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마탄의 사수 (2)
<살 거야. 살아날 수 있어. 살 수 있다고…….>
‘누구지?’
소리가 들린다.
흑객은 힘들게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대상을 찾지 못했다.
헛것인가 싶었지만 곧 않으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누군가가 말을 하고 있었고, 그게 자신에게 들렸다.
‘…이대로 죽는 건가.’
차츰, 생각이 났다.
카르삭의 화살에 심장을 관통당했고, 그는 죽음을 직감했다.
잔뜩 찌푸려진 얼굴의 고용주, 천마가 손을 써서 무언가를 했고.
가슴이 갈갈이 찢겨지는 고통과 함께 시야가 흐려졌다.
천천히 세상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몸도 그 어둠에 물들어 가며 감각 또한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렇게 있기를 한참.
뚜욱.
갑자기 시야가 밝아졌다.
두근.
그리고 갑자기 몸에 활력이 돌고 감각이 돌아왔다.
깜박.
눈이 떠졌다. 흐릿하던 시야가 천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근두근.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이럴 수가.’
흑객은 눈을, 자신의 감각을 의심했다.
분명히 그는 화살에 심장이 관통당했다. 대라신선이라도 오기 전엔 절대로 살아날 수 없을 몸이었다.
“크으읍…….”
그런데 살아났다. 천천히 호흡을 재개했다.
꿈틀.
다만 큰 문제가 있었다.
또도도도독. 도도독.
“……?!”
또렷해진 흑객의 시야에, 자기 가슴에 파묻힌 왼손이 들어왔다.
자라락. 자라락.
그리고 그 손은… 뱀이나 악어의 것처럼 시커먼 비늘로 덮여 있었다. 그 비늘이 가늘게 떨리며.
<가질 거야. 가질 거야. 거질 거라고…….>
처음에는 속삭임 같은, 작은 의념이었다. 하지만 곧 그 의념은 뚜렷한 목소리로 변했다.
<내 몸. 내 피. 흐흐흐… 가진다. 먹는다…….>
우득. 또독. 우드드득.
그와 함께 온몸이, 몸에 든 모든 혈액이 물이 끓는 것처럼 전신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통은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야릇한 근질거림과 쾌감이 느껴졌다.
‘설마!’
흑객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통증, 몸의 경고. 고통은 사람을 힘들게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지키기 위한 감각이다.
그런데 그 통각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육신이 자신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것. 바로 천마가 경고했던 우려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스멀스멀. 스멀스멀. 스멀스멀.
‘윽’
아니나 다를까, 근질거리며 야릇한 쾌감을 퍼뜨리는 존재.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존재가 느껴졌다.
바로 뱀파이어의 이빨이었다.
놈은 흑객이라는 숙주가 죽음에 임박하자, 제 모든 힘을 끌어내어 찢겨 나간 심장을 재생시켰다.
불사의 흡혈귀, 뱀파이어.
전설에 따르면 놈은 온몸이 갈가리 찢어져도 주변에 빨아먹을 피만 있으면 무한히 부활한다고 했다.
그 덕분에 살았다.
살아난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문제라는 걸 흑객은 잠시 잊고 있었다.
스멀스멀. 스멀스멀.
터진 심장을 복구한 후, 뱀파이어의 이빨은 수많은 조각으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온몸의 혈관을 타고 혈액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했다.
“……윽!”
덕분에 손도 발도 꼼짝 않는다. 심지어 호흡마저 남이 억지로 시키는, 기묘한 감각에 흑객은 전율했다.
스르륵. 스르르륵.
차곡차곡 온몸을 점령한 뒤, 혈관을 타고 올라오는 뱀파이어.
놈은 마지막 똬리를 틀 곳으로 뇌를 택했다.
흑객의 정신 자체를 잠식하려고 하는 것이다.
“……!”
신음도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시야는 색을 잃고 칙칙한 흑백으로 변해 갔다.
그런 가운데 희미하게 스치는 목소리 하나.
- 잔혈마공. 내가중수법으로 상대의 혈맥을 다 터뜨리는 지저분한 무공이다만, 피에 굶주리는 그놈에게는 딱 성미에 맞는 마공이다.
고용주 이한의, 아니, 천마신교의 지존이신 천마가 직접 내려 주신 가르침이었다.
“……!”
흑객은 이를 악물며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가슴은 움직이지 않았다.
‘떠올려야 한다. 피를 갈구하는 잔혈마공을.’
감각이 점점 사라져 갔다. 그 가운데서 흑객은 필사적으로 집중했다.
천마가 말했던 구결을 빠르게 읊고. 또한, 잔혈마공의 심상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피. 방울져 흘러내리는 피. 터져 나온 살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광포함.
