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학관 내 서클 (3)
서클.
과거 강호의 방(幇)과 당(黨)이라는 이익집단의 개념을 가져온 것으로, 본래의 취지 목적은 서로의 단합, 그리고 다른 단체와의 경쟁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었다.
본래는 4학년을 중심으로 서클이 구성되었으나, 정작 그들은 잦은 파견과 실무 경험을 쌓느라 바빴다.
때문에 점차 시간이 지나며 4학년은 이를 인맥 관리 정도로만 유지하고, 학관 내의 역할은 3학년이 대신하게 되었다.
현재의 천무학관 내에는 그 3학년들을 필두로 총 다섯 서클이 있다.
<비검대>
만병지왕이라는 검. 서로의 검술을 비교하고 겨루는 서클이다. 천무학관에서 가장 인원이 많고, 교관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조직.
문평을 필두로, 검을 주 무기로 쓰는 자들 대부분은 이 서클에 가입되어 있다.
<패왕도>
도(刀)를 주로 다루는 서클이지만, 비검대와 달리 딱히 병기를 가리진 않는다. 방침은 소수 정예.
과거에 이름을 날렸거나, 현재까지 성세를 누리고 있는 가문 출신에만 입회 자격을 두는 폐쇄적인 서클이다.
개개인의 능력이 출중하다 보니, 다른 사람을 얕잡아 보고 교류를 잘 하지 않는 집단.
<아르구스의 눈>
짧게는 아구스라고 불리는 서클.
특이 사항으로 현 서클의 수장 역시 ‘기부금 입학자’다.
비검대나 패왕도의 서클장에 비해 실력이 크게 떨어지나, 그는 재력으로 얻을 수 있는 아이템과 정보력으로 무장했다.
다양한 저잣거리의 정보와 각종 아이템의 시세, 거기에 던전이나 유적에 대한 공략 정보를 수집하고 그 정보를 대가로 다른 서클과 유용한 협력관계를 만들었다.
<마탑원>
마법사들과 연금술사, 그리고 신무기와 장비의 개발자들.
앞서의 비검대나 패왕도가 다분히 전사 집단이라면, 마탑원은 마법사, 그리고 마법사와 연대하는 연금술사, 인챈터(Enchanter: 강화. 부여술사). 아티산(Artisan: 장인)들이 함께 모인 조직이었다.
마법에 대해서만은 천무학관 최고의 실력자들이고, 마법적 능력을 지닌 아이템을 연구하거나, 더러는 제작해내기도 하는 이들.
<주시자>
개개인의 능력은 크게 호평받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하는 이는 누구도 없는 단체.
이유인즉슨, 이들은 천무학관의 괴짜들만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4학년이 되는 걸 거부하고 자진 유급된 자.
1학년에서 월반하여 바로 3학년이 된 자.
혹은 선천적으로 특별한 이능을 가진 탓에 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자.
평소에는 서로서로 교류나 간섭도 없이 느슨한 조직이다. 하지만 다른 서클과 충돌이 일어나면, 그 얼굴 보기 힘들다는 4학년까지 달려온다는 고슴도치들.
그중에서도 정규는 이들을 통솔하는 주시자의 장으로, 특유의 붙임성을 발휘해 괴짜들의 대장처럼 되어 있었다.
‘이게 마법이라는 거지?’
기생오라비를 바라보는 천마의 눈에는 묘한 흥미가 일고 있었다.
상대는 신법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그 움직임을 자신이 놓칠 리가 없다.
따라서 남은 방법은 바로 마법.
가고일의 왕이란 놈이 사용했던, 이공간을 통해 이동하는 요술. 바로 마법일 터였다.
“정규!”
고민하던 천마의 목소리 뒤로 강한 항변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평이었다.
그는 이제 막 이한을 혼쭐내려던 차에 정규가 끼어든 것에 분노했다.
“비검대가 우습게 보이나! 남의 서클룸에 무단으로 침입해서 방해를 놓다니, 이게 무슨 짓이냐!”
“어. 좀 미안하게 됐어.”
하지만 정규는 문평 앞에서 태연자약했다.
“갑자기 살기를 뿜으니까 나도 모르게 그만. 3학년이 2학년을 죽이게 둘 수는 없잖아? 학칙상 금지라고.”
“…….”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문평은 그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
“살기라니. 터무니없는 오해로군. 우리는 신입들에게 비검대에 입회하지 않겠냐고 제안하던 중이다.”
“그런 것치고는 꽤 험악한 분위기던데?”
정규가 스윽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좀 전까지 이한을 적대하려 하던 비검대. 이들의 서클룸에는 아직 흉흉한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그걸 지적하자 문평의 얼굴에 불쾌감이 떠올랐다.
