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남의 집 사글셋방 (2)
“…지금 뭐라고?”
후드득.
소가백화점의 매출 보고서를 읽던 소진은 문서를 떨어뜨렸다. 너무 황당한 말을 들은 탓이다.
“크흠!”
집사는 소주인의 실수를 못 본 척하며 좀 전의 말을 다시 읊었다.
“네, 천무학관 학관생이라는 두 사람이, 소가주의 친구라며 찾아왔습니다. 집이 박살 나서 살 곳이 없으니 집을 좀 달라면서요.”
“대체 무슨…….”
‘미친 소리야’라고 하려던 소진은 간신히 참았다.
부모님 때문에 입관한 천무학관이다. 낙제하지 않으려고 아득바득 애쓰지만, 몸이 악하다 보니 항상 경멸당하고 무시당한 그다.
물주 취급만 당했지 친구가 있을 리 없다.
하물며 집이 박살 났으니 집을 좀 달라? 옷이 찢어졌으니 한 벌 빌려 달라는 것도 아니고? 이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놈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이름이 뭐래?”
“한 명은 흑객이라 하고, 또 한 명은 이한이라는…….”
“지금 어디 있어?!”
벌떡!
듣다 말고 소진은 기겁하며 일어났다.
생각해 보니 그 주변에 딱 한 놈 있었다. 저런 정신 나간 소리를 할 수 있는 놈이!
* * *
푸르륵! 덜컥!
“여기야. 이한! 이 집 어때? 마음에 들어?”
소진이 도착하자마자 마차 문을 열고 말했다.
“흐음…….”
천마와 흑객은 눈앞에 있는 집을 올려다보았다.
깔끔하고 단단하게 지어진 2층 목조 저택.
방은 여럿이고, 넓은 마당도 있었다.
담이 높아 어지간한 잡상인은 들어올 수도 없었고, 주방과 창고까지 딸린, 채광도 통풍도 좋은 그런 저택이었다.
“쓸만하군. 너는 어떠냐?”
천마의 물음에 흑객은 슬쩍 주변을 돌아보며 점검했다.
주변에 다른 인가가 없고, 야트막한 구릉 위에 외따로 지어진 집.
위치도, 입지 조건도 좋았다. 기습을 당할 염려도, 남의 이목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
흑객은 앞에 있는 소진을 힐끗 쳐다본 뒤 말을 흐렸다.
“당장은 이 집을 구입할 돈이 없는데…….”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런 좋은 집은 최소 금화 천 냥은 나갈 텐데, 자신들은 그나마 있던 집도 부숴 먹고 나온 터다.
“아, 괜찮아. 돈은 이 녀석은 많거든. 그렇지?”
하지만 천마는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소진을 보았다. 너무 당당하게.
“아… 뭐… 그렇지.”
‘너 돈 많으니까 내줄 거지?’라는 얼굴에 소진은 황당해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한에게 돈을 받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나에겐 좋은 일이야.’
가문이 멸문당했다는 딱한 사정은 익히 들었고, 도움을 주고 싶었던 차에 당사자가 자기 발로 찾아왔다.
이한은 이미 천무학관 2학년 전체에서 주목받는 몸이다. 상인으로서 투자할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
그리고 그간 소진이 도움받은 걸 따지면, 이런 집을 몇 채는 사 주어도 모자랐다.
카르삭 왕릉에서 얻은 아이템, 레어급 석궁은 값어치를 따지기 어려운 귀물이었다.
소가백화점의 장인들이 검증하기로 최소 금화 7백 냥 이상이라고 하니까.
“그런데 이한, 옆에 분은 누구셔?”
소진은 조심스레 이한의 옆에 선 흑객을 눈짓했다.
학의를 입은 것이 천무학관인 것 같은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나이도 좀 든 거 같은데 이한이 너무 쉽게 대하고 있고.
“아, 내가 고용한 용병. 흑객이라고 해. 천무학관 4학년이고.”
“4, 4학년?!”
소진의 눈이 휘동그레졌다.
3학년도 아닌, 4학년.
2학년 재학생들과는 얼굴을 보기도 힘들다는 인물이 와 있었던 것이다.
“괜히 부산 떨 필요 없다. 이 은혜는 언젠가 꼭 갚으마.”
소진이 과도한 예의를 차리려 하자 흑객이 냉막하게 대응했다.
“아, 예… 감사합니다.”
확실히 상대는 비범했다.
왠지 모르게 한마디 내뱉었을 뿐인데,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덕분에 본인이 집을 내어 주고 오히려 인사를 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천마가 왜 하대하는지도 잊어버렸고.
“여튼. 내일 보자.”
