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카르삭의 등장 (1)
천마가 흑객을 데리고 돌아왔을 때는 철수가 상당히 진행된 뒤였다.
군영은 텅 비어 있었고, 던전을 관리하는 키퍼도 눈에 띄게 부쩍 줄어 있었다.
“…여기가, 카르삭의 왕릉입니까?”
조금 떨어진, 숲속에서 몸을 은폐시키고 있던 흑객이 물었다.
신전을 연상케 하는 크게 높은 탑.
크고 작은 구조물들이 신비하게 느껴졌다.
“그래. 저곳이지.”
천마는 주변 상황을 잠시 살펴보았다.
꼼꼼하게 보지 않아도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는 짐작은 갔다.
수행평가를 위해 남겨 둔 약한 던전에서, 공략 대상에도 없는 특이종이 튀어나왔다.
발칵 뒤집혔을 거란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은밀히 들어가자.”
“…아직 사람이 있는데요?”
흑객의 말처럼 주변을 순시하는 이들이 있었다.
폐기 처분 할 던전인 만큼, 중요 기물은 철거했지만, 아직 순찰 인원들은 남아 있던 것이다.
“그 정도는 알아서 뚫어. 따라와.”
핏.
말이 끝나자마자, 천마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너무 빨라 흑객의 눈이 좇지 못한 것이다.
“실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흑객은 혀를 내두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 역시 어둠 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 * *
자박. 자박.
천마와 흑객은 조심스레 첫 번째 광장을 지났다. 발치에 걸리는 것들은 원래 가고일이었던 돌 부스러기들.
리젠이라고 하던가.
한 번 가고일이 나타나고 그놈을 처리하고 나면, 다시 다른 석상이 가고일로 변할 때까지 일정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직전에 놈들을 처치해 버렸기에, 아직 가고일이 나타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두 번째. 세 번째.
그렇게 네 번째 광장에 들어선 뒤 흑객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머리 두 개 붙은 가고일이 나타났다는 말입니까?”
그는 등급이 높은 용병이다. 당연히 수많은 던전과 몬스터를 상대해 본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견문이 좁지 않음에도, 머리 둘 달린 가고일이라는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최소 오거 정도는 되어야 가끔 나타나는 별종이, 고작해야 2학년 수행평가용 하급 던전에서 나타나다니.
“우선, 저기 봐.”
천마가 위를 가리키자, 천장의 기이한 그림들이 흑객의 시야에 들어왔다.
“진화도군요.”
흑객은 소진이 말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했다.
“너, 알아?”
“보통 왕릉 같은 곳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벽화지요. 그리고 그림을 보면 이 던전의 생성 과정이나 유래의 진화를 볼 수 있습니다.”
“저기서 나왔어. 대가리 둘 달린 놈이.”
“…그림에서요?”
흑객의 표정이 굳었다.
‘하긴, 우스겐 던전의 경우도 있기는 했지˪ 그런데 그 경우엔 철저하게 그림 그대로였는데… 제멋대로 변하다니.’
혼자서 중얼거리던 흑객이 재차 물었다.
“정확히 보신 겁니까? 원래 두 마리가 하나로 합쳐져 있는 그림 아니었나요?”
“내가 그런 걸 헷갈리겠냐? 당연히 똑똑히 봤지. 저기 저 그림이… 어?”
-그오오오.
때마침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채광이 내리쬐듯, 천장에서 두 줄기 빛이 바닥에 내리꽂혔다.
“저건…….”
흑객은 똑똑히 보았다.
마법사에 의해 부서지는 가고일 그림 중, 가장 앞쪽에 있던 두 마리의 눈이 빛을 뿜고 있었다.
그리고.
-그아아아아아!
울음소리와 함께 두 마리가 합쳐진 가고일이 그림에서 빠져나왔다.
허각과 남소천군이 있을 때는 반응하지 않았던 이들이 천마가 나타나자 움직인 것이다.
“이 녀석이 왕릉의 주인…….”
흑객은 그제야 확신했다.
등장하자마자 엄청난 위압감이 몰려왔다.
고작 위험등급 5등급 수준의 가고일이 풍길 기백이 아니었다.
이쯤 되면 가고일이 아닌, 가고일의 모습을 한 마수라 할 만했다.
“주인 아냐. 이놈은.”
철컥.
천마는 검을 꺼내 들었다.
시중에서 대충 사서 맞춘, 밋밋하고 볼품없는 이한의 검은 천마의 손을 따라 사선 방향에서 고정되었다.
-크아아아아!
트윈헤드 가고일의 눈빛은 이전보다 더욱 흉폭해졌다.
하나의 입엔 뜨거운 불꽃이 머금어져 있었고, 다른 하나의 입엔 푸른 냉기를 머금은 상태로 천마를 향해 수직 하강 했다.