“너무 방자하게 굴어서 3학년과 2학년의 격차를 보여 주려던 것뿐. 너희들 주시자 서클은 위아래도 모르는 거냐?”
“우리가 좀 위아래가 없긴 하지. 알겠어. 그러니까 뭐야, 그냥 인재 영입의 일환이라고?”
“…그렇다.”
문평의 얼굴이 조금 더 일그러졌다.
대놓고 거짓말을 해서인지, 아니면 천마와 이한, 이 두 놈을 ‘인재’라고 말해야 해서인지.
“그럼 뭐 아직 진행 중인 거네. 현재로서는 비검대 소속도 아니고. 맞아?”
그랬더니 씨익, 정규가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무슨 말이긴. 우리 서클에 들어오라고 제안하는 거지. 자, 2학년 여러분? 주시자는 학년도, 기수도 딱히 따지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입니다만. 생각 없어요?”
“정규, 너!”
콰아아악!
문평이 진심으로 분노했다.
그가 일으키는 살기에 소진이 흐악! 하고 머리를 움츠렸다.
하지만 정작 살기를 정통으로 맞은 정규는, 그러거나 말거나 하며 싱글싱글 웃었다.
“아니, 왜 나한테 화를 내고 그래? 어차피 어느 서클에 들어가는지는.”
그는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 이한 아우님이 결정하는 거지. 안 그래?”
“…….”
조용한 침묵.
하지만 소진은 그 침묵에 강한 투기가 얽혀 들어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으아아아…….’
비검대의 장과 주시자의 장.
3학년 서클을 대표하는 이들의 층돌에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이었다.
“거참.”
그런 진지함을 깬 건 어이없게도 천마였다.
그는 이게 자신이 만든 상황인지도 모르는 듯, 천연덕스러운 눈빛으로 둘을 번갈아 봤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이들이 사용하는 마법이라는 것도 흥미가 간다.
확실히 2학년들과는 다른 이들.
왠지 이들과 어울리면 좀 더 변화된 세상에 대해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오랜만에 무리 생활 하는 것도 재밌을 듯했고.
“좋아. 결정하지.”
그의 말에 두 사내의 시선이 강렬하게 모여들었다.
특히 문평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다만, 조금 생각해 보고. 당장 정해야 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
“…….”
말투가 신경을 거슬린 것일까.
으득.
문평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정규의 안색은 오히려 더 밝아졌다.
“가자.”
천마는 그렇게 뒤돌아섰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있던 소진은, 천마가 움직이자 당황하며 빠르게 뒤쫓아 갔다.
“…역시. 맘에 든다니까.”
냉랭한 분위기 속 정규는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멀어지는 천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3학년 무관실.
학급의 가장자리에 존재하는 5개의 서클 방 중, 패왕도가 담당하는 곳.
교내에 있는 방이라고는 믿기 힘든 너비의 공간에 각종 무기들이 정비되어 있었다.
“핫! 핫!”
그리고 점심시간 이후, 십여 명이 훈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들 눈에 생기가 넘치고 동작들이 날쌘 것이, 확실히 2학년들과 결이 달랐다.
한편, 한쪽에는 꽤나 진지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소파 한쪽에는 2학년 학관생이 정자세로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꽤 준수한 얼굴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서문영치고는 아쉬운 결과구만.”
사내는 서류 몇 장을 확인한 후,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맞은편 서문영은 그렇게 느끼지 않은 듯했다.
꾸욱!
패왕도의 1인자. 고경(古敬).
혼자서 와이번 한 마리를 쉽게 써는 무용으로 알려진 그는, 3학년 내에서도 가장 실력이 뛰어난 자들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런 그가 어디서 구해 왔는지, 자신의 무공학 수행평가 보고서 사본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카르삭 왕릉이 무너지지만 않았어도…….”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시간만 충분했으면 우리 서문영은 충분히 만점을 받았을 테지.”
고경이 끄덕이고 서문영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우리 서문영’이란 친근한 표현에.
하지만, 고경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런데 운소령은 만점을 받았단 말이야. 똑같이 부족한 시간을 가지고도 엘리트 가고일을 세 마리나 처리했지. 그것도 무려 4명이라는 적은 인원으로 말이야.”
“……!”
점잖게 돌려서 찌르는 말에 서문영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운소령.’
하지만, 그는 곧 숨을 들이마시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녀는 서문영이 처음 봤을 때부터 반한 여인이다.
‘너라면 인정하겠다.’
미모도 미모지만, 그녀의 됨됨이를 알자 더욱 마음에 들었다. 분명 여인의 몸임에도, 어쭙잖은 사내놈들보다 훨씬 더 가혹한 수련을 자처하는 이.
