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남의 집 사글셋방 (1)
뇌천벽이 떠난 이후, 흑객은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가 내민 것은 파격적인 회유 조건이었다.
그저 3년. 학관생으로서 졸업까지 남은 1년과 이후의 단 2년.
체육학관 조교로 지내면서 목숨 바쳐 충성하라는 것도 아니고, 학내에서 권력 투쟁이 있을 때 적당히 자신들의 편을 들어 달라는 것.
그 대가로 천무학관의 학비, 생활비 면제, 심지어 안락하게 보낼 수 있는 인근의 장원까지 제공한다.
“아무래도 이건 교주께 말씀드려야 할 일인 것 같은데…….”
다른 어떤 것보다 장원, 수십 명이 거주할 수 있는 저택의 제공이 마음을 흔들었다.
흑객 자신이야 풍찬노숙도 익숙했다.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까.
때문에 자신이야 아무래도 좋았지만, 지금의 주군은 다르다.
천마의 이름을 새로 얻으신 사조를, 이런 누추한 곳에 모시는 건 여러모로 속이 상했다.
정작 본인은 별 신경 쓰지 않으시는 것 같긴 하지만.
“교인들도 모아야돼. 제의를 받든 안 받든, 보안이 유지되는 저택은 반드시 필요하다.”
흑객은 자신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음을 알고 있었다.
동시에 자신의 그릇이 너무 부족함도 알고 있었다.
진실로 마의 하늘, 천마신교의 지존. 그의 가르침은 너무도 넓고 깊은데, 반면 자신의 깨우침은 느리기 짝이 없었다.
그게 너무 안타까웠다.
저분의 학식과 지혜를, 벽지에서 와신상담하는 교단의 형제들에게 나눠 줄 수 있다면…….
‘내 대에서 천마신교의 부흥을 보는 것도 꿈은 아니다.’
스윽. 슥.
그는 지필묵을 꺼내 교단 본부로 보내는 서신을 작성했다.
천마와 독대하며 받는 가르침은 기쁘고 영광스럽지만, 그걸 혼자 독점하려 해서는 안 되었다.
하루라도 빨리, 교인들을 모으고 잊힌 절기들을 천마께 전수받아야 했다.
----!
서신이 마르기를 기다려, 흑객은 작은 피리를 불었다.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는, 하지만 십 리 안에 있는 특별한 전서구를 부르는 피리였다.
푸드드득! 푸득!
얼마 후 온몸이 불그스름한 비둘기가 날아들고, 흑객은 서신을 그 발목에 묶었다.
푸드드득!
그리고 전서구가 날갯짓을 하며 멀어져 가는 것을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어억?”
이변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갑자기 지독한 갈증, 그리고 허기가 송곳처럼 온몸을 쑤셔 왔다.
“윽… 이런. 이놈이 또…….”
벌컥벌컥. 우적우적.
흑객은 미친 듯이 물과 음식을 먹어 댔고, 그럼에도 허기가 계속되자 주방에 남은 음식들. 천마께 바치려던 성찬까지 모조리 먹어 치웠다.
후우우…….
배를 불리고 나니 증상이 좀 잠잠해졌다. 한참을 쉬던 흑객은 텅 비어 버린 음식 그릇을 보고 한숨 쉬었다.
“새로 만들어야겠군.”
시간상 아직 천마가 학관을 나설 때까지 두 시간이 남았다. 지금부터 식재료를 손질하면 늦지 않게 저녁거리를 만들 수 있었다.
피이이잉!
하지만 그렇게 일어난 순간, 시야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이번 건 이제까지와 달랐다.
여태까지는 이질적인, 둔중한 침입이라 저항할 수 있었지만, 지금 쏟아져 들어오는 의식은 연검처럼 부드럽고 예리했다.
“이놈! 허튼짓할 생각 마라……!”
뚜욱.
막 저항의 말을 내뱉던 흑객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리고.
그는 잠시 우두커니 자리에 그대로 선 상태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 입에서 나온 말은 멀리, 어딘지도 모를 이국의 언어였다.
원래 검었어야 할 중원인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달아오른 흑객.
두근. 두근.
“……!”
극도로 예민해진 청각이 생명의 박동 소리를 감지했다.
그는 쇠약해진 몸으로 휘적휘적 걸어 저택 뒤편으로 움직였다.
꿰에에엑.
거기에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언제든 바로 잡을 수 있게 씻기고 털까지 밀어 놓은 새끼 돼지 한 마리가 묶여 있었다.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흑객은 즉각 손을 휘둘렀다.
싯! 털썩.
돼지의 목이 날아갔다. 너무 빠르고 예리한 일격에, 고통도 비명도 없이 생을 달리했다.
