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정령술사 (3)
“땅의 기운 노움은 내 말을 들으라. 쌓고 쌓이면 언젠가 갈라지는 균열의 힘으로 말한다.”
가고일이 포악한 이빨을 드러내자, 제일 먼저 반응한 건 필리아였다.
그녀의 부름에 두더지처럼 생긴 정령들이 반응했다.
모두들 총총걸음으로 그녀 곁에 다가온 것이다.
“거대한 돌로 창을 만들어, 눈앞의 적을 섬멸할 것이니…….”
팔락팔락.
가고일들이 정령의 움직임을 본 것일까.
몬스터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하나둘씩 필리아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때쯤 두더지 정령들은 이미 땅속으로 파고들었는지 보이지 않았고.
“대지의 창!”
그녀의 외침과 함께 바닥에서 거대한 종유석이 솟구쳐 올랐다.
-까아아아악! 까아아악! 까아악!
정령의 충격파가 일대를 휘감았다.
울려 퍼지는 가고일들이 비명.
갑자기 솟아오른 종유석은 창처럼 변해 가고일 넷의 몸통을 산산이 부서뜨린 것이다.
거기다 한 녀석은 부서지지 않았음에도, 충격의 여파 때문에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휘청였다.
여덟 중에 단번에 넷을 일격에 처치.
동료들의 죽음을 방패 삼아 살아남은 멀쩡한 가고일은 고작 세 놈에 불과했다.
-그아아악!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세 마리 가고일이 포악한 이를 벌리며 필리아에게 즉각 달려들었다.
자신만만하게 큰 기술을 쓴 그녀의 얼굴에 당혹이 스쳤다.
사방으로 뻗어 나간 종유석 때문에, 정령사 본인이 시야를 놓친 것이다.
-그아아아악!
“걱정하지 마.”
저도 모르게 눈을 감은 필리아 앞에 운소령이 나타났다.
그녀는 검집에서 검을 뺌과 동시에 거침없이 휘둘렀다.
쉬이이익!
“아!”
그 검의 궤적을 보던 필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너무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곡선.
마침 새하얀 백의를 입은 운소령이 검을 휘두르자, 흡사 검의 여신이 강림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가고일 비명 소리에 필리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 마리가 가고일이 운소령을 향해 동시에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끼이이이익-!
그리고 그곳엔 공간을 그어 버리는 긴 섬광이 있었다.
운소령의 얇고 긴 검이 만드는 선.
가로, 세로, 사선으로 그어지는 수십 개의 선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만큼 치명적이었다.
파드드드득-.
검이 지나간 양단의 공간에 살아 있는 건 없었다.
물리 내성을 지닌 화강암의 가고일이, 운소령의 검에 수십 동강 나 버렸고, 그 단면은 거울처럼 매끄러웠다.
“월녀검(月女劍)이었어…….”
필리아가 감탄했다.
월녀검법. 춘추전국시대의 오월전쟁을 승리로 이끈 여검사가 창안하여 전수한 검법.
지독하게 빠른 쾌검이자, 허공을 가르는 경신법이 특징이며, 내공의 소모가 거의 없다고 알려진 실전 검법을 눈앞에서 본 것이다.
‘저 검…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돼.’
아무리 대단한 검이라 하더라도 돌덩어리 가고일을 저런 식으로 가르진 못한다.
더욱이 그녀의 검은 평범한 협봉검(狹鋒劍). 검신이 좁고 길어, 가느다란 회초리 같은 검이다.
검기처럼 기공 발현도 하지 않았다면 필시 등급이 높은 아이템일 터였다.
“아! 한 마리가.”
감탄하고 있던 필리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황급히 남은 가고일을 찾아 고개를 돌리던 그녀는, 입을 쩍 벌리고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쏘라고.”
“저리, 저리 가! 다가오면 정말 쏠 거야.”
크르르릉!
이빨을 드러낸 가고일은 머리채가 바닥에 짓눌린 채 옴짝달싹 못했다.
