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야외 실습 (2)
불쑥! 주르르륵.
“…엥?”
그날도 집으로 돌아가던 천마는 멈칫했다.
갑자기 지면에서 뭔가가 솟아오르며, 한쪽 발목을 묶었기 때문이다.
“이거 뭐야… 등나무?”
꾸르르륵. 꽈드득.
담쟁이, 갈대, 그리고 등나무의 여린 줄기가 급속도로 자라나 발목을 휘감았다.
뒤이어 단단해지고 질겨지며, 줄기는 무릎과 허벅지까지 묶어 버렸다.
“움직일 수가 없네?”
천마는 묶인 자신의 다리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쯤, 멀리서 낄낄 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봤지? 3반 놈들 이런 건 모른다니까.”
보아하니 이번에도 천무학관 학관생들로 보였다.
대략 3~4명의 가지각색의 복장을 한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 하는 놈들이냐?”
천마의 물음에 짧은 머리의 청년이 말했다.
“우린 6반이다. 네가 그 이한이란 녀석이지?”
“…그런데?”
천마는 물었다.
왠지 전에 들었던 말의 되풀이가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다름이 아니라, 네놈을 사로잡아 오면 비검대 선배님들이 좋은 걸 준다고 하셔서. 안 됐지만 넌 우리와 함께 가야겠다.”
“또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떻게 된 게 한 치의 예상도 빗나가지 않는다.
“난 따라갈 생각 없는데?”
“…이 자식이 상황 판단이 안 되냐? 넌 이미 우리에게 잡혔어. 너에겐 선택권이 없다고!”
한 학관생은 비웃으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반짝.
그의 손목에서 보석이 박힌 마법 아이템이 빛났다.
“이게 뭔지 아냐! 드라이어드의 축복이다! 식물과 풀을 무기로 쓸 수 있는 고급 정령 아이템!”
“어? 그거 꽤 좋아 보이는군.”
천마의 입꼬리가 웃음기를 그렸다.
어쩐지. 아까의 익숙한 느낌은 그 때문이었던 모양이었다.
필리아가 사용했던 드라이어드 루트.
적의 움직임을 속박하는 중급 정령술이었다.
상대는 그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마법 아이템을 장비하고 공격해 온 것이다.
“드라이어드의 축복이라… 그거 비싼 거지?”
“…어?”
우드득. 치이익!
의기양양하던 녀석의 얼굴이 따악 굳었다.
화르르륵. 모락모락.
천마의 하체가 온통 불길과 연기에 뒤덮인 것이다. 그와 함께 급속히 쪼그라들고 부서지는 식물의 줄기.
“바지 한 벌값으로 마법 아이템이라… 남는 장사네.”
“미, 미친! 다리로 어떻게 열양공을…….”
“당황하지 마! 증폭!”
쫘아악! 덜컥.
“오오?”
막 등나무 줄기를 열기로 태워 벗어나려던 천마가 다시 멈칫했다.
어찌 된 게, 조금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나무줄기와 풀들이 자라 다리를 묶어 오는 것이다.
“증폭! 증폭! 증폭!”
꾸드득. 꾸드드득.
팔찌를 찬 또 다른 녀석이 외칠 때마다, 나무줄기는 더욱 강하고 빠르게 자라, 이제는 몸통까지 휘감아 왔다.
“…보아하니 뭔지 알겠군.”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물디드문 정령술을 쓰는 팔찌 아이템.
그리고 어떤 아이템의 효과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는 지원 아이템.
그리고 수업 시간에 배운 거지만, 이런 것들은 대개.
“꽤 값이 나가겠지?”
콰아아아아!
대답과 함께 조금 더 기운을 쏟아내자, 나무줄기들이 와다닥 불타올랐고.
작은 불티를 흘리며 무너져 나갔다.
덕분에 삽시간에 옷들이 누더기가 되었지만, 옷 한 벌 정도야 뭐.
“자, 몸에 있는 거 다들 꺼내 놔.”
얻는 거에 비하면 참으로 작은 것들이다.
“히이익!”
“으아악! 괴물!”
“쏴! 바로 작동해!”