투욱! 투욱! 주르르륵!
머리를 잃은 돼지의 목이 거세게 피분수를 뿜어냈다. 흑객은 주저 없이 그 목에 이빨을 박고 쭈욱, 쭉, 맹렬히 빨아 마셨다.
“크르르르…….”
그러기를 한참. 핏기를 모두 잃고 하얗게, 크기마저 살짝 줄어든 돼지의 사체를 흑객이 내던졌다.
그때, 천마가 나타난 것이다.
“결국… 먹힌 거냐?”
크르르륵?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
흑객은 괴기한 소리를 흘려내며, 왼손을 낫 모양의 무기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팟.
공간 도약(Shifting). 흡혈귀의 고유한 권능을 발휘해 접근한 뒤 날카롭게 변한 무기를 상대에게 휘둘렀다.
그의 무기가 지나간 자리에는.
사아아아악!
천마의 사지가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큭큭큭… 큭?”
기분 좋게 웃던 흑객. 아니, 흡혈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휘이이익.
두 조각이 나 있던 천마의 몸은, 천천히 흩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이형환위. 경신술의 극의. 애초부터 갈라지던 몸통은 허상이었다. 천마는 먼저 시야를 빼앗고, 실제는 문밖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야, 이런 걸 기습이라고 한 거냐?”
“흥!”
후욱!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공간 도약.
분명 눈앞에서 사라진 흑객이, 어느새 천마의 뒤에 나타나 거대한 낫을 휘두르고 있었다.
촤아아아악!
그리고 이어지는 흑객의 두 번째 공격.
터억!
하지만 이번엔 끝까지 휘두르지 못했다.
천마가 무기로 변한 그의 왼손을 직접 손으로 낚아챈 것이다.
소수마공.
극한의 냉기로 손을 단단하게 하여 상대의 병기를 막은 것이다.
“나 참. 이따위 얄팍한 공격으로 나를… 어?”
피식 웃던 천마의 눈에 약간의 당혹감이 들었다.
주르륵.
병기를 잡고 있던 왼손에서, 얼음으로 변한 손등으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가……?’
보고서도 믿기지 않는 것이다.
소수마공은 빙공의 극한. 절정에 이르면 도검불침이 된다. 어떤 병기도 그 방어를 뚫을 수 없다.
그런데 어찌 된 게, 상대의 무기는 그 방어를 뚫고 천마의 살에 상처를 입혔다.
“이 녀석이……?”
천마는 그제서야 흑객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키킥.
얼굴에는 실핏줄이 거미줄처럼 돋아나 있고, 눈동자는 흰 자위만 드러내고 있었다.
완벽히 이성을 잃은 것이다.
“카아아악!”
사사사삭!
그리고 이어지는 수많은 칼질.
거의 눈으로 좇을 수 없는 빠르기로 천마의 몸속 구석구석을 찔러 넣었다.
그러던 순간.
쾅!
흑객의 몸이 뒤로 날아가 버렸다.
쿠키지직 쿵! 쿵!
그는 엄청난 압력을 받고는, 외벽을 뚫고 우거진 나무들을 몇 개 부순 후, 먼지를 일으키며 쓰러졌다.
하지만 이내 자리에서 일어선 흑객은 득의양양하게 걸어 나왔다.
“뱀파이어라던데… 맞나?”
천마가 묻자 흑객은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이내 이빨을 드러내며 즐겁다는 듯 미소 지어보였다.
“블라드. 그게 내 이름이다. 인간.”
* * *
흡혈귀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천마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일시적인 건가. 아니면 완전히?’
저 요괴가 튀어나왔다는 건. 안타깝지만 흑객이 결국 녀석에게 먹혔다는 얘기였다.
하나, 잠시 밀려서 처박혀 있는 건지, 아니면 완전히 녹아 들어가 살릴 가망이 없는 건지는 알 수 없다.
“궁금하긴 했노라. 카르삭, 반쪽짜리지만 가고일의 왕을 무너뜨린 무위가 어떤 정도인지.”
블라드는 매우 흥미에 찬 얼굴이었다.
흑객의 몸에서 깨어난 후, 그는 가까이에 아주 강한 존재가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세계에서는 본 적 없는, 전혀 다른 힘을 사용하는 자.
마나를 사용하는 기법도, 그걸 다루는 방법도 모두 다른, 그럼에도 절대의 강자.
자존심 상하지만 그가 부수지 못한 카르삭을 부순 이. 당연히 흥미가 일 수밖에 없었다.
“너… 의식을 잃었던 게 아니군?”
그리고 그 말은 천마에겐 조금 의외였다.
당시 흑객은 분명 기절해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누가 카르삭을 처리했는지 물었을 정도다.