“그냥 어중이떠중이 놈이고.”
그런 그를 상대로 천마는 가볍게 검을 허공에 그었다.
사락.
가볍게 그은 동작에서 생성된 희미한 기운.
그것은 트윈헤드 가고일과 가까워지자마자 흰 빛을 머금었고.
쿠오아아아앙!
그들과 부딪치자, 실로 거대한 강기(罡氣)로 변해 두 놈의 얼굴과 몸통을 완벽하게 양단해 버렸다.
“다음 방에 그 녀석이 있어.”
두두두둑.
“…아아.”
흑객은 입을 쩌억 벌렸다.
고용주의 무력이 자신보다 높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보여 준 것은 충격 그 자체였다.
강기.
절대고수들이 펼치는 강기를 그는 간단히 펼쳐 냈다.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집중하는 기색도 없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간 이한 흉내 내느라 죽는 줄 알았네.”
천마는 바닥에 떨어진, 가고일 머리를 밟으며 앞을 가리켰다.
빈 석관이 들어 있던 5번째 광장이었다.
“가자. 주인 놈 보러.”
* * *
왕릉의 중심. 5번째 광장은 동, 서, 남, 북문의 중심이라 그런지 이전 광장보다 훨씬 컸다.
‘정녕 극마에 오른 것인가…….’
천마의 무공을 본 흑객의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검기 발현도 아니고 강기라니.
내가기공을 무형의 검기에서 유형의 검기로 돌리기 위해선 경지를 몇 개나 뛰어넘어야 한다.
이름하여, 절대지경이라 불리는 극마가 그것이다.
‘어쩌면, 사부님과 비슷한 수준일지도 몰라.’
흑객은 태상장로 노달(老達)을 기억에서 떠올렸다.
본 교를 대표하는 극마의 고수로서 어릴 때부터 자신을 보살펴 왔던 분.
옛적에 극마의 경지를 뚫은 그를 떠올릴 만큼 고용주의 무위는 충격적이었다.
“뭐 해? 안 들어오고.”
천마가 한마디 하자, 그제야 흑객은 정신을 차리며 주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광대하게 그려진 벽화에 시선을 뺏겼다.
복잡하고 빽빽한 그림들.
이전 천장에서 보던 용과 가고일, 마법사뿐만 아니라, 인간과 뼈, 그리고 활을 쏘는 궁수들도 볼 수 있었다.
“이게 다…….”
흑객은 너무도 광대한 벽화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림을 이해해서가 아니다.
지식을 많이 쌓은 고고학자가 아니면 이 벽화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다만, 그가 알고 있는 것.
왕릉에 그려진 벽화들은 어떤 것이든, 후대에게 전달하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해석하기 어렵고 광대한 그림일수록, 선대가 가졌던 지식의 수준이 높다는 뜻이다.
때문에 모순이 생겼다.
가고일은 문자를 이해할 지능이 없다. 그 때문에 선대가 그림으로 벽화를 남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그 선대는 누구인가?
누구이길래 가고일의 역사를 가고일의 지능에 맞게 그림으로 그렸는가?
애초에 어려운 것을 쉽게 만드는 것은, 높은 성찰과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런 지능은……
가고일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었다.
“여기 석관 말이야.”
드르륵.
어느새 광장 중심으로 걸어가는 천마는 석관 뚜껑을 걷어냈다.
흑객은 급히 그의 뒤를 따라붙으며 물었다.
“여기에 그 흑요석이 쓰일 게 있다는 겁니까?”
그러면서 석관 안을 천마와 같이 바라보았다.
“그래. 이걸 여기에 넣으면…….”
천마는 어린애 주먹만 한 구멍을 가리키며, 들고 온 흑요석을 거기에 툭 넣어 보았다.
토옥.
“역시 정확히 맞구만.”
“…….”
그의 말대로 흑요석은 거짓말처럼 정확한 구멍에 딱 들어맞았다.
그런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흑객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재차 물었다.
“그게 맞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
“나도 모르지.”
“…예?”
“그냥 맞나 볼까 해서 가지고 온 거야.”
천마가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돌리자, 흑객은 맥이 탁, 풀렸다.
“하… 하하하하.”
그리고 그게 이상하게도 납득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고용주는 싸움만 좀 잘할 뿐이지, 뭔가 생각을 깊이 하는 녀석이 아니다.
‘가만…….’
흑객은 다시 흑요석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뭔지 몰라도 일단 일은 끝났으니 흑요석을 팔기 위해 챙기려던 순간, 그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스르르르륵.
석관이 아주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흑요석을 돌아가는 방향대로 한번 움직여 보았다.
그런데.
둥.
