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마시(魔矢)의 존재 (2)
‘이건 진화도(進化圖)야.’
소진은 벽화를 집중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석조 가고일이 불타는 채로 부서지고 모습.
벼락에 맞거나, 브레스, 마법에 맞는 동장이 그려져 있다.
그것이 점점 강해지고, 변화해 가는 과정을 그린 그림.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했던 일행들이, 소진의 해석을 들으며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보다 보니 정말 뭔가 의미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잠시만, 내가 집중할 수 있게, 조용히 좀 해 줄래?”
소진이 한참을 벽화를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운소령이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왜 그래?”
“…여긴 유적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유적지?”
보통의 던전은 기존 공간에 비이상적인 마력치가 쌓여, 생성된다.
한데 그런 던전 중에는 드물게도 고대나, 혹은 다른 차원의, 미지의 지식이 발견되는 곳이 있다.
이런 경우 해당 던전은 ‘유적’ 판정을 받는다.
필리아가 곧장 의문을 제기했다.
“지나친 생각 아닐까요? 여긴 2학년생 수행 평가 던전이에요. 가고일이 일반인에겐 까다롭긴 해도, 위험 등급 수준은 5급, 6급 정도이고.”
천무학관이 카르삭 왕릉을 수행평가 던전으로 삼은 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동안 수많은 학관생들이 지나갔고, 던전 키퍼(관리자)들도 상주하는 곳이다.
뭔가 대단한 것이 있다면 발견되었어도 진작에 발견되었어야 한다.
“맞아.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역대 최우수점이 될 수도 있어. 여길 지나간 수많은 학관생들이 눈치 못 챈 걸, 우리가 발견한 거니까.”
“…가능성은 낮지만, 그렇다고 무시하기엔 매력적이네. 좀 더 둘러봐.”
운소령의 말에 필리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진이라면 자신들이 모르는 뭔가를 찾아낼 것도 같았다.
“…흐음.”
한편, 천마는 가운데 놓인 석관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역사든 뭐든, 그림의 순서는 난잡하고 어지러웠다. 무슨 내용인지 그로서는 짐작도 안 갔고 흥미도 없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석관에 음각된, 작은 형상이 눈을 잡아끌었다.
그건 가고일도, 드래곤도 아니었다.
생긴 모습은 인간이었는데, 뼈와 피막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달려 있었다.
‘이놈이구나…….’
햇살을 배경으로 얼굴이 가려진 그는, 커다란 활을 들고 있었다.
그건 천마가 소가백화점에서 본, 그 궁수였다.
“굉장히 섬세해…….”
소진은 벽화를 매만지고 있었다.
광범위하게 그려진 그림을 한 번 보고는 다시금 벽에 손을 가져갔다.
“이걸 그린 게 누구일 것 같아?”
운소령이 물어왔다.
소진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 저었다.
“일단 가고일은 아니야. 이 그림은 지성체의 흔적이야. 인간, 요족, 아니면 다른 차원의 엘프나 드워프. 오크는 이런 그림을 그리지 못해. 애초에 가고일의 이야기인데…….”
“가고일의 이야기를 가고일 아닌 자가 그릴 수 있는 건가요?”
필리아가 의문을 표했다. 거기서 소진이 천장의 정중앙을 가리켰다.
“다행히 딱 하나, 알아볼 수 있는 문자가 있어.”
“그게 어떤 거예요?”
“카르삭.”
“카르삭?”
“카르삭이라…….”
누군가의 이름, 수많은 관들, 그리고 경비로 세워진 석상들. 중원에도 이런 곳이 있다.
주로 왕릉이 그렇다.
위대한 왕의 살아생전의 업적을 추모하고, 사후에도 그 영광이 계속되기를 기원하는 묘소.
“그래서 카르삭 왕릉이라고 부르는구나……. 알아볼 수 있는 문자는 하나고, 모양이나 쓰임새는 영락없이 왕릉이니까.”
여러 가지를 알게 된 시간이었다.
운소령도, 필리아도, 소진도 뭔지 모를 감상에 젖어 들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여기가 단순한 던전이 아니라, 한 종족의 왕을 추모하는 곳이었다는 것에.
물론 그런 감상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 있었다.
그그긍.
“그럼 이 안에 그 왕이 있었다는 얘기야?”
“이, 이한!!!”
운소령이 물을 때, 소진이 고개를 홱 돌리며 질겁했다.
천마가 겁도 없이 중앙에 있는 석관의 뚜껑을 열어 버린 것이다.
무슨 기관이 발동될지도 모르는데.
“뭐야. 텅 비었구만.”
“이한, 너 뭔 일이 일어날 줄 알고 그래! 함정 같은 게 터지면 어쩌려고?”
소진이 천마에게 급히 다가가며 외쳤다.
하지만 천마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런 게 있다면 진작에 발동했겠지.”
“이번엔 이한 말이 맞아. 지나간 학관생이 몇인데?”
거기다 운소령이 거들자 그제야 소진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듣고 보니 그도 그럴 듯한 것이다.
