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제갈유진이 그리는 미래 (2)
찌릿찌릿. 짜르르.
천마는 눈을 가린 채 전각과 전각 사이에 묶어 놓은 외줄을 타고 있었다.
전각 처마에서 바닥으로. 제일 높아 봐야 고작 6장 높이.
바람 한 번 불면 옷이 나부끼고, 길게 걸쳐 둔 줄이 흔들린다.
“체격이 작아서 그런가. 감각이 예민하게 반응하긴 하는데…….”
이한의 몸.
근골도 약하고 내공을 쌓기에도 좋은 재질이 아니라, 크게 될 수 없는 체질.
원래라면 이한은 잘되어 봐야 겁 많은, 전형적인 삼류 무인이 한계다.
그래서 학관 생활도 그 모양이었다.
“이런 몸도 활용하기에 따라 차이가 나는 법이지.”
하나, 지금 이한의 몸에 들어온 천마는 나름 만족했다.
천마신교가 어디 처음부터 중원 최강의 세력이었던가.
그 역시 처음에는 작은 단체의 수장에서 시작했고, 수많은 제자와 가르침이 필요한 놈들을 손봐 주었다.
마교라는 곳이 어디 보통 놈들이 들어오는 곳이던가.
성격파탄자. 미친놈. 세상을 불태울 만큼 한을 품은 놈들이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리는 곳이다.
재능 있는 놈, 한 가닥 재주가 있는 놈들은 다른 구파일방에서, 혹은 사파(邪派)에서 먼저 알아보고 채 간다.
달리 말해, 마교의 인물들은 대개 재능이 없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강호의 고수로 키워 낸 천마는, 현재 자신의 몸 감각을 키우는 데는 최고의 훈련 교관이었다.
“후우우…….”
터벅.
“고생하셨습니다.”
줄타기를 마치고 내려오자 흑객이 잘 마른 수건을 건넨다.
천마는 그걸 받아 땀을 닦았다.
이한의 예민한 몸은 신경질적으로 땀을 흘렸고, 그 때문에 찝찝하던 참이었다.
“너도 내공 안 쓰고 해 볼래? 싫으면 안 해도 되고.”
“예……?”
흑객이 처마까지 이어진 줄을 보고 잠시 고민했다.
눈을 가리고 높은 곳까지 줄을 타는 것.
쉬워 보일 것 같지만, 내공을 사용하지 않으면 난이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자칫 떨어지면 죽을 수 있다는 그런 공포가 생기는 것이다.
“도움이 될 거야. 육체를 다루는 공부는 무식할수록 좋은 법이니까.”
“해 보겠습니다.”
이쯤 되자 흑객은 바로 대답했다.
이제껏 천마와 지내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감을 잡았으니까.
꾸욱. 꾹.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흑객은 팔을 뻗으며 외줄을 탔다.
그러면서 그는 새삼 되새겼다.
천마는, 하루 거의 대부분을 자기 자신에 대해 탐구하는 이였다.
그러다 보니, 다른 이를 굳이 가르치거나 돌보려 하는 경우가 적었다.
하나 아주 가끔, 벽에 막혀 고민하는 자신에게 ‘이거 해 볼래?’라고 지나가듯 가볍게 제안하는 때가 있었다.
요는, 그때 바로 따르면 몇 마디 더 들을 수 있지만, 지나가는 말이구나 싶어 흘리면, 다시는 조언이나 가르침을 얻을 수 없다는 것.
‘대체 왜 이런 기본 과정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헛?’
지이잉. 지이잉.
줄을 오르다 말고 흑객은 숨을 들이마셨다.
일순, 분명히 눈을 가리고 있는데, 검은 천 너머의 세상이 잠시 보였다가 사라지는 경험을 한 것이다.
휘청.
‘……!’
그래서 오히려 불안정해졌다. 아예 눈을 감고 움직일 때는 이런 일이 없는데, 어설프게 깜박깜박, 시야가 보이다 말다 하니 더 감각이 혼란스러운 것이다.