그렇게 한참 심상에 집중하던 차였다.
“크윽!”
찌리릭!
갑자기 느껴졌다.
놈이 왔다.
아니, 이미 전부터 와 있었다.
<늦었어. 이제… 이 몸은 내 것이다.>
그리고 흑객 자신의 입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
투투투툭. 콰직!
천마의 뱃가죽이 얼음처럼 깨져 떨어져 내렸다. 그와 함께 괴이한 뼈창이 조각조각 나 나뒹굴었다.
“젠장할…….”
투두둑.
새하얀 얼음덩어리에 덮여, 천마가 신음했다.
영원빙벽공(永遠氷壁功).
본래라면 탈마에서나 쓸 수 있었던, 일종의 금강불괴다.
온몸을 북극의 영원 빙벽처럼, 차갑고 단단하게 만드는 천마신교의 수호신공(守護神功).
그걸 썼음에도 천마는 치명상을 피하지 못했다.
애초에 경지를 무시하고 기억에 의존해서 펼친, 불완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나 그렇다 해도 수호 신공을 뚫다니, 대체 저 말도 안 되는 창은 뭐인가 싶을 정도다.
[이건… 정말 놀랍구나. 고작 필멸자 따위가, 용의 이빨을 맞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니…….]
놀란 것은 천마만이 아니었다.
카르삭은 눈앞의 광경에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말을 더듬거렸다.
서먼 드래곤 투스.
말 그대로 용의 이빨을 소환하는 것이다.
카르삭이 한때 리치왕의 본 드래곤과 어울리다 얻은 것으로, 작심하고 쏘아 내면 성채를 하나 무너뜨릴 만한 힘이 담긴다.
관통력과 파괴력만 놓고 보면, 거의 9서클 마법에 달할 정도. 그 화살을 맞고도 상대는 살아 있었다.
이쯤 되면 치명타를 입힌 카르삭이 오히려 두려움을 느낄 정도다.
대체, 저게 인간이기나 한지.
누군가 ‘드래곤이 인간으로 폴리모프 한 것’이란 말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강함이었다.
[네 용맹에 경의를 표한다. 하나… 이번엔 확실히 마무리를 지으마. 서먼 드래곤 본(Summon Dragon Bone).]
스윽.
카르삭이 영창하며 허공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거대한 뼈 기둥 하나가 생성되어 그의 손에 잡혔다.
“……!”
천마는 어이가 없었다.
설마하니 저런 기둥을 화살로 쓴단 말인가?
카가가가각-!
하지만 그게 현실로 일어났다.
카르삭이 잡고 있는 뼈 기둥이, 급속도로 갈려 나가기 시작했다.
다소 휘우듬하게 굽어 있던 뼈는 음각으로 용이 새겨지고, 날렵하게 그 모습을 다듬어 갔다.
특이하게도 화살촉의 끝이 날카로운 게 아니라, 오히려 오목했다.
‘이런, 시간이 없어.’
투투투툭.
천마를 빠르게 응급조치를 했다.
내상이야 빠르게 회복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신경을 다치면, 마비 증상이 따라온다.
아무리 강제로 내공 순환을 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공간으로 밀어 넣어야 한다.’
뚜둑. 뚜둑.
과연 천마답게 신체가 얼어붙어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반격을 생각하고 있었다.
공간을 넘어 날아오는 화살.
언뜻 보면 무적의 공격처럼 보이나, 사실 그건 치명적인 약점도 함께 가지고 있다.
화살이 공간의 경계를 넘어오는 짧은 찰나, 그 경계에 공격을 가할 수 있다면 화살만이 아니라 화살에 간섭하는 카르삭의 본체를 타격할 수 있을 터.
문제는 그 찰나를 어떻게 잡아서, 공간 너머로 검강을 불어 넣느냐는 것인데.
‘대류의 흐름이 변할 것이다. 그 지점을 찾으면 된다.’
거기서는 천마 자신의 직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바늘구멍에 실을 던져 넣는 것보다 몇 배는 어려운 방법.
하나, 직감이란 그런 것이다.
단련으로 극한에 이른 검사는 자신의 검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정확하게 반으로 가를 수 있다.
머리로 생각하기 앞서 몸이 먼저 최적의 위치, 방향, 강도를 바로 파악하고 대처하는 것.
검이 곧 자신이며 자신이 곧 검인 경지. 이를 일컬어 옛 강호에서는 신검합일이라 불렀다.
피유유육! 슉! 피유유육! 슉! 피유유육! 슉!
천마가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릴 때, 카르삭은 한 가지 수작을 더 부렸다.
[쉐도우 오브 애로우: Shadow of Arrow]
화살의 그림자.