아니, 천천히 소진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돌로 된 머리를 잡은 이한이 가고일을 끌고 소진에게 다가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멈춰! 이한! 아악, 부탁……. 야! 쏜다! 진짜 쏜다고!”
“그냥 쏴. 인마. 나 걱정말라니까.”
소진은 거의 울먹거리고 있었고, 이한은 건들거리고 있었다.
필리아는 나오던 비명을 급히 삼켰다.
이한의 기행 때문이 아닌, 가고일을 가지고 노는 듯한 행동에 기겁한 것이다.
‘말도 안 돼!’
체고가 2미터, 체중은 1톤에 육박하는 가고일이다.
심지어 철골 따위는 쉽게 으스러뜨리는 가공할 힘까지 가졌다.
그런 가고일의 머리를 한 손으로 짓누르고, 그러고도 모자라 일어나지도 못하게 힘으로 제압했다.
퍼덕퍼덕!
가고일이 온몸을 뒤틀며 날개만 파닥거리는 모습은 그녀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가슴을 노려. 이곳을 맞혀야 뭔가 깨진다며.”
“으아아아!”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던 소진은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등 뒤는 벽이다. 그리고 눈앞에는 가고일이 천마 손에 잡힌 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에이, 그냥 던져 버려야겠군.”
소진이 석궁만 겨눈 채 울고 있자, 짜증이 난 천마가 머리를 냅다 집어 들었다.
그리고 소진 쪽을 향해 던지려는 시늉을 하자.
“아아악!”
기어코 소진이 비명을 지르며 발동 장치를 눌렀다.
퓨슉!
-콰아아앙!
귀청을 찢는 폭음과 비명이 일었다.
“꺄아악!”
“뭐 하는 거야!”
뒤늦게 그 장면을 목도하던 운소령과 필리아가 경악했다.
기계 활인 노궁은, 단순한 화살이 아닌 탄환을 발사해 버렸다.
그리고 눈앞에서 터진 폭발은, 시중에 파는 벽력탄, 그녀들이 아는 일반적인 범주의 벽력탄보다 몇 배는 더 강력했다.
고오오오-.
충격이 지축을 흔들고, 폭염은 저 높은 천고까지 치솟았다. 거기다 불길까지 주변으로 옮겨붙었다.
당연히 직격당한 가고일은 물론, 그걸 잡고 있던 이한까지 화염이 덮어 버렸다.
“아, 안 돼! 이한!”
기겁한 소진도 정신을 차렸다. 그는 비명과 함께 불길에 뒤덮인 가고일 쪽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몇 걸음 다가가기도 전에 멈췄다.
불길을 털어내며 말을 걸던 녀석 때문이었다.
“야, 이런 걸 쏘면 미리 말을 하지.”
치이익! 치익!
이한이 투덜거리며 걸어 나왔다.
벽력탄에다 자그마치 백린을 넣은 벽력탄을 맞고도 그는 태연히 말하고 있었다.
“너… 괜찮은 거야?”
“안 괜찮지. 인마, 너라면 괜찮겠냐?”
“그, 그래서 안 쏘려고…….”
“너 같은 겁쟁이는 이렇게라도 쏴 봐야 해. 물론 다음은 이렇게 기다려 주지 않을 거지만.”
“그, 그건 그런데… 너, 정말 괜찮아? 아무 이상 없어?”
소진은 울먹거렸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백린(白燐)의 화염은 한번 붙으면 물로도 꺼지지 않는 지독한 불길이다.
생살에 붙으면, 칼로 긁어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런데 대체 무슨 조화인지, 이한이 손으로 털어 낸 부위는 거짓말처럼 불이 꺼져버렸다.
“안 괜찮다니까? 나중에 단단히 뜯어낼 테니까 그리 알고.”
치이익. 치이익.
바닥에는 아직도 흘러내린 백린이 타오르고 있었다.
