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정령술사 (2)
갑자기 땅에서 진흙 더미가 치솟아 올랐다.
그 속도는 가히 육안으로 쫓을 수 없을 만큼 빨랐고, 그것이 가고일 넷을 일시에 삼켜 버렸다.
“헉!”
“아!”
그 장면을 본 소진과 운소령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날아다니던 가고일이 피할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덮어 버린 진흙더미. 저게 가고일이 아닌 자신들을 덮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꾸물. 꾸물.
흙더미는 한참을 요동쳤다.
마치 뱀이 박쥐를 삼킨 듯이, 흙더미 밖으로 간헐적인 가고일들의 몸부림이 이어졌고.
-쿠에에에엑!
얼마 가지 않아, 흙더미가 가고일을 내뱉었다.
그 결과.
두두두둑.
가고일들은 산산조각 난 몸이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호오…….”
편한 자세로 앉아 있던 천마가 눈에 약간의 호기심이 내비쳤다.
실로 생경한 광경이다.
대법(大法)도 아닌 걸로 보이고, 몇 번 경험했던 마법과도 달라 보인다.
그렇다고 네크로맨서가 생성한 소환수 같지도 않았다.
백 년을 훌쩍 넘게 살아온 온 그에게도, 저런 식의 방식은 상당히 낯선 것이었다.
‘심력을 이용한 수법인 것 같은데…….’
천마의 시선이 필리아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수법을 부리는 과정에선 기(氣)의 활용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확실히 마법은 아닌 셈이다.
지금껏 자신이 경험했던 마법은 내공과 형태가 다를지언정, 하단전에서 진기(眞氣)를 부리는 활동이 있었다.
‘염력(念力)은 더더욱 아니다. 단순한 이능이 저런 조화를 부릴 순 없어…….’
엄청난 경험을 쌓았던 천마조차 필리아가 펼친 소환 공격이 무엇인지 좀처럼 핵심을 짚어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추론까지 불가능했던 건 아니었다.
애초에 필리아에게 나름 한 수가 있다고 생각한 이유가 바로 상단전.
머릿속에서 잠재되어 있는 이지력(理智力)이 일반 무인보다 월등히 높았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내공을 쌓는 하단전과 달리, 상단전에는 정신에 축적된 공명력이 모이는 거니까.
“필리아. 너… 정령술사였구나.”
‘정령술사?’
운소령의 말에 천마의 신경이 자연스럽게 쏠렸다.
적어도 운소령은 뭔가를 알고 있는 듯했다.
“숨겨서 미안해. 왠지 주목받을 것 같아서…….”
필리아는 그 말에 볼에 홍조가 조금 끼더니, 수줍게 고개를 내렸다.
“아냐, 잘 생각했어. 학급에 정령술사가 있다는 게 알려졌으면, 학우들이고 교관이고 할 것 없이 널 가만 놔두지 않았을 거야.”
“…고마워.”
그건 운소령, 본인이어도 그랬을 것이다.
정령술사라니. 말은 들었지만, 직접 이렇게 보니 정말로 신비하다는 느낌이 가득했다.
꾸물꾸물. 토도독.
부서진 가고일의 돌을 차곡차곡 모으고 있는 두더지들.
반쯤 사람 얼굴을 한 이들은 벗겨진 머리로, 이리저리 흩어진 돌을 깨끗이 만들고 있었다.
“밥 줘. 밥 줘. 밥밥밥.”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며.
벌써 소진은 이미 돌을 굴리고 있는 두더지에게 시선을 뺏겨 뚫어지게 관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은 어느 등급이야?”
운소령이 재차 물었다.
땅의 속성인 것은 척 봐도 알았다.
정령술을 쓸 때 들었던 노움이라는 말로 보면 아마도 중급 정령 노움을 말한 것 같은데.
“중급 정령이야. 아직 상급까지는 능력이 안 되서.”
“아!”
예상대로 중급 정령.
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상당히 높은 친화력이다.
보통 정령사 중급이면 마법사로 치면 거의 4클래스와 비견될 정도의 무력을 보인다.
