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페이탈리스트 (2)
마(魔).
페이탈리스트를 불러들인 건, 아마도 마공이었다.
돌이켜 보면, 필리아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정령사가 소환하는 정령은, 보통 소환사의 특질을 닮는다.
그래서 천마가 정령을 불렀을 때, 불 도마뱀이 나타났다.
불처럼 폭급하고, 난폭한 성미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폭급한 불보다, 훨씬 더 천마와 가까운 존재가 있었다.
바로 천마의 마공.
평생을 수련하며 삶에 담아 온 힘이었다.
분명, 천마신교의 교리에서 불은 어둠을 밝히고, 파괴와 창조를 함께하는 중요한 요소지만.
태초의 근원. 불이 있기 이전에 있었던, 창조될 세계의 근원에 닿은 힘은 혼돈이었으니까.
선도 악도 아닌 마(魔).
파괴도 창조도 아닌, 영원한 혼돈. 마공이 추구하는 가장 고절한 이상이 바로.
형체를 가지고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럼 이제 한번 경험해 보도록. 혼돈에 휩싸인 너 자신은 어떠한 존재인지!]
“쿠오오오오.”
육합 전성처럼, 상대의 의지가 전해짐과 동시에 지독한 투지가 몰려왔다.
검은 천마는, 온몸에서 분출하는 마공을 더욱더 뿜어내 유형의 기로 변화시켰다.
츠츠츠측!
그리고 그 기는, 온몸의 혈맥 위를 따라 불길하게 표류하고 있었다.
‘아, 암흑심화인(暗黑沈化人)?’
천마는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저건 그 자신이 극마의 끝에 다다랐을 때에야 겨우 쓸 수 있던 수법이었다.
암흑심화인.
세상 어느 무인도, 항시 기를 펑펑 뿜어내는 무인은 없다.
기는 내력이고, 평시에는 내공이라는 그릇이 되어, 형체 없는 기를 몸에 담아 둔다.
하지만 본시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았으니, 천마신교의 유수한 미치광이들 중에서는 내공과 내력의 차이를 없애려는 시도도 종종 이루어졌다.
마교의 암흑심화인은 그 목적으로 만들어진 신공이다.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뒤, 그 힘을 상시 사용할 수 있는 절대적인 신공.
또한 언제나 어디서나 원할 때면 극한으로 끓어오르는 살기는 곧 심즉살(心卽殺). 살의를 품기만 해도 상대를 격살할 수 있는 용법이기에, 이는 탈마에 이르기 위한 필수 과정 중 하나이기도 했다.
“쓰읍. 잘하면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는데…….”
화르르륵.
천마는 이제 다른 한 손에도 열화공을 피워 냈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여유는, 상대의 암흑심화인을 보는 순간 사라졌다.
오직 진지함과 신중함이 천마의 두 눈에 담겨 있었다.
‘일단은 싸워 봐야 안다.’
저것이 그저 허상뿐인지, 아님. 정말로 천마신교의 마공이 추구하는 존재 그 자체인지.
직접 부딪치면 알게 될 것이다.
팟.
준비 과정은 없었다.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둘이 움직였고.
콰아앙---!
한 지점에 둘이 격돌했다.
* * *
첫 공격은 대등한 권장에 맞부딪침이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큭!”
생각보다 더 밀려났다.
비등한 일격이라 여긴 느낌과 달리, 상대는 열화공을 중화시켰고.
막아 냄과 동시에 오히려 더 강한 반격을 해 왔다.
쿵! 쿵! 쿠웅!
주먹, 장법, 발길질로 이어지는 연환 공격. 막아 낸 천마의 몸이 쭈욱 밀렸다.
‘이놈, 강하다.’
찌릿한 격돌의 여파가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상대는 빠르고 강했다. 그러나 정말 화가 나는 것은 내공이었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내력은 방대했고, 심지어 마공의 순도마저 자신보다 높았다.
한순간에 4연격, 아니, 5연격을 펼쳐 내고, 상대는 비딱하게 선 채 비웃음을 보였다.
이지를 잃은 표정으로.
[크큭. 자, 이제 누가 강하지?]
“시건방진……!”
구구구궁!
짧은 호흡과 함께 물러섰던 천마가 달려들었다.
부지불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그의 손에서 열화공이 다시금 피어 나왔다.
상대의 능력을 알아보는 건 여기까지.
이제는 강력한 일격으로 그의 무릎을 꿇릴 때다.
패애애액.
한달음에 지척까지 다가간 천마. 그는 한 손을 둥글게 휘두르며, 다른 한 손에 끌어올린 강렬한 열기를 상대에게 쏘아 보냈다.
