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네 번째 광장 (1)
이틀 뒤.
카르삭 왕릉 주변은 분주했다.
입구 주변에 급히 지은 임시 막사에는, 학관에서 파견 나온 무공학 조교들이 죄다 몰렸다.
사박사박.
두런두런.
다급하게 부족했던 보고서를 보충하는 이들. 그리고 나온 보고서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이들.
그 한가운데는 총책임자로 교관 허각이 있었다.
“흐음…….”
차락. 차락.
원탁에 올려진 보고서를 검토하며, 삐딱하게 앉아 있던 허각. 그러던 그가 갑자기 자세를 고쳤다.
펄럭.
막사 안으로 한 노인이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오셨습니까. 남 교관님.”
“오셨습니까!”
그를 본 무공학 조교들이 급히 허리를 숙였다.
“일들 하게. 난 신경 쓰지 말고.”
동네 할아버지 같은, 편안한 인상의 노인이 허허, 손을 내 저으며 웃었다.
남소천군. 천무학관의 실전학 교관.
그는 예전 카르삭 왕릉의 책임자이기도 했다. 전 책임자를 향해 무공학 교관 허각, 현 책임자가 예를 차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배님. 먼 길 오시는 데 불편함은 없으셨는지요?”
“별로 멀지도 않았네. 며칠 거리 아닌가.”
남소천군은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그를 보는 허각은 살짝 긴장한 얼굴이었다.
“한데, 바쁘시다 들었는데 이번에는 무슨 일로……?”
“우리 아이들이 이곳에서 수행평가를 시작했다고 들어서. 내 어떤가 궁금해서 왔네.”
“아… 그렇군요. 한데 고작 2학년생입니다만?”
지역 책임자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중앙의 감찰(監察)이었다. 그게 아니란 걸 알자 허각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래도 2학년생 중 가장 뛰어난 반이 아닌가. 학관 내에서도 눈여겨보는 아이들도 있고.”
“서문영과 운소령 말이군요.”
“흠흠.”
담당 학과는 달랐으나, 둘은 평소 사이가 좋았다.
실전학 교두인 제운비와 무공학 교두인 최일이 워낙 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다만, 남소천군은 연차가 높아, 허각이 예의를 차렸다.
“그 일이라면 마침 보고 있던 참입니다. 이쪽으로.”
허각은 자신이 보고 있던 원탁을 가리켰다.
곧 남소천군이 그리로 움직였고, 아래에 있던 보고서로 시선을 내렸다.
“이번 기수는 크게 3개의 파티로 나뉘었습니다. 각각이 남문. 동문. 북문의 3번째 광장까지 토벌을 마쳤습니다.”
“사상자는 없었나?”
“없었습니다. 모두 무사합니다.”
“오. 가고일 숫자가 제법 많았을 텐데? 특히 3단계는 강화 가고일이지 않은가?”
“예. 저도 이 정도로 잘 해낼 줄 몰랐습니다.”
남소천군은 슬쩍 상황판을 보았다.
왕릉을 그린 지도와, 진입한 파티 및 구성 요원이 적힌 기록이었다. 그중 한 조를 보던 남소천군은 조금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이 조는 네 명인가?”
“예. 운소령입니다.”
“고작 4명으로 3단계를 통과했다고?”
“예. 심지어 다른 파티보다 3단계 통과 기록이 이틀 빠릅니다.”
“허어…….”
보고서 요약을 본 남소천군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3단계라면 강화 가고일이 무려 여섯. 그런 곳을 고작 2학년생 4명이 하루 만에 돌파했다.
그것도 1단계, 2단계를 처리한 직후에. 이건 좀 많이 놀라웠다.
“4단계는?”
“아직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며칠째 야영하는 걸 보아, 전술준비와 체력 축적을 하는 모양입니다.”
“하긴. 4번째 방은 만만치 않지. 현명하군.”
엘리트 가고일.
와이번의 위력을 내는 위험 등급 6급의 몬스터들이다. 잠시 생각하던 남소천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자칫하면 사상자가 발생하겠는데. 경쟁자보다 점수를 더 얻기 위해 무리할 테니까.”
“그래서 각 조마다 교관 한 명을 몰래 잠입시켜 놓았습니다. 만약 애들이 위험해지면, 곧장 개입할 겁니다.”
“허. 역시 자네로군. 그래. 잘 알아서 하겠지.”
남소천군은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주위를 슬쩍 바라보았다.
의미를 알아차린 허각은 조교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잠시 나가 있거라.”
“네!”
우루루루.
조교들이 즉각 움직였다. 사람으로 가득했던 천막은 금세 비워졌고, 남소천군과 허각 두 사람은 가장자리에 비치된 의자로 이동했다.
“그래서, ‘그 건’은 잘 보고 있나?”
