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49화 (50/310)

49화. 페이탈리스트 (1)

천마는 침소에 들어오자마자 자리에 누웠다.

간단한 야영을 하는데도 왠지 모르게 숙소에서 묵는 것보다 편안함을 느꼈다.

왜 이럴까 하고 생각하다가 옛 기억을 떠올린 그는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 보니 애들과 같이 나온 것도 참 오랜만이군.”

그러니까, 막 탈마에 등극했을 때였나.

수하들을 데리고 중원을 돌아 본 적이 있었다.

중원 정복 같은 유치한 목적 때문이 아니라 그저 유희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그날, 많은 수하들이 웃는 모습을 보았었다.

-내가 사실 교주 자리까지 갈 수 있는 재목이었는데 한 끗 차였다 이 말이지.

교단에서 딱딱하고 근엄하게만 굴던 부교주는 술에 떡이 되어 뻗었고.

-아니, 진짜! 제발 좀 혼자 움직이지 마십시오. 우리가 뭐 병풍입니까? 병풍이냐고요!

직속 호위대란 놈들은 뭐가 쌓였는지 감히 자신에게 삿대질을 했으며.

-넌 오늘 뒈졌다. 예전부터 네놈 하는 짓거리를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

-닥쳐 구라쟁이. 고작 초절정인 놈이 극마에 올랐다고 구라친지 얼마나 됐다고.

삼개전단의 수뇌들은 사슴 다리 하나를 놓고 쌈박질을 벌이는 등,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나를 위시하는 호위 무사들이 이거 말려야 되지 않느냐고 간곡히 부탁도 했었지.

물론 그때 난.

-부고 소식만 전해.

‘서예 공부’에 빠져 다른 이는 쳐다보지도 않았었지.

그 이후, 더는 중원에 나오지 않았다.

본교로 돌아간, 거의 백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오로지 수련, 수련, 수련이었지.

문득 옛날의 추억이 떠오르자 왠지 모르게 그리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지금에서 돌이켜 보니, 그토록 많은 시간을 수련에만 몰두했나 싶었다.

조금 더 여유 있게 삶을 즐겼어도 되었을 텐데.

어차피 육신을 버리고 선계에 드는 걸 원하지도 않았으니까.

“한데… 어떻게 하급 정령 따위가 나왔을까?”

천마는 그 점이 의아했다.

치졸한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아도 자신이 소환하면 상급 정령은 튀어나오는 게 맞았다.

필리아는 정령사의 자질이란 타고나야 한다고 했고, 그건 천마도 동의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는, 무의 자질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하나, 그렇게 따지면 천마 자신이야 말로 그 자질을 얻은 인간이었다.

‘탈마를 넘는 순간, 언제든 호풍환우(呼風喚雨-비바람을 불러일으킴) 할 수 있다는 걸 느꼈었는데.’

무인들이 현경이라 부르고, 마인들이 탈마라 부르는 경지는, 인간이 자연과 동조하여 자연체가 되는 시기다.

한 가닥 바람을 태풍으로 바꿔 버리고, 작은 등불을 거대한 화마로 바꿀 수 있는, 그야말로 작은 우주.

물론 그때와 달리 지금은 극마 수준이긴 하나, 그게 문제 되지는 않는다.

말 타는 법과 같이, 한번 깨닫고 나면 잊어버리지 않으니까.

탈마에 오를 때 느꼈던 자연과의 교감은 아직도 자신은 뇌리에 남아 있었다.

“고작 하급 정령 따위가 3갑자의 내력을 단숨에 집어삼키다니…….”

천마는 당시 아이들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몸속 내공의 변화를 느꼈다.

빠져나간 내력은 급히 역혈신공으로 다시금 채워 넣었다지만 뭔가 좀 자존심 상했다.

하지만 천마는 그 일을 잊기로 했다.

어차피 정령 따위 없어도 그만이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믿는 것은 천마 자신의 두 주먹이었으니까.

* * *

그렇게 누운 지 얼마 있지 않아.

뭔가 알 수 없는 이질감에 천마가 다시 눈을 떴다.

‘……?’

눈앞에는 수많은 별이 보였다.

검은 하늘과 회색 대지.

풀씨 하나 보이지 않는 돌투성이 가득한 땅에 자신이 서 있었다.

“이게 뭐야?”

천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가에 씐 건가.

바람 한 점 없는 황량한 고원. 여기저기 팬 지면 저편에 열기를 뿜어내는 분화구가 보인다.

어떻게 보아도 정상적인 땅은 아니었다.

“이 무슨 조화지?”

분명 침소에서 눈을 감은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사술에 걸린 것인지 자신은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곳에 이동해 있었다.

그리고 등 뒤.

이질적인 뭔가가 느껴졌다.

[보고도 믿을 수 없군. 당연히 마왕 일게로라 생각해 부름에 응했거늘……. 어찌 마왕이 아닌 이가 나를 부른 것이냐.]

“……!”

