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카르삭의 등장 (3)
대격변의 날.
리치왕이 잠든 후. 십수 년 동안 무림에 밀어닥친 전란을 일컫는다.
그린스킨의 수장 아락취.
데스나이트의 수장 칼베스 폰 운터마임.
가디언의 수장 링가드.
네크로맨서의 수장 메피스토.
리치왕 직속 4대 수호장들.
그들은 이전 차원 그라나다보다 열 배에 가까운 생명이 숨 쉬는 땅, 새로운 세상에 전율했다.
-주군이 일어나셨을 때 아무것도 한 게 없어서야 체면이 서지 않는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메피스토였다.
무한한 좀비와 해골 전사를 뽑아낼 수 있는 네크로맨서들, 그들이 파도처럼 쏟아져 나가고 나서 힘을 회복한 데스나이트들이 뒤를 따랐다.
- 과연, 이 세계에는 어느 정도의 강자가 있을까!
아마 거기에는 사자(死者) 특유의, 생명체에 대한 증오와 질시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죽은 자들의 허기가 끝없이 자극하는 수많은 생명들에 자극받은 것이다.
반면 아락취는 움직이지 않았다.
- 정예의 그린스킨은 여기에 남으라, 주군이 일어나실 때까지. 그 외의 그린스킨은 저 머나먼 땅을 개척해라. 우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군단을 만든다.
인간을 싫어하지만, 그래도 생명체인 그린스킨들.
오크, 트롤, 오거들은 풍요로운 초록의 대지에 집을 세우고 군영을 만들었다.
반면 가디언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링가드의 휘하는 반으로 갈렸다.
- 우리는… 기다리겠다.
일부는 고고한 석상이 되어, 백 년 단위의 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일부는 앞서 뛰쳐나간 언데드 군단이 지원을 요청하면, 그에 달려 나가 돕는 쪽이었다.
그중 ‘카르삭’은 수호장 링가드의 휘하 중, 가장 혈기왕성한 이였다.
-힘을 아껴라, 카르삭.
-걱정 마십시오, 링가드 수장. 리그웨더라도 나타나지 않는 이상, 저를 막을 자는 없습니다.
-적은 골드 드래곤만이 아니다. 이 세계… 중원인인지 강호인인지 하는 자들은, 우리가 살던 세계의 기사들과 전혀 다른 놈들이다.
기세등등한 어린 가고일의 왕에게, 링가드는 조심스레 경고했다.
카르삭도 처음에는 그 경고를 가슴에 새겼다.
하지만 수십, 수백 번에 이르는 연전연승은 어린 왕을 천천히 방심시켰다.
그리하여 결국.
-아미타불!
-아미타불!
-크아악! 이 계집들이!
불행히도 그는 사천의 아미파라는 곳에서 패배를 맞이했다.
허약하고 깡마른 여승들은 기이한 신성력을 뿜어냈고, 강철보다 단단했던 데스나이트들은 잿더미가 되어 흩어졌다.
“일어나라! 나의 무덤이여! 내 저주받은 피의 이름으로!”
하지만 카르삭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후의 힘을 끌어냈다.
부정한 성역(Unholy Sanctuary).
가디언 일족에서는 어린 축에 속하지만, 카르삭 역시 엄연한 왕.
가고일은 애초에 드래곤의 아종(亞種)이었다.
존재 자체가 법칙인 드래곤, 그 피가 흐르고 있기에 카르삭은 자신을 수복하고 회복시키는 성역을 만들 수 있었다.
“힘이… 힘이 필요하다.”
하지만 땅에서 솟아나는 음기만으로 회복하기엔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렸다. 카르삭은 대지에 스민 어둠을 모아, 아군을 부르는 표식을 만들었다.
링가드가 수장인 이상, 안타깝게도 같은 가디언은 조우하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그 대신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상위종 언데드를 부를 수 있는 흑요석의 석관을 장비했다.
그렇게 수십 년.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예상했던 대로 음차원의 마나가 보충되었다.
한데 그 힘을 전해준 것이 가디언도, 네크로맨서도 아닌, 한낱 필멸자라니.
[천마라 하였는가. 묻겠다. 네가 어찌 음차원의 마나를 지니고 있는 것이지?]
카르삭은 기이하게 여겼다.
그가 만든 문은 흑마법, 어둠의 일족이 사용하는 음차원의 마나가 있어야 발동이 가능한 장치였다.