강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비상한 머리와 고아한 분위기까지 모두 갖춘 여인.
“운소령은 재녀 중의 재녀이니 할 수 없지요. 그녀는 2학년 전체 수석입니다.”
그래서 서문영은 그다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당장 지금 그녀가 자신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하더라도, 그는 상관없었다.
언제고, 그녀를 손에 넣는 것은 자신이라 믿었기에.
“그건 그래. 나름 파티운도 좋았고. 전사 일색인 너희 파티와 달리, 고작 2학년생에 중급 정령사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그 표정을 본 고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팔락, 수행평가 보고서를 덮었다.
“그런데, 이한이란 녀석. 실력이 너와 비슷한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선배님?”
서문영은 이번에야말로 울컥했다.
학년 수석인 운소령이나, 중급 정령사인 필리아의 경우라면 서문영도 납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1학년까지 성적이 바닥에서 놀던 이한. 고작 기부금 입학생과 비견되는 것은 치욕스러울 수밖에.
“아니, 널 모욕주려는 생각은 없어. 그런데 수행평가 보고서에 엄연히 적혀 있단 말야.”
타악. 스윽.
고경은 보고서를 내려놓고 앞으로 밀었다. 못 믿겠으면 직접 보라는 듯.
“이한, 수행평가 최우수. 두 마리의 엘리트 가고일을 한 시간 가까이 붙잡아 두고, 심지어 한 개체를 파괴… 보고서 내용만 봐선 서문영, 너보다 더 뛰어난 녀석인데?”
“그건 그냥 운입니다! 큰 우연이 따른 겁니다!”
서문영은 벌컥 소리를 질렀다. 자칫 무례하게 비칠 모습이었지만 고경은 담담했다.
끼이이익!
헛? 허업…….
그러던 중, 갑자기 여기저기서 숨 막히는 신음이 일었다. 서클룸의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에게 모두의 시선이 모이고 있었다.
텅. 텅. 터텅.
근육을 단련하던 이들이 무거운 쇠뭉치를 떨어뜨렸다.
벌떡! 벌떡!
소파에 앉아 있던 서문영, 그리고 고경도 보자마자 자리에 일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아, 아. 인사는 됐어. 다들 하던 일 해.”
툭툭. 터덜터덜.
적당히 손을 들어 인사를 받은 이는 바로 남궁호.
놀랍게도 4학년 졸업반이자, 얼마 전엔 뇌천벽 교두가 이끈 던전 토벌에 참가한, 천무학관 내 최고 유망주 중 하나였다.
당연히 고경은 처억, 극도의 공경을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배님. 여긴 어쩐 일로……?”
“어쩐 일이긴. 우리 막내 보러 왔지.”
남궁호는 서문영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그리고 탁자 쪽으로 걸어가더니, 서류 몇 장을 집어 들었다.
팔락.
“흐음.”
그는 실전학 수행평가 보고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던전 공략이나 토벌은 실전이다. 그리고 그 실전에서 활약하는 것은 대개 실전학 수행평가 점수가 높은 학관생들이었다.
당연히 관심이 갈 수밖에.
“흐음.”
서류를 훑어보던 남궁호는 피식, 하고 웃어 보였다.
“서문영치고는 아쉽네…….”
“죄송합니다.”
푸욱.
서문영은 진심으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에게 남궁호는 천무학관에서의 우상. 애초에 서문영이 패왕도에 가입한 것도, 여기에 남궁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할 수 없지. 충분히 시간이 있다고 생각해서 차분히 진행하는데, 난데없이 왕릉이 붕괴돼서 그런 거잖아.”
“…예. 그런 점도 있었습니다.”
“뭐, 이번엔 운이 없었다. 최고의 실력자도 그런 경우에는 어쩔 수 없어. 다음번에는 결코 밀리지않을 테고.”
“…네!”
“그래. 운인지 실력인지 지켜보면 알게 될 거야.”
“……?!”
서문영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분명 남궁호의 말은 응원인데, 혹은 격려인데, 듣기에 따라서 굉장한 가시로 볼 것이 박혀 있었다.
뚝. 뚝. 뚝.
서문영의 얼굴에서 진땀이 흘러내렸다.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아무리 노력해도 좀처럼 펴지지가 않았다.
“그럼 수고해.”
툭툭.
남궁호가 서문영의 어깨를 두드리고 걸어 나갔다. 그렇게 몇 초 후.
빠드득.
서문영의 주먹이 있는 힘껏 쥐어졌다.
‘지켜보면 알게 된다… 고?’
운인지 실력인지.
그 말은 이한에게 한 말이라기엔 이상했다.