“열화멸절공(熱火滅絶功)!”
부아아악--!
닿는 즉시 누구라도 재가 된다는 열화공의 극의.
열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정염(情炎)의 불꽃이, 시뻘겋게 분출되며 상대를 태워 버렸다.
그랬다고 믿었다.
그놈을 보기 전까지.
“……!”
검은 천마는 그대로 서 있었다.
마치 당한 게 아니라, 피하지 않았다는 걸 일부러 보여 주려는 것처럼.
쉬이이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연기와 열기, 핏기 자국으로 보아 타격이 있긴 있었다.
그러나 놈이 일부러 만들어 낸, 가짜 육체임에도.
천마는 사지의 어느 것 하나도 날려 보내지 못했다.
[꽤… 재미있는 일격이군. 나도 해 볼까?]
“……?!”
화르륵!
검은 천마가 조금 전 천마가 한 동작을 그대로 따라 했다.
한 손을 크게 휘두르며, 다른 한 손에 열기를 끌어올렸다.
[열화멸절공.]
“뭐?!”
부아아악!
쏘아지는 정염의 불꽃.
천마와 똑같은 방식이었다.
다른 점은 색채. 먼저 쏘아졌던 시뻘건 화염보다, 더 위협적인 푸른 화염이 천마를 향해 날아들었다.
“크으읍!”
대경한 천마는 한 호흡으로 급히 3겹의 방어막을 쳤다.
내가기공을 이용해 강막(罡膜)을 끌어올렸고.
그다음은 외공의 호신강기.
마지막으로 호심공(護心功)을 통해 일시적으로 육체의 힘을 수십 배로 단단하게 만들었지만…….
지지직! 화아아아악!
역부족이었다.
강막도 호신강기도, 얼음이 녹듯 증발해 버렸다.
“크아아악!”
괴성과 함께 천마는 십여 장 가까이 몸을 날렸다.
끄그그그그극.
그리고 땅을 뒹굴었다.
온몸을 태우는 불길을, 두들겨서 겨우 잡았다.
“크윽… 하악… 하악.”
비명과 함께 온몸이 불타오르는 듯한 지독한 작열감이 전신에 스며들고 있었다.
적지 않은 화상까지.
하지만, 화상보다 더 큰 상처는 자존심이었다.
뇌려타곤이라니.
천마가 이런 낭패를 당해 본 게 대체 언제였던가.
[버러지처럼 굴러다니는군. 너에겐 아주 걸맞은 몸부림이다. 자. 이제 격의 차이가 좀 느껴지나?]
“이…….”
빠득.
천마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를 갈았다.
처음이었다.
이제껏, 그 어떤 도발이나 자극도 그를 이렇게 격동시킨 적이 없었다.
어떠한 공포나 두려움도 감히 그에게 침범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힘에 있었다.
세상 무엇이 덤벼 오든, 이겨서 꿇려 버릴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상식이 뒤집혔다.
눈앞의 검은 천마는, 자신보다 강했다. 그리고 자신을 하등한 존재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전에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무지한 놈. 아직도 계속하려는 건가?]
천마가 일어서자, 검은 천마가 비웃어 보였다.
“이봐,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아나?”
[…….]
천마가 피식 웃어 보였다.
강한 상대.
가슴을 뛰게 하는 상대.
그런 놈들과 싸울 때를 그는 늘 고대해 왔다.
그러니 이 순간 얼마나 기쁘지 아니한가.
“바로 너 같은 놈들과 싸우는 거야.”
파바바박!
말과 함께 천마의 몸이 수십 개로 늘어났다.
천마군림보. 수많은 싸움에서 언제나 그를 지탱해 온 천마신교의 경공술이자 극의.
상대의 역량이 전반적으로 우위임을 알았으니, 이번에 그가 꺼내 든 건 움직임이었다.
“어디 이것도 한번 따라 해 보라고.”
사사사사삭.
수십의 천마.
모습도 행동도 똑같다.
본체와 구분하기 불가능한 수많은 환영이 생겨나 허공을 뒤덮었다.
[그게 뭐. 어려운가?]
검은 천마는 피식 웃어 보였다. 그리고 발을 들어 올린 순간.
사사사삭.
똑같이 검은 환영들이 나타났다.
땅이고 허공이고 수십 개의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 천마를 즉시 추격해 왔다.
‘제길, 이것까지…….’
예상은 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섬찟한 느낌에 천마는 침음을 삼켰다.
사사사삭. 파바바박.
천마와 검은 천마가 서로 꼬리를 물었다.
