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페이탈리스트 (3)
이른 아침.
천마의 몸이 간헐적으로 경련하고 있었다.
그림자처럼 어두운 기운을 가득 담은 그의 몸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끄---- 억!”
겨우 내쉰 신음을 내뱉고는 거칠게 숨이 달음박질쳤다.
파르륵.
동시에 몸에서 멋대로 역류하는 기.
몸에 녹아 있던 마기는 전신 세맥을 헤집고 다니며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끄… 윽!”
쿡. 쿡.
천마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대맥의 혈도를 점하며, 호흡법을 바꿨다.
반혼어심법(返魂魚心法).
반혼어, 폐어라고도 불리는 물고기는 가뭄이 올 때 온몸을 딱딱한 돌처럼 바꾼다. 그러다가 비가 오면 다시 여느 물고기처럼 살아난다.
그 습성을 연구하여, 한 가닥 숨만 붙어 있으면 무조건 살려 낸다는 요상심공이다. 이런 고전의 심법을 급히 필요로 할 정도로 천마의 상태가 다급했다.
“흐읍----후! 흐읍----후!”
천마의 몸은 곧 안정을 되찾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이한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온 것이다.
“후우. 죽을 뻔했다.”
땀으로 축축해진 이마를 쓸며, 천마는 자신의 몸을 살펴봤다.
허물을 벗었음에도 벌겋게 화상이 남은 피부.
내력은 그야말로 바닥을 드러냈고, 뒤틀린 기혈은 조금만 무리해도 주화입마를 할 태세다.
찌이익. 찍.
하지만 정말 어이없는 건 몸 상태가 아니었다. 갈기갈기 엉망으로 터지고 찢겨 나간 옷.
“…미치겠네.”
이 찢어진 옷가지는 천마가 꿈이나 환상에 빠진 게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였다.
터지고 찢긴 부위를 보니 꿈인지 생신지 모를, 그 공격을 받은 그 자리였다.
“현계(現界)는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날 어디로 불러냈던 거지?”
풀씨 하나 없이, 오로지 돌만 가득했던 땅이었다.
사방이 분화구처럼 패이고, 하늘에는 하얀 달 대신 시퍼런 물빛 달이 보이던 그곳.
비록 생의 후반에는 혼자 수련하기에 빠졌다곤 해도, 한참 때는 세상 별의별 고수와 싸우러 찾아다니고, 새외의 온갖 기이한 것들을 다 본 몸이었다.
그런 그로서도 이번 같은 경험은 처음이었다. 살다 살다 처음 보는 기괴한 세상이었다.
짐작 가는 것이라면, 정령이라는 놈.
강렬하게 빛나는 눈을 가진 그림자 녀석. 그놈의 세계일 거란 것인데…….
“감히 이 몸에게…….”
빠득.
갑자기 이가 갈렸다.
이제껏 천마가 교주가 된 후 이렇게 처참하게 당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 있기는 있었지.”
생각해 보면 딱 한 번 있기는 있었다. 이한의 몸으로 들어오기 전.
본교에서 마주친 그놈의 해골바가지.
그러고 보니 한 명 더 있다.
기괴한 대법을 썼던 밀교의 금불선승.
하지만 결국엔 그놈을 이겼고, 리치왕 때는 지금처럼 무력하게 작살나지는 않았다.
그때 느꼈던 게 분노라면, 이번에 느낀 것은 당혹감이었다.
“휴우… 휴우…….”
천마는 성질을 누르며 다시금 몸을 관조했다.
소실된 내공. 흔들린 몸 상태는 마음먹으면 금방 복구할 수 있었다.
그보다는 힘도 못 쓰고 꼴사납게 패했다는, 자존심에 난 상처가 더 컸다.
자신 같은 고수에겐, 육신보다 이런 심리적인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한다.
무공이란 쌓으면 쌓을수록, 마음과 의지에 더 크게 공명하는 법이니까.
“필리아를 찾아가 봐야겠다.”
한참을 운기조식으로 내부를 다스리고, 천마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정령이 벌인 일이라면, 정령사에게 묻는 것이 맞을 터였다.
* * *
보글보글. 꼬르르륵.
“후우…….”
분주하게 아침거리를 챙겨 놓고, 소진은 팔에 찬 석궁을 점검했다.
찰칵. 찰칵. 툭.
석궁은 기계 장치의 활이다.
기관 장치의 작동 부위와 탄환의 점검은 아무리 해도 부족하지 않다.
하물며 위험하기 짝이 없는 폭약임에야.
“조심조심…….”
톡. 달칵.
소가백화점에서 백린탄을 석궁에 쓴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크기는 작게 폭발력은 최대한 크게 만든 휴대용 화기(火器).
