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혈교의 수법 (2)
콰아앙!
폭음이 일었다.
훅 끼어드는 먼지와 자잘한 뼛조각들. 눈을 감았다가 뜬 흑객은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캬아악! 크아아악!
갑자기 주위에 있는 몬스터가 괴성을 질렀고, 서로서로 다른 놈의 얼굴을 도끼로 찍어 버리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광기. 그 광기에 다른 녀석들도 동화되었는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까드득! 까득! 퍼걱! 빠직!
“대체…….”
흉흉하기 짝이 없는 전경.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아무리 죽은 놈들이라지만, 그래서 아군이 공격 범위에 있는 걸 신경 쓰지 않는다지만.
그럼에도 놈들은 언데드다. 살아 있는 것을 증오하고, 죽은 이들끼리 뭉치는 같은 편.
한데 이제와서 자신들끼리 치고받다니.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일까.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할 리가…….”
-그어어어!
부정해 봤자 눈앞의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더 격렬했다.
고용주에게 예를 올린 데스나이트가 다른 데스나이트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던 것이다.
졸지에 둘은 생사결이라도 하듯 미친 듯이 서로를 찔러 대고 있었다.
“…운이 좋았지. 혈교의 술법이니까.”
흑객의 등 뒤에서 고용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그의 눈에 핏발이 좍 돋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혈교? 거긴 어딥니까?”
콰드득! 콰직! 크아아아!
혼돈은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천마를 따르는 언데드들은 곳곳으로 산개되어 기존 언데드 군단에 기습을 가했다.
지능 없는 것들은 아무 방비 없이 맞고, 맞은 다음 반사적으로 반격하다 엉뚱한 놈을 가격하고, 그래서 또 다른 놈이 끼어드는, 주정뱅이들의 싸움판처럼 변해 갔다.
“설명하긴 귀찮군. 그나저나 아이템이란 거. 생각보다 쓸 만하네?”
툭툭.
천마가 옷을 털었다.
피에 젖은 뼛가루가 덩어리져 떨어져 내렸다. 팔다리에는 상처가 즐비했지만, 가슴과 배만은 피해가 없었다.
6층에서 챙긴 보호 장구의 덕을 본 것이다.
“고용주, 이게 어떻게 된 건 지 설명 좀 해 주시지요. 혈교가 어떤 곳입니까? 그들은 저런 몬스터들을 움직일 수 있다는… 억!”
급하게 물어 오던 흑객이 그대로 쓰러졌다.
방심하는 사이 천마가 그의 목을 내려친 것이다. 흑객을 기절시킨 천마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쯧. 뱀파이어인가 뭔가 하는 그거 발동시키지 말라 했더니.”
바닥에 쓰러진 흑객의 팔에는, 촘촘히 상어 이빨 같은 것들이 돋아 있었다.
그나마 숙주가 정신을 잃은 덕에, 변이는 더이상 진행되지 않고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긴 하지만.
“애송이 주제에 제법이었다. 마무리는 내 담당이니.”
-크와아아!
-캬아아아!
-끼르르르!
집결을 마친 것인가. 한쪽에서 족히 수백은 되는 언데드 무리가, 일제히 네크로맨서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막으려 드는 비슷한 무리들이 엉키고 있었다. 개싸움은 점점 점입가경으로 흘러갔다.
“다만,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다.”
그 전열의 맨 끝.
어느덧 천마는 진지하게 변한 얼굴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 * *
‘이럴 수가…….’
미궁의 주인 네크로맨서.
140년 전, 곤륜파 장로 청명 진인이었던 그는 리치왕의 저주에 걸려 사령기사가 되었다.
그리고 길었던 영욕의 세월 중 우연히 어둠의 군주라 불리는 자에 의해 다시 태어나게 된다.
메피스토의 권능은 놀라웠다.
생각이 없는 사령기사는 하루아침에 자아를 되찾았고, 나아가 동급의 데스나이트를 둘이나 거느린, 네크로맨서로 탈바꿈하기에 이르렀다.
