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학관 내 서클 (1)
천무학관의 수업 시간은 반 시진을 넘기지 않는다.
1교시는 진시(辰時-오전 8시부터 8시 50분) 시간대이며 2교시와 3교시는 사시(巳時-오전 9시부터 9시 50분, 10시부터 10시 50분)이다.
4교시는 오시(午時-오전 11시부터 11시 50분) 사이에 수업이 끝난다.
“그르르릉…….”
그리고 천마는 2교시 수업 때에는 어김없이 졸았다.
카르삭 왕릉을 다녀온 후, 전보다 수업에 흥미를 느끼긴 했으나, 이놈의 협의학만은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협(俠)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뭐기는, 속이 좁아터진 것들이지.’
교수의 말에 천마는 간단히 정의했다.
시대가 몇 세기를 지나고서도 아직 공자 왈 맹자 왈, 해 대는 정파의 사상에는 정말이지 넌더리가 났다.
“하여 시경에 이르기를…….”
‘후아암…….’
게다가 네크로맨서 잡으러 갈 때 책으로 다 보긴 했지만, 사실 수업 내용은 이전부터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본교 사람들이 의외로 놀라게 되는 것 중의 하나로, 사실 천마는 어지간한 경전은 다 꿰고 있었다.
애초에 탈마건 극마건 학문적 소양이 받침 되지 않으면 이를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그저 무예만 닦으려고 해도, 결국은 정파의 무공에서도 배워야 할 것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무공에는 도가나 불가의 사상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그랬기에 책만이라도 달달 외워야 했다.
아무리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 해도, 유학도 불도도 선도도 알아 둘 필요는 있었다.
나름 우주를 해석하는 철학이 담겨 있으니까.
“…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며, 입신양명을…….”
“도로로롱…….”
천마의 가치관에 이건 그냥 시간 낭비였다. 차라리 졸아서라도 정신력을 비축해 두는 게 이로웠다.
“…으흐흐흠!”
물론 그 모습은 협의학 교수의 눈에 단단히 찍혔고, 그는 사정없이 이한이 앉아 있는 자리의 주인인 ‘백무룡’의 태도 점수를 감점시켰다.
그래도 다음 시간. 3교시 병기술 수업 때는 조금 흥미가 생겼다.
쩔그렁!
병기학 교수는 들어오자마자 교탁에 2미터 길이의 도끼 창을 올려놓았다.
『7종 병기의 이해. 3장. 할버드.』
탁탁탁. 탁탁.
그리고 분필을 들어 칠판에 썼다.
“이번 시간은 장병기. 그중에서도 최종 완성형이라 할 수 있는 할버드의 운용과 개요에 대해 배운다.”
끼-익!
일부러 낸 건지, 분필이 칠판을 긁으며 귀를 찌르는 소리가 났다.
덕분에 2교시의 졸음이 남아 있던 천마는 조금 눈이 커졌다.
그리고 4교시.
“왔다.”
늘어져 있던 천마의 눈에 총기가 파르르 타올랐다.
드디어 모르던 걸 알게 되는 시간이다.
몬스터학.
오늘 수업은 던전의 생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구울(Goul)에 대해서였다.
* * *
한편.
“이게 왜 계속…….”
어두운 방 안에서 흑객은 몸을 비틀며 신음했다.
원래라면 천무학관에 가 있어야 하는데, 그는 창문을 모두 닫고 바람도 통하지 않는 방에 자신을 가둬 두고 있었다.
파라라락!
시커멓게 색이 변했다가, 뱀처럼 비늘이 돋아났다가 다시 본래대로 돌아가는 왼팔.
그와 함께 뼈를 저미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거기다, 한 가지 더.
“허억, 허억…….”
지독한 갈증이 일었다. 비지땀을 줄줄 흘리며, 흑객은 옆에 둔 물 항아리를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끄르륵.
‘목이… 말라.’
하지만 배가 터지도록 물을 마셔도, 이 미친 듯한 갈증은 달래지질 않았다.
마치 허기를 물로 달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불린 배는 일각도 지나기 전에 꺼지고, 더 심한 허기와, 심지어 고통이 찾아들고 있었다.