거기다 땅의 정령사는 동급의 마법사보다 1클래스가 더 높다고 평가받는다.
왜 그런가는 조금 전 그녀가 보여 준 토사의 파도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정령이라고? 이게?”
때마침 두더지를 보며 신기해하던 소진 옆으로 천마가 다가왔다.
“맞아. 그것도 땅의 정령.”
“그래? 능력은 형편없지만, 꽤 편해 보이는 능력이네?”
“뭐? 무슨 소리야?”
소진이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
“쓸모없다니. 무려 중급 정령이라고. 가고일 4마리를 단번에 날려 버리는 거 못 봤어?”
“강력한 만큼 굉장히 희소한 재능이야. 중원을 통틀어서 알려진 정령사는 채 열 명도 안 된다고.”
옆에서 듣던 운소령도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중원에서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운 천무학관. 이곳에서도 정령술사는 단 2명뿐이다.
특히 고작 2학년생이 중급 정령을 다룰 수 있다는 건, 엄청난 대사건이다.
‘대체 이놈의 정신세계는 어떻게 생겨 먹은 거지?’
운소령은 대응할 가치가 없어 뭐라 묻고 싶어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녀를 더 어이없게 만든 건 따로 있었다.
“그래? 그럼 나도 배워 볼까?”
“……?”
약간 의아하게 바라보는 필리아.
자연스럽게 이어진 잠깐의 정적.
하지만 천마는 그 틈에 끼어들며 또 한마디를 덧붙였다.
“꽤 편해 보인단 말이야. 지들이 다 알아서 하니까.”
“…….”
“…….”
“…….”
이번 꽤 정적은 길었다.
그 정적의 가운데서도 할 말은 하는 애들이 있었다.
“밥 줘. 밥. 밥. 밥. 밥.”
토톡. 토토독.
두더지같이 생긴 중급 정령들이 돌을 굴리며 소곤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어?”
어둠이 내리깔린 술시(戌時-오후 7시-9시) 쯤.
천무학관 무공학 교관 허각(許刻)은 입구 쪽에서 나오는 학관생들을 볼 수 있었다.
“끝난 거냐?”
그가 선두에서 걷는 학관생에게 묻자, 살짝 지친 기색으로 서문영이 대답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려고 합니다.”
“사상자는?”
“고작 2단계 광장에서 다쳤다면, 얼굴을 들 수 있겠습니까?”
뒤따라오던 언규가 씩 웃으며 말을 받았다.
허각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를 보더니, 뒤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는 보자기에 뭔가를 싼 채 들고 있었고, 다른 이는 어깨에 뭔가를 멘 자도 있었다.
허각은 그게 아이템이라고 추측했다.
“괜찮은 건 좀 나오더냐?”
“고작 석조 가고일입니다. 기대할 만한 건 없었습니다.”
“하긴. 그렇지.”
허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석조 가고일이 떨어뜨리는 아이템들은 쓸모없는 것들이다. 애초에 뭔가를 떨어뜨리는 일 자체가 드물다.
최소 4단계 광장에 있는 엘리트 가고일 정도 되어야 쓸 만한 게 나올 테니.
“한데 말입니다.”
선두에 선 학관생의 물음에 허각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다른 학관생은 오지 않았습니까?”
서문영은 궁금했다.
조금 늦은 시간이긴 해도, 자신들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너희가 들어가고 난 뒤, 설명 파티가 더 들어가긴 했지.”
허각은 거대한 왕릉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서 언뜻언뜻,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아직 치열하게 싸우는 모양이구나.”
* * *
2단계 광장으로 진입한 당무련의 일행은 또다시 수많은 가고일을 맞닥뜨렸다.
그런데 학관생들은 이전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가고일의 수가, 이전보다 훨씬 많았음에도 오히려 1단계보다 더욱 훌륭히 대처해 내고 있었다.
‘대단해.’
그것이 가능했던 데는 반장 방윤의 활약이 컸다.
콰드득!