원래 강호 백대 고수였던 그였다.
청명은 이제 네크로맨서의 마력까지 조율하게 되었다. 마법과 무공을 모두 쓰는 특이 개체의 탄생이었다.
이 정도면 언젠가 리치왕의 수호장 4좌에 더해 다섯 번째 수호장이 되는 것도 꿈은 아닐 거라 여겼다.
언데드는 죽지 않는다. 무한히 성장한다.
분명 그래야 했을 터인데…….
‘고작 필멸자 따위가…….’
발목이 잡혔다.
흔한 토벌대의 무리에 신경을 빼앗긴 틈에, 눈앞의 놈이 침입해 왔다.
상식을 벗어나는 무공과 처음 느껴보는 사이한 기(氣)를 사용하는 중원인.
대담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절대로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던전에는 수많은 저주가 걸려 있다.
피하려고 해도 벗어날 수도 없으며, 감염되는 순간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고위급 저주다.
그런데 아직까지 살아 있다.
단순히 버티는 것을 넘어 지금처럼 괴이한 상황까지 발생시키고 있었다.
-크아아아!
-우아아아!
뻐어억! 뻐뻑! 쩌저적!
스켈레톤이 스켈레톤의 머리를 부쉈다.
스켈레톤 메이지는 아군 한복판에 마법을 발사하고, 본 골렘은 물리적인 힘으로 동료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밴시는 밴시에게, 레이스는 레이스에게 저주를 거는 기이한 현상마저 벌어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카아앙!
자신을 호위하던 데스나이트와 대적하는 자.
그건 충격적이게도 또 다른 데스나이트였다.
가디언이 마스터를 공격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너는 누구냐…….”
청명 진인은 더는 언령으로 전달하지 않고 직접 물었다.
사방에서 일어난 혼란 때문인지 상대는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고 편안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어떻게… 저들을 어떻게 움직인 것이냐. 아니, 이 저주에 어떻게 걸리지 않는 거지?”
확인하고 싶었다.
대체 어떤 이유로 이 많은 저주가 눈앞의 상대를 비켜난 것인지.
“글쎄. 사실 나도 잘 몰라.”
“…….”
“굳이 찾으라면 내가 너무 대단해서……?”
천마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온몸을 뒤덮은 상처, 일격을 날리면 단번에 쓰러질 듯 비틀거리고 있음에도 그 얼굴에는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정말 광오할 정도의 자신감이군.”
“그게 뭔지는 곧 알게 되겠지.”
“허허허.”
청명 진인의 표정은 서서히 변했다.
반인반괴(半人半怪)의 얼굴 한쪽이 일그러져 있었다.
“필멸자여, 나도 살아생전엔 너처럼 하늘을 보지 못할 때가 있었다.”
“……?”
스르륵.
네크로맨서의 지팡이가 서서히 모양이 변해 갔다.
날카로운 창의 모양으로. 그 끝에 양날이 생겨나며 극(戟) 모양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분을 만나고 알게 되었지.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고, 그 어떤 것도 그분 앞에선 무의미하다는 걸.”
지이이잉.
창날에 창기가 맺혔다. 살아생전에 보였던 무공 고수의 움직임이다. 다른 점이라면, 창기에 시커멓게 서린 암흑의 기운이 맺혔다는 것 정도.
천마는 그걸 보면서도 그다지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나를 보통의 네크로맨서로 생각했다면 그건 매우 착각일 뿐이다. 생과 사를 조율하는 위대한 신(神). 그의 비호를 받는 그 힘을.”
투욱.
네크로맨서의 한쪽 동공이 서서히 멎었다.
그의 숨소리까지.
“직접 경험하거라!”
팟.
둘 중 먼저 움직인 건 네크로맨서인 청명 진인이었다.
그는 발을 움직이는 모습도 없이 공간 사이를 이동했다.
그리고 그가 멈췄을 때는 이미 지면이 아닌, 허공에 있었다.
