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75화 (76/310)

75화. 제갈유진이 그리는 미래 (1)

펄럭. 펄럭.

제갈세가의 누각 한 곳에, 작은 금빛 깃발이 걸렸다.

그 깃발을 건 이는 다름 아닌 제갈유군. 현 제갈세가의 가주였다.

“오늘은 오시려나.”

대략 두 시진쯤. 망연하게 기다리고 있던 그의 뒤에서 그림자가 솟아났다.

스스슥.

상념에 너무 접어들었던 탓에 조금 늦게 알아차린 제갈유군은 급히 몸을 숙였다.

“오셨습니까, 태상고모님.”

“그래.”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은 흰 비단옷의 노파.

마침 생일이라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제갈유군과 마주 앉은 그녀는 언뜻 보기에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하나 실제로는 백 년 가까운 나이 차이가 난다.

이제 69세인 그의 두 배가 넘는 삶을 살아온 역사적인 인물.

노파는 옛 무림맹 군사 제갈유진으로, 나이는 자그마치 166세이며, 140년 전 대격변의 날을 직접 목도한 살아 있는 역사였다.

“생일은 축하한다만. 괜한 욕심을 부리지 말아라. 미혹에서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느냐?”

달그락. 조르륵.

그 역사가 찻잔에 차를 따랐다.

제갈유군은 공손히, 조심스레 잔을 받으며 고개 숙였다.

“송구합니다. 고모님. 소자가 근자에 몸이 쇠하여…….”

“네 나이에 몸이 쇠했다고? 내가 주책맞게 너무 오래 산다는 말이 하고 싶은 게냐?”

“고, 고모님! 어찌 그런 말씀을…….”

“후훗훗. 농담이다.”

제갈유진이 웃었다.

까마득한 조카 손자를 놀리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제갈유군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아무리 같은 세가의 혈족이라지만, 상대가 너무 어마어마하다 보니 가벼운 농담에도 질겁하게 되는 것이다.

‘현존하는 최고위급 마법사.’

50여 년 전.

제갈세가 인근에서 몬스터 웨이브(Wave)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한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의 물결. 그 원인은 제갈세가 인근의 던전 때문이었다.

던전 같은 마경(魔境) 중에는, 계속해서 마력이 쌓이는 경우가 있다.

시간이 갈수록 위험해지고 몬스터들이 늘어나는 종류다.

보통 이런 던전은, 위험해지기 전에 인근의 학관이나 헌터들이 미리 처리해 둔다.

하지만 제갈세가 인근의 던전은 하필 인근의 호수 바닥에 생겨난 것이었다.

탐색자들이 찾아내지 못한 던전은 차곡차곡 마력을 끌어 모았고, 포화 상태에 이른 지 수십 년. 결국 던전 브레이크(Break)가 일어났다.

캄캄한 심야에 수천, 어쩌면 수만 마리에 달할지도 모르는 리저드맨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인근의 민가와 마을은 일각도 되지 않아 쑥대밭으로 변했다.

제갈세가의 사력을 다한 방어에도 불구하고, 결국 방어선이 무너지고 리저드맨들이 쏟아져 들어올 때.

-개미지옥(Ant Lion’s Pit)!

대지가 갈라지고, 모든 리저드맨들이 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비명과 피 보라가 일었고, 으득으득 하는 끔찍한 소리 후엔 사체조차 남지 않았다.

수천 혹은 수만 마리의 리저드맨들이, 단 한 번의 마법으로 퇴치된 것이다.

당시에 사용된 마법의 클래스는 가히 측정 불가.

그 후로 50년. 제갈유군은 약관의 청년에서 제갈세가의 가주가 되었다.

하지만 눈앞의 제갈유진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정정하기만 했다.

‘애초에 인간이 160세를 사는 것부터 말이 안 되니.’

어쩌면 일각의 소문처럼, 제갈유진은 리그웨더 님의 가디언인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오히려 말이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제갈유진이 담담하게 물어 왔다.

“금기를 올렸다면 보고할 것이 있을 텐데?”

“아. 예.”

제갈유군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는 품에서 서찰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사천 남이현(南理縣) 인근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했습니다. 수백의 와이번이 나타나 인근 민가를 궤멸. 사망자 수는 최소 천 단위라 합니다.”

“그래서?”

제갈유진은 되물었다. 사람 수백이 죽었다는 말에도, 그녀는 아무 감흥이 없었다.

제갈유군은 그 모습에 소름이 돋는 것을 애써 감추며 말을 이었다.

“…네. 그래서, 몬스터 웨이브를 피하던 이재민들 사이에서 고모께서 찾으시던 자들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파악!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탁자에 있던 서찰이 제갈유진의 손에 들려 펼쳐졌다.

“…죽었다고? 이제 겨우 발견했는데?”

그리고 부릅떠진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제갈유군은 ‘헉’ 하고 숨을 들이 마시며 급히 말을 이었다.