“이. 이게 무슨…….”
“편복(蝙蝠:박쥐들)이 보는 세계다. 녀석들은 눈이 아니라 소리로 세상을 보지.”
천마가 한마디 첨언했다.
무식하게 눈을 가리고 외줄을 타 보라는 이유가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뱀파이어가 침습한 지금 네 몸은 예전하고 달라. 감각도. 반사신경도. 엄청나게 올라가 있을 거다. 그런데 너는 성장한 네 몸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해.”
“……!”
“그러니 연습해야지. 칼날이 한 치 길어지면, 싸울 때 두 치의 간격이 차이가 난다. 몸은 병기의 가장 기본이다.”
휘익.
그리고는 가 버렸다.
잠시 줄 위에서 흔들거리던 흑객은 자신의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끊임없이 기초과정부터 되짚고, 성장할 때마다 자신의 역량을 파악한다.
생각해 보면 무에 입문할 때부터 들었던 기초였다.
‘잊고 있었구나. 나도.’
하지만 대부분의 무인들은 이를 실행하기 귀찮아했다. 흑객 자신도 마찬가지.
반면 천마 저분은 어떤가.
천마신교에 입교한 열 살짜리도 이미 터득한 기본기를, 저 경지에서도 다시 되짚는다.
그러니까 탈마도 극마도 노릴 수 있는 거다.
‘그래, 다시 시작해 보자. 되짚어 보자. 이제껏 내가 배운 모든 것들을!’
흑객은 안이했던 자신의 태도를 반성했다.
휘청. 휘청.
송글송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흑객의 수련은 다시금 시작되었다.
* * *
3일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천마는 학관 생활에 점차 적응해 가고 있었고, 이전처럼 갈등이나 사건과 같은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흑객도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스스로 올라가 눈을 감고 손쉽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4일째 되던 날이었다.
피시식.
아침 일찍 나와 1교시 수업을 기다리는 천마 옆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저, 저기… 이한 형님?”
“어?”
언제 왔는지 조용히 다가온 백무룡은 뭔가 말할 것이 있는 사람처럼 몸을 움찔움찔거렸다.
거기다 난데없이 형이라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
“어. 저기 지금 앉아 계신 자리가… 실은 소제의 자리라서 혹시 괜찮으시면, 자리 양보를…….”
“아, 이제야 왔냐?”
“어제도 있었습니다만…….”
“뭐, 그랬나.”
천마는 그를 반겼다.
애초에 그는 누굴 미워하거나 악감정을 가지지 않는다.
강자존.
강호에서든 어디서든, 약하면 당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이기에.
애초에 백무룡에 대한 감정도, 악감보다는 자꾸 자신을 건드렸기 때문에 귀찮음이 생긴 것이다.
“그래, 알았어.”
천마는 별다른 말 없이 한쪽에 놓인 필기구와 책을 들며 일어섰다.
그러고는 백무룡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런데 진작 말하지 그랬어? 내가 뭐 남의 자리 취미로 뺏는 사람도 아닌데.”
“…아, 예.”
백무룡이 조금 뜨끔한 얼굴로 움찔하더니, 다시 푹 고개를 숙였다.
“배려에 감사합니다. 형님.”
“이까짓 걸로 뭘. 그리고 그렇게 부르지 마라. 세상이 변했다고. 이 학관에선 학년이 높을수록 형이다. 그것도 모르냐?”
바뀐 세상에 나름 적응하던 차라 최근에 조교나 교두에게 하는 말투까지 고친 천마.
어느새 세상이 바뀌면, 행동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굳은 신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말에 백무룡은 여전히 눈치를 봤고, 자리에 겨우 앉았다.
“이한. 여기, 여기.”
소진이 탁탁, 자리를 두드리며 부른다.
앞자리에 앉게 된 천마는 끄덕이며 책상을 정리했다.
불쑥.
“뭐야. 이거?”
그런데 갑자기 자신을 향해 소진이 두툼한 책자를 하나 내밀었다.
