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운소령의 파티 (1)
3번째 광장 역시 상당히 넓었다.
여기저기 세워진 기둥들은 컸고, 그 기둥에 새겨진 가고일 또한 거대했다.
“이한, 너무 앞서가지 마.”
소진이 질색하며 뒤쫓았다. 이한이 너무 거리낌 없이 나간 탓이다.
3단계 광장에서는 1, 2단계인 석조 가고일보다 훨씬 위험한 강화 가고일이 나온다.
위험 등급 5급보다는 위고 6급보다는 아래.
이처럼 무력이 상승하니, 돌다리를 두들기듯 천천히 가는 게 당연한데.
“음. 이놈들이란 말이지?”
“이한!”
소진의 말은 듣지도 않고, 광장 중앙에 서서 좌우 기둥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고까지 높은 기둥의 높이는 대략 열 장 정도.
가고일 형상의 기둥은 무려 여섯 개였다.
“그렇게 혼자 가면……. 헉!”
천마가 있는 곳까지 다가가던 소진이 기겁했다.
우드드득!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 기둥에 박혀 있던 가고일 하나가 엄청난 속도로 뛰쳐나와, 날카로운 발톱으로 천마를 낚아챈 것이다.
쿵! 쿵! 쿵! 쿵!
시야에서 사라지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천마를 낚아챈 강화 가고일은 벽에 몇 번이고 내려찍은 뒤에 하늘로 치솟았다.
“이하아아아안!”
소진의 외침이 광장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위기는 이한에게만 닥친 게 아니었다.
우드득!
또 하나의 가고일이 기둥에서 벗어나, 소진을 향해 날아든 것이다.
“우왓!”
“소진! 엎드려!”
티이이잉---!
운소령의 경고와 함께 청아한 소리가 울렸다.
요란하게 붉은 빛을 뿌리며 날아간 루비, 홍옥의 유리가 가고일을 향하더니.
콰앙!
그대로 폭발했다.
-그아아아악!
뜻밖의 공격에 강화 가고일이 비명을 질렀다.
원래 마법에 내성이 있는 몬스터지만, 그것도 3서클이 한계.
운소령이 내던진 마정석은, 4서클에 가까운 파이어 볼이 인챈트(Enchant-적용)되어 있었다.
거기다 마침 가고일은 지수화풍 중의 지(地). 강한 불은 암석도 녹여 버리는 속성이 있다.
“월녀기혜(月女起兮)!”
운소령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타닥! 펑!
소진을 후려쳐서 밀어내고, 그 반동으로 달렸다.
불길에 휩싸인 강화 가고일의 몸에, 운소령의 월녀검이 두부를 찌른 듯 손쉽게 파고들었다.
쩌적!
그리고 이어진 사선 베기로 가고일의 몸체 중앙, 핵까지 갈라 버렸다.
놀라운 무위였지만, 데굴데굴 굴러간 소진은 비명을 질렀다.
“운소령! 뒤!”
-크아아아!
강화 가고일 네 마리가 일제히 그녀를 향해 달려든 것이다.
양옆과 뒤. 그리고 머리 위를 점한 일제 공격.
“윽!”
막 한 마리를 베고 난 직후라, 운소령은 회피하지 못했다. 해서 어떻게든 충격을 적게 받기 위한 방어 자세를 취했는데.
다행히 필리아가 도왔다.
“드라이어드 루트!”
지지지지직.
그녀가 주문을 외자, 바닥에서 녹색의 나무뿌리가 돋아나며 가고일의 발을 낚아챘다.
빙글.
“고마워! 필리아!”
“빨리 와! 오래 못 버텨!”
공중제비로 착지한 운소령은 흠칫했다. 필리아의 얼굴이 창백해진 게, 정말 무리를 하는 모습이었다.
타악!
운소령이 소진을 낚아채서 세 걸음, 네 걸음이나 달렸을까.
-크아아아아! 카아아악!
티티잉!
활의 현을 끊는 듯한 소리와 함께, 가고일을 묶었던 나무뿌리가 뜯겨 나갔다.
몸의 자유를 회복한 강화 가고일 네 마리가, 공중으로 떠올라 일행들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소령아, 이한이…….”
“걱정 마! 그 녀석, 쉽게 당하지 않아!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더 위험해!”
운소령은 필리아와 소진의 앞을 막으며 가고일의 움직임을 살폈다.
지능이 있다고 알려진 강화 가고일. 놈들은 무리 사냥을 한다.
푸드덕! 푸드덕!
마치 늑대처럼, 한 놈이 시선을 끌고 공격하는 사이, 다른 놈들이 반대쪽으로 달려드는 식이다.
더군다나 키 3미터, 체중 2톤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몸이다. 체중을 실어 달려들면 피하는 수밖에 없다.
공격을 막아도, 일격에 핵을 부숴도, 엄청난 무게의 돌이 쏟아질 테니까.