“다크 애로우(Dark Arrow)!”
어둠의 화살이 청명 진인의 손짓에 따라 수십 발 쏟아져 내렸다.
‘정신 차려야 한다.’
태도와 달리 천마는 진지하게 임하고 있었다.
화살을 보자마자 빈 공간을 향해 곧장 몸을 틀며 다음 수를 대비했다.
숫자가 많기는 했으나 피하기엔 어렵지 않은 속도였으니까.
“본 바인딩(Bone Binding!)”
뒤이어 구동어를 외치자 천마가 이동한 공간에 뼈의 벽이 생성되었다.
허공에 뜬 천마를 마법으로 단번에 가둬 버린 것이다.
콰지지직!
천마는 곧장 벽을 부수고 뚫고 나왔다. 하지만 청명 진인은 거기까지 계산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샌가 천마 앞에 나타나 지팡이를 찔러 넣었다.
“읍!”
푸욱!
창날이 천마의 왼쪽 어깨를 꿰뚫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었지만 청명 진인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콰득!
휘청이던 천마의 어깨를 이번엔 청명 진인이 그대로 내리찍었다.
연속 공격.
속도가 육안으로 좇을 수 없을 만큼 빨랐기에 가능했다. 애초에 초절정이었던 청명 진인의 무공은 현재 천마를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큭!”
바닥을 구르며 벗어난 천마가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숨 한 번 몰아쉴 그 짧은 틈도 청명 진인은 용서하지 않았다.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공격, 보법, 연계 속도.
보통의 무인은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퍼억!
뼈의 창이 한껏 날카롭게 되어 이번엔 쇄골을 꿰뚫었다. 맞으면서도 연계 공격을 피하기 위해 천마는 크게 거리를 벌렸다.
청명 진인의 마법이 발현된 것은 그때쯤이었다.
“서먼 팬텀(Summon Phantom)!”
그림자도 존재하지 않는 귀신이, 너울너울 날아가는 천마를 향해 떼거지로 소환되었다.
씨아아아악!
적아를 구분 못 하는 망령과 잡령.
청명은 이게 상대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끝이다.”
그럼에도 그들을 사용한 것은 잠시나마 천마의 정신을 뒤흔들어 놓으려는 생각이었다.
잠깐의 틈을 더해 폭풍 같은 연계 공격을 이어 내고, 그걸로 완전히…….
“갈(喝)!”
하지만 막 그렇게 생각했을 때.
쩌어엉!
빽빽하게 주위를 뒤덮었던 팬텀들이.
천마의 노호성 한 방에 소멸되어 버렸다.
사아아악.
한 번의 격돌이 지난 후 잠시 주위는 조용해졌다.
“제법이군.”
청명의 얼굴엔 약간의 놀라움이 서렸다.
그건 곧 여유가 있기에 보일 수 있는 반응이었다.
반면 천마는 얼굴이 굳어 있었다.
상태는 이전보다 심각했다.
한쪽 어깨는 완전히 박살 나 있었으며, 관통당한 어깨와 쇄골 어림에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 있기도 힘든지 무릎도 반쯤 굽힌 채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퉷. 그래. 생각났어. 정말 오랜만이라 가물가물했었는데 말이야…….”
천마는 입가에 피를 내뱉으며 말했다.
마법이란 건 그렇다 치더라도 이 신법은 모를 수가 없었다.
용형보(龍形步).
용의 움직임을 본떠 만들었다는 저 보법은, 구름처럼 느릿느릿하게 이동하는 곤륜의 대표적인 신법이다.
하늘하늘한 움직임 때문에 자칫 느린 보법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 느린 움직임은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한다.
수많은 방위를 점하며 천천히 들어오는 보법은, 느려 보이지만 오히려 피하기 어렵다.
어떤 공격을 가해도 견제받지 않고 차곡차곡 따라오는 신법은, 빠르지만 회피가 쉬운 기동보다 더 까다롭다.
