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네 번째 광장 (4)
부우웅! 쾅!
쇠주먹이 돌바닥을 찍었다. 천마는 그 공격을 한 끗 차이로 피했다.
뒤이은 또 한 번의 공격이 허공을 갈랐다.
펄럭.
풍압에 옷이 나부끼고, 머리카락 몇 올이 흩뿌려졌다.
“이한! 조심해!”
소진이나 필리아에겐,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으로 보였다.
엘리트 가고일 두 마리의 맹공을 버티고 있으니까.
‘하암. 느리구나. ’
하지만 사실은, 천마는 대충대충 상대해 주고 있었다.
다른 학관생들과 달리 그에게 엘리트 가고일은 너무 느렸고, 또 약했다.
조금만 힘쓰면 한주먹거리, 아니, 반주먹거리도 안 되는 놈들이다.
더욱이 얼마 전 페이탈리스트란 놈과 짜릿하게 한바탕 한 후로, 시시한 놈들하고는 싸우는 게 지겨워졌다.
-카아아아!
휘익.
또 한 번의 공격을 건성으로, 하지만 남 보기엔 위태롭게 피하며 그는 딴 생각을 했다.
‘아. 차라리 수업이나 듣고 싶다.’
학관에 있을 때는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생각이다.
그때는 모르는 걸 알아 가는 재미나 있지.
싸움이 지루해졌다. 예전에는 그나마, 약해도 처음 보는 놈들이라 상대하는 재미라도 있었다.
신기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천천히 식어 갔다.
외국의 별미란 처음 먹을 때나 좋은 것이니.
“헛. 헛. 헛.”
지루한 가운데에서도 천마는 싸우는 척을 해야만 했다.
성미 같아선 싹 다 죽이고 싶었지만, 그리된다면 자신의 존재는 확실히 발각되게 될 것이다.
광장 가장자리에서 기이한 은신술로 숨어, 지켜보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감독관, 혹은 보호자일 터.
‘거슬리네. 정말.’
둘 중 누구라도 이제 더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이미 적지 않게 소란을 벌인 터라, 여기서 더 주목받았다간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귀찮아질 것이다.
그나마 다행히도, 싸움의 추가 기울기 시작했다.
천마가 엘리트 두 마리를 붙잡아 두는 동안, 운소령은 남은 한 마리에게 착실하게 피해를 주고 있었다.
콰지직! 챙!
-크아아아!
가고일의 몸에 깊은 상처가 새겨졌다.
천마는 잠시 잠깐, 운소령의 검에 실린 은은한 빛을 보았다.
“오.”
분명 검기인데, 일반적인 검기가 아니었다. 아이템, 아니면 운소령이 익힌 또 다른 무공일 터.
천마가 알기로, 월녀검은 속도와 변화에 주를 둔 무공.
빠르지만 얕아서, 철로 된 몬스터를 베어내기에 좋은 무공이 아니다.
그런데도 저런 위력을 발휘하다니.
‘그러고 보니 제갈세가였지?’
천마는 운소령의 가문을 떠올렸다.
학자의 가문. 무인(武人)이 아니면서도 항상 무가(武家)일 수 있었던, 대대로 무림맹의 참모를 맡아 온 유서 깊은 집안.
성이 제갈이 아닌 운 씨라면 방계 사람일 것이다.
하나 자신이 알던 제갈세가는 방계라고 해서 딱히 차별하지 않는 곳.
주로 직계는 지식과 지혜를 추구하고, 그걸 방계와 공유하여 무력을 보충하는, 빈약한 무력을 가지고도 최고의 무림세가가 될 수 있었던 가문이 제갈세가였으니까.
치잉! 칭! 카칵!
운소령의 검이 점점 더 매서워지기 시작했다.
단칼에 치명타를 주지는 못하지만, 그녀의 검은 빨랐고, 계속해서 끈덕지게 상처를 늘렸다.
이따금 발악적인 반격이 날아들었지만, 빠른 몸놀림과 적절한 아이템 사용으로 계속 주도권을 유지했다.