“일단은 그렇습니다. 하나, 그들은 죽었기에 저희들에게 발견된 것입니다. 달리 말해 약한 이들일 터……”

“흠. 직전 제자는 살았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마교로 추정되는 사망자들은 격전지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력을 알 수 없는, 흑마법에 가까운 무언가를 투사한 흔적이, 동쪽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다.”

차락.

제갈유진이 서찰을 확인하고 조용히 내려놓았다.

뒤이어 가슴을 쓸어내리는 그녀의 모습에, 제갈유군은 그동안 생각했던 바를 털어놓았다.

“고모, 외람되오나… 소자는 조금 의아합니다. 그들이 이렇게까지 공을 들일 가치가 있는지요?”

“마교 말이더냐.”

“네, 고모님. 일전에 운소령에게 일러 둔 그 말씀도 그렇고, 고모께서도 아시겠지만 당금의 무림은 과거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강해졌습니다.”

제갈유군이 고개를 조아렸다.

중원 각처에 자리 잡은 수많은 학관.

그들 중 하나만 나서도 과거의 소림이나 무당. 화산보다 강하다 할 수 있다.

옛 강호와 달리 서로의 비기를 아끼지 않고 공유하고, 협력하며 연구한 덕에 무공의 수준이 아득하게 상승한 것이다.

쉽게 예를 하나 들면, 천무학관 조교들의 무공 수위가 대부분 초절정이었다.

“거기다 클랜. 비공식적인 그룹까지 포함하면 그 힘은 과거의 구대문파를 아득히 날려 버릴 수준입니다. 여기에 무림맹은 역대 최강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제갈유군은 그저 자만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예만으로도 140년 전보다 몇 배는 강해진 강호.

여기에 마법이란 신비한 힘이 출현하고, 아이템이라는 신병이기가 더해졌기에, 실질적인 전투력은 예상하기 힘든 수준으로 올라가 있었다.

여기에 더해 경험.

대격변의 날부터, 중원은 수많은 피를 흘렸다. 하지만 그렇게 흐른 피가 마냥 헛되지만은 않았다.

죽은 이들은 지식을 남겼고, 공략을 남겼고, 파훼법을 남겼다.

정체도 약점도 몰랐던 몬스터들을 상대로 대처하는 법. 피하는 법, 혹은 유인해서 격멸하는 전술을 터득했다.

이 모든 것은 학관, 그리고 학관을 졸업한 교육생들이 쌓아 올린 거대한 지적 자산이었다.

“너는 그리 보고 있느냐?”

“고모님, 이는 소자의 생각만이 아니옵니다. 본 가의 장로들, 심지어 무림맹의 전략기획관에서도 나온 계산입니다. 전성기 때의 천마신교라 한들, 현 중원 전력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제갈유진의 심드렁한 대꾸에, 제갈유군은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마교.

대격변의 날,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흩어진 옛 무리들.

한때 중원의 가장 강대한 세력이었다곤 해도, 그 이름은 140년 전에 무너졌다.

지금 여기저기 숨어 몸을 피하는 마교도들은, 옛 전성기 때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전력이다.

이들을 가지고 무슨 신통한 쓸모가 있을지, 그리고 그 쓸모라는 게 대체 있기나 할지 의문인 상황이다.

“격돌하면 팔 할의 확률로 완승이란 계산이 나옴에도 고모, 아니, 태상께서 왜 무너진 사교(邪敎)의 무리를 찾으려 하는 것인지, 부디 소자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십시오.”

“…….”

이미 무림맹의 전략기획관에서는, 마지막에 있을 전쟁에서 8할의 확률로 강호인들이 승리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것도 최소치였다.

집계되지 않은 은둔 고수를 모두 제외하고서 그 정도로 평가한 것이다.

‘정말이지 왜 이렇게…….’

제갈유군의 보고에도 제갈유진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이었다.

계속해서 마교의 뿌리를 찾기 위해 변방으로만 돌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몇 년 전.

현경에 오른 강호제일검수.

유문(柳文)과 접대한 이후에는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쯤 되자 그는 정말이지 따져 묻고 싶었다.

역사상 최대의 기재이자, 무림맹의 오래된 두뇌인 제갈유진이.

왜 한낱 전설 따위에 매달리는지를.

마교의 교주라면 천마를 말하겠지만, 그는 최소 수백 년 전. 까마득한 과거에 있었던 인물이다.

애초에 살아 있지도 않거니와, 살아 돌아왔다 해도 기록으로 전해지는 그의 경지는 탈마.

그래 봐야 현 강호제일검 유문과 같은 수준이 아니겠는가.

“전설 따위가 아니니라. 그게 술안주 삼아 말하는 전설이었다면 우리는 이렇게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을 테니.”

“…예?”

“그래, 네가 그리 말한다고 해도 나는 이해하마.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느냐. 그때 그날을.”

제갈유군의 눈이 커졌다.

“…태상.”

놀랍게도 제갈유진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하게, 쓴웃음을 지으며 끄덕이고 있었다.

