈로 보내라!”

말을 알아들은 제운비가 곧장 노호를 터뜨렸다.

크허어엉!

지하 10층에서 뇌성벽력 같은 소리가 울렸다.

척마멸사(拓魔滅邪)의 공능을 담은, 저주를 밀어내는 사자후였다.

* * *

“크억! 헉! 으큭!”

흑객은 정말 죽어라고 뛰었다. 사위가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마법을 피해 몸을 던졌다.

퍽! 퍼벅! 투각!

뼈의 칼날을 몸으로 막고 칼로 길을 뚫는다. 구석진 벽에 처박히길 여러 차례.

화르르륵! 슈아아악!

화염과 냉기의 화살은 집요하게 그를 노렸다.

동시에 수많은 뼈 창이 등과 정면에서 찔러 들어왔다.

흑객은 그나마 반응이 있는 스켈레톤 하나를 어깨로 밀었다.

퍼엉!

뼈 갑주로 온몸을 덮은 해골바가지가 크게 뒤집혔다.

그놈이 나가떨어져 한데 모여 있던 놈들을 밀어냈다.

졸지에 몬스터가 엄폐물이 된 것이다.

콱! 콰득!

“끄윽!”

제 편 공격에 맞아 소멸되는 가운데서도 다른 해골이 어깨 어림을 찔러 왔다. 흑객은 놈의 얼굴을 발로 날려 버리며, 그 반동으로 몸을 날렸다.

쿠웅!

허억. 허억. 허억.

숨이 가빴다.

천마를 둘러업은 흑객은 온몸이 끈적거렸다.

반은 땀이고 반은 피다. 입안으로 스며드는 찜찜한 맛은 그를 불편하게 했다.

“퉤엣. 젠장.”

뛰어도 뛰어도 제대로 된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위 13층까지는 어느 정도 인위적인 공간이라면, 14층은 천연의 동굴이었다.

반절은 종유 동굴이고, 반절은 기분 나쁜 검은 흙이었다.

그리고 그 검은 흙에서는 수도 없이 하얀 뼈다귀가 일어나고 있었다.

‘어디로 도망쳐야 가야 하나?’

흑객은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폈다.

까드득! 까드득! 철컥. 철컥.

스켈레톤의 수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우글우글 몰려드는 해골바가지들은, 얼핏 보아도 수백 단위를 아득히 넘었다.

뼈 칼과 뼈 창으로 무장한, 천 단위 이상의 군대.

그것들이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단신으로 군대에 뛰어든 기분이다.

“이건 뭐 살 방도가 없겠는데…….”

화르륵! 씨이이잉!

정작 문제는 해골들보다 드문드문 있는 스켈레톤 메이지였다.

뼈다귀 주제에 마법을 쓰는 놈들이다.

포션으로 내력과 체력을 회복하긴 했지만, 저주에 걸린 통각 폭주가 발목을 잡고 있다.

물리적 통증은 이 악물고 버텨 보려 해도 마법적인 공격을 맞으면 정신이 아득해졌다.

더욱이.

스샤아아— 키익!

“끅!”

까다로운 놈들은 또 있다.

허공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레이스와 밴시.

메이지의 마법 공격은 스켈레톤으로 막을 수 있었다. 아무리 사격이 집중되어도 사각이라는 게 생기니까.

하지만 같은 해골을, 벽을, 바닥을 투과하며 날아드는 유령 계열 몬스터들은 답이 없었다. 그저 내력으로 버티고, 내력으로 베어내는 수밖에.

“흑영신장(黑靈神掌)!”

흑객은 벽을 통과해 달려든 밴시를 향해 권풍을 생성했다.

본디 주먹을 뻗자마자 순식간에 권기(拳氣)를 생성하는 기법이지만, 지금은 내공을 아껴야 했다.

펑! 펑! 펑!

권풍으로 유령들을 밀어내고, 다시 몇 걸음을 뛰었다.

그때 전혀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달려드는 스켈레톤의 칼날.

그는 늦었음을 직감하고 천마를 보호하며 대신 맞았다.

퍽! 퍽!

“…크으. 큭.”

흑객은 반격하지 못하고 짧게 신음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몸에 달군 인두를 지져 대는 듯한 느낌.

폭주한 통각의 영향으로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어깨에 멘 천마의 몸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이를 감지하고 붙잡아 올린 건 분노였다.

“고작 해골 따위에게!”

흑객은 비명 같은 기합을 내지르며 세 번을 걷어찼다.

펑! 펑! 콰득!

“쿠에에엑!”

“크어어억!”

“크에에엑!”

세 명의 몬스터가 바닥에 떨어졌다.

떨어지는 놈의 머리를 밟으며 흑객은 또다시 수십 마리의 몬스터들을 통과했다.

콱!

다리를 맞고.

콰득! 찌익!

허벅지가 뚫리며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악!”

흑객은 극심한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움직여야 했다.

몬스터 가운데서 냉기의 빛이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걸 봤으니까.

파앗.

다시 공간을 확보해 낸 흑객은 눈물을 흘렸다.

통증이 너무 커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아. 몇 번 더 버틸 수 있다.’

찢겨 나간 살점 주위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살아 있었다.

끼르르르!

몬스터가 조금 떨어졌다고 생각하던 사이 또다시 저주가 잠식해 왔다.

천장에선 빛이 쏟아져 내리고, 벽에서는 연기가 날렸다.

‘이건 한 번 겪어 봐서 안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는다는 걸.’

계속해서 스스로를 다독이며 왼손을 휘두르고, 양 발로 두개골을 밟았다.

