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슬기로운 학관 생활 (2)
처억.
엘리샤의 물음에 한쪽에서 손을 들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서문영입니다.”
“아. 서문세가.”
그녀는 이미 서문영에 대해 알고 있는지 반갑게 미소 지어 보였다.
“네. 그럼 한번 맞혀 보세요.”
서문영은 자리에서 일어선 뒤, 말했다.
“거기 있는 건 모두 마정석입니다. 붉은 홍옥 같은 것은 루비(Ruby), 푸른 청옥은 사파이어(Sapphire), 녹색은 에메랄드(Emerald). 마지막으로 노란빛의 황옥은 토파즈(Topaz)라 불립니다.”
“바로 맞혔어요. 그럼 서문영 학관생은 이것들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계시나요?”
엘리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물었다.
“예.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원소. 속성 마법의 기반이 되는 마정석입니다. 루비는 불, 사파이어는 얼음, 에메랄드는 독, 토파즈는 뇌전의 속성을 띠고 있으며, 이 마정석들은 마법을 쓸 때 마력을 보존해 주거나, 또는 위력을 더욱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훌륭하네요.”
여기까지는 교재에 있는 내용이다. 성실하게 선행학습을 하는 우등생들은 답변할 수 있는 범위.
하지만 엘리샤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럼 여기 있는 루비의 경우, 가지고 있는 고유 특성 마법이 뭐가 있나요?”
“예……?”
갑작스러운 질문에 서문영이 약간 당황스러워했다.
앞서의 내용은 성실히 공부한 학관생이라면 누구나 알수 있는 것이지만, 그 이상은 마법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학생들도 알기 힘든 것이다.
처억.
그때 뒤이어 손을 든 여인이 있었다.
“음, 거기 학관생?”
엘리샤의 손짓에 운소령이 차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마정석은 기본적으로 보석을 가공하는 것으로, 각 모서리의 개수, 투명도. 발색에 따라 효능이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지금 교관님이 가져오신 교보재는 3서클의 파이어 월(Fire Wall) 마법을 발생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죠?”
“발색이 핏빛에 가까운 진한 홍색이고, 창에서 들어오는 빛을 굴절시켜 3개의 광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거기에…….”
“그만. 그 정도면 충분해요.”
운소령이 더 설명하려는 것을 엘리샤가 손을 저어 막았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2학년 3반은 무학이 주라고 들었는데, 마법에 이토록 조예가 깊은 학생이 있을 줄은 몰랐군요. 훌륭합니다. 만점에 가까운 대답이에요.”
와아.
교실 내에 조용한 탄성이 울렸다. 교관의 더 할 나위 없는 칭찬에, 시선이 운소령 쪽으로 모였다.
사박.
운소령은 그런 시선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리에 앉았고, 괜히 머쓱해진 서문영만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또 운소령인가.’
이건 수업 교재에는 전혀 없는 내용이다.
선행학습을 통해 별도로 교육받은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것을 너무도 쉽게 대답하고 있었다.
“마정석은 강력한 소모품입니다. 그 위력은 천차만별로, 강한 것은 몇백 근의 화약이 폭발하는 위력을 상회 합니다. 특히, 몇몇 마정석에는 그 안에 고유 특성 마법이 내장되어 있는 경우가 있어, 딱히 마법적 소양이 없어도 내공을 사용하여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이지요.”
잠시 강론을 하던 엘리샤는, 자리에 앉은 운소령에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이 정도 크기의 마정석에는 또 다른 용도가 있지요. 소모하지 않고도 정확한 판별이 가능한 것. 혹시 거기까지 알고 있나요?”
“…네?”
이번에는 운소령조차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마정석은 강력하지만, 한 번 내지 두세 번 사용한 후에 소멸되어 사라진다. 소모품이기에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 전제를 교관은 간단하게 뒤집고 있었다.
“소모하지 않고… 정확한 판별?”
운소령이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생각에 잠길 때, 교관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칠판 아래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마력학의 기초」
-마법적 재능을 확인하는 방법
모두의 의아한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 * *
한편 수업에 들어온 흑객은 오자마자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교탁 앞에서 삼삼오오 모여 부산하게 떠드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정말 데몬즈 루인 던전에 갔단 말이야?”
“제운비 교두도 봤어? 정말로 그렇게 강해?”
