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운소령의 파티 (2)
3단계 광장에서 가고일을 천장에 박아 버리고 난 후, 천마는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어차피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녀석들이니, 여차하면 개입해서 막아 주면 그만이다.
그보다는 천마는 이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가 궁금했다.
“월녀검법이라니……. 참 오랜만에 보는데.”
덕분에 재미도 있었다.
특히 운소령이 펼친 신위를 흥미롭게 감상했다.
제자가 자질이 없으면 전수하지 않는다며, 끝까지 체면 차리다가 결국 사라져 버린 고대(古代)의 검법.
그게 백사십 년을 지나 운소령의 손에서 구현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거의 비슷해. 아직 보법은 재현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한 번 사장되었던 만큼, 운소령도 월녀검법의 원형을 완전히 복구하진 못했다.
그래서 부족한 경공술을 무당의 제운종으로 채웠다.
약간 어색함은 있지만, 그럭저럭 오의는 잡고 있어 보였다.
운소령이 재능이 있다면, 저기서 더 발전시켜서 원형을 찾아내겠지.
‘일월여제였던가…….’
사실 월녀검이 사장되었다가 부활한 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과거 자신이 중원에서 활동하던 시기에도 잊혔던 월녀검의 후예가 나타난 적이 있었다.
일월여제(一月女帝).
곤륜파의 속가제자로, 여인의 몸으로 검로를 탐구하다 월녀검을 대성한 여인.
그녀 역시 부족한 월녀검의 보법을, 빠르고 표홀한 곤륜의 보법으로 보충하고, 나중에는 완전히 원형을 찾아냈다.
만류귀종이라 하지 않던가,
검법이 가지는 오의를 진득하게 탐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원래 원형까지 찾아낼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재능과 노력이 따라야 한다.
“그렇다고 해도 돌을 저리 쉽게 썰어 버리다니. 저게 그 아이템이란 건가?”
천마는 운소령의 검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분명히 내기 발현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검을 휘두를 때마다, 희미하게 눈꽃이 피어올랐다.
냉기로 적을 순식간에 얼리고 쾌검으로 잘라 버린다.
마법이란 것이 부여된, 그것도 상당한 수준의 신병이기가 확실해 보였다.
“저리 무기에 의존하면 실력이 더 안 늘 텐데… 어?”
천마가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릴 때쯤, 긴박한 위기가 찾아왔다.
필리아 풀썩 쓰러져 있었고, 그 앞에 소진이 막아서고 있었다.
“내가 나서야 하나.”
아무래도 구경은 여기까진가.
천마가 입맛을 다시며 엉덩이를 떼려던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검을 들고 앞에 나선 운소령, 그리고 그 뒤에 석궁을 재며 따라나선 소진.
쓰러진 필리아를 보호하며 두 사람이 의지를 다진다.
“가만, 쉽게 무너질 것 같지는 않은데?”
천마는 이제 흥이 돋아 허벅지를 두드렸다.
자고로 구경 중에 제일 구경은 싸움 구경. 그중에도 하수들이 파닥대는 구경이 제일인 법.
때마침 허공에서 가고일 두 마리가 급선회하며 소진을 노렸다.
“이런!”
천마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운소령과 필리아는 몰라도, 소진의 경우는 투지가 약했다.
애초에 싸움에 대한 경험이 너무도 일천한 것이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날아드는 가고일의 거체에, 소진이 얼어붙었다.
분명히 강력한 백린탄을, 그것도 연발 석궁에 넣어 장전하고 있는데. 손가락만 까닥하면 되는데.
마음은 있는데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거다. 저런 상태를 천마는 수도 없이 보았었다.
‘저런 답답한 녀석.’
이런 경우.
공포에 이겨 낼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그에게 공포 이상의 책임감을 불어넣어 주면 되는 거다.
-쏘지 않으면 필리아는 죽는다.
구경만 하고 있으려던 관중은, 기어코 전음을 날려 대고 말았다.
* * *
“콜록콜록! 커허억!”
폭발의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일반적인 벽력탄이라면 돌가루나 먼지 좀 마시고 말 일이다. 하지만 소진이 쏜 탄환이 백린탄인 것이 문제였다.
운소령이 재빨리 와서 두 사람을 끌어냈지만, 창졸간에 놀란 소진은, 숨을 몰아쉬다 기어코 한 모금을 들이마셨다.
“캑캑! 콜록콜록!”
“잘했어, 소진.”
“…필리아는?”
“무사해! 네가 지킨 거야!”
숨 막혀 버둥대던 소진은, 배낭에서 급히 유리병을 꺼내 들이마셨다.
힐링 포션이 신속하게 화상을 치료해 주자, 그제야 그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다행이다. 너도… 필리아도. 나 정말 주, 죽는 줄 알았다고…….”