“보지 않은 이상 믿기지 않을 테지. 난 보고도 한동안 믿지 않았으니까. 군아야, 네가 아직 닿지 못하는 세계가 있단다. 그리고 마지막 싸움은… 그 세계에서 벌어질 것이란다.”

제갈유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뒷짐을 진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는, 그리고 골드 드래곤께서는 그리 보고 계신다.”

그렇게 말하는 제갈유진. 그녀의 눈에 언뜻 희미한 황금빛 이채가 서렸다 사라졌다.

* * *

부빗부빗.

“뭐야. 누가 내 얘기라도 하나?”

갑자기 심하게 귀가 가려웠다.

천마는 투덜대며 귀를 파고, 온몸의 가렵거나 불편한 느낌을 해소했다.

지금부터 할 일에 방심은 절대 금물이니까.

“후웁.”

그리고 천천히 운공에 들어갔다.

평소처럼 대주천이나 소주천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전신 세맥에 기를 퍼뜨리고, 몸의 반응을 관찰했다.

꿈틀. 꿈틀. 툭. 툭.

특히 몸이 미미하게 경련할 때, 자신의 그림자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스르륵. 특. 스르륵.

“…흐음.”

미미하게 짙은 그림자.

어느 순간부터 천마의 그림자는 일반적인 그림자와 달리, 조금 더 어둡거나 검게 느껴지는 부분이 생겼다.

“페이탈리스트라 했었지?”

자연을 부리는 또 다른 인과의 형태. 필리아와 소진은 그걸 정령이라 불렀다.

하지만 저 검은 놈을 직접 본 천마는, 그게 정령이라고 단정 짓기 어려웠다.

지수화풍의 정령은 딱 보는 순간 정령이라고 말하는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애초에 그 힘이 자연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검은 놈.

페이탈리스트는 자연계의 힘이라기보다, 뭔가 다른 것을 연상하게 했다.

“지금 상태로는 불러들여도 내가 질 것이다.”

혼돈의 근원.

놈의 힘은 마공과 흡사해 보였지만, 지금와서 기억을 떠올려 보면 뭔가 조금 달랐다.

애초에 마공의 근원도 따지고 보면 자연계의 힘이니까.

태초에 어둠과 빛이 양존하는 세계에 생명력이 불어넣어지고 거기에 기(氣)가 더해져 자연이 생성된 것이다.

그런데 그림자는…….

자연에 있지만, 자연계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흡사하면서도 어딘가 조금 달라 보였다.

“최대한 빨리 탈마에 이르러야 하는데…….”

결국 자연계의 힘을 부릴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필요가 있었다.

그 힘을 아우를 수 있다면 페이탈리스트라는 놈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 탈마에 오르기까지 과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가 하는 것.

“몬스터의 내공을 흡수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지금 천마의 내공은 3갑자 반.

네크로맨서를 처지한 후의 3갑자에서 카르삭이란 놈의 힘을 흡수한 뒤의 결과다.

본디 이 정도 힘이라면, 탈마 초입 구간을 넘봐야 했었지만, 생각보다 계획대로 되지 않고 있다.

문제가 바로 이한의 몸.

과거 천마, 자신의 몸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거… 다시 또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나…….”

검과 도는 둘 다 날붙이지만, 사용 방법이 판이하게 다르다. 검은 빠르게 찌르고 경쾌하게 달리는 반면, 도는 둔하면서도 예리한, 치명적인 베기를 사용한다.

근본부터 다르니 심득은 더욱 크게 갈라지는 법.

이처럼 이한의 몸은 선천적으로 약골이다.

그러니 그 약골에 맞는 심득이 있어야 탈마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천마가 해결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다.

다만, 그게 상당히 귀찮은 것뿐.

“더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해.”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통해, 언제든 마음대로 무공을 사용할 수 있는 일수일체의 몸을 만들어야 했다.

거기서 파생되는 수많은 심득 중 하나를 붙잡고 다듬어야 더 높은 경지가 가능했고.

“그럼 뭐… 일단은 감각부터 깨우쳐 볼까.”

늦은 밤.

천마는 거처 지붕에 올라가 처마 꼭대기에 섰다.

휘르륵.

서늘한 밤바람이 옷을 펄럭인다. 한 걸음 더 나가면 땅으로 고꾸라질 위치.

스르륵.

그런 곳에서 천마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반걸음 앞으로 나갔다.

푸드드득!

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었다. 옷자락이 잡아당겨지듯 강하게 나부꼈다.

그런 위태위태한 상황에서.

척. 척.

천마는 반의 반걸음. 그리고 다시 반의 반의 반걸음을 내디뎠다.

척.

그리하여 발뒤꿈치만 겨우 처마에 걸쳐진 상태로.

씨익.

그리고 천마는 그 몸의 경고를 따라, 천천히 천천히 처마 끄트머리를 밟으면서 걸었다.

‘백척간두 진일보.’

바로 예민함.

약하기에 더더욱 살고 싶어 하는 생존 본능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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