“빌어먹을!”
벌컥벌컥.
다시 물로 배를 채우며, 흑객은 고통에 몸을 떨었다.
천마가 나서고, 자신도 학관에 가기 위해 학의를 입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왼팔의 피부색이 변했다.
그러다 비늘이 덮이는가 싶더니 이내 본래의 팔로 돌아가다가 제멋대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뼈가 저미는 듯한 통증과 감내할 수 없는 갈증이 폭발했다.
차라락! 차라라락!
“…너, 원하는 게 뭐냐.”
엄청난 물을 마시고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자, 흑객은 짐작하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어두운 방 안에 혼자 있었지만 그는 확신했다.
기억은 흐릿해도, 분명히 자신의 몸을 빼앗으려 들었던 어떤 존재를.
<…뭐일 것 같으냐.>
예상대로 요괴라는 존재의 대답이 들려왔다.
장로에게 받아 왼팔에 심었던 뱀파이어 이빨. 가고일의 두목이 부른 대로라면 용공 드라쿨레아.
끝을 알 수 없는 존재의 말 속에 마치 비웃음이 들리는 듯했다.
“내 몸? 웃기지 마라! 이 몸의 주인은 나다! 위대한 천마신교의 후예! 흑객이다! 네놈 따위에게 빼앗길 것 같으냐!”
흑객은 전력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그의 강한 적개심을 담은 외침의 근원은 두려움이었다.
이미 스물스물 몸의 제어를 빼앗기고 있는 것을 겁내고 있는 것이다.
<네 심장은 찢기고 터졌다. 그 죽은 몸을 되살려 낸 게 나다. 어찌 네놈만의 몸이라 그러는 게지?
찌리리릿!
요괴의 말과 함께 고통이 번졌다. 변이하는 왼팔에서 뻗어 나간 아픔이, 어깨를 타고 가슴으로, 심장을 통해 온 몸으로 전류처럼 흘러 나갔다.
“크아아악!”
흑객은 비명을 질렀다.
그의 눈이, 동자가, 일순 핏빛으로 변했다. 감각은 기이하게 뒤틀리고, 지독했던 갈증마저 사라졌다.
그리고 그건 더욱 위험한 거였다.
흐리멍덩해지는 얼굴이 된 흑객. 그의 입술이 비죽 비틀리며 말을 자아냈다.
“지금 이 가슴에 뛰고 있는 심장이 내 몸이거늘. 어디 한번 심장 없이 살아 볼 테냐? 그러고도 네가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
비척비척.
몸이 멋대로 움직여 일어나려 들었다.
미친 듯이 날뛰는 파괴적인 욕망의 흐름. 그 안에서 흑객은 흐릿해진 의식으로. 온 기력을 짜내고 있었다.
<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구나.>
“뭐?”
흑객은 당황했다.
강렬하게 자신을 압박해 올 줄 알았던 그의 말이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쯧쯧쯧. 어차피 네 몸은 내 것이 될 것이다. 저항하지 않는 게 그나마 고통을 줄이는 것뿐.>
“이 자식이…….”
<그때까지 더욱 고통스러워해라. 크하하. 하하하하하!>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갑자기 공멸하는 듯 머릿속이 팟 하고 울리더니 이내 주변은 조용해졌다.
목소리가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언제 바닥에 주저앉았는지 흑객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왜 사라진 거지……?”
이유는 알 수는 없었다.
천마가 위급할 때 쓰라 했던 잔혈마공의 내공을 꺼내기도 전에 그가 먼저 사라졌다.
“어?”
그리고 때마침 무언가, 귀를 자극하는 발소리를 감지했다.
사박사박.
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기척은 크고 강하다. 거리는 대략… 10장(30미터).
“이건 뭐… 허어…….”
흑객은 새삼 자신의 몸에 기가 막혔다. 이 또한 흡혈귀가 일으킨 변이의 영향인가?
그도 원래 청각에 내력을 집중하면, 주변 10장 정도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풀벌레, 사람의 기척, 새 우는 소리 등등 모든 것을.
그런데 지금은 딱히 집중하지 않아도 주변의 모든 소리가 ‘조절’되어 들린다.