“그래도 그 정도가 한계인가? 내가 널 너무 과대평가했었나 보군.”
이제는 일어설 힘도 없어 보이는 천마를 향해 네크로맨서가 비웃었다.
고작 능력의 일부분만 사용했을 뿐인데 거의 나가떨어지다시피 했다.
“어떤 심법을 익힌 건지 흑마법에는 내성이 있나 본데, 정작 무공 실력은 따라가지 못하는군. 그리고…….”
네크로맨서는 고개를 들었다.
“네놈이 부리던 놈들도 이제 끝났다.”
“크아악!”
“카아아악!”
몬스터 무리들의 소란은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일시적으로 손에 넣은 통제권이 오래 버티진 못한 모양이었다.
애초에 숫자부터 열세였다.
발작하던 몬스터들의 목은 날아갔고, 몇몇 살아남은 잡 몹과 데스나이트 한 놈이 버틸 뿐이었다.
“그놈, 강하냐?”
“……?”
천마가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부르자 청명 진인은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 메피스토라는 놈.”
갑작스러운 물음에 잠시 갸웃하던 청명 진인은 이내 의도를 깨닫고 소리쳤다.
“네놈 따위가 함부로 입에 담을 이름이 아니다!”
그리고 이내 절대적인 존재를 떠올렸는지 준엄하게 꾸짖었다.
“4서클의 흑마법도 버티지 못하는 하등한 필멸 종자. 그분은 모든 어둠을 관장하는 군주이시다. 9서클을 다루시는 4대 수호장 중 하나시거늘!”
“그래? 그럼…….”
천마는 고개를 들었다.
이미 시뻘겋게 변한 눈빛의 변화는 어둠으로 인해 가려져 있었다.
“그놈이 리치왕이란 놈보다 강한 건가?”
“…뭐?”
“거, 있잖아. 뼈만 앙상하게 생긴 해골바가지. 140년 전에 왔던 놈.”
“……?!”
순간 청명 진인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제껏 나타난 반응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
“그분을 어떻게… 아니, 우리 불멸자들의 제왕이신 분을… 필멸자인 네가 아는가!”
“크크큭.”
그런 반응에 천마는 입가가 올라갔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웃음이 아니었다.
강렬한 희열.
“보아하니. 해골바가지가 더 강한 거 같군. 그래, 그쯤은 되어야지. 그 정도는 되어야 본좌가 여기에 있는 이유가 있지.”
“이, 이놈이!”
“좋아. 인정하마.”
곧장 달려들려는 청명 진인을 향해 천마가 몸을 일으켰다.
상처가 가득한 몸과 배치되는 밝은 얼굴이 묘하게 이질적이었다.
“지금 상태로는 너를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이 몸과 너의 수준이 워낙 차이가 나서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꼭 방법이 없는 것만은 아냐.”
“……?”
“단 한 번. 극마의 힘만 사용할 수 있다면 제압이 가능하니까.”
천마는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다만 두 단계 정도 경지를 인위적으로 격상시켜는 모험을 걸어야 하고. 쓰고 난 후, 나 자체가 소멸 될지도 모르겠다만,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군.”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청명 진인은 더는 들어 주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그저 그동안 괴이한 무공과 술법 때문에 그에 대한 궁금증으로 말을 걸고 있었다.
“크나큰 영광이 될 것이다. 잠깐이나마 본좌의 최고의 무공 중 하나를 보여 줄 테니까.”
우드득!
천마는 몸에 있던 아이템을 뜯어내고.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한 손으로 혈도를 몇 개 짚어 댔다.
금을 튕기듯 느리게. 어떤 부분은 빠르게 찍어 댔다.
“미친놈의 말을 더는 들을 필요가 없을 것 같군.”
“동감이야. 본좌도 곧 죽을 놈과 더는 말 섞을 생각 없거든.”
천마가 이죽거렸다.
그의 눈이 빛나는 순간.
“이번에 내가 가지.”
천마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과거 그를 천하제일고수로 단번에 만들어 준 신법이.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