천마도 피식 웃으며 소진의 어깨를 두들기며 한마디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어…….”
소진은 반사적으로 문 앞으로 한 발짝 걸었다.
왠지 모르게 자신도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무슨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터덜터덜.
다시 조금 전, 자신의 거처로 향하는 소진. 그 발길은 왠지 모르게 무거웠다.
드르륵!
새 집. 그것도 크고 넓고 깨끗한 집.
소진이 마련해 준 저택은, 원래 소가백화점의 식객들을 위한 집이었다.
식객은 평소에 생활에서 신세를 지다가, 소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무력으로 도움을 주는, 그런 무림 고수들.
‘살짝 족쇄가 채워진 기분이지만… 뭐, 어차피 교주님의 친구라면.’
어차피 어느 정도 보호는 해야 한다고, 흑객은 납득했다.
터억. 철퍽.
천마와 흑객. 두 사람은 새 집에 들어서자마자 옷가지부터 벗어 던졌다.
그리고.
“목욕물!”
“예옙!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천마의 말에 그는 즉각 움직였다.
나른한 몸을 녹이려는 생각은 단숨에 사라져 버렸다.
* * *
“그래서, 이야기 좀 들어 보자. 기억이 완전히 없다고?”
터억!
새 집. 소진이 마련해 준 호화로운 침대에, 너무나도 자연스레 발을 뻗으며, 천마가 물어 왔다.
“예, 그러니까…….”
흑객은 그 앞에 정좌를 하고 앉아 기억을 떠올렸다.
아침에 등교 하려고 준비하다 말고 갑작스레 일어난 갈증과 허기.
발작을 진정시키다가 나눈 흡혈귀와의 대화.
갑자기 찾아온 천무학관의 체육학과 교두. 그의 제안.
그리고 그 이후, 다시금 찾아든 발작과 의식이 끊겨 버린 일까지.
“그렇게 눈을 떴을 때, 천마님이 절 보고 계셨습니다.”
“허허… 이거 참.”
천마는 헛웃음을 쳤다.
두 개의 의식이 충돌하는 것도 아니고, 뒤바뀌며 나타난 꼴이라니.
“혹… 안 좋은 징조입니까?”
“글쎄…….”
걱정스러운 흑객의 물음에 천마는 턱에 손을 올리며 고민했다.
혈교의 빙의와는 달랐다.
예전에 빙의된 혈교 놈들을 때려잡았을 때를 떠올려 보자면, 놈들은 정신이 들자마자 바로 겁을 집어먹고 자신을 두려워했었다.
귀신이 들어왔다 한들,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게 아니라 의식이 한쪽으로 밀려나 제3자의 입장처럼 관조하는 형태였었다.
그런데 흑객의 경우는 그런 게 아닌 모양이다.
“아무래도 뱀파이어 그놈이, 머리를 좀 쓴 것 같구나”
“…예?”
“그게 말이다.”
천마는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깜빡이더니, 곧 흑객과 시선을 맞췄다.
“이전에도 녀석이 네 정신을 빼앗으려 했었다. 그리고 곧 그게 불가능하단 걸 알았지. 네가 익힌 마공이 그 이유이고.”
“…마공?”
“그래. 본 천마신교의 마공은 어떠한 이종과도 섞일 수 없는 성질의 기운이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기운을 거부하는 거지. 이미 정신에 귀속되어 있으니까.”
흑객은 천마의 말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마공이 정신에 귀속되어 있다니.
“이리 이해하면 편할 게다. 정종무공, 이른바 정파의 무공은 성취가 느린 대신, 정신을 맑게 하고 주화입마에 빠지지 않는다. 도사나 중놈들은 명상과 정신 수련을 통해 내공을 쌓지. 수련과 기의 단련이 동시에 일어난다.”
“음. 네.”
“하지만 마공은 마성(魔性)과 광기를 통해 힘을 받는다. 일순간에 거대한 내공을 얻지만, 불안정하지. 자칫하면 자신을 잃고 마기에 정신을 지배당해, 광인이 될 수 있다. 말이 극마고 탈마지, 결국은 그 불안정한 마공의 지배를 벗어나는 것이 목표야.”
마공을 달리 마공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다.
정종무공이 볼 때는 하루아침에 삼류 무사가 일류로 거듭나는, 삽시간에 강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당연히 이런 힘에는 제약이 따랐다.
지독한 정신력, 그리고 자제력. 이것 없이는 힘을 사용할 때마다 때마다 인성이 말살되거나 폭주하거나 하는 위험이 따른다.
때문에 입문하는 자를 엄격하게 선발하며, 수행하는 중에 끝없이 호심경을 외어, 광기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훈련을 계속한다.