천마는 홀가분해진 듯, 고개를 까닥이더니, 운소령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가자, 애들아. 3번째 방까지는 같이 가 줄 테니까.”
“…….”
“…….”
두 여인은 말이 없었다.
상황을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니, 딱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 * *
따닥따닥.
방풍벽을 세우고, 모닥불을 지폈다. 불 위에 올려놓은 냄비에선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주위로 둥글게 앉은 청년들.
내일 몬스터 사냥을 위해, 야영을 준비하던 서문영의 조였다.
“음. 됐다. 먹자.”
후르륵.
언규가 페미컨으로 만든 스튜를 맛보며 말했다.
육포와 곡물가루를 지방으로 굳힌 페미컨은, 그냥 먹으면 좀 느끼하기에, 가능하면 물과 함께 끓여서 조리한다.
몇가지 향신료를 넣으면 바로 먹을만한 고깃국이 된다.
“그런데. 서문영, 굳이 3단계까지 들어가지 않은 이유가 있어?”
당시에는 묻지 않았지만, 지금 떠올려 보니 이상했다.
서문영의 실력과 지금의 전력이면 세 번째 광장까지는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건 언규뿐만이 아니었다.
“내 생각도 그래. 2번째엔 잠시 당황은 했지만, 그 정도로 세 번째 광장까지 못 갈 정도는 아니었잖아?”
옆에 있던 다른 학관생 하나도 거들었다.
화산파 출신의 곽정(郭霆).
보통 때는 있는 듯 없는 듯 잘 나서지 않는 성격이지만, 2단계 광장 때 가고일 둘을 혼자서 해치운 실력자였다.
“사상자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야.”
청년들의 시선이 모였다.
서문영은 꾸욱, 눈꼬리를 누르며 기억을 되짚었다.
“3단계 광장에 있는 강화가고일. 정보에 의하면 체고가 3미터에 달하고 체중은 2톤에 육박한다고 했어. 다들 어릴 때 도량과 계측법을 배웠으니 그게 무슨 뭘 의미하는지 알 테고.”
“깔렸다 하면 죽는다는 거군.”
종천도가 서문영의 말에 동의했다.
그는 다른 학관생이 핵을 깨뜨린 가고일이 넘어지며 그를 덮치는 바람에 크게 다칠 뻔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방심 못 할 놈이 가고일이다.
“만약 전략이 삐끗해서 한 명이라도 다치게 되면 수행평가 점수가 깎여. 더욱이 우린 숫자가 10명이야. 다른 조를 이기려면, 최소 3단계 가고일은 무사히 처리해야 해.”
학관에서 제공해 준 지도에 따르면 강화 가고일은 여섯.
일시에 덤벼들었다간, 분명 무너질 것이다.
그러니 느리더라도 한두 놈씩, 따로따로 불러들여 피해를 입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오늘은 합을 맞춰 본 거고, 내일부터는 우리 조 전체의 전력을 감안해서 전략을 짜야 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야 하니.”
“고작 강화가고일 정도에…….”
언규가 웃음을 터뜨렸다.
“방심하지 마. 선행자들의 기록으로 추정하건대, 그놈들은 지능이 있어.”
서문영은 여전히 진지했다.
지능이 있다는 것은. 적들의 공격이 다양해진다는 거다.
그리고 거기에 항상 사고가 발생했다.
그는 그것을 우려했던것이다.
* * *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널브러진 가고일을 보고, 당무련이 말했다.
몇몇은 아이템을 줍고 있었고, 몇몇은 가고일의 증표, 핵을 챙기고 있었다.
수행평가에 들어갈, 몬스터를 잡았다는 증거품이었다.
“왜, 더 들어가지 않고?”
방윤이 물어왔다.
가고일들을 손쉽게 처리했기 때문인지, 그의 눈빛에는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더는 위험해. 강화가고일이 무려 여섯이나 있어.”
“난 자신 있어. 무섭지 않다고.”
“그런 문제가아냐.”
당무련은 멀찍이 떨어진 3번째 광장을 바라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방윤, 너는 강화 가고일과 싸워 본 적 있어?”