그가 몰려오는 가고일들 사이를 단번에 침투하더니, 단 일격에 하나를 날려 버린 것이다.
빠악! 우지끈!
뿐만 아니라, 뒤에서 날아들던 가고일도 쓰러뜨렸다.
손으로 가볍게 후려친 것 같은데, 거대한 돌덩어리가 쓰러져 뒹구는 것이다.
‘내가중수법이야!’
흔히 침투경이라 불리는 이것은, 검기나 도기처럼 예리한 공격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더 효율적이었다.
가고일의 몸은 딱딱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기나 검기는 몸통 속의 핵을 정확히 찌르지 못하면 타격을 줄 수 없다.
하나, 내부를 흔들어 부숴 버리는 내가중수법은 가고일에게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캬아아악!
“흡! 어딜!”
쩌어엉!
“저게… 전위.”
왜 소림승이 전위에 적합한지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가고일의 공격은 돌덩어리에 맞는 것과 같다.
일반적인 무인은 스치기만 해도 뼈가 부러지고 살이 터질 것이다.
하지만 소림의 후예들은 어려서부터 외가기공을 수련한 몸이다.
“합! 합!”
파앙! 빡!
금종조, 철포삼, 철비박, 철두공 등. 몸이 원체 단단하고 질기니, 설맞는 걸론 죽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소림승들은 그 단단한 몸이 있기에 회피형 전위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갑옷이라도, 몸에 철갑을 두르면 둔해지게 마련. 하지만 갑옷을 안 입어도 몸이 단단하니 빠르기가 그지 없다.
여기에 무리 속을 파고드는 담대함. 적을 앞에 두고 싸우는 투쟁심. 재빠른 움직임이 더해지니 가고일들은 계속 허우적거렸다.
쾅! 쾅! 크아아아!
느리지만 강력한 일격을 가진 소 떼가, 날랜 고양이를 잡지 못하는 것처럼, 소림승을 노린 공격이 빗나가 다른 가고일을 때리는, 웃기는 상황.
“하아!”
“합!”
방윤만이 아니라, 뒤따라간 방만과 방호도 마찬가지였다.
-가아아아악!
달려든 가고일은 열 마리였지만, 저희들끼리 엉키고, 내가중수법에 맞아 다섯이 쓰러졌다.
그러니 남은 가고일들은 학관생들 몫이었다.
“하앗.”
모두가 달려들 필요는 없었다.
날아든 세 마리가 무슨 이유인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얼음 발톱의 파편(Chillnail Splinter)!’
당무련은 양미가 날린 비수를 보고는 곧장 무엇인지 파악했다.
4등급으로 분류되는 아이템으로, 냉속성 마법이 걸린 단검.
꽤나 비싼 아이템인 이 세 개의 비수를 던져 갑옷과도 같은 가고일의 그들의 발을 묶어 버렸다.
-그아아악!
그리고 단검에 맞지 않은, 두 마리가 여전히 날뛰었고.
“비켜 봐.”
이번엔 당무련이 나섰다.
그녀는 학관생으로 달려드는 몬스터들에게 뛰어가더니, 들고 있던 철구로 가슴을 가격했다.
버벅! 벅!
단 두 방.
그것으로 충분했다.
두 가고일은 어떤 저항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쇠사슬에 달린 유성추의 철구에 가고일의 핵이 그대로 깨져 버린 것이다.
그사이, 굳어 있던 세 마리는 다른 학관생들이 손쉽게 처리했다.
“이제 네 마리 남았네.”
덤벼들지 않았던 또 다른 무리 넷.
그들은 하늘에 날아오른 채 무심히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 튀어나오지 않을까?”
옥애가 걱정스럽게 물어 왔다.
주위에 쫙 갈린, 돌인지 생명체인지 알 수 없는 석고 가고일.
꽤나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 상관없어.”
당무련은 유성추를 회수하며 미소 지었다.
싸워 보니 생각보다 어려운 상대가 아니란 걸 느낀 것이다.
“빨리, 마무리 짓자고.”