그래서 네크로맨서, 아니면 메피스토와 계약한 흑마법사가 들어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아니었다. 상대는 분명 어둠의 마나를 쓰고 있긴 했었다.
그럼에도 자세히 보니, 카르삭이 아는 어떤 흑마법과도 다른 힘이었다.
“음차원의 마나?”
[…모르는 건가. 기이하군. 그런데 어째서…….]
“아, 혹시 줄기차게 뼈다귀들 우르르르 소환하던 그놈 말하는 거냐? 청명인가 하던?”
[…너, 설마!]
카르삭의 눈빛이 고요해졌다.
청명 진인. 곤륜파라는 무인 집단의 수장이자,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탄생한 네크로맨서이자 데스나이트.
아무리 서로 다른 수호장을 따른다 해도, 청명 진인의 존재만은 카르삭도 알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청명은 데스나이트 칼베스가 최초로 ‘쓸 만하다’는 평을 내리고, 그가 수하로 삼으려는 것을 메피스토가 낼름 잡아채는 촌극의 주인공이었으니까.
덕분에 의문은 풀렸다.
눈앞의 상대는 청명을 파괴하고, 그 사체에서 얻은 핵으로 카르삭에게 접근한 것이다.
[확실히 자격이 되는 녀석이었군. 그럼 우선 귀찮은 놈부터 제거하는 게 맞겠지.]
“무슨 말이냐?”
천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뜬금없이 귀찮은 녀석을 제거한다니.
처억.
카르삭이 등에 멘 활을 집어 들었다.
스스스슥.
그리고 초점 없이 검은 연기만 나오는 눈을 조금 위로 들고, 검은 화살을 잰 활을 위로 겨냥했다.
이 뜬금없는 행동에 천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뭐 하는…….”
[Der Freischütz: 마탄의 사수]
피유유육!
물음은 소음으로 끊겼다.
카르삭이 당긴 활을 쏘자, 시커먼 화살이 파공음을 내며 천장으로 날아갔다.
뒤이어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슈우욱! 휙! 슈우욱! 휙!
분명히 천장으로 날던 화살이 난데없이 사라졌다.
핏! 핏! 핏! 핏!
그리고 깜빡깜빡 점멸하며, 가고일 앞으로, 천마의 머리 위를 지나.
퓨욱!
“컥!”
흑객의 가슴을 정통으로 꿰뚫었다.
“…이 뭔!”
팟!
천마는 급히 달려가, 힘없이 쓰러지는 흑객을 부축했다.
팟. 팟. 팟!
사람 하나를 안고, 한 번에 일 장씩.
단번에 삼 장 거리를 확보한 천마는 재빠르게 흑객의 몸 상태를 살폈다.
“인마! 괜찮 ……이런. 안 괜찮네.”
그러고는 그의 몸에 파고든 물체를 내려다보았다.
지이이이이..
기분 나쁜 어둠을 피워 올리는 화살.
독인지 저주인지 모를 뭔가 나쁜 게 서린 그것은, 정통으로 심장에 박혀 있었다.
“이 빌어먹을…….”
씨이잇!
그리고 천마가 뽑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마치 도망치기라도 하듯 어둠 속으로 녹아든 것이다.
[동료애라는 것인가. 후후후. 걱정 말거라. 곧 너도 저렇게 될 것이니.]
“…….”
카르삭의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천마는 무시했다.
그는 오로지 흑객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흑객의 정신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크… 고용주…….”
흑객 또한 천마를 보고 있었다.
화살이 사라지자, 꿰뚫린 심장이 피를 뿜어냈다. 흑객은 그런 상처를 안간힘을 다해 눌렀다.
그리고 그건 살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다.
“그 말이… 사실입니까?”
어떻게든, 물음을 던질 몇 초를 더 벌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뭐가 말이냐?”
“천마. 본 교의 개파조사이시자, 전무후무한 무신(武神). 무위는 하늘에 닿아 대천마(大天魔)라고 불리고……. 언제고 천마신교가 길을 잃으면 다시 오신다 하신, 그분이 당신이 맞으십니까?”
천마는 대답이 없었다.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흑객은 얼굴은 오히려 밝아졌다.
“처음부터 이상하긴 했습니다. 본 교의 실전된 마공을 알고 계시는 것하며… 정말, 정말로… 그리웠습니다.”