“…저 정도면 혼자서 잡겠는데?”
무력은 분명히 절정의 수준.
하지만 상황 판단만큼은 초절정에 다다랐다고 해도 모자람이 없다.
천마는 점점 수세에 몰리는 엘리트 가고일을 눈에 담고는 다시금 여유롭게 움직였다.
그오오오오-!
퓻! 퓻!
한편, 가고일이 화염을 내뿜자 운소령은 두 번 몸을 뒤집으며 허공을 뛰고 뛰었다.
페더폴 브로치. 몸을 가볍게 해 주는 마법 아이템 덕이었다.
무당파의 제운종이라는, 상승의 경공술을 쓰면서도 내력 소모가 거의 없었다.
원래 경공술 하나는 학관에서도 손에 꼽히는 운소령이었다. 월녀검법과 아이템이 더해지자, 그야말로 칼의 바람. 그 자체였다.
‘거의 다 끝났어.’
힐끗.
운소령은 이한을, 엘리트 가고일 두 마리를 상대하는 그에게로 잠시 눈을 돌렸다.
화르르륵!
쿠쿠쿵! 팔락파락!
내리찍고, 불을 뿜어내고 바람을 일으키는 두 마리의 엘리트.
그녀가 보기에도 이한은 몬스터 둘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허우적. 허우적.
그런데 그게 좀 이상했다.
분명히 몇 초 안에 파국을 맞을 것 같았는데, 몇 초는 고사하고 벌써 일다경 가까이 저런 식으로 버티고 있으니까.
화아아악-!
“윽,”
가고일이 파이어 볼트를 뿜어냈다.
잠시 흔들렸던 운소령은 다시 눈앞의 상대에 집중했다.
휘리리릭! 핏!
몸을 뒤집으며 다시 공중을 밟았다.
단번에 엘리트 가고일의 지근거리로 뛰어올라, 그녀는 눈부신 속도로 검을 뿌려 냈다.
핏! 패액! 패액 패애애액-!
엄청난 쾌검의 난무.
이제까지는 멀리서 검기를 쏘아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바로 가고일의 몸에 붙어, 검날로 베기 시작했다.
싸아아악! 카가가각!
그러자, 엘리트 가고일의 몸이 상처 부위를 시작으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가고일은 애초에 물리 면역, 마법 면역을 가진 몬스터. 하지만 그 면역은 3서클까지였다.
“하아아아!”
운소령이 든 검은 냉기 속성의 신병이기. 연속된 빙벽의 검(Sword of Infinity Frost)이다.
멀리서 검기를 쏘아 낼 때도 유효하지만, 지금처럼 진기를 잔뜩 품고 긁어 댈 때는, 가고일의 면역을 통째로 뚫고 들어가 타격을 입힌다.
-그아아아아!
온몸이 허옇게 얼어 가며 마비되는 가고일.
자잘하게 진동하는 운소령의 검은, 계속해서 놈의 면역을 흐트려뜨려, 결국에는 완전히 파훼해 버렸다.
가각가각. 빠지지직!
냉기 속성의 무구는 대단히 귀하고 값이 비싸다.
단순히 냉기 대미지 외에도 상대를 얼어붙게 만들어, 움직임을 둔화시키기 때문이다.
운소령의 검에 면역이 완전히 날아간 가고일은, 더 이상 날지 못했다.
온몸이 허옇게 얼어붙어 그대로 추락했고, 뻣뻣하게 굳은 몸은 약점도 가리지 못했다.
“흡!”
운소령은 멈추지 않았다.
가고일의 핵이 있는 목젖, 거기로 향하는 길이 열린 걸 보고 재빠르게 달라붙었다.
후욱!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분명히 위로 뿜었던 가고일의 불길이, 갑자기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피해 낸 줄 알았던 공격이, 방향을 틀어 운소령의 뒤를 노렸다.
“……!”
피할 방도가 없었다. 마무리 지을 기회라 보고 이미 전력을 썼던 운소령이다.
