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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48화 (49/310)

48화. 운소령의 파티 (3)

식사와 휴식을 마치고, 네 사람은 모닥불 앞에 모여 있었다.

다음 전투를 위한 전략을 짜기 위해서였다.

“소진, 오늘 좀 놀랐어. 의외로 명사수의 소질이 있던데?”

그전에 운소령은 소진의 칭찬부터 시작했다.

사실, 그녀는 소진이 그 정도로 잘 대응하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아. 하하. 정말? 그냥 무기가 좋아서…….”

“무기 역시 그 사람의 역량이야. 그때 펼친 무위는 정말 대단했어.”

운소령은 고개 저었다.

좋은 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역량이 폄하되어야 한다면, 그건 그녀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터였다.

“필리아가 정령술사인 건 더 놀라웠고.”

운소령이 필리아를 쳐다보자 그녀는 수줍게 고개를 내렸다.

“숨기려고 한 건 아닌데…….”

“알아. 정령사는 관심을 끌 수밖에 없으니까.”

정령사 대부분은 신경이 예민하다.

학우생 하나가 정령사라는 게 알려지면, 학관생들은 너도 나도 필리아에게 큰 관심을 가졌을 테고, 그건 예민한 신경의 소유자에게 대단히 괴로운 일이 된다.

“다만, 위력은 충분한데, 어딘지 모르게 서툴러 보였어. 혹시 오늘처럼 전력을 다해서 써 본 건 처음이야?”

“응…….”

상당히 수준급의 실력.

하지만 실력에 걸맞지 않게 위험한 상황이 나올 뻔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연습을 많이 해 놔야 해. 좋든 싫든, 실력이 있는 이상 언젠가는 써야 할 곳이 있을 테니까.”

“그럴게.”

그렇게 첨언하자, 필리아의 얼굴이 조금 더 굳어졌다.

“이한은 뭐 대단…….”

운소령은 말을 하려다가 머뭇거렸다.

실력이 뛰어났다는 얘기를 자신이 한다는 게 조금 어색했다.

“다들, 네 번째 광장에서 나오는 게 뭐지?”

그래서 운소령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말투와 달리 소진을 바라보며 묻는 것이, 혹시 모를 수 있는 필리아와 이한을 위해 설명을 해 주라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 어? 음. 엘리트 가고일. 강화 가고일보다 작은 2.5미터의 체고, 체중은 3톤이야.”

소진은 기억력 좋은 삼음절맥답게 곧장 대답을 이어 갔다.

“앞서 나왔던 석재 가고일, 강화 가고일과 달리, 이 녀석은 전신이 철재야. 표면이고 내부고 모두 금속. 거기다 얇고 강한 날개를 가지고 있어서, 공중전에서 더 빠르대. 거기다 더 무겁지.”

꿀꺽!

말을 하다 말고 소진은 저도 모르게 침이 삼켜졌다.

엘리트 가고일.

처음에는 거기까지 갈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어찌하다 보니 목표가 그놈이 되어 버렸다.

책으로만 보아 온 위험을 진짜 겪는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운소령이 말했다.

“아마 4단계 광장이 수행평가를 가르는 기준이 될 거야.”

서문영, 그리고 당무련의 파티 실력이라면 3단계는 충분히 통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4단계 광장의 싸움이다.

엘리트 가고일 몇 마리를 잡느냐에 따라 승부가 나눠질 터.

운소령의 파티가 유리한 점이라고 하면, 파티 인원이 네 명에 불과하다는 것.

동수의 가고일을 잡아낸다 해도, 추가점이 훨씬 높을 터였다.

“소진, 지도 가지고 있지?”

“응.”

촤악.

소진이 준비해 온 왕릉, 4번째 광장의 지도를 펼치고 설명을 이었다.

“앞서 1, 2, 3단계와 달리, 엘리트 가고일은 단 네 마리만 나온다고 했어. 여기서 중요한 건 절대로 모두를 불러선 안 된다는 거야. 어떻게든 하나씩 불러들여서 싸워야 승산이 있어.”