한 명을 둘러싸고 우르르 몰려 있는 4학년 4반의 학관생들.
그 한가운데 앉은 남궁호는, 천무학관의 교두들과 함께 이번 던전 소탕에 참여한 이야기를 풀고 있었다.
“말도 마. 스켈레톤 메이지에 밴시까지… 특히 광범위하게 퍼지는 언데드 권역 저주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더라고.”
그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같은 반 학관생들에게 어제 겪었던 상황을 설명했다.
대규모 토벌. 무려 천무학관 교두 3명이 참관하고, 수석 교관, 그리고 실전학 십수 명의 교관들이 대거 움직인 토벌.
그 살벌했던 싸움의 이야기는 학관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물론, 모든 학관생들이 그에게로 몰려든 건 아니었다.
양대, 장우.
나름 뛰어난 실력자라 평가받는 그들은 같은 반 학관생들의 반응을 내심 불편하게 느끼고 있었다.
“…응?”
남궁호는 무용담을 늘어놓던 중에 잠시 대화를 멈췄다.
어느샌가 나타나, 자리에 앉은 흑객을 본 것이다.
“…잠깐만 비켜 줘.”
“왜? 어디 가려고.”
“더 얘기해 봐.”
남궁호는 반 학관생들의 요구를 뒤로하고 흑객에게 걸어갔다.
그러고는 그의 앞에서 인기척을 냈다.
“큼큼.”
스윽.
흑객의 시선이 올라갔다.
“오셨소.”
“뭐 나야. 늘 빨리 오는 것이 습관이 되어 말이오.”
남궁호가 슬쩍 미소를 띠며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척 거리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그는, 흑객에게 조금 더 다가가 속삭였다.
“한데 어땠소?”
“뭐가 말이오?”
흑객이 불편한 어조로 묻자, 남궁호의 표정에 살짝 실망한 기색이 서렸다.
“허, 참. 내 딴에는 본가에 유명한 숙수의 비전을 알려 주었는데…….”
“아!”
순간, 흑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깍듯이 포권을 하며 예를 표했다.
“실수했소. 잠시 뭐 좀 생각을 하느라… 이번에는 큰 도움을 받았소.”
“허, 뭐. 그렇게까지 대단한 건 아니었는데…….”
남궁호가 난감한 듯 괜스레 머리를 긁적였고, 흑객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흑객은 다시 관심이 없는 양, 창가로 고개를 돌렸으니.
하지만 남궁호는 그런 반응이 흥미로웠는지 한마디를 더 던졌다.
“혹, 그 얘기 들으신 적 있소?”
“……?”
“올해 무림맹의 목표 중 하나였던, 데몬즈 루인 던전이 소탕되었다는 소식이오.”
“…….”
하나 이번에도 흑객은 대답이 없었다.
그 반응에 남궁호는 계속 말을 붙였다.
“놀라지 않소? 저 악명 높은 던전 데몬즈 루인이 없어졌는데.”
“…알겠소.”
흑객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호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친해지기 힘든 친우.
하지만 ‘마교’란 단체에 호기심은 여전한지 여전히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그때.
“이왕 온 김에 한 가지 물어도 되겠소?”
이번엔 흑객이 물어 왔다.
“말해 보시오.”
“혹시 마정석에 대해 좀 아시오?”
“뭐. 대충은. 자랑은 아니지만 사실 내가 천무학관에 온 뒤로 단 한 번도 수석을 놓친 적 없소.”
“음…….”
“뭔데 그러시오?”
흑객이 주저하자, 남궁호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렇게 침묵이 좀 길다 싶었을 때쯤.
“자리를 좀 옮길까 하는데…….”
흑객이 조심스럽게 묻자 남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꽤 중요한 얘기란 걸 알아챈 그는 문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날 따라오시오.”
* * *
햇살이 내리쬐는 아늑한 방.
리그웨더는 책상에 앉아 편안한 자세로 눈을 감고 있었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단순한 명상을 하고 있으리라 여겼겠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어둠 속을 더듬듯, 계속해서 특정 장면이 움직이고 있었다.
-크아악!
-카아아아악!
어둠 속을 메운 수천의 군세.
그 위로 움직이는 희끄무레한 잡귀들.
확실히 데몬즈 루인 던전은 여느 곳과는 달리 밴시와 레이스들도 허공에 가득했다.
