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슬기로운 학관 생활 (1)
그르르릉.
조용한 교실 한구석에 코 고는 소리가 울렸다.
이리저리 사나운 시선이 몰려드는 가운데서 소진만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꾸 왜 저러는지…….’
천금을 주고도 받기 힘든 수업을, 조는 것도 아니고 아주 퍼 자는 동급생 때문이다.
물론, 천마도 아무 생각 없이 자고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도 딴에는 오늘만큼은 학관의 수업을 열심히 들으려고 했다.
불과 네크로맨서와의 싸움에서 학을 뗀 게 어제였으니까.
하지만.
‘다 아는 거군.’
그게 주된 이유였다.
3반의 첫 수업은 병기술이었다.
병기술은 2학년 핵심 교과 중 하나로, 기초적인 검술, 도술 창술을 배우고. 황실의 무예도 같이 가르친다.
그렇다고 단순 기본만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소림사의 봉술, 무당의 태극검혜, 화산파의 매화검법 등 구대문파가 자랑하는 병기술을 모두 가르친다.
거기다 오대세가의 검법과 도법 등 응용 분야도 함께 배운다.
이 과목은 수행평가가 없으며, 시험은 주로 1학기 중간고사는 필기, 기말고사는 실기로 대처한다.
「십팔반병기(十八般兵器)의 이해」
병기술 수석 교관 좌홍(左洪)은 철두철미한 무인이었다.
그는 항상 시간에 정확히 딱 맞춰 들어왔고. 곧장 아이들의 총기 있는 눈을 살폈다.
매사에 성실한 그는 성과만이 아니라, 수업 태도를 매우 중시했다.
바른 자세에서 바른 검법이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학관생들은 아예 출석을 하지 않는 게 더 낫다는 걸 알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감점 먹을 일도 없으니까.
그르르릉.
‘이 자식이…….’
그런 그의 신념을 정통으로 긁어 버리는 사태가 있었으니, 바로 대놓고 책상에 엎어져 자고있는 학관생이었다.
촤라락.
그는 학급일지를 펼쳤다.
가운데 열.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 학관생을 명부에서 확인한 그가 속으로 생각했다.
‘백무룡이라.’
그의 손은 거침없었다.
지익!
1학기 태도 점수 기입란에 지체 없이 선을 그었다.
-‘최하(最下)’.
그렇게 1교시가 끝났다.
* * *
2교시 수업은 무협학.
담당 교관 소소검녀(昭昭劍女) 수향은 오늘도 들어오자마자 밝게 웃으며 수업을 시작했다.
『협(協)이란?』
“…하여 공자께서 이르시길, 먼저 의복과 먹을 것이 충분하면 사람이 스스로 예를 안다 하시어…….”
도르릉. 고르르릉.
교실 여기저기서 살짝 조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녀는 뭐라 하지 않았다.
애초에 무인이 태반인 젊은 학관생들에게, 예의범절이란 고루하고 맞추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래도 결국 사람은 본성에서 시작하는 것이지.’
때문에 당장은 졸거나 지루해하는 학생이 있어도, 소소검녀는 항상 착실하게 수업을 진행해 나갔다.
언제고,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이런 인성 함양이 기본 중의 기본이라 자부하며.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녀는 늘 그랬듯 수업 시간을 대놓고 방해하는 학관생들이 아니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눈감아 주었다.
물론 대놓고 퍼질러 자는 경우가 처음이긴 했지만.
“다음에 보아요.”
오늘 자 진도를 끝낸 그녀는 교재 몇 권을 들고 인사했다.
그러고는 여느 때와 같이 밝은 얼굴로 밖을 나가려 했다.
그 소리만 듣지 않았다면.
“아함, 잘 잤다.”
‘잘 자?’
빠직!
막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녀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아 소소검녀라 불리는 그녀의 별호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스윽.
그녀는 나가던 발을 돌려, 다시금 교탁에 앉아 학급일지를 펼쳐 보았다.
‘백무룡.’
교탁 가운데의 맨 뒷줄.
위치를 확인한 그녀는 1학기 태도 점수를 지체 없이 기재했다.
지익.
-‘최하(最下)’.
백무룡의 성적이 맨 아래로 처박히는 순간이었다.
* * *
“이한.”
2교시가 끝난 쉬는 시간.
소진이 백무룡의 자리에 앉은 천마를 향해 말을 걸었다.
“할 말 있나?”
“그게… 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건지 해서.”
“아. 난 뒤에서 내려다보는 걸 즐기거든. 그래서 이 자리가 맘에 들지. 뭐 문제 있냐?”
“…그게, 규칙상 그러면 안 되는 거라서.”
소진은 걱정스러웠다.
