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71화 (72/310)

71화. 학관 내 서클 (2)

“지금 그놈 온다고?”

3학년 1반의 원상(元常)은 탁자에 엉덩이를 걸친 채 입을 열었다.

팍 삭은 얼굴이었다.

아니, 얼굴만이 아니라 실제로 삭았다. 당장 그의 나이는 이미 서른둘.

천무학관에 입학이 늦기도 했지만, 2학년 때 유급을 무려 2번이나 당했다.

그렇게 퇴학을 앞둔 해에, 다행히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겨우 3학년이 되었고, 이래저래 학관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웬만한 검술은 모르는 것이 없었다.

덕분에 비검대에 들어올 수 있었고, 이제껏 쌓인 자격지심을 후배들에게 맘껏 풀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엔 2학년 중 재미있는 녀석이 나왔다는 얘길 듣고 불러 오라 한 것이다.

“예, 곧 올 겁니다.”

백무룡을 따르던 명우(明宇)와 담송(談宋)이 예를 차리며 대답했다.

이들은 이날을 위해서 열흘 가까이 수업에도 출석하지 않았다.

기껏 학관에 와서는 비검대 선배들의 심부름이나, 뒤치다꺼리를 하며 열심히 비위를 맞췄다.

물 떠 와, 빵 사 와, 저기 쓰레기 좀 치워 같은, 몸종이나 할 일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백무룡들은 비검대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영광으로 여겼다.

“어떻게 할 거야? 대장?”

원상 옆에 앉은 하운이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한 청년에게 물었다.

3학년 2반의 부반장, 비검대 2인자기도 한 그는 이 상황이 제법 흥미로운 듯 보였다.

“글쎄…….”

사락.

말을 받은 비검대장, 문평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다만, 말투와는 달리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백무룡이 데리고 온다는 학관생 이한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거 들었어? 이번에 2학년 3반 실전학 수업을 했다는데 말이지. 그놈 그 수행평가에서.”

원상의 말에 하운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만점을 받았다던데?”

“…만점? 정말?”

“확실해. 아침에 2학년 3반에 있는 후배 하나가 내게 알려줬거든.”

만점이란 말이 흥미를 자극했던 걸까.

문평의 손에 들려 한 장씩 넘어가던 책장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거, 기부금 입학이라고 적당히 교육 좀 시켜 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물건인데?”

“운소령과 같은 조라며. 걔가 다 한 거겠지.”

“아냐. 혼자서 엘리트 한 마리 잡았다는데?”

원상의 말에 하운은 더는 말꼬리를 잡지 못했다.

무려 위험 등급 6급이라는 엘리트 가고일.

그런 걸 단독으로 한 마리 잡았다는 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위를 가지고 있다는 방증 아닌가.

“암기 과목만 달달 외워 겨우 2학년 턱걸이했다고 들었는데…….”

“숨겨 둔 한 수가 있었나 보지. 백무룡을 쓰러뜨린 건, 요행이 아니란 거고.”

원상은 고개를 까닥이며 입구 문을 바라보았다.

말만 무성하던 놈을, 오늘 직접 얼굴을 볼 기회가 생겼다.

과연 녀석이 카르삭 왕릉의 4단계. 엘리트 가고일을 처리했던 건지 아닌지.

어차피 직접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왔군.”

드르륵.

때마침 문이 열렸고, 앞서서 기다리고 있던 백무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아……!’

얼떨결에 천마를 따라온 소진은 3학년 반에 들어서자마자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천무학관 공식 서클 중 하나인 비검대였다.

한쪽 머리로 가린 눈을 들어 보이는 인물.

3학년에서 위명을 떨치는 비검대장 문평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비검대장만 있는 게 아냐…….’

소진의 시선이 옆으로 이동했다.

다른 비검대원들도 보인다.

다부진 체격에 머리에 영웅건을 두른 사내.

눈 깜짝할 사이에 여러 개의 검초를 펼친다는 하운이란 자가 아닌가.

거기다 쾌검술로는 교내에 따라올 자가 없다던 원상이란 사내도 보였다.

“…음?”

그런데 소진 옆에 있던 천마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늘 그랬듯,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후우…….”

평소라면 잔뜩 겁을 집어먹었을 법한 소진은 천마를 보자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카르삭에서 몬스터를 함께 상대했던 기억이 떠오르고, 덕분에 심리적으로 빠르게 안정을 찾은 것이다.

성격은 괴팍하지만, 이한 이 녀석과 함께 있으면 최악은 면할 수 있을 거라고.

“대장, 녀석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천마와 소진을 뒤로하고, 백무룡은 활짝 핀 얼굴로 득의양양하게 예를 표했다.

그에게는 드디어 복수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이한 이놈이 제아무리 방학 기간 동안 실력이 높아졌다 한들, 비검대 선배들 앞에선 장난감에 불과하다.

2학년과 3학년 사이에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실력의 격차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저 녀석은 누구지?”

백무룡을 잠시 보던 원상이 천마 옆, 소진을 향해 턱짓을 했다.