반 미친 연금술사가 소가백화점의 지원을 받아, 수많은 시도와 개량 끝에,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휴대용이지만 위력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일반 벽력탄은 파이어볼 1~2서클에 달하는 파괴력을 지닌다. 하지만 소진의 백린탄은 특제다.
파괴력은 2-3서클에, 화염 피해를 감안하면 4서클을 상회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석궁도 특제였다.
무게는 고작 네 근(2킬로그램)이라 소진의 빈약한 팔로도 쉽게 들 수 있고, 사정거리는 10장(30미터). 3발 연사에 장탄 수는 12발이다.
툭! 툭! 툭! 찰칵.
복잡한 점검을 끝낸 다음, 백린탄 대신 연습용 백묵을 장전하고 쏘아대는 소진.
그는 표적으로 삼은 나무 그루터기를 보고,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역시 하루아침에 늘지는 않네.”
병기는 최고급이지만, 안타깝게도 사수의 능력이 모자랐다.
분명히 쏴서 맞힌 줄 알았는데, 절반은 빗나갔다.
툭! 툭! 툭! 찰칵.
그럼에도 소진은 낙심하지 않고 계속 연습했다. 지금 그의 등을 떠밀고 있는 건, 어제의 경험이었다.
겁먹어서 꼼짝도 못 하고 짐만 되었던 처지. 그리고 반쯤 운으로 가고일을 때려 맞혔을 때의 흥분.
‘나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필리아의 몸 상태를 고려해, 야영장에서 이틀 휴식 후, 일행은 4단계 광장에 들어간다.
이제까지의 석재 가고일들과는 차원이 다른, 철제 가고일들이 나타나는 곳. 하지만 소진은 이번에야말로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다.
선행자들의 정보에 따르면 철제 가고일은 분명 강하고 빠르지만, 숫자가 고작 서너 마리 정도라고 했다.
양보다 질. 그렇다면 싸움의 양상은 정해져 있다.
“하아…….”
몇 번을 연습하던 소진은 금세 지친 얼굴이 되었다.
그러다 문득 이한의 천막을 돌아보았다.
그와 같은 기부금 입학생.
분명 1학년 때는 비슷비슷한 처지였다.
심지어 이한의 성적은 자신보다 낮았다.
그런데 2학년이 되고 나서, 사람이 달라졌다.
대담해지고, 자신만만해졌다. 무공도 강해졌지만, 소진이 더 충격을 받은 것은 이한의 미친 듯한 자신감이었다.
“먹을 걸 좋아하는 거 같던데 일단 좀 친해져서… 어?”
그렇게 유치한 작전이나 짜고 있던 소진의 눈이 커졌다. 이한이 천막을 퍽, 걷어차고 나온 것이다.
그리고 천막을 나오기가 무섭게 산속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 * *
짹짹짹!
작은 새들이 지저귀고, 좋은 바람이 지나간다.
화아아아.
이름 모를 꽃들과 가득한 나무 냄새. 마음이 편해진 필리아는 모처럼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후우…….”
필리아는 자연이 좋았다. 천무학관에 입학하기 전에는 거의 숲에서 지냈으며, 학관에서도 새벽녘에는 꼭꼭 숲이나 나무를 찾았다.
그녀가 학급에서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존재감이 옅어진 까닭이기도 했다. 사람 많은 곳은 숨 쉬기가 답답하고 불편했고, 그래서 말도 거의 꺼내지 않았으니까.
스스스슥.
그때 뭔가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무심코 잡은 여린 가지가, 급속히 시들어가자 필리아는 급히 손을 뗐다.
요족이라고 밝혔던 그녀의 말은 거짓이었다.
자연 친화적인 요족 출신으로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랬다.
실은 동물이든 식물이든 두려워하는 존재. 그래서 자연을 사랑하지만 다가가지 못하는, 필리아에겐 그런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들이 아무리 상냥해도, 정작 그들을 만나는 모든 생물들은 두려워하는, 위협적인 고대 종족의 피가.
“어, 여기 있었냐. 필리아.”
“꺄악!”
잠시 상념에 잠겨 있었던 필리아는,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기겁을 했다.
“이. 이한? 무슨 일이에요?”
소리도 기척도 없이, 이한이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필리아는 자신의 감각으로 그가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한 것에 얼떨떨해했다.
“뭐 좀 물어보자. 너, 정령사라고 했지? 그럼 정령을 잘 알겠네?”
“어. 그게…….”
이한은 밑도 끝도 없이 자기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필리아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하긴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하고 중얼거리며.
“네, 뭐 궁금한 게 있으세요?”
“정령, 그게 자연 4대 원소만 있는 게 아니지?”
“…그건 또 무슨 말인가요?”
“음.”
천마는 잠시 고민했다.
자기가 겪은 걸 어디까지 털어놓아야 할지. 너무 상세히 설명하다가 괜히 귀찮은 일에 엮이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적당히 핑계를 댔다.