안 그래도 강력한 용의 뼈를 화살로 삼고, 그 화살에 잔상을 부여한다.
맹렬하게 이동하는 뼈 화살들은, 사방으로 공간을 도약하며 눈을 어지럽혔다.
그러던 중에 천마는 눈을 감고 있었다.
어차피 진짜는 한 곳.
한 지점, 또 한 지점으로 이동하는 그 실체를 잡으면 된다. 눈앞에 이공간이 펼쳐지는 그때.
‘지금!’
천마는 순식간에 검을 휘둘렀다.
구구구궁-.
강기, 실명할 듯한 빛이 검 끝으로 펴져 나갔고, 동시에 어둠을 머금은 화살도 같이 이어졌다.
그리고.
“컥!”
천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안타깝게도 천마의 강기는 상대의 화살을 격중시키지 못했다.
이전보다 더욱 강맹한 화살은 천마의 복부 바로 아래에 박혀 들었고.
카아앙!
급기야 천마의 금강불괴지신이 깨어졌다.
아차 싶어 몸을 비틀어 타격을 줄였으나, 그 충격으로 반대편 벽까지 쭈욱 날아갔다.
[…헉!]
하나, 이번엔 한쪽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다.
카르삭 역시 위기에 몰린 건 매한가지였다.
천마의 예상처럼, 그의 마탄은 공간 전이를 기본으로 하는 것.
화살이 통과하는 약간의 찰나, 천마의 검에서 뻗은 강기가 창졸간에 그의 얼굴까지 다가와 있었다.
콰아아아앙!
그리고 그 역시 천마처럼 뒤로 밀리며 벽에 부딪쳤다.
두 절대 강자가 똑같이 비기에 타격을 받고선 돌 더미에 깔려 버렸다.
* * *
스으으으으-.
“콜록. 콜록.”
양쪽 다 쓰러졌지만, 먼저 일어난 쪽은 천마였다.
그는 균열이 난 벽 아래에서, 복부를 잡고 끊임없이 피를 토해 내고 있었다.
후드드드득. 철퍽.
내기로 막(膜)을 치고, 신체를 금강불괴로 바꾸었음에도 화살은 정확히 배를 관통했고, 이전보다 더 큰 상처를 남겼다.
토해 낸 피가 바닥을 적실 정도로 극심한 내외상.
그나마 다행인 건,
마지막 순간 몸을 틀어 단전이 부서지는 최악의 사태는 피했다는 것과.
전격 마법의 효과가 끝나 심법으로 지혈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진짜 성가신 놈이네…….”
천마는 고개를 들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가고일의 왕이라는 카르삭. 녀석은 네크로맨서 청명보다 더 까다로운 존재였다.
청명의 약점은 명확했다.
무한한 해골 전사를 소환해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지만, 정작 소환하는 것에만 의지해, 본신을 방어하는 데에는 소홀했던 것이다.
하지만 저 녀석은 완전히 다르다.
싸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궁수로서 적정한 거리를 계속 유지하고, 원거리에서 한 발 한 발이 치명적인 공격을 해 온다.
심지어 한번 쐈다 하면 무조건 맞혀 내는, 말이 안 되는 이능까지 사용한다.
답답해서 어떻게 근접전으로 넘어가 결판내려 하면 그 시도를 철저히 배제하고 있었다.
-크르르르르.
매번 두 마리 이상을 항상 소환해 두는 특이 가고일.
이놈들은 베어도 베어도, 계속 다음이 튀어나오는 방패이자 무시 못 할 공격자들이었다.
공간을 넘는 사격,
표적을 놓치지 않는 기이한 추적의 권능.
이제껏 수많은 싸움을 해 온 천마에게도 해괴하고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이다.
‘적도 타격을 받았다면, 어떻게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천마는 투지를 잃지 않았다.
까마득한 과거에, 그가 만난 강자들이 몇이었던가.
혈교를 일으켜 세운 혈마는?
천축의 마악대불이라는 놈은?
밀종의 대신교들과 그들을 이끄는 종주와 싸울 때는 어디 편했던가?
수많은 강시, 들이마시면 중독되는 독분, 이 세상의 것인지 아닌지 모를 환각술과 대법 등.
이제껏 보고도 믿기 힘든 온갖 이능을 다 맞아 봤었다.
그리고 이겼다.
최후의 승리자는 언제나 그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패배는 상정조차 하지 않았다.
[방금 뭔 짓을 한 거냐…….]
“칫.”
천마가 가볍게 혀를 찼다.
그런데 왠지 이번 싸움은 수많은 전장을 겪은 그에게도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검강을 맞은 녀석이 멀쩡히 일어난 것을 보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