그런데 지금 하는 말은, 마치 그때 정신이 남아 있었다고 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 녀석, 아직 있나?”
천마의 턱짓에 블라드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젠 없노라. 변변치도 않은 종자가 꽤 질기게 버티긴 했었다만.”
“변변치도 않은 건 네놈이겠지.”
“…뭐라?”
드라쿨레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천마와 용공. 두 사람이 그렇게 잠시 서로를 응시하던 중에.
파파파팟.
블라드의 왼손과 오른손이 무기로 변하기 시작했다.
한쪽은 낫. 다른 한쪽은 칼로.
“필멸자, 네 피가 탐나는구나. 그 몸에 흐르고 있는 생혈은 무슨 맛일지 궁금하군.”
“뭐, 할 수 있다면.”
파파팟.
먼저 움직인 쪽은 드라쿨레아였다.
그런데 조금 특이했다.
이전에는 순간적으로 거리가 증발되는 느낌을 받았다면 이번엔.
드드드득.
자신에게 이어진 동선 안에, 네 번의 순간 이동을 했다.
그렇게 극단적으로 빨라졌다 느려졌다를 반복하다 천마의 지척까지 다가온 것이다.
쾅!
동시에 휘둘러지는 드라쿨레아의 낫.
이전처럼 천마의 신형이 허상으로 사라졌음에도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파악했다.”
이형환위를 통해 뒤로 물러선 천마.
블라드는 곧장 따라붙으며 거의 시간의 간극 없이 검날을 휘둘렀다.
쩌어어어엉!
두 사람이 서 있던 지면이 강렬한 기류로 인해 강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위.
블라드가 휘두른 칼날을 천마가 막아 냈다.
소수마공으로.
‘대체 이 녀석의 무기는…….’
균열.
이번엔 도검불침의 일부가 아닌, 전체가 깨진 듯했다.
그로 인해, 상대의 검이 손바닥을 찔렀고, 그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후르르륵.
그리고 기묘하게도, 흘러내린 핏방울은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허공을 유영했다. 피에 대한 지배. 흡혈귀의 권능이었다.
“큭… 훌륭하군.”
촤라라락.
천마의 피를 마시고 입맛을 다시는 블라드.
그 얼굴엔 흑객의 모습이 더 이상 없었다. 그저 피에 굶주린 괴물의 얼굴만이 남아 있었다.
파파파팍.
그리고 누가 뭐라 할 새 없이 이어진 몇 번의 교전.
이번엔 천마가 더 빨랐다.
그가 팔을 휘두르기 전에 몸에 파고들어, 곧장 장법을 내질렀다.
퍼억!
그렇게 몸이 붕 떠서 공중으로 날아가던 블라드.
우뚝!
당연히 지면에 나뒹굴어야 할 몸이, 공중에서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리고 몸이 뚝 떨어지며 너무도 편안하게 땅을 밟았다.
“쯧. 이 몸뚱이가 말을 듣지 않는군. 역시 변변치 못한 놈이로다.”
그리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근접전에서 밀린 게 짜증이 날 법함에도 그의 얼굴엔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천마도 마찬가지였다.
“…요 몇 달 동안 기상천외한 것만 봐서 그런가.”
공간을 순식간에 이동하고, 일격을 당하고도 곧장 회복하는 그를 보면서도.
“별 감흥이 없군.”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 모습이 오히려 블라드의 관심을 이끌어 냈다.
“확실히.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노라. 그대, 평범한 인간이 아니구나.”
“…….”
“그래서 더 가지고 싶어졌으니.”
촤라라락.
이번엔 그의 무기가 바뀌었다.
오른손의 검은 더 짧아졌고, 왼손의 날은 곡괭이처럼 변해 있었다.
‘극마에 다다른 수준이라…….’
천마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지금 저 몸의 움직임은 초절정 수준인 흑객의 무위를 가뿐히 벗어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극마의 초입 구간처럼, 잠깐잠깐 움직임에 부자연스러운 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건 뱀파이어가 말한 대로, 아직 신체의 능력을 제대로 끌어내지 못한다는 의미.
“하. 뭐야? 이제보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있었네?”
“음?”
“너, 그 녀석 몸에 있는 내공, 마공이 뭔지 모르지?”
느닷없이 나온 말에 블라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말을 꺼낸 천마는 피식, 웃으며 손을 까닥였다.
“본디 마(魔)는 인간을 취하게 하는 마성. 주화입마가 근본이다. 잠식당하면 강한 것을 탐하고, 파괴적인 성향을 띠지. 하나 그걸 통제하고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담금질하는 과정에서 얻는 힘. 그게 마공이다.”
“……?”