수많은 신형들이, 서로에게 권각을 날리고, 피하고 있었다.
타다닥! 타다다닥!
부딪히고, 부딪히고, 부딪혔다.
상대가 자신과 똑같이 천마군림보를 구현함을 넘어 더 많은 환영을 생성해 냈지만, 천마는 오히려 담담해졌다.
‘수 싸움을 해야 한다.’
그가 믿는 것은 두 가지.
하나는 수없이 많은 강호의 기인이사들과 싸워 온 경험이었다.
그중에는 천마 본인도 다시 싸우라면 꺼려질, 괴물 같은 놈들도 있었다.
또 하나는 초식.
무예에서 초식은, 단순히 공격 방식이나, 내력 운용의 요결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옛 구파일방의 정예들.
소림, 무당, 화산 등으로 대표되는 명문 정파 중에는, 그런 놈들이 많았다. 쌓아온 내력이나, 타고난 체질 등으로 인해 천마조차 극마 경지로 싸우면 쉽게 이길 자신이 없었던 괴물들이.
그런 수많은 전대 고수의 경험과 운용이 녹아 이루어진 것이 바로 초식인 것이다.
파바박! 투닥! 파바박! 투닥!
천마는 눈앞의 검은 천마를 향해, 수많은 초식과 연계된 변초를 뿌려 대며 확신했다.
이번엔 분명 통할 거라고.
“잡았다. 요놈.”
한 초식으로 두 초식을 방비하고, 두 초식으로 세 초식을 방비를 주고받던 그때.
천마의 눈이 빛났다. 수 많은 환영들 사이에서, 검은 천마의 실체(實體)를 파악한 것이다.
“묵령공(墨靈功)!”
푸아악!
천마가 부지불식간에 흑마공의 정점이라 불리는 묵령공을 발현해 냈다.
새카만 기공이 채찍처럼 너울거리며 천마의 손바닥에 나타나, 검은 천마에게 쏘아지던 순간.
[묵령공.]
“……?!”
천마의 온몸의 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눈앞의 검은 천마의 손에서 너울너울 기공이 피어오른 것이다.
“제에기랄! 천마폭렬공(天魔爆裂功)!”
천마는 최후까지 저항했다.
급히 다시 한번 3겹의 보호막을 치고, 쏘아 보내던 묵령공을 회수하여 열화공의 다른 극의.
검강과 맞먹는다는 불의 고리를 일으켰다.
퍼어어엉!
하지만 상대의 묵령공이 더 강했다.
천마가 일으킨 불의 고리를 수십 조각 내고, 그러고도 여력이 남아 천마의 본신을 직격했다.
“끝이 아니다!”
천마는 창졸간, 그 짧은 틈으로 상대의 묵령공을 손끝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거의 탈진한 상태에서도 기운을 회전시켰다.
천마의 장기이자, 호교신공의 극의라 불리는 건곤대나이였다.
[…억!]
휘릭!
강대한 힘이 휘우듬하게 방향을 바꿔, 주인인 검은 천마를 공격하자, 한순간, 이지를 빼앗긴 검은 천마의 눈에 당황하는 기색이 서렸다.
“가라!”
되돌린 적의 힘에, 자신의 묵령공을 쥐어짜 보태며 천마는 확신했다.
이번엔 분명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을 거라고.
삭!
“…어억!”
그러나, 그때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건곤대나이의 수법으로 거의 지근거리에서 펼친 묵령공.
그 기운이 검은 천마 앞에서, 거짓말처럼 흩어졌다.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모래처럼.
[훗. 생각 외로 재미있는 놈이구나. 필멸자.]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천마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조금 전의 반격은 자신이라도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힘이었다.
그런 힘을, 검은 천마는 막은 것도 아니고 피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없애 버렸다. 마치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고작해야 인간의 인식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수 있다니… 칭찬해 주지. 어쭙잖은 마왕보다 낫다.]
“…….”
천마는 멍한 상태로 있었다.
대체 이놈은 무엇이기에,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발칙하고 광오했던 것 또한 용서하마. 인간. 하지만 모자라다. 고작 그 정도로는 나를 부릴 수 없다.]
그래서 눈앞의 검은 존재에게서 다른 기미가 나타남을 알지 못했다.
무언가 알 듯 말 듯. 뇌리를 간질이는 아스라한 느낌 속에서.
[돌아가라. 너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
슈욱! 펑!
천마는 보았다.
아무것도 없던 가슴에 갑자기 시꺼먼 강기가 박히는 자신의 모습을.
“크아아악!”
몸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천마는 괴성을 질렀다.
그 찢어질 듯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사그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