기울어진 몸의 중심을 바꾸는 데만도 반 초는 걸린다. 완벽한 무방비의 순간.
퍼어어엉!
폭음과 함께 화끈한 열기가 엄습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아프지 않고, 별로 뜨겁지도 않았다.
발이 지면에 닿는 그 순간까지.
“하하하! 맞혔다!”
“……?”
쉬이익! 펑! 펑!
그리고 허공을 질러가 폭발하는 철의 탄환.
소진이었다.
이제껏 정령의 벽에 몸을 숨기고 있던 그가, 운소령의 위기를 보고 재빠르게 뛰쳐나와 석궁을 갈긴 것이다.
-크아아아아아!
단 세 방의 폭염.
하지만 그 위력은 운소령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가뜩이나 냉기 공격에 저항력이 박살 나고, 얼음보다 더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가고일은, 벽력탄의 폭발과 백린의 화염을 맞아 급속하게 팽창하기 시작했다.
“운소령, 끝내!”
소진의 말에 운소령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콰드득! 우드득!
금속은 급작스러운 온도 변화에 약하다. 얼어서 쪼그라든 몸이 불길에 달궈지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쨍그랑! 쩡! 쩡!
엘리트 가고일은, 이제 싸울 의지를 잃었다. 날개고 팔이고 와작와작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약점인 목젖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흡!”
탁! 쇄애애애액-!
오랜만에 지면을 밟은 운소령이, 용수철처럼 치솟았다. 새하얀 섬광이 직선을 그리며, 가고일의 목에 꽂혀 들었다.
“크아아아아!”
콰득. 콰득. 쨍그랑!
마지막 단말마와 함께, 엘리트 가고일의 몸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금속성이 울리고, 죽은 가고일의 몸이 파편처럼 튕겨 날았다.
“하아. 하아.”
운소령은 상기된 얼굴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정말 위험했다.
전력에 넣지 않았던 소진. 그가 아니었다면 분명 그녀는 죽거나, 혹은 회복 불가의 치명상을 입었을 터.
“…고마워. 소진.”
“에이. 뭘. 운으로 맞힌 거야. 운으로…….”
“아니. 운이 아니었어.”
머쓱하게 웃는 소진에게 운소령이 다시 말했다.
이번엔 그녀도 진심이었다.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소진은 필요할 때에 활약했다.
단순히 도움받은 고마움뿐만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그는 잘해냈다.
“크. 흠! 이제 두 마리 남았…….”
그녀의 칭찬에 소진이 괜히 어색해지자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한 마리다.”
콰지직! 쿠쿠쿵!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가고일 하나가 부서졌다. 산산이 깨어진 몸이 요란한 금속음을 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
“대체…….”
소진도 필리아도 입만 크게 벌렸다.
학급 최우수생인 운소령. 그녀가 죽기 살기로 상대해서 겨우 쓰러뜨린 엘리트 가고일.
이한은 그 두 마리를 동시에 상대하다가, 하나를 박살 내 버리기까지 한 것이다.
“휴… 아슬아슬했어.”
전혀 상황에 맞지 않는 말까지 내뱉으며.
* * *
운소령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도 상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상대는 무려 엘리트 가고일이다.
자신도 한 마리를 겨우 처리했고, 그나마도 소진의 도움이 없었다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졌을 터였다.
그런데 이한은 홀로 한 놈을 처리했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두 마리가 달려들었는데도 저렇게 한 녀석을 제거한 것이다.
“대체 어떻게…….”
너무나 급박했던 상황이라 이한이 어떤 식으로 제거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건 필리아와 소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방비와 운소령 보조를 하느라, 이한을 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운소령도 한 마리 처리했으니까, 그다지 놀라진 않겠지. 암 그렇고말고.’
천마는 모두가 놀라는 광경을 보고 다르게 해석했다.
저 녀석, 생각보다 꽤 한다는 느낌 정도로.
그래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릴 수 있었다.
“자. 한 마리 남았으니 쉽게 처리될 것 같은데?”
“…음.”