풀벌레 우는 소리, 바람에 잔모래가 부딪히는 자잘한 소리 등, 듣고 싶지 않은 소리는 작게 들리고, 주의할 필요가 있는 소리만 들린다.
“7장. 6장, 5장… 에서 잠시 멈추는군. 대체…….”
청각이 예민해진 게 아니라, 발달되었다. 건물 밖 몇 장 앞의 도로. 거길 걷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이리 선명하게 들리다니.
자박.
발소리는 1장 거리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잠시.
“실례하네. 여기 흑객이라는 분이 계시는가?”
그 소리의 주인이 입을 열었다. 아마도 자신을 찾아온 손님인 듯했다.
* * *
“뇌천벽일세.”
자리에 앉은 흑객은 상대를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태양혈은 불룩하게 솟아 있고, 눈에 서린 기광(氣光)은 이미 범인의 수준을 넘었음을 방증하고 있으며, 그 흐름이 지나치지도 않았다.
‘화경인가.’
흑객은 그렇게 판단했다.
자신의 사부보다는 못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기운.
더욱이 상대는 그런 기운을 애써 갈무리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흘려보냈다.
“전 흑객이라 합니다. 교두께서 이곳엔 어인 일이십니까?”
흑객이 다시 물었다.
그가 천무학관의 4학년에 입학한 것은, 천마-이한이라는 당시 고용주의 안위를 위해서였다.
수업이야 몇 번 들었지만, 체육학 교두 뇌천벽은 자신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런데도 이리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흠…….”
한편, 꼿꼿이 서 있는 흑객을 보던 뇌천벽 역시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흑객. 정보 단체의 보고대로라면 마교의 잔당.
그런데도 마교 특유의 불쾌감을 유발하는 마성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는 스스로 기를 갈무리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
‘4학년생이 천무학관 교관 수준의 경지라니…….’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면, 마공을 익힌 자인지 모를 정도로 기운을 잘 통제했다.
이 정도라면.
반드시 회유, 포섭해야 할 대상이다.
“…교두?”
“음.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 물으러 왔네.”
흑객이 채근하자, 뇌천벽은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자네, 천무학관에 온 이유가 무엇인가?”
“……?”
살짝, 흑객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의도로 하는 질문인지, 의도에 따라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오해하지 말게. 나는 딱히 자네를 핍박하러 온 것이 아니야. 그저 알고 싶을 뿐이야. 옛 천마신교의 후예가, 왜 구파와 오대세가의 직전 제자가 가득한 천무학관으로 왔는지.”
뇌천벽도 그걸 아는지, 조금 자세하게 풀어 놓았다.
“…그게 왜 궁금하십니까?”
“그건 자네가 내 질문에 대답한 후 말하겠네.”
흑객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방문첩도 보내지 않고 다짜고짜 들이닥친 데다, 듣기에 따라 무례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고, 이유는 자신에게 대답을 들은 다음에야 말해 줄 수 있다고 한다.
원래라면 바로 거절하고 축객령을 내려도 무방. 하지만 그렇게 대차게 했다간 뒷일이 번거롭다.
무력 수준과 상관없이, 상대는 천무학관의 교관이다.
그에 반해 자신은 학관생이었다.
위대하신 천마를 모시면서, 배우고 익히려면 학관생이라는 자리가 유지되는 편이 좋았다.
“용병들 간의 관례를 함부로 발설할 순 없습니다.”
“그랬군.”
“……?”
어찌 보면 성의 없는 대답인데 이번엔 뇌천벽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말을 붙였다.
“혹 맘에 드는 전공 학과가 있나?”
뜬금없는 두 번째 질문.
이번에도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첫 번째와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그냥 듣기에도 저의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다지.”
“좋군.”
‘……?’
이번엔 더 모를 말이다.
더 성의 없이 대답했는데 상대는 오히려 더 좋아하고 있었다.
“이제 말하겠네. 사실, 자네가 물은 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네.”
잠시 시선을 내린 뇌천벽.
그리고 다시금 고개를 든 뒤, 흑객을 바라보았다.
“체육학과로 오게.”
“…….”
“졸업 후, 우리 학과의 조교로 들어온다면 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