“어. 이제까지 수업 필기한 거.”
“수업? 필기?”
“응. 너 그동안 결석… 많이 했잖아? 그래서 진도 따라가기 힘들 거 같아서.”
조심스레 ‘부모님 상(喪) 때문에’라는 말을 돌려 말하는 소진.
파라락.
천마는 그러거나 말거나 단정하게 써진 필기 책을 보고 ‘오’ 하며 신음했다.
과연 삼음절맥. 수업에서 나온 내용은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거기에 더 유용한 것은 소진의 주석이었다.
중요한 부분.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일부러 글자를 크게 쓰고, 그 옆에 깨알만 하게 보충이 되어 있었다.
“뭐, 쓸만 하네.”
천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책자를 받아 들었다.
‘망할. 원래는 내 건데…….’
한편, 뒷자리에서 앞을 돌아보며 백무룡이 신음했다.
소진의 요약 노트는 학년 전체에서 정평이 나 있었다. 누구든 저게 있으면 상등의 성적이 나온다고.
백무룡이 그간 이한과 소진을 따돌린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평소에 괴롭히다가 시험 칠 때 좀 잘해 주면, 손쉽게 성적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노렸던 노트가 안 그래도 설쳐 대는 이한의 손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이제 앞으로 난 어떻게 되는 건지…….’
그저 한숨만 쉬는 백무룡.
지난번 비검대 서클에 이한을 데려갈 때만 해도, 짜증 나는 녀석을 한 방에 가라앉힐 수 있을 거라 보았다.
그도 그럴게, 아무리 날고 기는 놈이라 한들, 뒷배도 없는 2학년이 3학년 앞에 개길 수 있을 리 없으니까.
-비검대에 골칫거리를 가져왔구나. 백무룡.
그런데, 황당하게도 이한은 개겼다. 게다가 개기는 와중에 주시자라는 뒷배까지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백무룡은 날벼락까지 맞았다.
-네 형의 얼굴을 봐서 좋게 보려고 했는데. 비검대 비공식 소속이지만, 정식 입단 절차는 아무래도 다시 고려해 봐야겠다.
-서, 선배님!
주시자는 학내의 고슴도치였고, 비검대가 아무리 학내 서클 1위라 해도, 그들과 부딪히는 건 꺼릴 일이었다.
화가 난 3학년들은 만만한 백무룡에게 화를 냈고, 그 바람에 백무룡은 인맥이라는 큰 끈이 끊기고 만 것이다.
거기다 이제껏 자신과 함께 왈패 짓을 하던 놈들은, 아예 휴학계를 내 버렸다.
‘제길. 할 수 없지. 지금이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 잘 치면, 낙제는 면할 수 있어.’
한숨 쉬며 공부에 대한 의욕을 일으키는 백무룡.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이미 천마가 그의 자리에 앉아서 태도 점수가 수직 하락 해 버린 바람에, 만점이 아닌 이상 낙제는 피할 수 없었다는 걸.
* * *
땡땡땡!
후드득. 후드드득.
종이 울리고, 학관생들이 부산하게 강의실을 나갔다.
소진의 요약 노트에 집중하고 있던 천마는, 어느새 텅 비어 버린 강의실을 보고 갸웃했다.
“어째 요즘 좀 조용하다?”
지금까지 갑자기 시끄럽게 설쳐대는 이한 때문에, 반 안에서는 은근히 그를 적대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수업이 마치고 난 뒤, 일부러 들리도록 욕설을 지껄이거나, 혹은 한 발 물러서서 비릿하게 비웃는 시선을 보내거나.
그런데 요즘 들어 그런 시빗거리가 크게 줄었다.
생각해 보면 지난번 카르삭 왕릉 이후로 대접이 달라진 것 같긴 한데…….
“곧 중간고사잖아. 다들 성적에 집중하는 거야.”
“아.”
소진의 말에 천마는 납득이 갔다.
듣고 보니 요즘 들어 다들 수업에 열심이었다.