“이번에도 위장하고 있거나, 한데 모여 있을 텐데……. 좋은 생각 있어?”

“우리에겐 필리아가 있잖아.”

시선이 필리아로 모였다.

앞서의 경우처럼, 땅의 정령으로 가고일을 미리 분별하는 게 가능하겠냐는 것이다.

그런데.

“어려울 것 같아.”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왔다.

그리고 그 이유를 곧 들을 수 있었다.

“금속은 돌에서 나왔지만, 이미 성질이 돌과 달라진 존재거든. 땅의 정령으로 두드려 볼 수는 있겠지만, 자극받은 가고일에게 바로 처치당할 수 있어.”

그리고 정령이 받은 타격은, 바로 정령사에게 이어진다.

강화 가고일 때, 필리아가 힘을 쓰지 못한 것은 속박술을 너무 급하게 쓴 것도 있지만, 가고일들이 힘으로 속박을 끊어 낸 탓에 반동으로 역류가 왔었다고.

“그건 곤란하네. 몸 상태는 어느 정도야?”

“뭐. 일단 하루 정도 자면 회복될 거야.”

“아니, 사흘은 족히 걸릴 거다.”

“……?”

대화 중 침묵만 하던 이한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시선이 한데 모이자 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정령술이라는 거. 상단전을 사용해 싸우는 걸 테지. 그렇다면 심(心), 기(氣), 체(体) 중에서 심이 되겠지. 여기 말야.”

톡톡.

자신의 미간, 눈썹과 눈썹 사이를 두드려 보이는 천마. 필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 기, 체 중에서 으뜸은 말할 필요도 없이 심이다. 소모한 체력은 보통 한두 시진 만에 회복이 되지. 기력은 날 잡고 하루는 정양해야 하고. 하지만 심력은 앞서 두 개와 달라. 회복하는 데 짧게 잡아 사흘이야. 그보다 더 길 수도 있고.”

“…정말이야?”

“필리아?”

운소령과 소진이 조금 놀란 채 물었다.

이한의 얘기도 그렇고, 자신들도 정령술사는 처음 보는지라 정확한 상태가 궁금했다.

필리아는 쭈뼛쭈뼛하다 말했다.

“그 정도 있으면 더 편할 거예요.”

“편한 게 아니라 필수다. 무인이 단전이 손상을 입으면 폐인이 되지. 그처럼 상단전에 손상이 가면 정신이 부서져. 미친다는 말이야.”

“헉…….”

소진이 본인 일도 아닌데 숨 막힌 비명을 흘렸다.

“필리아, 정말이야?”

운소령이 놀란 눈으로 돌아보자, 필리아는 잔뜩 찌푸린 채 투덜거렸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 정해진 건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인데…….”

“아니, 그럼 무조건 쉬어야지.”

운소령이 냉정하게 손을 내저었다.

필리아는 부정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분명 그런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2학년 수업 중 가장 비중 있는 과목의 수행평가이긴 하나, 졸업시험도 아니고, 평생에 한 번 있을 기회도 아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이한,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소진은 이번엔 천마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심, 기, 체라는 것도 배우긴 했지만, 여기에 접목할 수 있다는 건 전혀 예상치 못했다.

특히 나름 책을 많이 봤다는 그도 정신적인 타격과 회복이 며칠 걸린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보지 않았는가.

‘이 정도는 다 아는 거 아닌가?’

천마는 내심 놀란 이들의 얼굴들을 보니 괜히 말해 준 건가 싶었다.

자신은 이들에게 어디까지나 이한이어야 하니까.

결국 그는 대충 둘러댔다.

“책에서 봤어.”

“…….”

“…….”

그의 예상을 빗나간 것인가.

다들 반응이 미지근했다.

특히 운소령과 소진은 믿기 힘든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사실 책이라면 누구에게도지지 않을 만큼 많이 본 사람이 이 둘 아니던가.

“그건 그렇고.”

천마는 애써 무시하고 필리아를 보며 화제를 돌렸다.

“네 정령술, 나한테 가르쳐라.”

“…뭐라고?”

“유용한 기술 같던데 말이야. 편하기도 하고. 나도 좀 배워서 편하게 지내보자.”