이한의 인상착의는 대충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옆에 있는 학관생에 대해선 정보가 없었다.

“이한과 같은 기부금 입학생이야. 소가백화점네 둘째 아들이라던데.”

하운이 말했다.

“뭐? 소가백화점?”

소가상단(小家商團).

사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재력가로, 상계는 물론이거니와 무계, 학계에서도 항상 중요한 자리에 나타난다고 알려진 부유한 가문.

애초에 기부금 입학생치고, 집안이 부자가 아닌 자도 없지만, 그중에서도 소진은 학내 다섯 손가락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덩치 큰 가문 출신이었다.

“오… 생각보다 더 굉장한 집안인가 보지?”

오가는 대화를 듣던 천마가 새삼 소진을 다시 보았다.

이제껏 꽥꽥 대서 시끄럽게만 여겼던 오리가, 사실은 황금알을 낳는 오리라고 알게 된 것처럼.

“어, 뭐… 조금.”

“그럼 포션 같은 거도 마음껏 얻을 수 있나? 그게 되게 구하기 어렵다던데…….”

몇 마디 그렇게 말을 주고받을 때쯤, 문평이 그사이에 끼어 들었다.

“네가 이한이냐?”

스윽.

천마의 시선은, 자신에게 말을 건 사내에게로 이동했다.

그리고 담담히 고개를 까닥 끄덕였다.

“어. 그런데.”

“그런데?”

순간, 창가에 있던 원상이 표정을 구겼다.

이런 놈은 처음 보았다.

2학년 따위가 감히 3학년에게 반말로 개기다니.

정말 어이가 없어질 정도다.

“저것 보십시오! 제가 뭐라 했습니까? 저 건방진…….”

“백무룡, 넌 입 다물어.”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간 백무룡을 물리고, 문평은 이한을 보고, 스윽 위아래로 훑었다.

“얘기는 들었다. 양친께서 작고하시고 가문이 몰락. 이제는 더 눈치 보고 싶지도, 참고 싶지도 않아졌겠지.”

“……?”

“차라리 죽고 싶다, 항상 그런 마음일 테고. 뭐 이해한다. 하지만, 이 이상 겁 없는 설침은…….”

드르륵.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허락하지 않겠다.”

“…….”

스르르륵.

문평이 노골적으로 기세를 뿜어내자 장중의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었다.

완숙한 절정의 기운.

살기만으로 상대에게 위협감을 줄 수 있는 수준으로, 확실히 2학년생과는 무공의 경지가 차이가 났다.

“으… 윽.”

살기를 비껴 맞은 백무룡은 주춤거리다 급히 뒤로 물러났고, 소진 역시 이내 온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정통으로 맞은 천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겨우 알껍데기 벗은 햇병아리 수준이긴 하지만…….’

그는 사실, 제법 놀라고 있었다.

상대의 기세는 절정.

그것도 초입을 넘어 완숙해진 절정이었다.

‘본 교의 무공을 익히지 않고도 이 나이에 절정이라니.’

이 정도면 과거에서도 명문 정파에서도 손에 꼽는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마교처럼 초반에 경지가 급상승하는 출신도 아닌 자가, 서른도 되지 않는 나이에 이 정도의 기운을 내다니.

확실히 예전에는 없었던 학관이라는 곳이 생김으로써, 무공을 가르치는 데 진일보했다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내 이름은 문평. 비검대의 대주다. 긴말 끌 것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저벅저벅.

그는 자리에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천마를 마주 보고 섰다.

“너, 우리 서클에 들어와라.”

“대, 대장.”

“…대장?”

뒤에 서 있던 원상과 하운이 놀라 급히 되물었다.

분명 족치려고 불렀던 녀석인데 정식으로 비검대에 들이겠다니.

서클 가입 권유는 보통 2학년 말경에 시작된다. 물론, 이른 시기부터 권유가 없는 경우는 아니었다.

그만큼 절대적인 실력이 있거나.

아니면 충분히 잠재력을 보인 명가의 후예거나.

하지만 지금 상대는 이한. 애초에 기부금 입학생인 데다, 1학년 내내 성적이 바닥을 기던 놈 아닌가.

“비검대가 뭐 하는 곳인데?”

천마는 소진을 보며 물었다.

“우… 우리 천무학관의 서클 중에서, 검술을, 오로지 검술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수련하는 곳이야.”

소진이 덜덜덜, 몸을 떨고 말까지 더듬으며 설명했다.

“서클은 또 뭔데?”

“서클이… 그러니까, 방과 후 특별활동. 아니면 취미 생활? 그리고 사람들이 모이고 교류하는 그런 거…….”

“아아.”

그제야 천마는 알아들었다.

문파까지는 아니고, 방회(方會)나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는 그런 곳이라는 걸.

“주로 3학년 선배님들이 활동하시고, 가끔은 4학년……. 졸업반에 계신 대선배들도 오셔. 그리고 검의 오의 같은 걸 알려 주시는데… 우리 같은 2학년생들은 소수만. 정—말 극소수만 선택받을 수 있어. 정말이지 큰 영광이라고!”