“예.”
이번에 남소천군이 온 건 단순히 2학년 학관생들을 보기 위함만이 아니었다.
작년부터 발생한, 카르삭의 왕릉 내부의 이상 현상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제운비 교두께서 예상하신 대로, 점점 마력이 불어나고 있습니다.”
“정말 흡수를 하는 게 맞는 건가?”
“아직 조사 중이긴 합니다만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계속 집계하고 있는데…….”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작년부터 가고일의 숫자가 분기마다 한두 마리씩 늘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한두 마리야 그럴 수 있지 않은가. 왕릉 가고일은 아무리 때려잡아도 한 달 뒤면 복원되니까.”
“그게……. 평범한 가고일이면 그러려니 하는데, 이번엔 엘리트가 늘었습니다.”
“다섯으로?”
“예.”
“허!”
중급 수행평가 던전, 카르삭 왕릉.
수많은 석상들이 즐비한 가운데 가고일이 종류대로 튀어나오는, 천무학관이 학관생들에게 실전 경험을 시키기 위해, 파괴하지 않고 놔둔 던전이었다.
물리 내성에 마법 내성까지 함께 갖춘 몬스터. 그런 것이 자동으로 재생성되는 던전은 쓸모가 매우 많다.
문제는 이 던전에서 출현하는 가고일의 숫자가 언제부터인지 한두 마리씩 늘어났다는 점.
조사 팀을 꾸려 본 결과, 왕릉의 한가운데서 작동하는 마력원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다행히 위협적이지는 않았고, 왕릉은 수행평가 던전으로 계속 유지되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마력원의 마력치가 점점 변하고 있어, 학관에서 조심스레 지켜보고 있었다.
“엘리트라… 그렇군. 그래서였어. 안 그래도 상부에서 결정이 났네.”
“어떤…….”
“카르삭 왕릉에서 철수하라고.”
“예?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나도 아깝네만, 학과장께서 결정한 사안이야.”
“아.”
허각은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몬스터는 분명 인간의 적이었다. 하지만 적이 있기에 싸울 수 있고, 배울 수 있지 않았던가.
이제 2학년인 학관생에게, 카르삭 왕릉만큼 안전한 가운데 경험을 쌓게 할 곳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럼 언제쯤?”
“이번 수행평가가 끝나는 대로. 리그웨더 님께서 오실 게야.”
“학과장님께서 직접?”
허각의 눈이 커졌다.
학과장 리그웨더는 웬만해선 학관 밖으로 잘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직접 행차한다는 건 의미가 명백했다.
“아마 일대를 다 날려 버리실 게야.”
“…그렇다면?”
“그래. 미티어를 쓰실 생각인 듯해.”
팔락. 팔락.
막사에 바람 한 조각이 스며들었다. 날리는 보고서들 사이로, 허각의 한숨이 번졌다.
* * *
“다들 장비 챙겨!”
“긴장해야 해! 오늘은 엘리트 가고일이야!”
한편.
왕릉의 입구. 막사와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한창 젊은이들이 북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3단계 강화 가고일 광장을 마무리하고, 하루 더 넉넉하게 휴식 후 서문영의 파티가 드디어 움직인 것이다.
“다들 허리띠 찼어?”
“물론이야.”
“샤프니스 스크롤은?”
“물론이지.”
요란하게 대답하는 젊은이들. 그들은 다 함께 같은 색의 두터운 요대를 차고 있었다.
거인의 허리띠(Belt of Giant).
위험하기로 유명한 필드 던전, ‘거인의 숲’에서 거인을 살해하고 얻은 아이템들이다.
천무학관 공식 감정에서, 근력과 완력을 무려 3할이나 올려준다는 장비였다.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속도 1할 증가도 있었다. 완력의 증가는 무기를 휘두르는 속도도 빠르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1인당 하나씩 지급된 샤프니스 스크롤. 여기엔 날붙이의 예리함을 극도로 높이는 마법이 담겨 있다.
아무리 물리 내성의 가고일이라도, 두 아이템의 보정을 받고 싸운다면 상대해 볼 만하다.
“서문영, 이거 정말 우리가 써도 되는 거야?”
잠시 빌리는 것이지만, 압도적인 힘을 휘둘러 보게 된 파티원들은 잔뜩 흥분했다.
“돼. 다만 끝나고 나서 반납하는 걸 잊지 마.”
서문영은 끄덕였다.
수행평가의 고득점을 목표로, 그는 서문세가에게 총력을 다한 지원을 부탁했다.
거인의 허리띠 10개와 샤프니스 스크롤 10장. 세가 약한 무가라면, 준비하다가 기둥 뿌리 하나는 뽑을 엄청난 투자였다.
“으흐흐흐흐. 당연하지.”