그럼에도 어깨에 멘 고용주는 놓지 않았다.

흑객은 알고 있었다.

언제 깨어날지는 알 수 없지만, 이자가 깨어난다고 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것이란 걸.

여기서 그가 뭔가 해 줄 거라는 기대는 이미 저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도 버텨 내야 했다.

대천마신교의 후예라면.

모두가 존경하는 대천마의 기상을 받은 후손들이라면, 이따위 공포 앞에서 굴복해선 안 된다.

어둠의 주인은 저들이 아니라 자신들이다.

저따위 미물들이 어둠의 주인이 아니라, 흑마공(黑魔功)을 사용하는 자신들이 어둠의 주인이었다.

“이따위 저주가 마공을 익힌 우리들에게 통할 듯 싶으냐아!”

빠각! 퍼엉! 화르륵!

사방에서 불길과 냉기, 그리고 전기 마법이 쏟아졌다.

흑객은 빠르게 피해 내며 허공에 떠 있는 유령을 노렸다.

끼르르르! 쉬익!

펑! 펑!

흑영신장에 한 번에 두 마리씩. 투과하던 유령과 스켈레톤이 동시에 맞아 박살 난다.

씨근대며 피식 웃던 흑객의 얼굴이 딱, 굳었다.

-그오오오.

“…엿 같구만.”

앞에는 뼈 말을 타고, 거대한 뼈와 대검을 든 데스나이트.

잘각잘각. 잘각잘각.

뒤에는 끝도 없이 몰려드는 스켈레톤과 메이지. 그리고 허공에서 부유하는 레이스와 밴시.

순식간에 포위되어 버렸다.

이제껏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것이, 거짓말처럼 불리하게 바뀌었다.

애초에 흑객이 이제까지 버텨 온 까닭은, 달려드는 몬스터들의 급이 낮았기 때문이다.

네크로맨서는 고용주와 한판 드잡이한 후 주문에만 몰두해 있었고, 데스나이트 두 마리는 소환자의 안전을 위해 호위만 하고 있었다.

-캬아아아아!

다다닷.

그러던 놈 중 하나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흑객은 급히 천마를 내려놓고 그 앞에 섰다.

내공은 거의 다 소진되어 있었다.

도망가다 비참하게 죽을 바에야, 당당히 서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다다닷.

거대한 뼈 창을 꼬나쥐고 질주하는 데스나이트.

이전과 달리 눈에는 청색의 빛이 새어 나왔고, 몸에서는 검은 기운이 주변을 덮고 있었다.

“와라!”

그 역시 한 줌의 내공을 검에 담았다.

죽음을 직감했는지, 발동하지도 않은 왼팔에서 뱀파이어가 이빨을 드러냈다.

그리고 거의 지척에 다다랐을 때.

“으아아압!”

흑객이 모든 힘을 쥐어 짜내자, 녹색빛이 스며들었다. 동시에 손의 모양도 이빨로 변해 버렸다.

이제는 영영 돌아갈 수 없는, 혈수마공을 쓰려 한 것이다.

터억!

그런데 막 손을 내뻗으려던 순간 막혔다. 데스나이트가 아닌, 등 뒤에 있는 누군가로 인해.

“고. 고용주?”

어느새 깨어난 고용주가 자신의 왼팔을 잡고 있었다.

창을 찌르던 데스나이트의 움직임도 동시에 멎어 버렸다.

천마가 얘기한 그 한마디로 인해.

“그대, 어둠을 숭상하는가.”

“……?”

-스으으으.

데스나이트가 느리게 반응했다.

흐릿한 아지랑이가 일어나는 창끝을 겨눈 채 죽은 자의 시선은 천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불온(不穩)과 타락의 주체(主體)여. 생명과 영혼이 합치하여 저주와 타락에 머무르는 자여. 태초의 성화는 불길로써 세상을 양분하였다. 빛이 어둠을 낳고, 세상이 흑백으로 나뉘었으되 아직 회색에 머무르는 겁(怯)이여.”

“이보시오. 지금 무슨 말을…….”

흑객은 잠시 당황했다. 고용주가 해 대는 뜻도 모를 미친 소리에.

하나 곧 그것이 일종의 주문(呪文 : Spell)임을 알 수 있었다.

이 반 각 동안 뭘 한 것인지, 고용주의 눈에는 시뻘건 광망이 서려 있었다.

“이제부터 너희의 주인은 본좌가 되리라! 젠장할. 하나만 걸려라. 혈시마겁겁자(血屍怯怯者) 역천화마신(逆天火魔神), 영사기기묘(靈砂奇技杳), 금분주세술(金分主世術)!”

-……!

파아아아앗-!

소리 그 자체가 힘이 되었다. 흑객은 저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고용주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명확한 글자(漢字)로 화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보인 것이다.

“이게 무슨…….”

사자후다.

소림이 쓰는 척마멸사의 기운과는 전혀 다른.

오히려 광기와 혼돈이 가득한 종류의 사자후. 어둠보다 더 검은 칠흑이 담긴 사자후.

그것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오오오!”

“케에에엑!”

주변에 있는 모든 몬스터들의 눈빛이 변했다.

고용주의 말대로 소리치고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이제껏 놈들이 그저 피에 굶주린 동물이었다면.

지금은 뭔가 극심한 분노로 가득한 폭도의 느낌이 드러나고 있었다.

-기사단장 르웨르, 주인님을 따르옵니다.

덜그럭. 달각.

눈앞에 있는 데스나이트가 움직였다.

한쪽 무릎을 꿇고 가슴 어림에 손을 댄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절대자를 위한 경배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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