“필리아, 여차하면… 필리아?”
“아아아…….”
말을 걸던 운소령의 눈에 필리아가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지는 모습이 담겼다.
소진이 급히 다가오며 물었다.
“필리아! 왜 그래! 괜찮아?”
“으… 머리가…….”
“헉!”
소진이 휘청이던 필리아의 상태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정령사든 마법사든 강력한 주문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나마 마법사는 술식을 미리 계산해 뒀다가 쏘아 내면 끝이지만, 정령사는 정령과의 교감을 통해서 부리는 것이다.
이걸 급하다고 강제로 움직였을 경우, 무림인의 주화입마 같은 부작용을 겪곤 한다.
“으윽! 윽! 윽!”
필리아의 경우엔 상단전의 폭주로 이어진 모양이었다. 머리를 부여잡고 꼼짝도 하지 못하는 걸 보면.
“…소진, 넌 싸울 수 있어?”
“…….”
소진은 운소령의 목소리가 자신감이 차 있던 때와 달라진 걸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2단계 광장의 여유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위기 상황에 처했다.
엄청 강해진 이한과, 수행평가 최고 점수를 노리는 운소령.
거기에 드물다는 정령사까지 포함된 파티라 내심 도전하는 걸 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한은 급습에 처박혔고, 필리아는 마나의 역류로 꼼짝 못 하는 상황이다.
남은 것은 운소령과 자신뿐.
아무리 그녀라 해도 위험 등급 5등급과 6급의 사이에 속한 몬스터 네 마리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다. 당연히! 아까 봤잖아!”
솔직히 도망치고 싶었다.
이대로라면 자신도 위험했으니까. 하지만 도망치는 것 역시 그에겐 두려웠다.
기부금 입학에다가 파티 동료를 버리는 겁쟁이.
아마도 평생 고개도 들지 못하고 살게 될 테니까.
찰칵! 찰칵!
“어, 어느 쪽을 맡으면 돼? 왼쪽? 오른쪽?”
석궁에 백린탄이 장전된 걸 확인하던 소진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운소령은 그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소진, 전면 싸움은 내가 해. 넌 뒤에서 저격하는 역할이고.”
“아… 그랬지.”
“너무 걱정 마. 충분히 자신 있으니까.”
푸드덕! 푸드덕!
운소령은 머리 위에서 맴도는 가고일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소진에게 말을 걸었다.
“첫 공격은 내가 막을 게. 너는 다음 공격을 대비해. 아까 본 위력으로는 폭발 범위는 3m 정도 되는 것 같거든.”
“어! 맞어!”
백린탄의 확산은 그보다 더할 테지만, 일단 폭발의 충격에 대비해야 했다.
운소령은 정확히 그걸 파악했고.
“네 동체시력이 좋은 편은 아닐 테니까. 조준사격이 아니라 예측 사격을 해야 해.”
“2리드(Lead : 비행체의 길이) 앞에 쏘는 걸 말하는 거지?”
“…잘 알고 있네.”
운소령의 가벼운 웃음에 소진은 두려움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하지만 그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가아아악!
갑자기 하늘에서 가고일들이 괴성을 질러 댔으니까.
“온다! 준비해!”
“아, 알았… 어?!”
꾸욱.
백린탄이 장전된 석궁을 들던 소진이, 경악으로 눈을 크게 떴다.
이전처럼 가고일이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일제히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다.
뒤늦게 뇌리에 경종이 울렸다.
그러고 보니 들은 적 있었다. 강화 가고일 중에서 약하지만.
화염 공격을 해 오는 놈이 있다고.
“운소령! 화염구야!”
“……!”
끼긱, 하고 막 뛰쳐나가려던 운소령의 발이 멈췄다. 그와 함께.
투화악! 투확!
불덩어리가 날아들었다. 화염 공격이 전문인 몬스터가 아니기에 위력은 약했지만, 사람에게 뜨거운 불길은 그것만으로도 위협이 되기엔 충분했다.
“소진! 필리아를!”
“으아아앗!”
운소령이 뛰고, 소진은 필리아를 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한 손에는 장전된 석궁을 단단히 쥐고서.
쾅! 쾅! 화륵!
“으, 뜨거…….”
뒤통수에 화끈함이 몰려왔다.
고작 1서클의 수준이긴 해도, 어지간한 불덩이를 던진 수준이다.
미리 알지 못했으면 큰 피해를 입었을 터였다.
“필리아, 괜찮… 어?”
필리아의 상태를 확인하던 소진은 또 한 번 눈을 크게 떴다.
파파파팟.
운소령이 한쪽으로 재빨리 뛰더니, 그대로 벽을 밟고 허공에 뛰어오른 것이다.
가고일이 모여 있는 공중이었다.
“위험해!”
몬스터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리는 건 명약관화였다.
검을 든 운소령이 다가오자 가고일 모두가 다시 한번 쩌어억! 입을 벌리고 화염구를 토해 냈다.