“…….”

“…….”

“…….”

이번엔 필리아도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 * *

정령술.

아주 오래전, 그라나다 대륙의 사람들은 만물에 신이 깃들여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자연을 숭배했고, 또한 신성시하며 받들었다.

그런 것을 애니미즘(Animism)이라 불렸다.

각각 사물의 현상에는 정령,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힘이나 존재’가 있다고 믿은 종교인 것이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들은 어떤 계기로 인해 자연을 부릴 수 있는 영적인 단서를 찾았다.

고대의 언어라는 마법과 비견되는, 혹은 그걸 넘을 수 있는 권능의 힘을 눈앞에서 목도한 것이다.

다만, 그들은 이것을 부릴 수 있는 자들이 오로지 선택받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태어날 때부터 자연에 친화적인 조건을 갖춘 이들이었고, 한 세대를 통틀어도 자격을 갖춘 이들이 몇 명에 불과할 정도였지만.

어쨌든 그들은 자연과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에 만족해했다.

스스슥.

필리아는 바닥에 큰 원을 그렸고, 그 안에 육망성을 새겨 넣었다.

각 뿔마다 범어 같은 문자를 그렸고, 원의 중심에는 눈썹을 그려 넣었다.

“그런데 이한, 넌 정령과 접촉 시도를 해 보지 않았던 거야?”

소진은 이한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운소령도 마찬가지였다.

정령술사에 대한 얘기가 떠돌기 시작한 건 백 년 전이었다.

그 이후부터 모든 무림인이 했던 것이 자신이 정령을 부릴 수 있는가에 대한 확인이었다.

특히나 최근에 들어선, 학관의 주도하에 정령 친화력을 가진 사람이 없는지 검사를 한다.

당연히 이한도 그런 검사를 해 봤으리라 생각했다.

“뭐, 기억이 안 나네.”

천마는 대충 얼버무렸다.

사실, 본래의 몸 주인이던 이한이 정령 친화력 검사를 받았느냐는 건 그다지 쓸모는 없었다.

영혼이 바뀌면서, 당연히 정령의 감응력 역시 달라졌을 터.

“이제 정령 소환 준비는 끝났어요.”

토옥.

필리아가 육망성 끝에 돌들을 올려 두고, 가장 가운데에는 품속에 있던 녹옥을 내려놓았다.

육망성이 완성된 걸 본 천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령 소환이란 게, 이리 간단한 거야?”

“소환은 기본적으로 인사 같은 거니까요. 의지만 확실하면 딱히 제물이 없어도 부를 수 있습니다. 물론 정령이 당신에게 흥미가 없다면, 어떤 귀한 걸 제물로 올려도 응하지 않을 거고요.”

제물이라니.

바닥에 그어진 모양이 마치 혈교의 대법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차이점도 존재했다.

“명치로 숨을 쉬면서 미간에 집중해야 해요. 이 모양을 기억하시고요.”

그녀는 바닥에 막대기로 뉘어진 8자 모양을 그려 보였다.

“호흡은 아랫배에서 명치, 명치에서 미간으로 기를 움직여야 해요. 그리고 나면 어깨를 통해 내려가서…….”

‘대주천이군.’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을 중점적으로 활용하는 소주천과 달리, 대주천은 사지백해, 기경팔맥을 모두 운용한다.

다만, 그녀의 설명을 듣다보니 기존의 대주천과는 조금 달랐는데, 전신 360개의 혈자리를 순차적으로 열어, 마지막에 뇌호혈과 함께 일시에 개방하는, 다소 변형된 형식이었다.

이런 대주천은 내공을 쌓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아마도 정령과 교감하기 위해, 감각만을 극대화시키는 호흡법이리라.

“음. 뭐 해 보지.”

천마는 바닥에 육망성으로 그려진 중심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말한 대로 대주천을 운용했다.

“하례하나이다. 어두우신 어머니여… 하례하나이다. 모든 만물의 아래에서 받치시는 가이아여…….”