“알긴 아는구나.”

부러움이 가득한, 잔뜩 흥분한 소진의 해설을 듣고, 문평이 코웃음을 쳤다.

돈으로 들어온 기부금 입학생이지만, 그래도 주제 파악은 하는 모양이다 싶어서.

사실이 그랬다. 아무리 튀는 놈이라도, 고작 2학년생에게 자신이 나서는 것 자체가 파격적인 조치였다.

그랬기에 문평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다시 물었다.

“어떠냐? 이한.”

“음.”

천마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별로네.”

“…뭐?!”

“일단 그다지 관심이 안 가고. 굳이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

“뭐, 나에게 제안한 용기는 가상했다. 가자, 소진.”

스윽.

문평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천마는 손을 휙 내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 모습에 소진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이, 이한. 잠깐…….”

지금 이건 어마어마한 무례였다.

당장 붙잡아서 백배사죄시켜도 모자랄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런 천둥벌거숭이가!”

분노하던 문평이 아닌, 뒤에서 바라보던 하운이란 자가 먼저 격분해 몸을 날린 것이다.

쉬---익!

휘리릭.

그런데 그때, 정말로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막 일격을 날리려던 하운.

그리고 돌아보는 이한. 딱 반 장(1.5미터) 거리에서 갑자기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헉!”

지이잉.

기이한 소리와 함께 나타난 사람의 앞에 반투명한, 색이 얼룩덜룩한 불길한 방패가 나타났다.

언럭키(Unlucky) 실드였다.

“큭!”

덕분에 막 공격을 하려던 하운은 아슬아슬하게 궤도를 바꿨고, 크게 휘청거리며 노호를 터뜨렸다.

“블링크? 정규(鄭奎)! 너 이 자식, 무슨 짓거리야!”

‘마법……?’

천마의 눈이 가늘어졌다.

단거리 순간 이동 블링크. 아이템으로 저걸 쓰는 건 여러 번 보았다.

하지만 방금 나타난 남자는, 아이템을 써서 날아든 것이 아니다.

“마법으로 남의 서클실을 무단 침입해? 너, 미쳤어?”

“미친 사람은 어느 쪽이려나~”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장신의 사내.

한 손에 책을, 다른 한 손에는 작은 지팡이를 든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도 그냥 보고만 있으려고 했는데, 방금 내가 본 게 맞나? 하운, 너 3학년이 2학년 등 뒤를 치려고 했지?”

“…….”

하운의 불쾌한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하지만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하고 다시금 물러섰다.

“미친 새끼…….”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얼굴.

실제로 정규는 학관 전체에서 알아주는 미친놈이었다.

당장 저놈이 일으킨 언럭키 실드, 저건 ‘불운’이라는 저주를 잔뜩 끌어모은, 살상력은 거의 없지만, 쳤다간 미친 듯이 더러운 사고에 휘말리는 괴상한 마법이었다.

그 정규가 흘흘 웃으며 이한을 보았다.

“그래서, 네가 그 시끌시끌한 이한?”

“…그러는 너는 뭔데. 기생오라비.”

“호오.”

천마가 되묻자, 정규의 눈은 가늘어지고 옆에서 소진이 거의 비명을 질렀다.

“이한! 말조심해! 이분은 주시자의 장이야.”

주시자.

각종 아이템이나 마법과의 결합, 몬스터 공략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루는, 그런데 3학년들 중에서도 괴짜들만 모인 곳.

실력만은 상당하다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성적에 관심이 없는’ 괴짜들만 고이는 곳이라, 정작 4학년을 올라갈 실력이 있어도 3학년에서 노는 놈들이 많은 서클.

저하고 싶은 것만 하고, 여차하면 앞뒤 안 가리고 들이받는 놈들의 모임이라, 3학년 서클 중에서도 주시자는 누구도 건드는 이가 없었다.

“거긴 또 뭐 하는 놀이집이냐?”

“노. 놀이…….”

“하하! 푸하하하하!”

한데, 천마의 반응에 정규라 불렸던 자가 크게 웃었다.

그건 불쾌감이 섞인 웃음소리가 아닌, 진심이 담긴 웃음이었다.

“후련한데! 놀이집이라. 그게 맞지. 한데 모여 놀이를 하는 거지. 이야~ 그래도 2학년한테 들어보긴 처음인데? 좋아. 정말 좋아.”

툭툭.

정규는 오른손에 든 지팡이를 왼손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정중하게 빈손을 내밀었다.

“2학년 3반 학관생 이한, 정식으로 권유하지요. 우리 주시자에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거긴 왜?”

천마가 되물었다.

대충 서클에 권유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파악했다. 그럼에도 초면에 학년 높은 이가 존대까지 쓰는 게 의아했다.

“간단히 말해서. 당신의 그런 성미가 마음에 들어요, 저는.”

정규는 싱글싱글, 기분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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