-끼아아아아.
수직 낙하 하는 가고일들을 향해.
이번엔 너 나 할 것 없이 모든 학관생들이 달려들었다.
* * *
“마. 많다.”
천마의 일행은 두 번째 광장에 들어간 후, 얼마 걷지 않고 걸음을 멈췄다.
2단계는 1단계와 숫자가 아예 달랐다.
가고일 네 마리가 기둥에 박혀 있던 1단계와 달리, 2단계는 좌우에 석조 가고일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던 것이다.
“서, 설마 이것들이 전부 가고일이 되는 건 아니겠지?”
끼릭끼릭.
소진은 급히 석궁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의 석궁에는 새카맣고 굵은 철구가 장전되어 있었다. 벽력탄이었다.
소가백화점은, 가문의 귀한 도련님을 험지에 그냥 보내지 않았다.
값비싼 마법 장비는 물론이고, 여차하면 바위 하나를 박살 낼 벽력탄을 수십 발이나 준비시켰다.
“다는 아니고 저 중 일부일 거야. 하지만 숫자는 앞서보다 훨씬 많겠지.”
운소령도 긴장한 기색으로 말했다.
한 마리 정도는 그녀도 가볍게 날려 버릴 수 있었지만, 많은 숫자는 그 자체로 위협이 된다.
심지어, 겉보기엔 전부 똑같아 보이는 석상이 수십 개다.
싸우는 와중에 언제 어느 놈이 뒤에서 공격해 올지 모른다는 건, 꽤나 등골이 서늘해질 일이었다.
아무래도 까다롭겠다, 그렇게 생각하던 중에 기묘한 광경을 보았다.
똑똑. 똑똑. 똑똑. 똑똑. 똑똑.
노움이라 불리는 중급 정령들.
짧은 다리로 이리저리 흩어지던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가고일 석상을 하나씩 두들기고 있었다.
“모두 열네 마리네요.”
그리고 곧 필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런 것도 가능해?”
소진이 놀라 묻자 그녀는 수줍게 웃었다.
“마침 돌이잖아요. 어느 게 가고일인지는 몰라도, 어느 게 석상인지는 바로 알 수 있죠. 이 아이들은 땅의 정령이니까.”
“아… 정말 대단하다.”
소진이 감탄했다.
원래 가고일을 상대할 때 가장 까다로운 조건이, 어느 놈이 진짜고 어느 놈이 가짜인지 판별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파티는 어이없게도, 가장 까다로운 조건을 시작부터 해결한 것이다.
“웃을 상황은 아니야.”
소진의 반응과 달리 운소령은 여유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가고일 열네 마리.
하나하나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이 정도 숫자라면 상대해야 할 수는 정해져 있다.
자신과 필리아가 있긴 하지만, 일시에 달려든다면 다른 아이들의 안전들은 장담하지 못할 터.
‘이한이 몇 마리나 막아 줄지가 중요한데…….’
그렇게 슬쩍 그를 바라보는데, 어느새 이한은 석조 가고일 앞에 있었다.
“아니, 여덟 마리야.”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고는 가볍게 주먹을 내질렀다.
그런데.
쾅! 쾅! 쾅! 쾅
그의 주먹에서 강렬한 기풍이 나와 가고일 석상을 하나둘씩 부서뜨리더니.
콰콰콰쾅!
멈추지 않고 끝도 없이 뻗어가며 가고일 전부를 박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람에 가고일 모양의 석상뿐만 아니라.
-쿠에에에에엑!
석상으로 위장하고 있던 가고일까지 모두 함께 부서져 나갔다.
“말도 안 되는…….”
운소령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위장이고 뭐고, 죄다 쓸어 버리는 말도 안 되는 공격력에.
-카아아아악.
더는 숨어 있는 게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걸까.
좌측 편에서 석조로 위장하던 가고일 몇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숫자가…….”
운소령은 가고일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이한의 말은 정말이었다.
필리아가 말했던 열네 마리가 아닌.
고작 떠오르는 건 여덟 마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