소진은 말하다 말고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렇게 조금 진정하던 소진이 다시 되물었다.
“이한은? 이한은 어딨어?”
“저기 오네.”
“어……?”
소진이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걸어오고 있는 청년이 보였다.
오른손에 깨진 가고일 핵을 들고서
“와… 이번엔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실실 웃으며 다가오는 발걸음이 누가 봐도 죽다 산 사람의 표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뭐 어찌 되었든 이젠 상관없었다.
“일단. 밖에 한 번 나가자. 필리아도 그렇고 지금은 정비를 할 시간이야.”
“그래야겠네.”
운소령의 말에 소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 정비가 필요한 시간이었다.
지금 상태로 4단계를 바로 들어가는 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었으니까.
* * *
따딱. 따딱.
카르삭의 왕릉 입구. 서문영 파티나 방윤 파티와 떨어진 곳에 모닥불이 지펴졌다.
나오기가 무섭게 소진은 활력을 되찾았다.
그는 마차에 이것저것 연결하더니, 긴 포목을 연결해 간단한 천막을 세웠다.
“여기 놓아야 해. 이건 이렇게, 그리고 이건, 이렇게…….”
모닥불 주변에는 접의자를 펴서 비치했고, 천막마다 침구를 비치했다.
일각이 조금 지났을 때, 일행은 모닥불 위에 따끈한 보양식을 끓이고 있었다.
“와, 이게 다 뭐예요?”
평소처럼 건강이 돌아온 필리아가 비치된 간이 의자를 가리켰다.
분명 무슨 널빤지 접어 놓은 것 같았는데, 그게 의자가 되고, 동그란 통은 양파처럼 까도 까도 계속 내용물이 나왔다.
특히 주변을 밝히는 랜턴을 보곤 기쁘게 반응했다.
“하하, 마차를 타고 온 이유가 이거라서.”
부잣집 도련님이 수줍게 머리를 긁었다.
다른 일행들보다 느리게 도착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마차 안에 야영에 쓸 만한 물품들을 대거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오오! 신묘하도다.”
특히나 천마의 반응이 제일 컸다.
소진이 낑낑대며 큼직한 상자를 가져와서 열자, 그 안에서 새하얀 냉기가 피어오른 것이다.
“이게 뭐야? 술? 세상에! 여름인데 술이 차갑다니!”
쇠로 격자를 만들고, 안쪽에는 목화솜 등이 들어찼다. 가장 안쪽은 나무로 만들어 온도를 유지하는 구조였다.
“이건 아이스박스라고 불러.”
“이것도 아이템이냐?”
“이 안에 것만. 옆에 잘 보면 마정석이 붙어 있어. 차갑게 보관하니까 음식이 오래 유지돼.”
“비싸냐?”
“조금 가격이 되지만, 그렇게 많이 비싼 건 아니야. 찾는 사람이 많으니까, 많이 만들어서 원가가 내려가거든. 물론 냉장고 같은 커다란 저장고는 비싸지만 말야.”
“크하하. 신묘하다. 정말 마법이란 거. 알아볼수록 재밌는 거구나.”
천마는 냉기를 뿜어내는 냉장고 안을 만졌다.
둥근 원에 육각의 별이 새겨져 있고, 그 안에 서역 문자가 이리저리 쓰인 것이, 수업 때 들었던 마법진이라는 물건 같았다.
손을 대 보니 스륵스륵 찬 기운이 스며 나온다.
원래 차가운 냉기를 뿜는 마정석을, 마법진으로 강화시킨 모양이었다.
“이 그릇들은 뭐냐? 꼭 양파 같군.”
천마는 이번에는 자기 앞의 얇은 쇠그릇을 가리켰다.
겹겹이 쌓인 연철 그릇은, 서로서로 안을 채우며 촘촘하게 들어맞아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생각도 못 했던 크기와 분량이었다.
처음에는 둥그런 솥을 하나 꺼내나 싶었더니, 그 솥이 작아지며 여덟, 아홉 개로 점점 불어났다.
덕분에 소진 일행은 한 사람당 그릇 두셋씩 나눠 받을 수 있었다.
“이건 코펠. 겹쳐서 넣고 이렇게 야영할 때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여러 개의 그릇이지.”
“세상 변해서 좋은 점도 있구만!”
천마는 다시 한번 감탄했다.
예전에 그가 활동했던 때와는 모든 게 달랐다. 그리고 재미있었다.
척. 척. 척.
까마득한 과거의 문물만 기억하는 천마는, 신기한 장난감을 처음 접한 어린애처럼 그릇을 겹쳤다 풀었다 하며 놀고 있었다.
‘저렇게 보면 확실히 우리보다 지능이 떨어지는 것 같은데…….’