백무룡과 그 일당이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없어 좋기는 하지만, 이한처럼 멋대로 자리를 바꿔 앉으면 규칙에 어긋난다.
지금이야 교관들도 얼굴이 익숙지 않아 모르는 듯하지만, 나중에 알게 되면 분명 문제가 될 것이다.
“뭐, 나중에 그놈이 오면 정식으로 바꿔 달라고 하지. 그나저나…….”
천마는 이리저리 몸을 두들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수업이란 게 뭐 이리 지루하냐. 하루종일 자리에 앉아 이상한 얘기만 듣고…….”
“아직 우리가 2학년이라서 그래. 3학년부터는 거의 다 이동 수업이야. 편히 앉아서 수업 듣는 날이 잘 없다고…….”
“그래? 그럼 3학년으로 옮길까?”
“…하.”
소진은 그저 고개만 저었다.
반 배정도 아니고 학년 배정을 멋대로 하겠다는 말에 그저 기만 막힌 것이다.
“근데 말이야.”
천마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왜 다들 힐끔힐끔 날 보고 있어?”
3반의 학관생들은 수업 시간이 끝나면 각기 무리들로 나뉘었다.
반장 방윤을 중심으로 소림사 직계 셋.
운소령을 중심으로 한 여인 여섯.
서문영을 중심으로 한 열 명.
그리고 또 다른 무리의 학관생 셋.
그중에서도 가장 노골적으로 천마에게 적의를 보이고 있는 자들은 바로 소림사 쪽이었다.
“사형, 정녕 이대로 계속 두고 보실 겁니까?”
방만은 화가 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대사형 방윤보다 한 살 적은 그는 몸은 왜소하지만 외공 단련으로 인해 온몸이 근육질로 단단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교관님들께 하오체라니요. 아니, 심지어 교두님께도 그랬습니다.”
막내인 방호 역시 불만 섞인 말을 토해 냈다.
“아서라.”
방윤은 짧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잠시 감았던 눈을 뜨며 말했다.
“일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 않느냐. 곧 4교시 체육학 시간이다. 무인이 할 말이 있으면 그때 하면 된다.”
4교시는 체육학 시간.
몸을 단련하는 수업 특성상 이 시간 중엔 언제든 정식으로 비무가 가능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학관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체의 함양이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녀석을 손봐 주는 일에는 제가 제일 먼저 나설 것입니다.”
방만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매서운 눈길로 소진과 떠돌고 있는 천마를 바라보았다.
“얘, 이거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야?”
한편, 천마의 태도를 곱게 보지 않는 사람들은 또 있었다.
운소령 옆 자리에 앉은 여인.
그 이름은 양미(楊美)로, 양가창법으로 강호에서도 이름을 날리는 양씨세가 사람이었다.
“수업 분위기 진짜 안 좋다. 저런 애랑 같이 수업 못 들어.”
“맞아. 교관님들께 하는 말투도 그렇고 이러다가 우리까지 덤터기 쓰게 생겼다고.”
뒤이어 말을 받는 여인.
예쁘기보단 귀엽게 생긴 여인이지만, 그녀의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표정이 바뀔 터였다.
당무련(唐務蓮).
사천당문의 여인으로, 입학 때부터 꽤나 우수한 성적으로 천무학관에 들어온 여인이었다.
사교성이 좋은 그녀는 항상 여인들의 중심에 있었고, 개중에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운소령 옆에서 실질적으로 모든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었다.
“령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관심 없어.”
운소령이 짧게 말하자 양미는 김이 샜는지 눈을 찌푸렸다.
‘재수 없는 년. 끝까지 착한 척하는군.’
그러다 그녀 옆에 조용히 있는 한 여인을 보며 물었다.
“필리아, 너는?”
유달리 하얀 얼굴에 속눈썹이 긴 필리아.
여인이라 하기엔 나이 어린 소녀의 얼굴을 띠고 있었다. 참고로 그녀는 천무학관에서 유일하게 서역에서 온 여인이었다.
“나는 괜찮은 것 같은데…….”
“뭐가 괜찮아? 이러다가 우리 반 전체가 감점 먹는다고. 너, 그래도 좋아?!”
양미가 도끼눈을 뜨고 말했다. 겨우 입을 열었던 필리아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만해. 우리끼리 싸울 필요는 없어.”
당무련이 제지하고 고개를 돌렸다. 소림사 쪽, 그리고 서문영 쪽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우리 말고도 싫어하는 자들이 많은 것 같으니까.”
까닥까닥.
서문영은 늘 그렇듯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가 손에 쥐고 있는 우필은 신경질적으로 까닥거리고 있었다.
그게 그가 기분이 심히 상했을 때 나오는 버릇임을 당무련은 알고 있었다.