아무리 혈기 넘치는 학관생들이라 해도, 남 괴롭히기에 열중하다 자기 성적이 떨어지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었으니까.
“그래서 이한, 너 6교시 뭐 들을 거야?”
“…엉?”
소진의 말에 천마는 눈을 크게 떴다.
이제껏 천무학관의 수업은 항상 5교시에 끝났는데?
“6교시? 수업이 또 있었냐?”
“…7교시까지 있어. 모르고 있었던 거야? 하긴 4교시만 하고 갈 때도 많았으니.”
집에 갈 준비를 하던 천마를 보고, 소진은 황당해했다. 그것도 잠시, 곧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음. 6교시는 선택과목 자율 수업이야. 본인이 듣고 싶으면 듣고, 아니면 자습하고, 다른 과목에 집중하든지. 본인 선택이지.”
“그래? 꼭 들어야 하는 건 아니고?”
“자율이라니까? 실력에 자신 있는 애들은 안 들어. 무예 단련만 집중해도 만점 가까이 받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우리 같은…….”
말하다 말고 소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천무학관에서는 반대였다.
소진이나 이한같이 몸이 약한 학관생은 머리가 고생해야 하는 것이다.
“무예 점수가 낮은 학관생들은 대부분 들어. 선택과목을 이수하면 추가 점수를 얻거든? 실전학 과목에서 만점 받을 자신이 없으면 무조건 듣는 게 좋아.”
본래 2학년의 선택과목은 총 6가지.
그중 오늘들을 수 있는 것은 약재학, 신체학, 이론마법학, 던전개요학, 고대서역어 5가지였다.
“원하는 사람은 7교시 교양수업도 들을 수 있어. 도적학이나 몬스터 탐지, 외국어 등. 정말로 다양해. 출석만 해도 추가 점수를 조금씩 얻으니까, 열심히 들어 두면 득이 되지.”
“흠.”
천마는 조금 고민했다.
극마에 도달한 뒤 탈마를 목표로 수련하느라, 아직 이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전부 다 알지 못한다.
140년 동안 세상이 변하면서 당장 병기술부터 변했다.
오늘 병기술 과목에서는, 각 단병, 장병기의 특성과 해석, 또한 그런 무기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갑옷 장착과 움직임에 대해서도 배우지 않았는가.
집단 전술 역시 그러했다.
예전의 강호에서는 배울 일이 없던, 군에서나 배웠을 과목들이다.
세상이 바뀌고 가치가 바뀌었다. 천마는 그 부분에 흥미를 가졌다. 특히 오늘의 선택과목 중에 그렇지 않아도 한번 듣고 싶은 것이 있었다.
“소진, 넌 무슨 과목인데?”
“난 신체학이야.”
“아, 삼음절맥?”
천마는 끄덕였다.
체질이 선천적으로 약한 녀석들이, 자기 몸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어 하는 건 흔한 일이다.
“뭐, 그럼 나는.”
잠시 고민하던 천마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론마법이나 들으러 가지.”
“이론마법? 거긴 우리 반 애들이 없는데?”
소진은 갸웃거렸다.
한참 무예가 상승 중인 이한이, 무예도 아닌 갑자기 마법?
“아니, 이한. 너 1학년 때 마법 소질 없다고 판정받았잖아? 이제 와서 왜?”
“음. 내가 그랬나?”
소진의 반응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마법은 무예보다 더 지독하게 소질을 따지는 분야다.
차라리 신체는 단련하는 것이 눈에 보이기나 하지, 마나와 마법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역량을 키우기 훨씬 힘들다.
“그냥 뭐 맛이나 보려고. 너, 수업 교재 있어?”
“아, 있긴 있는데.”
뒤적뒤적.
만성적인 학점 부족으로 평소에 선택과목이란 선택과목은 다 듣고 다니는 소진이 두툼한 서책 몇 권을 내밀었다.
파라라락.
천마는 소진의 교양 책과 요약 노트를 다시금 속독으로 읽으며, 빠르게 교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