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카르삭의 등장 (2)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벽에 그려진 벽화에서 분신(分身)처럼 나타난 가고일들.
이건 본디 벽 안에 저 그림 형태로 숨어 있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 깨어난 현상이라고 봐야 했다.
흑객은 사방에서 쏟아진 가고일 중, 유독 묘한 기운을 가진 가고일에 눈이 갔다.
‘저놈은?’
체고는 고작 2미터.
엘리트 가고일보다는 작았다. 하지만 뭔가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흑객은 몰랐지만, 이 몬스터는 고대의 용종(龍種)의 피가 흐르는 존재.
에이션트 가고일이었다.
피부는 자체적으로 물리 저항력을 가지고 있고, 마법 갑옷을 입고 있는 개체.
용의 아종이기에 브레스를 뿜는, 위험 등급 8급으로 평가되는 몬스터.
그런 녀석들이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용병, 네가 나설 차례가 왔구나.”
“…예?”
“저놈들 대장이 시험해 본다잖아. 고작 시험 따위에 굳이 내가 나서랴?”
흑객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천마를 바라봤다.
“하지만, 고용주. 이 많은 녀석을 저 혼자 어떻게…….”
“허… 이 녀석!”
천마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더니, 이내 호통쳤다.
“고작 한낱 미물 따위에게 겁을 먹은 거냐? 날파리 같은 놈들을 상대로? 아. 하긴, 그러니 남궁호 같은 녀석에게 처맞고 다녔던 건가.”
“처맞진 않았습니다!”
-그오오오오!
팔락팔락.
때마침 발끈하던 흑객의 뒤에 있던 엘리트 가고일 수십 마리가 날갯짓을 했다.
말을 섞지 않아도 곧 덤벼들겠다는 의도를 내비쳤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처맞은 게 아니었나?”
“무기에 밀렸을 뿐입니다! 좋습니다. 내 실력이 어떤지는 직접 보시지요!”
철컥.
흑객은 분노를 머금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수십 마리의 가고일 무리 쪽으로 담담히 걸어갔다.
‘육십, 아니, 칠십여 마리…….’
말은 호기롭게 하며 당당히 나섰지만, 수십 마리의 가고일 떼가 주는 위압감은 실로 엄청났다.
더구나, 눈에서 쏘아지는 투기가 당장에라도 쏘아질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흑객은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자신 있었다.
남궁호와의 대련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에 정진했으니까.
“흡!”
흑객은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이내 가고일 무리 속으로 빠르게 뛰어 들어갔다.
-카아아아악!
수십의 가고일들이 달려들었다.
몇몇은 불을 뿜어내는 놈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구오오오오!
체격과 무게 차를 이용해 몸통으로 압살시키려고 달려들고 있었다.
그런데, 흑객을 단번에 깔아 죽일 것 같던 수십 마리의 가고일의 몸통에서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사사사사사삭.
이해할 수 없는 격자 무늬.
하나가 아닌, 달려든 수십 마리의 몸에 생기기 시작했고, 흑객의 지근거리까지 도착했을 때쯤.
콰아아아아아앙!
흑객의 검에서 미친 듯 솟아오르는 광풍과 함께 수십 개의 검기가 사방을 물들었다.
그 풍압에 휘말린 스무 마리는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날아온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두두두두둑.
더욱 놀라운 것은.
날아가는 놈들의 몸은, 언제 당했는지 조각조각 분리된 시체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오. 흑천부(黑天府) 마공인가?’
천마는 흑객의 검술을 보곤 자못 놀랐다.
검풍에 검기를 실은 뒤, 사방으로 뒤흔들어 날려 보내는 수법.
저건, 과거 마교의 지파라고 알려진 흑천부 마교도들이 자주 사용했던 마공이다.
‘2학년 학관생들과는 확실히 다르군.’
천마는 이제야 좀 구경할 맛이 난다고 생각했다.
운소령이 펼친 월녀검은, 처음엔 흥미를 당기긴 했지만 보다 보니 곧 답답해진 게 사실이었다.
아무리 초식이 미려해도 내공을 펼치는 힘이 약하니, 별것 아닌 공격에도 수세에 몰리지 않았는가.
그에 반해 흑객은 이미 저돌적으로 파고들어 제압하는 공격이 주를 이룬다.
민첩성도 그렇지만, 공격 수법이 마공의 패도적인 힘과 참 잘 어울렸다.
‘이리 보니, 학관생 실력은 아니야.’