그 모습에 필리아가 피식 웃으며 뜨겁게 데운 물을 잔에 따랐다.
쪼르르륵.
찻잔 위에 올려진 깔때기. 거름종이를 통해 진한 갈색의 찻물이 아래로 떨어졌다.
무럭무럭 김이 피어오르며 퍼지는 진한 향기.
비단길 너머 돌궐(투르크)에서 건너온 가배(커피)였다.
필리아는 후후 불며 가배 한 모금을 마시고 탄성을 내뱉었다.
“후아아……. 좋다.”
대격변 이후, 주로 상류층에 머물렀던 가배의 유행은 근래 들어 각계각층의 여인들에게 크게 호평받았다.
볶은 곡물의 구수한 냄새와, 청아한 꽃의 향기를 동시에 품은 가배.
특히 정신을 맑게 해 주는 효과도 있어, 마법사나 정령사에게는 기호품이 아니라 필수품에 가까웠다.
필리아 역시 가배 중독에 가까운 애호가였지만, 값이 비싸 자주 마시지 못하는 음료였다.
지금은 부잣집 도련님인 소진과 함께한 덕에 누리는 사치인 것이다.
“가배 때문에라도 같이하길 잘했지. 안 그래? 소령아.”
“…….”
“운소령?”
“어… 필리아.”
언제부터인가, 멍한 시선으로 모닥불을 보고 있던 운소령이 조금 늦게 대답했다.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아니, 그냥. 아, 고마워.”
운소령은 필리아가 건넨 가배를 받았다.
달콤하며 고소한 향기. 그리고 새콤하고 알싸한 가배의 맛에 후우, 하고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정말 좋네.”
“으하하! 신선하도다! 차가운 술이라니!”
그런 그녀의 눈은, 차가운 맥주에 즐거워하는 이한을 향해 있었다.
조용히. 그리고 차분하게.
‘아무래도 다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
3단계 광장에서, 이한은 갑자기 사라졌었다.
본인 말로는 가고일에게 붙잡혀 겨우 벗어났다곤 하지만, 운소령이 보기엔 말이 되지 않았다.
첫 일격에 몇 번이나 벽에 부딪쳤다.
웬만한 학관생이라면 거기서 바로 기절했어야 했다.
그런 충격에도 타격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 된다.
‘석조 가고일 6마리를 일격에 박살 냈던 건 또 어떻고.’
운소령 자신도 강화 가고일 한 마리는 쉽게 상대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보다 등급이 낮다는 석조 가고일 6마리를 한 방에 처치하기는 쉽지 않았다.
‘내가 감지 못하는 아이템일까?’
눈으로 보고도 그녀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톤 단위 무게의 가고일을 집어 던지는 괴력, 그리고 반장인 방윤을 일격에 날려 보낸 이한이.
1학년 때 비실비실했던 그 이한과는 도저히 같은 인물로 볼 수가 없었다.
여기서 가능한 합리적인 추론이라면 두 가지다.
하나는 이한이 겨울 방학 동안 급격히 강해졌다고 하는 것. 소문대로 가문의 전력을 부어서 미증유의 대법을 전수받았다는 것이다.
‘대법이라는 게 그렇게 쉬울까?’
약한 이를 단시간에 강하게 만드는 대법. 그런 게 있다면 진작에 소문이 났을 터였다.
강해지고자 하는 무가의 후계 몇 명을 키워 주는 것으로, 이한의 가문은 천만금을 벌 수 있을 터.
애초에 천무학관에 들어올 필요도 없다. 그 가문 자체가 새로 학관을 세워 버리면 될 테니까.
그렇다면 다른 추측은, 이한이 원래 강했고 그 힘을 1학년 내내 숨겨 왔다는 것인데.
‘그건 더더욱 말이 안 돼.’
운소령은 고개를 저었다.
이한은 기부금 입학이라는 이유로, 1학년 때 백무룡 등의 같은 반 학우에게 심하게 괴롭힘을 당했다.
자기 일이 아니기에 그저 보고 있던 운소령조차 그러지 말라고 점잖게 타일렀을 만큼.
대개의 경우, 강한 이는 강한 만큼 자존심도 세다.
운소령 자신이 이한 같은 힘을 지녔다면 1학년 때 받은 괴롭힘을 차마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가문이 욕을 먹고, 본인이 나약하다고 놀림 받는데, 실력이 받침이 되는 이가 참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아직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어. 그게 무엇인지는 계속 지켜봐야 할테고.’
운소령은 조용히 눈을 빛냈다.
처음에는 할머님의 지시로 시작한 관찰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 본인이 흥미가 생겼다.
외가의 방계에 들어 있지만 운소령 역시 제갈세가의 후손.
지식과 강함에 대한 갈구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