그리고 환희에 휩싸인 듯한 얼굴로 천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껏 목숨 바쳐 천마신교에 봉사해 왔지만,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흐려지는 교의 명맥을 어찌 이어 나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
“흑혈단주께서 계시지만, 안타깝게도 역부족… 저희는 그저 기도하며 기다려 왔습니다. 언제고 이 혼란을 헤치고… 우리를 이끌어 줄 분이 나타나 주시길.”
“…더는 말하지 마라.”
천마가 침음하며 제지했다.
흑객은 얼굴이 흙빛으로 검게 물들어 가다, 다시 환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촛불이 꺼지기 직전 마지막 피워 올리는 빛. 너무도 명확한 죽음의 신호였다.
‘살릴 방법이 없는 것인가…….’
천마가 가슴에 내기를 주입하고 있었지만, 들어간 내력은 허무하게 흩어졌다.
흑객의 몸은 혈맥이 진기를 붙들 힘조차 잃어버린 것이다.
“하나만……. 여쭈어도… 되겠……. 습니까?”
흑객의 눈은 초점이 없었다.
의식이 흐릿해지는 가운데서도 꾸역꾸역 입을 열었다.
“백사십 년 전… 리치왕의 진격을 막은 자가… 정말로 천마님이셨습니까?”
천마는 대답이 없었지만, 그는 또다시 질문했다.
“정말이지, 그 얘기는 꼭 듣고 싶었습니다…….”
“…….”
천마는 침울하게 시선을 내렸다.
대체 그딴 게 뭐가 중요하다고, 저승길 가는 와중에도 묻고 있는 건지.
꿈틀
그때, 내린 시선에서 무언가를 본 천마의 눈이 크게 떠졌다.
꿈틀꿈틀.
심장에서 흘러내린 피에 반응한, 주인의 명줄이 경각에 달하자 용트림 치고 있는 요괴.
“이제와서 그게 뭐가 중요하느냐.”
천마는 대충 대답하고는 그의 몸을 다시금 살폈다.
흑객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의 팔에 기생한 이 녀석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놈 역시 알고 있는 거다.
숙주가 죽으면 자신도 사라진다는 걸.
‘이거, 잘하면…….’
천마는 급히 꿈틀거리는 녀석, 흑객의 오른손을 낚아챘다.
“천마님? 뭐 하시는…… 아!”
그리고 곧 흑객도 깨달았다.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들은 것이다.
까깍까깍까깍까깍.
저들끼리, 부러질 듯 괴이한 음성을 내며 갈아붙이고 있는 뱀파이어의 이빨.
“좀 아플 거다.”
천마가 그의 팔을 들어 화살이 박힌 곳으로 강하게 밀었다.
뚜두둑! 으아악!
졸지에 자기 손을 자기 가슴에 쑤셔 넣은 흑객의 비명이 동굴을 뒤흔들었다.
고통이 그의 의식을 점점 잡아먹던 가운데, 천마는 그의 귀에 속였다.
“맘 단단히 먹어라. 지금부터 이 녀석은 너를 잡아먹으려 할 테니.”
“무슨…….”
“어떻게든 싸워서 이겨야 한다. 도움을 주자면, 네가 의식을 잃게 되면 완전히 이놈에게 먹힌다. 하지만 이성을 잃지 않으면, 생존하는 것은 물론 이놈의 능력을 한층 더 끌어낼 수 있게 될 거다.”
“그치만, 지금은…….”
“그리고.”
천마는 그의 귓가에 짧게 말했다.
“리치왕은 막은 게 아니고, 때려눕힌 거다. 그러니 지금까지 처맞고 뻗어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는거고.”
투욱. 툭.
천마는 흑객의 몸을 반듯이 눕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조금 앞으로 걸어갔다.
이제부터 녀석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진다면 죽을 것이다.
이긴다면 저 요괴의 힘을 얻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더는 자신이 개입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거 무슨 술법이냐?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화살이라니.”
투욱.
천마는 걸음을 멈춘 뒤, 카르삭을 보며 그제야 말을 붙였다.
[후후후…….]
그는 대답 없이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천마 역시 따라 웃었다.
지나친 자신감은 이래서 좋다.
자신이 흑객이 살 수 있는 방도를 찾는 동안 적이란 놈이 이렇게 기다려 주니 말이다.
[인간들의 눈물겨운 작별 인사는 끝난 것이냐. 그럼 이제…….]
카르삭은 다시 활촉을 꺼내 겨눴다.
어떻게 된 것인지 흑객의 가슴을 관통했던 활이 어느새, 그의 손에 다시 붙들려 있었다.
[네 마지막도 지켜보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