“몇 번 본 적이 있어. 싸워도 봤고.”
소림사 출신답게, 크고 작은 사건을 해결한 적이 있는 듯 보였다.
하긴, 그러니 석조 가고일들을 능숙하게 상대했던 거겠지.
“그럼 다른 아이들은?”
“어?”
“다른 학관생들이 너만큼 경험을 쌓았을까? 너만큼 침착하게 상대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보는데.”
“아…….”
그제야 방윤은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상대는 물리 내성을 갖춘 거대한 체구의 몬스터다.
한순간의 방심이, 목숨을 앗아 갈 수 있다.
“이번 시험은 누가 더 많이 잡느냐의 문제가 아냐. 누가 더 실수를 하지 않는가. 누가 더 안정적으로 파티를 운영하는가. 그게 평가 기준이라고 생각해.”
“…내 생각이 짧았다. 알겠어. 네 말에 따를게.”
당무련의 말에 방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시험 기간은 1주.
학관으로 돌아가는 시간까지 계산해도, 앞으로 5일이나 남았다.
느긋하게 계획을 짜고, 공략해도 충분한 시간이다.
드드드득.
“어? 이게 무슨 소리지?”
때마침 학관생들에게 간헐적인 울림이 느껴졌다.
건물도 그랬지만, 지면도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도, 다른 싸움의 영향 때문으로 보였다.
“방향은 북쪽이야. 운소령과…….”
이한.
채 입에 올리지 않은 이름을 떠올리며, 당무련이 표정을 굳혔다.
* * *
“무턱대고 들어가면 안 된다고!”
소진은 3층 광장의 문을 여는 이한을 급히 제지했다.
3단계는 강화 가고일이다.
고작 네 명이라는 숫자로, 무턱대고 들어갔다간 큰 위험이 따를 것이란 건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필리아와 운소령은 그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다.
“굳이 우리가 피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오히려 운소령은 이한을 부추기는 행동을 취했다.
곧 닥쳐올 몬스터들에 대한 걱정보다 이한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기 때문이다.
‘실력이 어느 정도지?’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이한이 권풍 한 방으로, 두 번째 광장에서 좌측에 정렬하고 있던 가고일을 단번에 파괴했다는 걸.
단순히 권풍 때문에 놀란 건 아니다.
2학년 학관생 중 그보다 더 상승무학인 권기를 쓰는 자들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한이 쏘아 낸 건 단순한 권풍이 아니다.
기껏해야 10m 정도 뻗어 나가다 소멸하는 권풍과 달리 벽에 부딪혀 소멸할 때까지 쭉쭉 뻗어 나갔다.
어디 그뿐인가.
그 권풍으로 단순한 가짜 가고일 석상만이 아니라, 위장해 있던 진짜 가고일까지 단번에 없애 버리지 않았는가.
물론 필리아가 말했던 열네 마리가 맞다는 전제하에서의 판단이었다.
“얼마나 강한 걸까요?”
이한에게 두고 있던 운소령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였다.
필리아가 말을 건 것이다.
“이한이란 저 학우 말이에요. 적어도 2학년급은 아닌 것 같죠?”
“글쎄…….”
운소령은 선뜻 말하지 못했다.
둘은 이미 이한의 무공 수준이, 2학년생의 범주를 벗어났다는 건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 ‘대체 어떻게?’라는 자연스러운 질문에 답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겨울 방학 동안, 분명 뭔가 일이 있었어.’
정말로 나도는 소문대로, 이한의 집안이 무슨 대법을 성사시킨 걸까?
그렇게 상념에 잠길 때쯤.
드드드드득.
“와---.”
문이 열리고, 필리아가 감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더 넓게 펼쳐진 광장.
그리고 멀찍이 떨어진, 광장 중심에 가고일 형상을 한 여섯 기둥이 한눈에 들어왔다.
일행들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놈들이 이번 세 번째 가고일이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