급히 뒤돌아선 천마의 눈에 들어온 그것은 하나의 영체(靈體)로 보였다.

희미한 기운을 품은 검은 구체.

형체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그럼에도 뚜렷한 의지를 전달해 오는 미상의 존재다.

“너는 누구냐?”

[나는 페이탈리스트(Fatalist). 세상의 모든 그림자와 혼돈의 근원이다.]

“뭔 소리를……. 가만.”

천마는 뭔가 짐작 가는 바가 떠올랐다.

침소에 눕기 전, 필리아의 정령 감정을 받지 않았는가.

그때 자그마치 3갑자나 되는 내력이 훅하고 빠져나갔다.

그렇다면.

“크-- 하하하핫!”

그제야 모든 게 이해가 갔다.

자신이 불러낸 건 크기도 능력도 하찮기 짝이 없는 불 도마뱀이 아니라.

“너구나. 네가 그 정령이었어!”

뭐 하는 놈인지 모르지만, 천마 본인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이곳으로 이동시키는 재주까지 있는 정령.

이 녀석이 바로 자신의 내력을 잡아먹고 소환된 정령인 것이다.

[정령? 그래……. 어찌 보면 그렇게 날 부를 수도 있겠군.]

그때였다.

검은 하늘에 흐르는 검은 기류에 의해 주변의 찬란하던 별들이 한순간에 가려졌다.

그리고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검은 구체의 목소리가 뇌리에 전해졌다.

[너는 누구인가? 어떻게 나를 부른 것인가?]

“아, 나는 네 주인이다. 본신의 능력이 출중하여 너를 부를 수 있었지. 영광으로 생각하거라.”

[내 주인이라고? 네가?]

“어.”

싱글싱글 웃던 천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상대가 뜨뜻미지근하게 반응해 온 것이다.

‘이 녀석, 좀 성깔이 있네?’

필리아에게 듣기로, 정령은 자신을 소환한 존재에게 과할 정도의 친근함을 표시한다고 했다.

그래서 숙련되지 않은 자는 능력을 과신하다 오히려 다칠 수도 있다고.

[허. 허허허…….]

그런데 왠지 이놈은, 친근감은 고사하고 뭔가 반항기가 느껴진다.

웃음에서도 뭔가 깔본다는 것이 느껴진다.

평생을 유아독존 했던, 자신의 성미와 비슷하게 닮아 있었다.

[참으로… 참으로 날 웃기는구나.]

그 말을 끝으로 검은 장막이 짧게 물결쳤다.

휘이이익.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푸른 달을 중심으로 회전했다. 별들이 삼켜지며 둥근 호를 그렸다.

검은 하늘로 뒤덮인 가운데, 짙은 푸른색으로 흘러내린다.

“이… 뭔!”

그 푸른색은 돌덩이었다.

창공에서 만 근이 넘는 돌덩이들이 떨어져 내리는 게 보였다.

거기다 거의 대지를 덮어 버릴 정도로 광범위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크크크. 필멸자 따위가… 나를 부리겠다고?!]

굳어진 천마에게, 검은 그림자가 말을 걸었다.

비웃음을 넘어 차가운 냉기가 흐르는 어조로.

“읍!”

두두두두두둑!

시야를 가득 메운 바위를 바라보며 천마는 곧장 천마군림보를 펼쳤다.

개수를 세는 게 무의미할 정도의 바위 소나기.

파파파팟.

천마는 엄청난 속도로 돌덩이를 피해 갔다.

경공술의 극의라는 이형환위(移形換位)가, 찰나간에 무려 십여 번이나 펼쳐졌다.

그럼에도 위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두두둑! 두두둑! 두두두둑!

피하고 또 피해도, 끝없이 떨어지는 바위의 포화는, 천마가 피할 방위를 차곡차곡 조여 오고 있었다.

더군다나.

슈슈슉!

“…뭐야?”

부서지는 바위 틈으로 기공(氣功)까지 날아들었다.

그 숫자는 바위 소나기에 못지않았다. 점입가경이었다.

하늘에서는 끝없는 돌의 비.

땅에서는 파도처럼 몰려드는 검기 다발.

“익!”

천마는 이를 악물었다. 이쯤 되면 제아무리 자신이라도 피할 도리가 없었으니까.

콰가가각! 쿠쿠쿠쿵!

천마의 신형이 수많은 바위들 사이로 사라졌다. 뒤이어 어마어마한 충격이 대지를 강타했다.

쿠쿠쿵! 쿠쿠쿠쿵! 콰드드득! 콰드드득!

그 위로 미친 듯한 돌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세상을 찢어발기는 호우처럼, 무수한 유성의 비가 쏟아져 내려 삽시간에 작은 산을 이루었다.

툭. 툭. 도르륵.

압도적인 질량. 끔찍한 충격을 퍼부어 놓고, 검은 구체가 말했다.

[호오. 피했어?]

감탄하는 투로.

쩌어억!

이변이 일어난 건 그때였다. 산처럼 쌓인 바위들 위로 격자 무늬의 섬광이 죽죽 그어지고.