“……어?”
“……!”
천마와 흑객이 밟고 있던 지면이 약간 들썩였다.
그리고. 또 잠시 뒤.
쿠쿠쿠쿠쿵.
기관 진식이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강한 충격이 석관 주위에 전해져 왔고.
이내.
“…뭐야.”
“…헉!”
쿠아아아아아앙!
석판을 중심으로 반경 1장 이내의 땅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 * *
“크으으…….”
흑객은 충격에 지면을 손을 잡고선 신음을 내뱉었다.
대체 얼마나 아래로 떨어져 내린 걸까.
자신 같은 고수가 약간의 내상을 입을 정도라면…….
“백 장 정도 내려왔다.”
뿌연 먼지 속에서 그의 생각을 알기라도 하듯, 천마가 대답했다.
그는 너무도 여유로워 보였다.
땅이 갑작스럽게 꺼졌음에도, 어떠한 피해도 받지 않는 듯했다.
“어……?”
흑객이 정신을 차렸을 때, 점점 시야가 밝아지는 걸 보고 스스로 놀랐다.
위쪽의 구멍은 이미 닫혀 있었다. 설령 열려 있었다 하더라도, 지하로 백 장 가까이 내려왔다면, 절대로 빛이 들어올 수 없어야 했다.
“…야명주입니까?”
“아마도. 뭐, 불편했겠지. 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생활하기란 편한 게 아니니.”
“…생활? 여기 누가 있습니까?”
흑객은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곧 고용주가 말한 의도를 알아챘다.
눈앞에는 왕릉의 천장처럼 거대하게 높은 천고.
그리고 벽에는 엄청나게 많은 그림들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 벽화들은…….”
흑객은 벽화를 보고 말문을 막혔다.
이건 척 봐도 어떤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수많은 가고일.
석조 가고일, 강화 가고일, 엘리트 가고일.
그리고 그중에는 좀 전에 등장했던 트윈헤드 가고일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처음 보는 가고일 종도 있었고.
그 중심에는 모두가 가고일 날개를 한 괴물을 추앙하고 있었다.
“저, 저자가…….”
그때였다.
[어떻게… 인간 따위가 이곳에 들어온 것인가.]
흑객의 눈이 커졌다.
전령이다.
전음과 흡사하지만, 한 사람이 아닌 전체에게 보내는 능력.
그리고 애초에 말을, 의사소통을 한다는 건 보통의 몬스터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여기에 숨어 들어가 있었구만. 궁수.”
천마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너는 누구냐. 어떻게 나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지?]
보이지 않는 존재는 계속 말을 걸었다.
하지만 천마는 너무도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가 떨어뜨린 화살이 있었거든. 역시나 알아채기 힘든 이유가 이거였군.”
천마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의 몸에 흐르는 마공.
네크로맨서를 처리하고 얻은 흑요석엔 마공과 비슷한 흑마력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흑마력은 이 지하로 통하는 석관에도 깃들어 있었다.
어쩌면 마공, 혹은 흑마력은 같은 계열의 몬스터들 사이의 통행증 같은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리석은 인간이여. 어떻게 인과율을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모르나, 너의 그 호기심이 어떤 참혹한 결과를 불러들일지 알고는 있느냐?]
“그런 것까지는 내가 알아야 필요는 없고.”
천마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뚝뚝 소리 내며 말을 이었다.
“내 목적은 한 가지야. 나의 무공 정진을 위한 내단. 그게 지금 필요해서. 아, 그리고 아이템. 그것도 필요해. 센 놈일수록 값비싼 아이템을 준다고 하던데…….”
흑객은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 천마를 바라보았고.
“서로 시간 끌 필요 없이 그것만 줘. 그럼 나갈게.”
천마가 한마디를 더했다.
[크크크크…….]
웃음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소리를 내던 상대는.
[재미있는 인간이로군…… 좋다. 다만 그 전에, 그만한 자격이 되는지 한번 시험해 보지.]
그의 말과 함께 벽에서 약간의 흙먼지가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 설마. 아니겠지.”
흑객은 무시했다, 하고 싶었다.
자신의 짐작이 틀리기를.
하지만.
-그르르르르. 키이이이익. 카아아아아. 그아아아악!
지하 깊숙한 곳에 숨겨진 거대한 공간.
가고일 수백 마리가 그려진 빽빽한 벽화에서 하나둘씩 튀어나왔다.
석조와 강화 가고일 따위는 없었다.
대부분이 엘리트 가고일.
뿐만 아니라.
-크아아아아아아아!
특이한 개체의 가고일도 여섯 마리가 더해졌다.
천마뿐만 아니라 흑객 역시 처음 보는 개체.
최근에는 무림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에이션트(Ancient) 가고일도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