“그러니까 꿈에서, 굉장히 이상한 놈을 봤단 말이야. 시커멓고, 난폭하고, 아주 강한 놈을.”
그냥 꿈이라고, 그런데 꿈치고는 너무 생생해서 단순한 악몽으로 치부할 수가 없는 꿈이었다고.
“제가 뭐 그림자의 왕, 모든 혼돈의 근원이니 어쩌니 하던데.”
“으으응…….”
한참을 진지하게 듣고 있던 필리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림자 쉐도우 일족을 말하는 건가요? 그런데 왕이라니… 하지만 인간은 그럴 리가 없는데요?”
“야, 무슨 소린지 알아듣게 말해.”
이한의 말에 필리아는 아, 하고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림자의 정령. 그런 종류가 분명 있긴 있어요. 그리고 이한과 왠지 어울리기도 하네요. 근데 좀 믿기지가 않아서요.”
“안 믿겨? 뭐가?”
“알다시피, 보통 인간 중에서 정령사의 자질을 가질 확률은 수만 분의 1이에요. 굉장히 드문 체질. 거기에 그림자의 정령 자체가 많이 없고.”
“흠.”
“그런데 나타난 존재가 자신을 왕이라고 했다면서요? 게다가 근원? 그건 굉--- 장히 높은, 최상급이나 그 이상의 존재라는 말이거든요.”
필리아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건 드문 정도가 아니라, 희박, 아니, 그냥 말도 안 되는 확률이에요. 만분의 일에서 또 만분의 일을 찾는, 수억 분의 일이라고 해야 하나?”
애초에 드문 종류의 정령이, 거기에 강력한 최상급. 사대 원소로 치면 정령왕급의 존재다.
그런 이가 가뜩이나 정령 친화력이 낮은 인간에게 이끌려 올 리가 없다.
친화력이 뛰어난 요족 중에서도, 정령왕은 고사하고 최상위 정령을 부리는 이도 손에 꼽는다.
확률로 치면 수억 분의 일에서, 또 수억 분의 일을 찾는 격. 보통은 이런 걸 불가능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과 달리 정령은 자신을 함부로 과대 포장 하지 못해요. 자칫하다간 그 계열의 주인에게 붙들려 가서 소멸당하니까.”
“…흠.”
하지만 그 말에 오히려 천마는 납득하고 있었다.
정령왕인지, 최상급 정령인지, 어쨌든 자신이 불러낸 놈이다. 그 정도는 되어야 급이 맞았다.
무엇보다 그 어마어마한 강력함. 천마 자신을 패배시킬 정도의 위용. 들으면 들을수록 이게 그놈이다 싶은 것이다.
“음… 그러니까. 아마 좀 이상한 꿈을 꾸신 모양이에요. 이한은 이미 불의 정령을 다룰 수 있짆아요? 그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거예요. 낙심하지 마세요.”
“…어?”
그런데 곰곰이 반추하는 천마를, 필리아는 어떻게 본 건지 위로하는 말을 해 왔다.
이걸 뭐라고 해야 오해를 푸나. 살짝 귀찮아진 천마가 인상을 쓰자, 필리아가 한 번 더 오해를 했다.
“어. 음. 그럼 저는 할 게 있어서 좀 가 볼게요.”
이한이 기분 상했다고 생각해서 재빨리 도망가려는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천마는 급히 말했다.
“페이탈리스트.”
“……?”
흘깃 돌아보는 필리아. 천마가 다시 말했다.
“페이탈리스트라고 했어, 제 이름이. 들어 본 적 없어?”
“음… 없어요. 죄송해요.”
타다닥.
그리고 가 버렸다. 이런. 하고 혀를 차며 천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광기와 만월(滿月)의 주인을 말하는 거야?”
“어?”
엉뚱하게도, 아까부터 조심조심 따라오던 소진. 그놈이 숨 막힌 듯 갑자기 되물어 왔다.
“너, 뭐 아는 거 있냐?”
천마가 묻자, 소진은 한층 더 숨이 막힌 듯, 새하얀 얼굴이 되었다.
“페이탈리스트는 혼돈의 근원이자 모든 그림자의 왕을 얘기해. 그런데 그걸 꿈에서 본 거야?”
“……!”
천마의 눈썹이 꿈틀했다.
광기, 이 말은 필리아에게도 한 적 없다. 그리고 천마가 만난 페이탈리스트는 완벽히 미친놈이었다.
검은 천마. 온몸에 흐르던 마기. 그리고 일그러진 기괴한 얼굴을 떠올리며, 천마는 피식 웃었다.
“그 이야기. 좀 더 자세히 해 봐.”
아무래도 정령 이야기를, 정령사가 아니라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에게 듣게 될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