“안에… 아무것도 없어?”
이후, 조금 진정이 가라앉자 소진은 빼꼼히 석관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는 것이 많은 만큼 궁금한 것도 많은 것이다.
“뼈다귀 하나 없네.”
천마가 흥미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검은 석관은 대단히 소박했다.
왕릉에 흔히 있을 만한 부장품 같은 건 물론이고, 흔하디흔한 문양이나 그림 같은 것도 없었다.
화려함이라곤 전혀 없는 평범한 석관. 카르삭 왕릉의 전체 크기나, 이제껏 지나쳐 온 석조 기둥, 천장, 벽화를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유해가 없는 거야 누군가 도굴해 갔다 치더라도, 묘소에서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건 관인 법.
그런데 그 관이 지나치게 조촐한 것이다.
“조사할 것도 없네. 이래 가지곤.”
운소령이 말하자 필리아도 동의했다.
“조사관들이 얼마나 조사를 했겠어요.”
“그럼 일단… 적당히 아무거나 하면서 기다리자. 아까 그 괴물은 조교가 어떻게든 할 테고, 우리는 이미 엘리트 가고일 세 마리를 처치했으니.”
수행평가는 완료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엘리트 가고일을 3마리나 잡았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고득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끝인 거야?”
그런 와중에 천마가 불쑥 물었다.
자신의 목적은 애초부터 저 정체 모를 궁수에게 향해 있었다.
그런 와중에 가고일을 상대하느라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제야 꽤 세보이는 몬스터가 나타났다.
“…응. 끝이야.”
“그건 모르지.”
천마는 아쉬움이 담긴 말이었는데, 그들에게는 걱정스러운 질문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까 상대한 머리 둘 달린 트윈헤드 가고일, 그놈은 말 그대로의 괴물이었다.
자신들은 적시에 조교가 개입해서 무사했지만, 조금만 늦었어도 누군가는 명을 달리했을지 모른다.
“음… 어, 여기 무슨 열쇠 구멍 같은데.”
“응?”
대화를 나누던 도중 석관 안에서 소진이 뭔가를 발견했는지 부스럭거렸다.
천마는 자연스레 고개를 까닥해서 석관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관 바닥을 톡톡, 두드리고 만져보는 소진.
“열쇠 구멍이라고?”
“어… 음… 아닌가? 살짝 그런 느낌이었는데…….”
그그극. 그그그극.
그가 만지는 곳의 석판은, 빡빡하지만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가운데에 묘하게 생긴 구멍을 두고.
크기는 어린애 주먹만 한, 둥근 구멍이었다.
“…너무 낡아서 모르겠네. 서역식 금고 중에 그런 게 있거든. 열쇠를 꽂아서 돌리는 거.”
“바보야. 그게 어디가 열쇠 구멍으로 보여? 그냥 돌 떨어져 나온 흔적이지.”
필리아가 피식 웃었다.
소진이 어, 하고는 끄덕였다.
어린애 주먹만 하게, 그냥 푹 팬 구멍.
확실히 이런 류의 열쇠라고 하면, 개나 소나 다 열었을 터였다. 그냥 비슷한 돌덩이 하나 꽂아 넣어서 돌리면 될 테니까.
“미안. 내가 잘못 봤나 봐.”
“…….”
소진은 멋쩍은지 짧게 웃었지만, 천마는 아니었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 구멍을 유심히 살폈다.
검은 구멍.
바닥의 석판 전체가 검어서 얼핏 보면 잘 보이지도 않는 구멍인데 이렇게 보고 있자니 묘하게 거슬렸다.
분명 뭔지 모르겠지만 이것 비슷한 걸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가만있어도 검게 그림자가 지는.
희미하게 무언가가 느껴지는 구멍.
“그나저나. 너, 이번 평가에 돈 많이 썼지 않아?”
“으응… 마정석이 좀 비싸긴 해. 하지만 다른 애들도 다들 그 정도는 썼을걸?”
“……?”
거기서 필리아와 운소령의 말이 천마의 뇌리를 자극했다.
마정석.
바로 그 말이.
천마는 손을 내밀어 구멍을 매만져 보았다. 그러자 손끝을 타고 익숙한 느낌이 느껴졌다.
“가만, 이거…….”
스르륵.
석판에서 그림자가 묻어났다. 만져보고 나니 의심은 확신이 섰다.
검게, 그림자가 지는 돌.
‘…네크로맨서 놈 거잖아?’
이 석판은 그놈을 잡고 얻은 흑요석과 같은 종류였다.
* * *
사사삭.
왕릉 입구에 지어져 있던 임시 막사 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디론가 빠르게 움직이는 이들.
그리고 급히 뭔가를 집어 들고 말을 타고 이동하는 자들.
그런 부산한 가운데 매우 빠른 속도로 임시 막사에 들어선 이가 있었다.
“그래, 어떻게 되었나?”
막사 입구 쪽을 바라보던 허각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그의 옆에는 남소천군이 함께 있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허!”
“후우.”
그제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운은 북쪽 광장을 맡고 있는 4년 차 조교다.