“쉽게 말해서, 마공은 그 자체가 강한 통제력이다. 네가 한가락 하는 요괴 놈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 봐야 지금 그 몸이 지닌 힘의 근원은 마공. 결국 그 의미는.”
천마는 씨익 웃어 보였다.
“흑객은 아직 잡아먹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리키지.”
“…….”
블라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히 자세를 낮췄다.
공격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음.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알려 주자면…….”
팟.
블라드는 천마가 말 꺼내기가 무섭게 빠르게 접근했다.
이번에는 직선. 여러 번 우회하지 않고 최단 속도로 지척까지 다가간 것이다.
패애애애액!
천마를 향해 빠르게 베어진 그의 칼날.
훅!
천마는 이전처럼 이형환위를 펼쳤고, 블라드가 그 뒤를 잡았다. 사라졌다 나타난 천마의 뒤에, 사라졌다 나타난 블라드가 검을 날렸다.
카아아앙!
똑같은 부딪침. 다시 공격을 막은 천마가 피식 웃었다.
“계속 이거냐? 끝이 없네?”
“아니, 끝이다.”
하지만, 그건 블라드가 원하는 그림이었다.
촤라라라락!
갑자기 칼날이 터져 나갔다.
“…뭣?”
천마는 반사적으로 피했지만, 그게 결정적이었다.
쫘아아아아악-!
흡혈귀의 권능은 피. 블라드의 검은 피 그 자체였다. 칼날은 수천수만의 혈관으로 변해, 그물처럼 천마의 몸을 꽁꽁 묶었다.
우드득!
그리고 으스러뜨렸다.
블라드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확실히 본 것이다.
상대의 피와 살이 부서지며 찢겨 나가는 장면을. 그런데.
“와, 그거 걸렸으면 확실히 아팠겠네.”
“……?!”
분명 죽인 상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블라드는 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놀랍게도 상대는 거기에 서 있었다.
“무슨 마법을……!”
---!
이번엔 다른 무기로 천마의 머리를 찢어발겼다. 소리조차 넘어선 극쾌의 공격. 상대는 피하지도 방어하지도 못했다.
그랬는데.
“마법 같은 소리 하네. 인마. 그게 너와 나의 차이다. 자고로 무공이란 속도나 변초로 싸우는 게 아니라…….”
파팟.
또 뒤에서 들리는 소리! 블라드는 뒤로 돌자마자 곧장 검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이번엔 분명히 감촉이 있었다.
“기본기에 있다고.”
“크아아악!”
그런데도 블라드는 뇌전에 감전된 듯 온몸을 떨었다.
스르륵.
눈앞에서 그의 공격을 맞고 사라져 가는 천마.
그리고 동시에, 그의 등 뒤에서 나타나 정수리를 가격한 또 한 명의 천마!
“미러… 이미지?”
“아니, 천마군림보.”
털썩.
답을 들었는지 어쨌는지, 블라드는 그대로 무너졌다.
뚝. 뚝뚝.
천마는 자신의 몸을 살폈다. 허리와 어깨. 허벅지에서 흐르는 비.
상처를 보건대, 완벽하게 피한 건 아니었다.
천마군림보의 약점 아닌 약점. 모든 게 환영이며 동시에 실체인 경신술은, 상대의 공격이 정통으로 먹힐 때는, 환영이 부서질 때 본신에도 피해가 있다.
뚝. 뚜둑. 뚜두둑.
덕분에 제법 피를 봤다.
천마는 쿡쿡 혈을 짚어 지혈하려 했지만, 곧 인상을 찌푸렸다.
출혈이 멎지 않는 것이다.
“골고루 하네. 보통 방식으로 지혈이 안 되는 무기라니. 퉷!”
천마는 이를 한 번 다물고, 이번에는 손끝에서 염마공을 일으켰다.
찌지지직-!
그리고 출혈이 멎지 않는 상처를, 아예 불로 지져 버렸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대처였지만, 어쨌든 덕분에 피는 멎었다.
“아… 천마님?”
정신이 든 것인가.
눈을 껌뻑 감았다 뜬 흑객은 쓰러진 자세로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천마의 예상대로였다.
마공은 지독하게 강한 자의식이 있어야 배울 수 있다.
때문에 역설적으로, 저주나 빙의 등의 영적 현상에 대해서는, 소림의 내공만큼이나 저항력이 뛰어났다.
“야, 짐 싸라. 이사 가자.”
“…예?”
멍하니 눈을 껌뻑이는 흑객. 그는 이제껏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분명 천마가 도착할 때까지 한 시진 정도가 남아 있었고, 그의 저녁밥을 차리려고 몸을 일으켰는데.
“집이 없어졌으니 이사 가야지.”
“……?!”
눈을 떠 보니 집이고 창고고 죄다 박살이 나서 쑥밭이 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