“몇 마리 잡을 예정이야?”
그리고 그 투자 덕분에 벌써부터 조짐이 좋았다.
은연중에 시큰둥해하던 파티원들, 자신을 경쟁자로 생각하고 뻣뻣하게 굴던 이들이 굽실거리기 시작했다.
“세 마리.”
“넷 중 셋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쉽지 않을 뿐이지 못할 건 또 아니니까. 천무학관의 학관생이라면 누구나 숨겨 둔 한 수는 있는 법이고.”
서문영이 까닥하고 종천도를 턱짓했다.
그의 손에는 지난번 싸움에서 못 본 강철 장갑이 들려 있었다. 척 봐도 보통 물건이 아니다.
‘전사의 수투(Warrior’s Gauntlet)겠지. 아마도.‘
추가로 힘 혹은 민첩성을 올려주는 아이템. 거기다가 방어 면적이 넓다. 팔뚝의 절반가량을 덮고 있다.
“쓰기 전까지 그 수를 숨기는 건 좋아. 신중한 거니까. 하지만…….”
“써야 하는 때에 쓰지 않는 건 멍청한 거지.”
서문영의 말을 받으며 언규가 몸을 틀었다.
철컥.
그 역시도 지난 싸움에서 보이지 않았던 철갑을 장비하고 있었다. 전신 플레이트. 무게가 상당할 텐데 가볍게 움직인다. 아마도 경량화 마법이 걸려 있을 터.
방패에도 희미한 아지랑이가 어리는 것이, 물리 타격을 방비할 마법 처리가 된 것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다들 같은 생각이라면.”
스윽.
서문영은 품속에서 반지를 꺼내 오른손 약지에 끼었다.
진작부터 기회를 기다리던 맹염의 반지(Ring of fierce flame)였다. 사용하게 되면 맹렬한 화염이 솟구치는데, 무기에도 불꽃의 힘을 부여할 수 있는 효과가 있었다.
‘내가 이기는 거지.’
달그락.
그는 이어서 옷 아래로 느껴지는 금속 목걸이를 확인했다.
어차피 다들 능구렁이. 너도 나도 숨겨 왔던 한 수가 있다. 그걸 꺼낼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면, 이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자. 이번에 확실히 우리들의 실력을 보여 주자고.”
* * *
“걱정 마. 이번 싸움은 우리가 유리해.”
다른 한쪽에서도 장비 착용이 한창이었다.
역시 3단계를 처리한 후, 4단계에 도전하는 당무련과 방윤의 파티였다. 그들은 세 파티 중 가고일을 가장 늦게 처리했지만, 그건 그만한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움직여서였다.
“다들 내가 준 거 하나씩 챙겼지?”
“어어!”
파티원 중 서너 명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에 들린 건 평범한 자기 항아리. 하지만 그 내용물은 지독한 부식성 맹독(Venom)이었다.
강력한 산성으로 금속을 녹이고 피해를 주는 독. 위력은 충분하다. 조심해야 할 게 있다면, 독이 아군에게도 위협적이라는 것이다.
“잊지 마. 최대한 적을 한쪽으로 모아야 돼.”
“알고 있어.”
방윤이 탁탁, 손과 발에 찬 가죽 장갑과 가죽신을 두드려 보였다.
각각 넉 백(Knock Back:밀쳐 냄)의 장갑과, 신속의 부츠다. 맞지 않고 공격을 끌어당기는 회피형 전위에게, 이보다 좋은 장비도 없었다.
“일정 거리 안으로 세 마리를 모두 끌어들이고, 그 상태로 10초. 맞지?”
“맞아. 일단 내가 발동시킬 시간만 벌어줘. 그럼 우리가 무조건 이기게 돼.”
말과 함께 당무련이 손목에 찬 팔찌를 들어 보였다.
지나치게 수수한 나무 팔찌. 하지만 이것이 그들의 필승의 패였다.
대속박마법의 팔찌. 효력은 20미터 안의 모든 것들을 끈끈한 거미줄로 묶어 버리는 것.
4단계 엘리트 가고일을 처치하기 위해, 당문 역시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이다.
“걱정하지 마. 당 소저.”
방윤은 그녀에게 말했다. 전에 없이 묵직한,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우리는 소림이다. 가자.”
“예! 사형!”
“예!”
그를 따라 전위조. 엘리트 가고일을 전방에서 막아 줄 전위 무사들이 방패를 들고 나섰다.
척. 척. 척.
남은 시간은 3일.
몇 번 합을 맞춰 보고 여차하면 후퇴하면 된다. 작전이 성공만 한다면 엘리트 가고일 넷 중 두세 마리 정도는 쓰러뜨릴 수 있었다.
“좋아. 준비는 완벽해.
당무련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