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31화 (32/310)

31화. 의문의 존재 (2)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벅저벅.

영기가 모두 사라진 어두운 암동을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화르르륵.

사방으로 횃불이 비치되어 환하게 밝혀진 공간.

그곳으로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습니까.”

“오셨습니까. 관주.”

수십의 무인들이 일제히 예를 갖추며 그녀를 환대했다.

펄럭.

여인은 가볍게 소매를 모아 화답하며, 원을 그리고 선 무인들 사이로 다가갔다.

“이곳입니다. 먼 곳까지 발걸음 하시게 하였습니다.”

근엄한 얼굴의 사내가 그녀를 맞이했다.

다부진 체격에 혈기방장한 인상. 척 보기에는 중년인의 인상착의지만, 실은 환갑이 훨씬 넘은 무림 고수.

교두 제운비였다.

“하청청입니다.”

“월산입니다.”

제운비 다음으로 하청청 교수와 월산 교수가 차례로 예를 갖추었다.

물끄러미 그들에게 눈을 돌린 학과장 리그웨더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크로맨서가 사라졌다고요?”

“…….”

제운비는 잠시 가슴이 덜컥했다.

늘씬한 몸매에 이국적인 이목구비.

잡티 없는 화려한 미모도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눈길을 잡아끄는 건, 바로 새파란 눈이었다.

“크흠!”

제운비는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오랫동안 여색을 멀리하고, 부동심(不動心)을 철칙으로 살아온 그였건만,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 정도로 흔들리다니.

“그렇습니다. 저희가 한참 10층을 토벌하고 있는 과정에서…….”

“…그렇게 갑자기 지면이 흔들리더니. 이내 몬스터들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리고…….”

제운비는 차마 그녀를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여기에 왔을 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스윽.

제운비의 말에 리그웨더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직경 백 장에 가까운 거대한 동혈.

곳곳에 긁히고 부서진 자국들, 그리고 깨지고 박살 난 인골들이 먼지처럼 수북했다.

그리고 그 끝에.

이 방을 밝혀 준 원 모양의 고리가 회색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포탈… 누군가 먼저 왔나 보군요.”

“그런 듯합니다.”

제운비는 동의했다.

네크로맨서가 사라졌고, 이 끝에 포탈이 열렸다.

그리고 그 통로와 연결된 곳은 바로 자신들이 들어왔던 1층이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입니다. 대체 누구일까요?”

기다리고 있던 월산 교두가 나서 물었다.

“아무리 저희 토벌대가 신중을 기해서 느리게 움직였다 해도… 던전의 최심부까지 내려왔다는 건 보통이 아닙니다.”

“중원 백대 고수 이상의 실력이란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 인물이 투입되었다면… 무림맹에서 저희에게 왜 언질을 하지 않았을까요?”

월산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리그웨더는 물끄러미 주변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림맹이 관여하지 않았을 수 있죠.”

“하면. 누가?”

“알아봐야죠. 이제부터.”

“저, 혹시 말입니다만…….”

헛기침을 하며 하청청이 물었다.

“쓰러뜨린 게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토벌대의 규모를 보고 던전 보스가 도피했다든가…….”

“아뇨. 상리에 맞지 않습니다. 던전 보스에게 던전은 단순한 집 이상의 의미예요. 더군다나 일부가 아닌, 모든 몬스터들이 증발하듯 사라졌다는 건. 그 던전의 보스. 이 경우엔 네크로맨서가 퇴치되었다는 것을 의미해요.”

“허어.”

하청청은 신음했다.

추정 위험 등급 12급 이상.

이 던전은 네크로맨서들 중에서도 상위급이라 알려진 놈이라, 천무학관에서도 토벌에 신중을 기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대규모 토벌대를 구성하고, 피해 없이 복귀하기 위해서 계획을 거듭해 왔다.

그런 위험한 네크로맨서를.

대체 누가 죽였단 말인가.

당시 상황으로는 천무학관의 최정예가 몰려들었던 전투다. 그로 인해 던전의 전력이 분산되었을 수도 있지만.