* * *
3교시 수업은 마력학.
학관이 세워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설된 학과로, 마법의 기초 학문 중 한 분야였다.
대격변의 날 이후, 강호인들은 무예 외에 마법의 존재와 맞닥뜨렸으며, 본인이 마법을 쓸 수 있든 없든, 일단 마법이란 것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있었다.
물론 무인이라는 강호인의 특성상, 실제 마법을 배우는 것보다는 주로 연금술, 기계공학이나 보석 또는 가죽 세공에 관한 연구에 가까웠지만.
본래 마력학은 3학년 전공과목이다.
하지만, 2학년 수업에도 한 번씩 이런 식으로 특강을 하곤 한다.
“처음 뵙는군요. 저는 오늘부터 여러분들을 가르치게 된 교관 엘리샤(Elisha)라고 해요.”
엘리샤라 말한 여인은 모두를 사로잡았다.
보통의 여인보다 한 뼘 정도 더 큰 키.
백옥처럼 빛나는 피부와, 긴 머리를 풀고 다니는 그녀의 눈동자는 벽안(碧眼). 새파란 눈이었다.
“얼래? 생긴 게…….”
이번에도 또 고개를 처박으려던 천마의 고개가 슬쩍 들렸다.
예전, 이한의 기억에서 이런 눈을 가진 이를 본 적이 있었으니까.
“저 눈……?”
“요족(妖族) 사람이야.”
기억을 더듬던 차에, 때마침 소진이 말을 걸어왔다.
“요족? 그게 뭔데?”
“…너, 몰라?”
소진은 어이없어 하더니 천마에게 목소리를 낮춰 설명해 주었다.
“마법을 잘 다루는 부모들 사이에서 드물게 태어나는 아이야. 엄청난 수준의 재능을 지닌 건 물론이고 신성의 힘도 사용해. 거기다 제일 놀라운 건. 미인이라는 말씀.”
요족.
마법을 사용하는 무림인들이 생겨나면서 나타난 기현상.
중원인과 이목구비가 다른 아이들이 어느 날부터 태어났던 것이다.
처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무리를 혐오하고 멸시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인(華人)들과는 한눈에 보기에도 생김새가 달랐고, 이를 색목인의 피가 섞였다고 천시하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도시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고 외곽 지역에 밀려나서 살던 요족.
하지만 그 차별은 얼마 가지 않았다.
격변의 날 이후, 몬스터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민초들의 생활이 위협받는 날이 길게 이어졌다.
수많은 전사와 무인들이 죽어 가는 가운데, 그때까지 천시받으며 살던 요족들이 몬스터를 퇴치하는 데 놀라운 활약을 보였다.
타고난 무공과 마법적인 재능은 가히 눈부실 수준이었고, 거기에다 의협심, 선함을 가지고 있어, 사람을 구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일이 흐른 지 오십여 년.
사람들에게 요족은 귀한 존재, 재앙을 물리쳐 줄 사람으로 인식이 바뀌어 있었다.
“허어…….”
설명을 들은 천마는 감탄성을 내뱉었다.
그가 살던 시기에서 색목인은 주로 배척의 대상, 혹은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선망받는 대상이라니. 시대의 변화가 여실히 와닿은 것이다.
‘이건 좀 아쉬운데.’
새삼 이한의 지식이 그리워졌다.
이제껏 그의 영혼이 있는 동안은, 모르는 것들도 기억을 더듬다 보면 대부분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네크로맨서의 싸움 이후. 이한의 영혼은 그야말로 완벽히 사라져 버렸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고, 이후에 육신의 감각이 더욱 예리해졌지만, 당장 이 몸으로 살게 된 이상 아쉬운 부분이 이렇게 생기는 것이다.
“참고로 제 수업에는 교재가 필요 없어요. 여러분께 실무적으로 중요한 내용을 가르칠 예정이니까요.”
앞줄부터 부스럭부스럭, 준비된 교재를 꺼내는 학관생을 보며 엘리샤가 말했다.
「마력학의 기초」
그녀는 칠판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 뒤, 자신이 들고 온 뭔가를 교탁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턱. 턱. 턱. 턱.
엘리샤가 꺼내 놓은 건 4종의 보석이었다.
다만 각기 빛을 뿜어내는 색이 달랐는데, 영롱한 빛이 학관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어, 저건?’
특히나 천마의 눈을 뜨게 했다.
저 보석.
생김새와 색은 다르지만 느낌은 비슷했다.
네크로맨서를 죽이고 얻은 그것과 같은 종류라고 느낀 것이다.
“이게 무엇인지 맞혀 볼 사람? 수행평가 점수에서 가산점을 드리겠어요.”
뒤이어 엘리샤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