콰아아앙!

강력한 힘에 바위산이 박살 나며 사방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그 속에서.

천마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에는 돌먼지가 묻고, 이마 한쪽은 찢어져 피까지 흐르는.

이제껏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낭패를 겪은 모습이었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조금 전에 그는, 바위끼리 부딪치며 생긴 작은 틈으로 몸을 날렸다.

그래서 겨우 살았다.

단 일 합으로 천마는 직감했다.

지금 이놈은, 이한이 되고 나서 겪은 그 어떤 존재들보다 위험하다고.

“우선 혼 좀 나야겠군.”

고오오오-.

그렇기에 천마는 즉각 극에 다다른 힘을 불러들였다.

오른손에 전력을 퍼부어 열화공의 구체를 생성했다.

‘상대는 영체 같은 존재다.’

물리적인 공격은 애초에 통하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압도적인 열기로 태워 버리는 것이 방법.

천마가 온몸의 감각을 집중하여 상대를 살피고, 일격을 쏘아내려 하는 순간.

[크큭. 그런 수가 먹힐 것으로 보이나?]

“하, 먹힐지 안 먹힐지는 해 봐야…….”

[나는 이미 소개를 했는데. 아직 모르나 보군. 그럼.]

스스스슥.

갑자기. 검은 구체가 다시금 응집되었다.

“……?”

스르륵.

그리고 천천히, 지면에 내려와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굳이 유리한 위치를 포기하고, 인영, 사람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바꾼 것이다.

그걸 보던 천마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이… 뭔?!”

[큭큭큭. 익숙한 얼굴이지. 아닌가?]

그도 그럴게, 정령이 갖춘 모습은 천마.

다름 아닌 그 자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따라 만든 것이었으니까.

“어디서… 개같은 수작을 부려!”

천마는 극도의 불쾌감을 드러냈다.

강호의 어느 고수라도, 자신과 똑같은 얼굴의, 자신과 똑같은 기파를 뿜어내는 존재를 마주하면 그리될 수밖에 없을 터.

-그르륵. 그르륵.

아니, 그보다 더했다.

눈앞의 검은 천마는, 생긴 거죽만 자신을 닮았을 뿐, 지독하게 불쾌한 모습이었다.

온몸에는 검붉은 마기가 드글거리고. 눈은 풀리고, 입가에서는 침까지 흘려대는.

이지를 완전히 상실한, 천마가 가장 경멸하는, 주화입마의 극에 달한 대살성이나 할 모습을 하고 있었다.

[누구나 자신의 어둠이 있지. 보아라. 네가 가장 두려워하고 수치스러워하는, 영락(榮落)한 너의 모습을.]

“이 자식이 계속…….”

그건 천마에겐 강력한 도발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러려니 해도, 절대 고수들에겐 이런 심마는 역린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천마는 이미 절대 경지를 몇 번이고 뛰어넘은 자.

거기서 오히려 냉정해졌다.

‘이놈, 아무래도 보통 놈이 아니다.’

필리아에게 들은 정령이란, 세상을 구성하는 4대 원소. 지수화풍이다.

하지만 이놈은 어떻게 보아도 자연의 영역과 맞닿아 있지 않다.

바람, 불, 물, 땅, 모두 아니다.

특히, 자신을 이런 ‘가짜’ 세계로 불러들인 데서 확신할 수 있었다.

울컥울컥!

천마는 자꾸만 맞은편 상대를 보며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을 억눌렀다.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괴로웠다.

“크으으…….”

상대를 파악하는게 어렵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쉬웠다.

그저 눈을 두는 것만으로도, 저 다른 천마가 어떤 감정,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 팍팍 머리에 꽂혀 왔으니까.

‘분노와 희열. 슬픔과 욕망’

울컥울컥! 부르르!

상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시에 감정이 가득 차,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는 상태였다.

마치 검은색처럼.

청황홍(靑黃紅)의 세 가지 색을 마구 섞어서 휘저으면, 아무리 비싸고 고급진 염료라 해도 검고 탁한 색이 되어 버린다.

눈앞의 검은 천마는, 그냥 아까의 영체가 검은색이라서 검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었다.

칠정(七情)과 오욕(五慾)이 모두 극도로 치밀어 오른 상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이란 감정이 최대로 치밀어 오른 상태로, 서로 섞여 질척해진, 그렇게 이루어진 검은색이었다.

그야말로 극도의 혼돈.

“잠깐, 너 설마……?”

문득. 거기서 무언가가 머리를 스쳤다.

그러자.

[큭. 이제야 날 바로 보는군.]

검은 천마, 그림자의 근원이라 말한 존재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것이 페이탈리스트, 나라는 존재다. 세상이 빛과 어둠으로 갈리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태초의 혼돈. 그 주재자이며 모든 그림자의 근원이지.]

“…마공이었나.”

천마는 짧게 침음했다.

그제야 그를 불러들였던 이유. 그 원인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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