위험등급 최소 12급 이상의 던전 보스를 퇴치할 전력이, 그런 대규모로 구성된 인원들이 대체 어디서 왔다 갔는지 알 수도 없다니.

“이거면 되겠군요.”

스윽.

잠시 바닥을 보고 있던 리그웨더가 형체가 온전한 두개골 하나를 집어 들었다.

교두들이 두 눈 부릅뜨고 집중하는 사이, 그녀는 두 손으로 해골을 들고 뭔가를 읊기 시작했다.

스스스슥.

희미한 영기가 손에서 일렁이고, 희뿌연 기운이 두개골에 스며든 지 잠시 후.

“……!”

교두들의 눈이 커졌다.

지이이잉.

그녀의 손에서 희미한 녹색의 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 것이다.

“침입자다---.”

그리고 모두에게 들리는 기분 나쁜 목소리.

리그웨더의 눈이 감겼다. 그녀의 동공이 눈꺼풀 아래서 좌우로 한 번 움직이더니, 이내 엄청난 속도로 파동 치기 시작했다.

“----죽여.”

“-----끝까지 싸워.”

강력한 의지가 담긴 목소리와 눈앞을 뒤덮은 혼령들.

그녀는 스켈레톤의 기억을 되짚는 중이었다.

싸이코메트리(Psychometry). 모든 것에 깃드는 존재 사념을 끌어내어, 원하는 광경만을 볼 수 있는 자그마치 10서클의 마법이었다.

“…탁해.”

그러나 선명하게 모든 것을 보여 주어야 할 영상이 흐리기 짝이 없었다. 부서진 해골의 눈에 투영된 건, 용암처럼 퍼져 나오는 불꽃.

그리고 그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누군가였다.

“크악!”

“카카악.”

점점 커지는 비명과 괴성.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파괴의 물결.

스켈레톤의 눈에는 그저 뒷모습이었지만, 수백, 수천의 무리들이 있는 가운데서도 그는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

그 기억의 마지막 자락에서 포착된 누군가의 모습.

그에 리그웨더는 눈을 크게 떴다.

‘대체 이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서는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마력이 느껴졌다.

마치 흑마법.

아니, 흑마법은 아니지만 본질적으로는 어둠에 근원을 둔 어떤 기운.

그리고 그것은 흑마법에 굴복하여 움직이는 어둠의 존재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쩌적. 쩍!

파스슥!

“아…….”

리그웨더가 탄식했다. 잔존 사념을 추출해 내던 스켈레톤의 머리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부서지고 있는것이다.

그녀는 집중을 더욱 높여, 쪼개지고 깨지며, 흩어지는 기억들을 끌어 모았다.

그러는 가운데 단 하나.

스켈레톤의 기억의 끝자락, 시야가 부서지는 장면과 함께.

-크아아아!

엄청난 함성이 그녀를 정신을 뒤흔들었다.

“콜록! 콜록!”

“괜찮으십니까?”

격하게 기침하는 리그웨더를 제운비가 부축했다.

“…괜찮아요.”

리그웨더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돌아보니 제운비와 월산, 하청청은 모두 불안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투지였습니다.”

“파괴적이고, 흉악하기 짝이 없는… 조금 전의 그건 대체 뭐였습니까?”

영상까지는 보지 못했지만, 스켈레톤이 마지막에 들은 무지막지한 굉음은 모두가 들었다. 교두 제운비마저 긴장하며 기다리는 가운데, 리그웨더가 입을 열었다.

“…통제를.”

그녀는 이질적인, 차가운 눈빛을 내보이며 단정했다.

“그가 몬스터들의 제어를 빼앗았어요.”

“그라면…….?”

“…누군지는 모르겠군요. 흑마법과 유사한 기운을 쓰는 자. 그가 이들 전부를 상대했어요. 마치… 마공(魔功)과 흡사했어요.”

“……!”

“……!”

“……!”

교두 셋은 일시에 당황했다.

“마공이라니…….”

“그럼 마교란 말씀입니까?”

마교. 마공을 익히고 연마했던 백사십 년 전의 무력 단체.

하나 지금 여기서 나올 이름이 아니었다.