천마는 흑객의 평가를 상향 조정 했다.
저 정도면, 처음 입구에서 자신들을 안내해 주던 교관이라는 녀석과 비교해도 그다지 밀릴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생각해 보면 그게 맞았다.
중원에서 최고의 학관이라는 천무학관. 여기에 입학하자마자 바로 4학년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더군다나 흑객은 용병으로 굴러먹던 몸이었다. 의뢰로 몸값을 쌓아 올렸다는 건, 실전 경험이 수도 없이 많고 온갖 악재에서도 살아남을 만큼 저력이 있다는 뜻이다.
즉, 기초가 부족한 걸 빼면, 천무학관의 교관으로 당장 올라서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
‘저놈은 어찌 상대할까?’
-그르르르르.
엘리트 가고일이 도륙되던 중에 천마의 시선은 그 너머를 보고 있었다.
진한 초록의, 온몸에 번들번들한 비늘이 덮인 에이션트 가고일.
그놈들이 무려 여섯 마리가 날갯짓을 하며 틈을 보고 있는 것이다.
흑객은 고개를 들었다.
그가 펼친 광풍살검(狂風殺劍)이 지나간 곳에는 토막 난, 가고일의 시체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덕분에 전의를 상실했는지 떼로 덤벼들던, 엘리트 가고일은 더는 달려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더 강한 적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오오오오!
울음소리가 들리자, 엘리트 가고일들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쉬이익!
그리고 덩치는 조금 작지만, 훨씬 위험해 보이는 에이션트 가고일. 그중 넷이 자신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이제 제대로 싸우겠군.”
트윈헤드 가고일은 고용주에게 단번에 죽임을 당했다.
이놈들은 척 봐도 그 이상.
고용주처럼 강기를 쓸 수 없는 자신에겐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거기다 숫자가 무려 네 마리다. 뒤에 남은 두 마리도 언제 가세할지 몰랐다.
-크오오오오!
-크아아아아!
생각할 틈은 없었다.
두 가고일은 자신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화아아악-!
다가오기 전, 불을 먼저 내뿜은 에이션트 가고일.
하지만, 움직임은 흑객이 더 빨랐다.
패애애액.
두 마리의 사이의 공간으로 돌진한 흑객이 좌우에 검기를 날렸다.
-커어어어어!
두 마리의 가고일이 몸이 기우뚱거렸다.
“칫!”
하지만, 목이 잘려나가진 않았다. 검기가 그들의 몸을 뚫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자세를 고치려는 그 잠깐의 틈을 비집고, 한 마리의 에이션트 가고일이 몸통 박치기를 시도했다.
콰아앙!
“윽!”
흑객이 충격으로 뒤로 밀려났다. 온몸이 진탕되는 기분이었지만 그럼에도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척에 있던 가고일 하나의 입가에 허연 서리가 맺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스으으으으으-.
“하앗!”
빙결 마법이 쏟아지는 가운데, 흑객이 곧장 맞받아쳤다.
소수마공.
극음의 정순함을 뽑아낸, 철원의 빙백신공과 비견된다는 마교의 대표 무공.
아니나 다를까, 4서클급 냉기 마법에 해당하는 냉기 브레스를 단번에 무력화시키며, 에이션트 가고일 머리를 얼려 버린 후 그대로 박살 내 버렸다.
‘억!’
하지만, 그건 또 다른 틈을 만들었다.
양쪽의 가고일이 몸통 박치기를 시도한 것이다.
다다닥.
흑객은 급한 나머지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하지만, 그건 외통수가 되었다.
무려 네 마리가 화염을 머금으며, 시간도 주지 않고 곧바로 쏘아 낸 것이다.
“…어?”
천마는 네 방향에서 쏘아진 화염에 직격당한 흑객을 보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분명히 정통으로 맞았다. 원래라면 피해가 제법 컸을 터인데.
쿠웅!
녀석은 쓰러지는 것이 아닌, 제대로 땅을 디뎠다.
“저 녀석… 드디어 익혔구만.”
천마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투욱.
지면을 밟고 내려선 흑객.
온몸이 그을린 상태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불꽃이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타오르고 있었다.
“이 자식들…….”
온몸에 타오르는 열기가 천천히 손에 모이기 시작했다.
혈수마공.
온몸의 열기로 상대의 열기를 제압한 뒤, 그 힘을 다시 쓰려는 수법이었다.
“모두 끝내 주마아아아!”