필리아는 두 손을 모은 채 기도를 올리듯 주문을 외웠다. 일반적인 정령사는 본래는 이런 방식으로 소환 의식을 하지 않는다.

정령사는 순수하게 친화력으로 결정되는 존재이니, 시중에서 파는 일정 등급 이상의 마정석만 있으면 누구나 확인이 가능했다.

그런데도 필리아가 이렇게 정식으로 의식을 치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한이 가진 친화력이 어디에서 어디까지 뻗쳐 있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4대 원소의 하급 정령에서 상급 정령까지. 그리고 혹여 친화력이 있다면, 4대 원소 이외의 모든 정령을 한 번에 불러 보기 위해서였다.

“그대들을 네 방위로 하여, 세상 만물을 부를지니.”

그렇게 조금씩 읊던 필리아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지더니, 마지막엔 쩌렁쩌렁 울렸다.

“모습을 드러내라!”

치이잇!

말과 함께 주위의 온도가 낮아진 듯 서늘함이 퍼져 나갔다.

“…어?”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운소령이었다.

화르륵.

피워 둔 모닥불 속에서, 천천히 기어 나오는 자그마한 불 도마뱀을 본 것이다.

“살러맨더다!”

조금 늦게 본 소진이 곧장 소리쳤다.

집중하고 있던 천마의 시선이 거기로 이동했다.

그리고 보았다.

정말로 정령처럼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가 있었다.

다만.

“뭐야, 저게?”

“하급 정령 살라맨더. 불 속성 정령이라고!”

소진이 제가 당첨된 듯 펄쩍펄쩍 뛰며 설명했지만, 천마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고작 저딴 놈이?’

일단 자신이 불렀다 하면, 소문으로 들었던 정령왕이라든가, 하여튼 태산같이 거대한 놈이 나타나 고개를 조아릴 걸로 생각했다.

그런데 고작 손바닥만 한 도마뱀이라니?

“불의 정령… 납득이 가네요. 상성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 축하해요.”

이 와중에 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환되는 정령은 대개 그 사람의 성미와도 상관이 있다.

예를 들어 물의 정령이라면, 대개 차분하고 이성적인 사람에게. 바람의 정령이라면, 어디에 속박되는 걸 싫어하는 자유로운 성미의 사람에게 나타난다.

그렇게 볼 때, 이한의 경우에는 아마 성질 급한 불이 나타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 짐작이 들어맞았다.

“촉매 없이 바로 불러냈으니까 마나 소모가 클 거예요. 폭주하지 않게 조심조심 접촉을 유지하고 의사를 나누어 보세요.”

“음…….”

필리아의 말에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얼추 3갑자 가량의 내공이 확, 하고 사라져 단전이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이까짓 놈이 그 정도였나?’

주변에 불을 두르고 있긴 했지만, 끽해야 손바닥만 한 크기. 심지어 하급 정령이라니.

자존심 상하는 걸 참고 살라맨더와 눈이 마주쳤을 때.

“캭!”

갑자기 살라맨더가 불 속으로 숨어들었고, 펑! 하는 폭발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어……?”

필리아는 황당해 했다.

“어떻게 된 거야?”

“모. 모르겠어요. 저, 저도 이건 처음 보는 광경이라.”

천마의 물음에 말까지 더듬을 정도였다.

정령사가 불러냈는데, 정령 스스로가 거부를 하며 도망가는 경우는 없다. 그럴 거면 애초에 소환 자체가 되지 않는다.

갓 불러낸 정령은 대개의 경우, 과하게 친밀감을 표현하며 마구 달라붙는다. 그 때문에 어설픈 소환자가 상처를 입기도 한다.

불 도마뱀인 살라맨더가 폭주하지 않게, 조심해서 접촉하라고 한 게 그 때문이었는데.

“겁먹은… 것 같은데.”

“뭐?”

그나마, 중급 정령을 다루는 정령사로서, 필리아는 사라진 살라맨더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저 아이는 무서워하는 것 같아요. 당신을요.”

불 도마뱀은 소환에 응했다가, 이한을 보자마자 식겁해서 달아난 것이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도 이 경우는 정말로 낯선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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