운소령은 자초지종을 듣고 싶었지만, 지금은 남은 놈을 잡는 게 급선무였다.
“필리아!”
“알았어!”
촤아악!
필리아는 정령술을 전환했다.
상대의 수가 줄어든 이상 더 방어에 전념하지 않아도 되었다.
쑤욱! 쑤욱!
장벽이 사라지고 대지의 창, 뾰족한 종유석 여러 개가 솟아나 공중을 겨눴다.
-그오오오.
위기감을 느낀 것일까. 남은 엘리트 가고일이 급히 날아올라 벽에 달라붙었다.
촤르르륵.
그리고 작아졌다. 날개를 접고, 몸을 웅크렸다. 심지어 온몸의 비늘까지 좁고 빽빽하게 오므려져 있었다.
갑작스러운 태세 변경에 천마가 갸웃했다.
“뭐야. 저거? 살려 달라는 건가?”
“…돌격 태세야.”
소진이 답했다.
파티의 시선이 모이자, 소진은 계속 말을 이었다.
“온몸을 움츠리고, 힘을 모으고 있다가, 기회다 싶은 순간 몇 배로 빠른 속도로 날아와. 조심해야 돼.”
“누가 그래?”
“어, 음. 책에서 읽었어. 제목이… 「나는 가고일과 싸웠다」 던가? 그거 4장 23쪽.”
피식.
소진다운 설명에 파티원 모두가 웃음을 지었다.
“그럼 뭐. 틈을 안 주면 되죠.”
필리아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듯, 한발 나섰다.
그녀가 살짝 손을 들어 무언가 집중하는 듯하더니.
“대지의 창!”
쫘아아악!
이미 준비되어 있던 정령술.
날카로운 종유석이 일제히 길게 뻗어 나갔다. 엘리트 가고일은 몸을 틀어, 날아오는 창에 비스듬히 방어각을 세웠지만.
“대지의 창!”
퓩!
진짜 공격은 반대쪽이었다.
놈이 달라붙은 벽에서 또 하나의 창이 튀어나와 그대로 가고일의 등을 관통한 것이다.
-크아아아!
몸이 꿰뚫린 엘리트 가고일은 크게 휘청거렸다.
퍼덕. 퍼덕.
균형을 잡으려고 날갯짓을 하지만, 그 가슴에는 굵직한 돌창이 박혀 있다. 무게중심이 흔들리니, 공중에 떠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기만 했다.
“소진, 네가 마무리 해.”
“응.”
이한의 말에 소진이 끄덕였다.
몸이야 이 중에서 가장 약하지만, 무장만 놓고 보면 그의 기계 활은 최강이라 할 만하다.
특히나 지금처럼, 허공에서 무방비 상태로 있는 녀석은, 석궁 사수에게 너무도 이상적인 과녁이었다.
딸칵 피이이이이-.
소진이 조작하자 석궁에서 기이한 소리가 울렸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약실이 개방되고, 일순간에 석궁의 현에 다섯 개의 백린탄이 동시에 장전되었다.
소진은 엘리트 가고일의 목젖, 놈의 핵으로 알려진 곳을 향해 정확히 석궁을 겨냥했다.
타다다다닥!
콰콰콰아앙!
그리고 전 탄 명중.
다섯 개의 백린탄이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폭발은 다른 폭발을 집어삼키고 더욱 커졌고, 광장 전체가 거인의 손에 후드려 맞은 듯 출렁거렸다.
꽈르르릉! 쿠쿵!
단 하나로 뭉친 폭발은 끔찍한 충격파를 터뜨렸다. 운소령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고, 필리아는 아예 귀를 막고 비명 질렀다.
“귀청… 찢어지는 것 같아!”
“잠깐! 저것 봐!”
철렁. 좌르르륵.
산산조각이 난 엘리트 가고일이 금속성을 내며 잔해를 우수수 떨어뜨렸다. 그러더니.
찰랑!
갑자기 쏟아지던 잔해가 증발하고 묘한 기음과 함께 빛 덩어리 하나가 떠올랐다.
놀랍게도.
아이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