콰콰콰쾅!
흑객이 펼친 두 손을 통해 뻗어 나온 불길이 도합 네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에이션트 가고일 넷이 전부 크게 튕겨 나갔고, 그중 두 마리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겨우 남은 두 마리도 상태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흑객이 주변을 확인한 후, 재차 혈수마공을 사용하기 위해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러던 그때였다.
피이이익-.
시야에 가고일 하나가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이제껏 움직이지 않던 에이션트 가고일 두 마리.
그중 한 녀석이었다.
“컥!”
급히 검을 집어 휘둘렀지만, 이번엔 소용없었다.
놈은 상상 이상으로 속도가 빨랐고 거기다.
휙.
그 속도가 거짓말인 것처럼, 날개를 크게 펼쳐 잠시 멈칫해 일격을 피하고는.
패애액!
다시금 흑객의 머리를 향해 대가리를 겨냥했다.
콰가가각.
그 순간, 흑객의 기지가 발휘됐다.
가까스로 바닥을 굴러 가고일의 공격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하나, 위기가 끝난 건 아니었다.
‘한 놈이 더…….’
마침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날아오는 또 하나의 에이션트 가고일.
이번엔 흑객은 어떠한 방어도 하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콰드득!
살이 짓이겨지는 소리. 하지만 고통은 없었다.
“네 수준에선 나름 훌륭했다.”
“……!”
눈을 뜨자 천마가 앞에 서 있었다.
날아오는 가고일의 머리채를 쥐고서.
“하지만 혈수마공을 제대로 익히진 못했다. 본디 기를 주입 시키는 데 집중하는 게 아니라.”
화르르르륵.
천마의 손에서 점차 불길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가고일의 몸까지 옮겨 붙고 있었다.
“단전에 격발시키듯 힘을 뿜어야 해. 이처럼 말이야.”
콰아아아아아앙!
한순간, 손에 잡힌 가고일의 머리에서 불꽃이 격발했다.
전방에 있던 놈들뿐만 아니라, 불길은 전 방위로 뻗어 나가 폭발을 일으켰다.
-께에에엑.
-까아아아악.
에이션트 가고일 다섯, 땅에 쓰러진 두 마리는 물론이고 허공에 떠 있던 세 마리도 화마에 말려 단번에 모두 제거되었다.
“아…….”
흑객의 눈이 천천히 떨렸다.
두려울 정도의 압도적인 힘의 차이.
자신이 어려워했던 가고일들을 모두 쓸어버리고도 너무도 여유롭게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마치 하나의 거대한 산을 마주한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이쯤 되면 나와라. 준비운동은 여기까지 하고.”
파랏파랏.
천마의 말에 아직 살아남은 엘리트 가고일들이 날갯짓을 했다.
[…….]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곧 달려들 것 같던 가고일들이 천천히 뒤로 물러났고, 천천히 정면 위에서 나타나는 검은 그림자.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자가 있었다.
[열화(熱火)의 힘을 사용할 줄 아는 필멸자라. 인정하마. 너는 나와 싸울 자격이 있는 자로다.]
스스스스.
그림자와 함께 천천히 모습을 보이자, 흑객은 입을 쩌억 벌렸다.
고슴도치처럼 뻗은 하얀 머리. 파란 눈.
어깨가 떡 벌어지고 다부진 체격. 눈은 가늘게 찢어져 있었다.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2미터에 달하는 장궁.
롱 보우(Long Bow)를 든 몬스터.
등에 달린 가디언 날개가 위험 등급을 측정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그으으으으.
그와 함께 나타난 가고일은 더욱 특이했다.
이놈 또한 에이션트 가고일. 한데, 4단계 광장에서 나타났던, 트윈헤드 가고일처럼 머리가 두 개 달려 있었다.
이제껏 경험한 바로 짐작컨대, 에이션트 두 마리를 합한 것 보다 몇 배는 더 강해 보였다.
“오. 좀 세 보이는데?”
천마는 그의 등장에 즐거워했다.
그리고 저런 기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즐거운 듯 보였다.
[내 이름은 카르삭. 가고일의 왕이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그가 묻자 천마가 대답했다.
“천마.”
“……?!”
흑객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천마라니.
하지만 그 뒤의 얘기는 더욱 충격이었다.
“그게 내 이름이다. 천마신교의 천마. 이 땅에 불꽃의 가르침과 마공을 알린 자. 이 정도면 상대할 만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