그들의 몸에서 퍼지는 사이한 기운만으로도 웬만한 범인은 질식할 만큼 지독했다.
“후훗.”
하지만 그 중심에 있던 자.
그는 가득한 사이한 기운 속에서도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영향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힘을 받아들이며 투기를 자극하고 있었다.
“마공이라…….”
리그웨더는 눈을 감은 채로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흑마법과 흡사하지만 본질은 전혀 다른 기운.
그럼에도 상대의 기운을 밀어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공력.
왠지 모르게 흑마법이 굴복한다는 느낌을 들게 하는 것은 기분 탓일까.
사이함이라면 흑마법보다 더 지독한 것이 없을진대.
똑똑똑.
“리그웨더 님.”
문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리그웨더는 눈을 떴다.
그리고 이내 바르게 앉아, 나긋하게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고 노인이 들어왔다.
교무처장 구용천은 약간은 수척해진 몰골로 들고 온 두툼한 서류를 내밀었다.
“찾아냈나요?”
“일단은 보시죠.”
리그웨더는 서류를 받자마자 허공에 던졌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백여 장의 서류가 거짓말처럼 멈췄다.
허공섭물.
본디 기(氣)로 멀리 떨어진 사물을 움직이는 최상승 무공.
하지만 그녀가 쓴 건 간단한 마법이었다.
“오호.”
리그웨더는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구용천이 숨을 두 번 내쉬기도 전에, 질문을 해 왔다.
“지도문화사에서 흑객이 데몬즈 루인 지도를 구했다고요?”
“아. 예. 직접 용모파기까지 대조해 보았습니다.”
대답하던 구용천은 속으로 감탄했다.
그녀와 함께 해 온 지 십여 년이 흘렀지만, 언제 봐도 저 기이한 능력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허공에 문서를 던져 놓고 한순간에 모든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은 저게 사람인가 싶을 정도였다.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요.”
리그웨더의 말에 구용천은 그 의미를 깨달았다.
가장 의심스러운 자.
바로 이번에 천무학관으로 들어온 4학년 학관생이었다.
출신은 마교, 이름은 흑객.
“하지만 학과장님, 4학년을 맡은 교두들은 그 정도 실력자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의문스러운 것이 없지는 않았다.
흑객이란 자가 뛰어난 실력을 가지긴 했지만, 네크로맨서를 처리한다는 걸 믿기나 할까?
“글쎄요. 그 정도 실력자라면 자신의 실력을 숨겼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죠.”
“교두들의 눈을 피해서 말입니까?”
“당장 제운비 교수도 마음만 먹으면, 1학년 학관생처럼 변할 수 있잖아요. 그런 걸 중원어로는 뭐라 했었는데…….”
“대지약우(大智若愚)라고 합니다.”
큰 지혜(智慧)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얼른 보기에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구용천은 슬쩍 미소를 띄웠다.
분명 학과장이 한 번 들은 걸 모를 리는 없었다.
그저 자신이 민망할까 봐 겸손하게 물어봐 준 것일 터.
“하면, 이 학관생을 어떻게 할까요?”
구용천은 본론으로 넘어왔다.
의심스럽지만 그렇다고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상황.
여기서 어떤 식으로 그의 능력을 확인하는지가 중요했다.
마교란 출신 단체 때문에 괜히 어설프게 접근했다간, 큰 화를 입을 수 있었으니까.
“4학년 과제 중에 몬스터 사냥이 있었죠?”
잠시 생각을 고르던 리그웨더가 물었다.
“음, 에. 각 배정된 장소로 이동하여 와이번을 사냥하는 겁니다.”
구용천이 잠시 기억을 떠올리고 대답했다.
“그거 좋겠군요.”
“예?”
구용천을 의아해했지만, 학과장은 당연하지 않냐는 듯 웃어 보였다.
“그걸로 확인하면 알 수 있을 거예요.”
“네크로맨서를 쓰러뜨린 자라면 와이번쯤은…….”
“한 마리가 아니라면 어떤가요?”
“네……?”
리그웨더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를 드러내며 눈을 찡긋했다.
그리고 뒤이어 질문했다.
“우리 학관에 배당된 던전 지역에 와이번 서식지가 있었죠.”
“아. 예.”
구용천은 거기서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로 보내 보세요. 과연 몇 마리나 상대하는지 한 번 지켜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