그럼에도 부작용은 피할 수 없다.
마공은 애초에 폭주로 시작하는 것. 빠르게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선천진기까지 태워 수명을 앗아 버리는 가혹한 불이니까.
어쨌든 그렇다 보니 저 뱀파이어는, 마공을 익힌 흑객의 몸을 쉽게 차지하기 힘든 것이다.
놈 또한 분명히 광기에 속해 있지만, 흑객 또한 평생에 걸쳐 그 광기를 제어하는 법을 몸에 익히고 있었으니까.
“그럼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흑객이 조심스레 묻자, 천마는 조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뭐. 극복하는 수밖에 없지. 흡혈귀의 충동이든, 마공의 유혹이든.”
“…극복이라는 말씀은?”
“일단은 뭐, 극마다.”
극마.
그 말에 흑객의 얼굴이 굳었다.
불길 같은 마공의 마성을 통제하여 선천지기의 소모를 방지하고, 수명이 줄어드는 부작용이 사라지는 경지.
하나 말이 쉽지, 마공을 익힌 무인의 열에 아홉, 아니, 백의 구십구는 거기에 다다르지 못한다.
그건 노력이 아닌, 재능이나 운의 영역. 당장 흑객 자신만 해도 ‘평생 노력하면 극마에 이를 수 있을지도……’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건 내 짐작인데, 아마도 블라드라는 녀석, 예전 생에서는 그 정도 수준이었던 걸로 보인다. 네 몸에 깃들었을 때, 뭔가 많이 답답해하는 기색이었거든.”
천마는 ‘블라드’란 자의 수준을 내심 경계하고 있었다.
이형환위보다 한층 더 발전된 경공술.
지혈이 안 되는 무기.
그리고 아직 보여 주지 않은 능력들.
“극마라니…….”
흑객은 한숨만 푹푹 쉬었다.
말을 듣고 보니 극마에 이르면 저 흡혈귀에게서 무조건 벗어날 수 있다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극마에 오른 뒤에야 상대와 싸움이든 뭐든 벌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고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천마도 흑객이 지금 어떤 감정인지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도 완전히 나쁜 이야기만은 아니다. 녀석은 일단 너하고 같은 몸. 같은 생명을 공유하고 있어.”
“그 말씀은?”
“저도 죽을 상황이 되면 널 지키려고 할 거라는 말이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가운 이야기는 아니군요. 별로.”
어떤 의미에서 목숨의 위협은 없어졌다.
블라드라는 흡혈귀는 어마어마하게 강하고, 놈이 나타났을 때는 피의 권능이라는, 기묘한 신통력까지 부리니까.
하지만 그러면 뭐 하는가.
천마가 보증하는 최소 극마 이상의 고수에게, 정신을 빼앗겨 괴물로 살 수밖에 없다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흑객이 입을 열었다.
“천마께서 보시기에, 제가 극마의 어디까지 이르면 그를 떼어 낼 수 있다 보십니까?”
“몰라, 나도. 애초에 그놈의 전력을 못 봤는데, 무슨 수로 장담하냐?”
“…….”
“일단 탈마까지는 아니겠지. 그리고 극마인 나와 싸울 수준인 걸 봐선 극마의 극한까지도 아닐 테고. 아마 극마 중상쯤?”
“…네.”
흑객은 그저 암담함에 한숨만 쉬었다.
말이 극마이지, 천마는 본 교 내에서 탈마의 극한까지 갔던 유일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지금 까다로울 수준이라면.
최악의 경우, 극마의 벽을 뛰어넘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 때는 빈말이라도 위로 좀 해 주시지…….’
생각하면 할수록 앞날이 아득한 흑객에게, 천마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좋게 생각해. 그놈이 없었으면 넌 이미 죽었다. 카르삭 던전에서 넌 심장이 터졌고, 그놈이 널 살린 거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네 시련은 분명 지독하다. 하지만 그걸 버텨 내면 네가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다. 이만한 기회, 잘 없어.”
“…….”
흑객은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죽음의 위기도 아닌, 존재 자체를 빼앗길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을 저리 쉽게 기회로 여기는 배짱은 아직 그로서는 일렀다.
결국 그는 체면 불구하고 매달리자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고.
“혹. 천마께서…….”
“아 참. 혹여나 내가 뭔가 해 주겠지, 어찌 되어도 최악은 피할 수 있겠지. 그런 생각 하지 마. 물러설 수 있다는 말랑한 정신머리로는 당장에 잡아먹힌다.”
“…….”
“음. 그래서. 내가 뭐?”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말은 나오지도 못하고 쑥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