거기서 운소령은.
팽그르르. 팍!
지면이 없는 공중에서 허공을 밟더니, 한 걸음을 더 뛰어올랐다.
‘제운종(梯雲縱)이다!’
소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발 디딜 곳 없는 허공에서 몸을 한 번 더 튕겨 올릴 수 있는 보법.
무당파의 경공절기라는 제운종이 틀림없었다.
푸드드득!
운소령이 위협적인 공간으로 들어오자 강화 가고일 하나가 날개를 펼쳤다.
말이 날개지, 실제로는 거대한 돌 문짝이 날아드는 거나 다름없는 공격이었다.
“흥!”
하지만 운소령은 피하지 않았다.
단단한 날개 뼈를 향해 내리 그었다. 저건 이제 잘린다, 그렇게 소진이 생각한 순간.
투욱!
“엇?!”
날개는 잘리지 않았고, 운소령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니, 5미터 가량 위에 있었던 다른 가고일의 머리통 앞에서 나타난 것이다.
“하앗!”
쐐액---! 파각!
반쯤 반파되는 소리와 함께 가고일의 머리 주위가 무너져 내렸다.
동시에 날개도 축 처졌다.
아무리 물리 내성이라도, 핵이 따로 있다고 해도. 머리가 날아가고도 멀쩡한 몬스터는 없는 법이었다.
타악!
그리고 떨어지는 가고일 위에서 또 한 번 사라지는 운소령.
피이이익-!
너무도 반듯한 직선이, 강화 가고일의 핵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소진은 기가 막혀 탄성을 내질렀다.
“가고일을… 공중에서 디딤대로 썼어.”
몸이 가벼워서 저런 게 가능한 것일까.
나비처럼 나풀거리고, 화살처럼 빨리 움직이는 검법을 보며 소진은 그저 감탄만 했다.
“소진! 위험해!”
물론 운소령이 경고를 보내기 전까지.
‘아차!’
-쿠에에에에
운소령이 강적이라고 판단한 것일까.
남은 두 놈이 방향을 바꿔 소진에게 달려들었다. 급하게 몸을 피하려던 소진은.
“하아. 하아…….”
“……!”
그의 뒤에서 아직 정신을 돌아오지 않은 필리아를 보고 멈췄다.
여기서 그가 피하면 필리아는 분명 죽을 것이다.
“이… 이……!”
찰칵!
소진은 급히 석궁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빳빳하게 굳은 몸이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소, 손가락이……!’
방아쇠만 당기면 되는데, 흡사 악몽에 가위 눌린 몸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급속도로 거대해지는 몸체의 몬스터, 그 위압감 때문이었다.
[쏘지 않으면 필리아는 죽는다.]
“어… 어…….”
짧은 순간. 그의 머리에 경종이 울렸다.
전음이다.
그것도 엄청난 수준의 전음입밀. 그렇지 않다면 목소리가 이리 빨리 전달되지 않을 터.
머리에 울리는 목소리는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비현실적 느낌을 주고 있었다.
[지금 네 손에 필리아의 목숨이 달렸다고.]
그 말에 사악, 하고
소진의 눈에 필리아가 들어왔다.
새하얗게 질린 데다 고통스러워하는 얼굴.
그녀는 움직이지 못하고, 앞에서는 강화 가고일이 날아들고 있었다.
저 목소리처럼, 자신이 이들을 밀어내지 못하면 3미터짜리 돌덩이의 돌격에 모두 죽을 것이다.
[어렵지 않아. 날 쏜 것처럼 하면 된다고.]
“소진! 쏴!”
허공에서 목소리가 날카롭게 그의 귀를 찔렀다.
그럼에도 소진은 무슨 생각인지 판단을 계속 유보했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을 뿐.
소진은 석궁을 그들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투웅.
그렇게 쏜 한 발.
한데, 거의 지척까지 날아온 가고일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뒤.
같이 날아온 다른 가고일을 향해 날린 것이다.
콰앙!
“필리아, 숙여!”
찰칵!
외침과 함께 소진은 석궁의 앞머리를 위로, 다시 아래로 내리며 중심을 잡았다.
연발 석궁.
가격이 커다란 저택 한 채와 맞먹는 이 무기는, 다행히 3발까지는 연사가 가능했다.
소진은 느릿해진 세상 속에서, ‘딸깍’ 하며 장전을 알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투웅!
그대로 격발했다.
콰아아앙!
그리고 그 노림수는 정확하게 적중했다.
뒤에 따라오던 가고일은 이미 저 멀리 튕겨 날아갔고, 지척에 있던 가고일은 머리에 정통으로 맞아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았다.
쿠우우우웅!
그리고 소진과 필리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바로 뒤쪽에 떨어졌다.
* * *
“오. 기가 막히게 쐈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을 거리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축 늘어져 있는 가고일 머리를 밟고 있던 천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