이건 마치 ‘너야말로 이제껏 운이었던 거 아냐?’라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 * *
툭. 툭. 툭.
천마는 높은 지붕들을 걷어차며 경신술을 발휘했다. 그는 학관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5교시는 역사학.
특이하게도 ‘오픈 북’ 수업이었다. 책을 펴 놓고, 교재 내용 안에서 흐름을 읽어 내는 수업.
이런 종류의 수업은 단순 암기보다 훨씬 까다롭다.
학관생들은 수많은 책을 펴고 덮으며, 머리를 쥐어뜯어야 하는, 그 맥락을 짚어 내야 하는 종류의 과목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오픈 북 수업의 주제는.
-‘암흑기(Dark Age)’ 이전의 경제 및 문화적 상황을 서술하시오.
…였다.
대격변의 날.
140년 전 리치왕의 등장으로 인해, 중원의 많은 시가지가 불타고 파괴되었다.
무인인 강호인들도 수백 수천 죽어 나가는 처지인지라, 저술가나 사서 같은, 자기 몸 하나 지키기 힘든 문인들은 그저 피난해서 목숨을 부지하기만도 힘겨웠다.
당연히 역사의 서술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따라서 대격변의 날 이전의 40년가량을 중원의 [암흑기]라 부른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사상, 문화, 철학이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시기.
“하필이면 죄다 아는 내용들이냐…….”
그러나 천무학관의 누구도 모를, 140년 전의 일을 천마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는 당장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니까.
산중에서 폐관수련 중이었어도, 중원의 일은 꾸준히 보고가 들어왔다.
‘야, 너두 한 달 안에 무림 십대 고수 될 수 있어’ 서책을 편찬하려고 했던 이유도 바로 수준이 낮은 강호인들을 겨냥한 의도였으니까.
덕분에 일각(15분) 만에 답안지를 빼곡하게 써 놓고, 경악하는 학관생들의 눈길을 무시하며 그냥 조퇴해 버렸다.
“아니, 근데 이놈은 왜 결석이야?”
그래서 4학년 교실에 들렀더니, 흑객이 오늘따라 결석.
시간이 빈 김에 한 수 가르쳐 주려고 했던 천마는 맥이 빠져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별일 없겠지? 음. 뭐 특별한 별식이라도 만드나 보군.’
요즘 들어 흑객의 요리 솜씨는 급상승하고 있었다.
원래 음식을 만드는 데 재능이 있었던 그는, 천마의 신분을 알게 된 후로 태도가 변해 버렸다.
까마득한 전대 교주. 저 리치왕을 때려눕힌 인물.
무엇보다 명맥을 유지하기도 힘든 오늘의 천마신교를 부흥시킬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흑객은 본인이 수련에 수련을 더함은 물론이고, 매 끼니끼니를 황제께 진상하는 숙수처럼 성의를 다했다.
“오늘은 돼지였지? 그럼 뭐… 오향장육? 아니면 동파육?”
어느 쪽이든 군침이 도는 요리다. 천마는 흥얼거리며 신법을 사용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얼마 가지 않아 거처 앞에 당도했을 때쯤.
처억.
걸음이 느려졌다. 얼굴도 굳었다.
직감적으로 느껴진 것이다. 방문 밖에서도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이.
“이봐, 왜 학관을 빼먹…….”
덜컥.
불길한 느낌.
아니, 그건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다.
우적. 우적. 우적.
문을 열고 들어서자 흑객의 뒷모습이 보였다.
등을 웅크리고 뭔가를 파먹는, 게걸스럽게 살점을 씹어 넘기는 턱. 그리고 바닥에 흥건한 피.
쩝. 쩝. 후루룩.
“너, 설마…….”
천마는 탄식했다.
분명 오늘 아침에만 해도 흑객은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천마는 녀석이 모르게, 기감을 퍼뜨려 전신을 감지하고, 이 상태로라면 폭주할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었다.
그랬는데.
키익, 키익……?
기이한 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리던 흑객.
그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미 인간의 이성이 보이지 않는 눈자위와 표정.
그리고 입가에 자욱이 묻은 붉은 피.
“결국… 먹힌 거냐?”
천마의 표정은 한숨과 함께 그늘이 졌다.
흡혈귀를 너무 만만하게 보았던 것일까. 이제 완전히 변이해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넌, 천마신교 수십 대 아래의 후예는.
키리리릭!
훅하고 모습이 꺼졌다.
자신을 향해 달려든 것이다.
카창!
“……!”
그리고 한순간, 천마는 그의 움직임을 놓쳤다.
블링크도, 마법도 아니다.
전에 가고일의 왕 카르삭을 상대로 보인 쉬프트(Shift).
흡혈귀가 가진 고유한 이능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