검술은 물론이고, 마법에도 능통해 조교 중에서도 제법 손꼽히는 자.
내년에 천무학관 무공학 교관으로 승진을 남겨놓은 그가, 이변에 큰 변을 당한 것이다.
“하면, 트윈헤드 가고일은 어찌 되었나?”
조교의 생사가 확인되자마자, 남소천군은 급히 물었다.
4년 차 조교를 죽음의 위기까지 몰고 간, 그 정체불명의 몬스터에 대해서.
“무공학 조교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하면, 도망친 건가?”
“그런 듯합니다. 직접 교전했던 한운의 말에 따르면, 자신에게 더 큰 치명상을 입힐 기회가 있었지만, 그 녀석은 싸우지 않고 천장으로 스며들어 갔다고 했습니다.”
“크음.”
허각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
단일 객체인 가고일이 합쳐진 상태로 나타나다니.
이는 다른 많은 던전 정보를 다루는 학관 내에서도 들은 적이 없었다.
“학관 안에 있는 아이들은 어찌 되었나?”
허각이 다시 물었다.
“다행히 한운 조교가 5번째 광장에 대피시킨 모양입니다. 모두 안전하게 밖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사건 보고는 누가 하러 갔나?”
“장훈 조교가 급히 학관으로 움직였습니다. 오늘 내로 교무처장께 보고 사항이 전달될 겁니다.”
“흐음.”
허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침묵했다.
마음 같아선 그놈을 불러내 처리하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여긴 천무학관의 자산 중 하나인 던전.
이런 특이한 동향 보고는 학관 내에 필수였다.
처우 방향은 그다음 몫이다.
“어떻게 합니까?”
“우선 정해진 지침을 따라야지.”
급한 불은 껐다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었다.
그 숨어 있는 놈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
“자넨, 아직 남은 학관생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내게. 북쪽에서 나타났다면, 동쪽, 남쪽 가릴 것 없이 죄다 나타날 가능성이 있으니.”
“알겠습니다.”
그는 읍을 해 보이며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제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허 교관, 한운 조교라면 초절정에 근접한 자가 아닌가?”
천천히 따라 앉던 남소천군이 그를 향해 말을 걸었다.
“예. 거기다 4서클 마법도 쓰지요. 장래가 유망한 청년입니다.”
“그런 사람이, 아무리 트윈 헤드라지만, 놈을 퇴치하긴커녕 부상을 입고 간신히 몸을 뺐다니. 듣고도 이걸 믿어야 할지.”
“최소 위험 등급 8급 이상이라고 봐야겠지요.”
허각도 남소천군과 같은 마음이었다.
처음 보고받을 때는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제법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제아무리 특이 변종이 튀어나온다 하더라도 한운은 천무학관의 조교 4년 차다.
위험 등급 8급 이상이 아니고서야 그에게 그런 상처를 줄 수 없었다.
“정말로, 카르삭 왕릉에 우리가 모르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군.”
남소천군의 말에 허각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못했다.
이제껏 수년에 한 번씩 가고일의 개체 수가 하나씩 늘고 있었지만, 이는 꼭 위험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오래된 던전에, 마력이 과도하게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경우도 제법 있었으니까.
대개의 경우는 몇 번 강한 몬스터를 토해 내고 나면,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곤 했다. 하나 불행히도, 아무래도 이번에 일어난 변고는 그런 경우가 아닌 모양이었다.
“어차피 폐쇄는 정해진 수순이었네. 생각해 보면 학과장께선 이미 일이 이리될 줄 알고 계셨던 건지도.”
“그렇군요…….”
남소천군의 말에 허각은 동의했다.
아무래도 좋은 던전을 없애 버린다는 아쉬움에, 그동안, 너무 낙관적으로 보려 했었음을 인정했다.
“그런데 선배님, 마력의 변화로 이런 혼종이 튀어나오는 곳을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어떻게 될까요?”
“무슨 뜻으로 묻는 건가?”
“그냥 궁금증이 생겨서 말입니다. 학과장님이 처리하시지 않고 왕릉의 마력이 계속 치솟으면, 대체 얼마나 강한 놈들이 튀어나올지 궁금해져서 말이지요.”
카르삭 왕릉의 처우가 정해지자, 허각은 뒤늦게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호승심이기도 했고, 호기심이기도 했다.
무인으로서 강한 몬스터를 상대하고 싶은 욕망, 그리고 몬스터의 새로운 갈래를 알고 싶다는 던전 키퍼로서의 욕구였다.
“나도 모르지. 계속 그리되면… 정말로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게 될지도.”
남소천군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한때 피 끓는 젊음이 있었고, 던전 키퍼로서 저런 호기심은 당연히 갖추어야 하는 것이었기에.
“어떤 걸 말입니까?”
“뭐, 간단하네. 생각해 보면 말이지. 이 왕릉이 발견될 때…….”
입술을 강하게 말던 그는 이내 허각을 한 번 지그시 응시하고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던전을 카르삭 왕릉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실상 그 안에서 ‘왕’을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