한때 강호에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적이 있긴 하나, 지금 와서는 제대로 된 활동도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쇠락해 버린 이들이다.

암암리에 겨우겨우 맥이 이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을 뿐. 그조차 제대로 된 세력은 아니었다.

“학과장님, 외람되오나 혹 잘못 보신 게 아닙니까?”

“예. 간혹 용병점에서 마인들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마교는 완전히 몰락했습니다. 만에 하나 예전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위험등급 12급의 네크로맨서를 처리할 실력자가 있을 리…….”

“그걸 이제부터 확인해야죠.”

영상을 보지 못한 세 교수는 회의적이었지만, 리그웨더는 단호하게 일렀다.

“가용한 모든 인력을 동원해 찾으세요. 이 던전에 누가 왔었는지. 어떤 자가 주변에 있었는지. 동선과 탐색 의도. 모든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찾으세요.”

“알겠습니다.”

“예.”

“…옙!”

교두들이 대답하자, 리그웨더는 돌아섰다.

다른 교두들과 달리 그녀를 바라보는 제운비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마교라…….’

학과장이 분명 잔존 사념을 통해 뭔가를 본 것이란 건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마교의 얼마 안 되는 세력이 이 던전의 네크로맨서를 퇴치할 실력이 있을 것인가.

“제 교두께서도 마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월산 교수가 물어 왔다.

“…뭐 지금으로선 아는 게 없으니.”

“노부의 소견으로는 학과장께서 너무 마교를 높이 보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140년 전 강호와 비교하면 지금의 수준이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으음, 하고 모여 있는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관이 세워지고 무공 교류가 이뤄지면서 강호는 엄청난 변화를 맞이했다. 그건 가히 혁명이라 할 수 있었다.

과거 강호 백대 고수라 불리는 이들은 고작 검에서 기를 뽑아내는 검기 발출의 수준이었다.

하나 지금은, 강호 백대 고수의 대부분이 검강을 구현할 수 있는 단계였다.

화경의 고수는?

추정하기로 전 강호를 통틀어 대략 30명이라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는 옛 강호의 전설이라 논해지던, 현경에 도달한 이가 3명이나 나왔을 정도다. 그것도 공식적인 숫자.

백사십년 전에 비해, 작금의 강호는 모든 면에서 급격한 성장을 이루지 않았는가.

“제 교두님?”

말없이 조용히 서 있던 제운비를 본 한 교관이 그를 불렀다.

그러자 하청청 교수가 그의 어깨를 살며시 두드렸다.

“잠시 기다리게.”

그는 짐작하고 있었다.

자그마치 백여 명에 달하는 토벌대를 이끌고, 토벌 중에 목표를 빼앗겼다.

뼛속까지 무인인 그의 자존심이 말이 아닐 터.

“현장을 잘 보존해라! 다른 뭐가 더 있을지 모른다!”

“옙!”

“부상자들의 상태와, 당시 발생했던 저주에 대한 흔적을 모두 모아라! 빨리빨리 움직여!”

“예!”

호통이 사방에서 이어졌다.

제운비를 비롯한 교관들이 나가는 가운데 부산스레 토벌대가 뒷정리를 시작했다.

“지도문화사부터 찾아봅시다.”

제운비가 슬쩍 입을 뗐다.

하청청이 되물었다.

“지도문화사?”

“누군지는 모르나, 우리를 앞질러 가려면 이 던전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겠지. 그렇다면 그 정보를 얻어 간 자가 누군지부터 좁혀 봅시다.”

“…과연. 미공략 던전을 공략하려면 지도가 가장 먼저겠군요.”

하청청이 끄덕였다.

월산이 뒤를 이었다.

“다량의 밧줄, 횃불이나 야명주를 구입 한 이도 명단을 추려 보겠습니다.”

“아이템도 있습니다. 던전 보스를 처치한 자라면 분명 고가의 아이템을 획득했을 겁니다.”

“암시장에서 거래되겠지요.”

옆에서 또 한마디를 거든다.

교수들 사이에서 가닥이 잡히는 걸 보며 제운비는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그것은 호승심과, 상처 난 자존심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