찰칵. 콰드드득!
아이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뭔가를 꾸몄고, 이내 천마의 발치에서 끔찍한 소리가 났다.
카가가각!
발치에서 불꽃이 튄 것이다.
내려다보니 곰도 잡을 만한 거대한, 쇠로 된 덫이 천마의 발을 물고 있었다.
“이놈들이 적당히를 모르네.”
천마의 얼굴에 미소는 여전했지만, 이번 공격은 꽤나 사나웠다.
호신강기를 자동으로 발현하는 그였으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발목이 잘려 나갔을 함정이다.
“저. 저… 몬스터용 덫이 어떻게…….”
“어떻게는 무슨.”
꽈드득. 쫘아악!
힘을 주어 발을 옮기자, 온통 시커먼 쇳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재료부터 평범하지 않은, 아마 통으로 현철로 된 덫인 모양이었다.
“…일단 이거도 돈 되는 것 같으니 압수하고.”
천마는 힐긋 주변을 돌아보고 타다닥, 손가락을 튕겼다.
픽! 픽! 철컹! 철컹!
지풍이 땅에 꽂히자, 자극을 받은 기관들이 차례차례 튕겨서 올라왔다.
하나같이 시커먼 현철제 덫. 그게 십여 개나 튀어나와 아가리를 다물고 있었다.
새삼 참 세상 많이 좋아졌다 싶었다.
예전 세상 같으면 보검에나 넣어서 쓰이던 현철이 일개 덫으로 쓰이다니.
“오, 이게 다 얼마냐?”
주섬주섬.
천마는 그 비싼 덫들을 일일이 다 챙기고, 얼어서 바짝 굳은 일단의 학관생들을 돌아봤다.
“너, 그 팔찌 내놔.”
“뭐. 뭐라고! 이 자식이!”
“순순히 내줄 것 같아! 이건 우리 가문에서…….”
“어. 그래서 달라는 거야.”
철컹. 철컹.
아까 한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며, 천마가 현철제 몬스터용 덫 십여 개를 들어 보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천무학관에서 학관생들의 과격한 싸움은 금지. 기본이 정학에서 심하면 퇴학까지 간다.
“퇴학당하는 것보다야 싸게 먹히는 게 아닐까?”
“…….”
천마의 지적에 죄다 안색이 하얗게 된 학관생들.
전부 멍청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었다.
그리고 그 멍청이들 중에도 항상 더한 멍청이가 있는 법이고.
“제기랄! 쳐! 입을 막아!”
“우와아아!”
천마는 기다렸다는 듯 웃어 보였다.
“내 생각도 그래, 우선 처맞고 시작하자.”
손쉬웠다.
퍼퍼퍼퍽!
그는 별 힘도 안 들이고 달려드는 놈들을 토닥토닥 때려잡았다.
애초에 무력도 아닌 아이템과 함정으로 무장하고 온 놈들이니, 손맛도 없이 싱겁기만 했다.
* * *
쩔그렁!
시커먼 현철 덫이 바닥을 굴렀다.
뒤이어 정령석과 보석이 박힌, 값비싼 팔찌가 두엇 탁자 위에 올려졌다.
“…이게 뭐야?”
덕분에 소진은 황당해졌다.
그의 눈이 탁자 위의 아이템과, 심드렁한 천마의 얼굴을 번갈아 오갔다.
“팔아 줘. 돈 좀 될 거 같으니까.”
“…이한, 일단 출처가 어떻게 되는지 말해 줄래?”
소진은 꾸욱, 미간을 누르며 짜증을 눌렀다.
요즘 들어 막 나가는 동급생은 가끔 상식과 힘을 바꿔 먹은 모양이었다.
“이건 기습당할 때 얻은 거고. 이건… 걔네들 가문에서 내려오는 물건이라던데?”
소진은 조심조심, 천마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이게 어떤 물건들인지를 알게 되었다.
백주 대낮에 벌어진 일방적인 시비.
증인도 많고, 상대는 자칫하면 퇴학까지 갈 수 있다. 다소 좀 시끄러울 수는 있겠지만, 천마가 뜯어 왔다고 신고하지는 못할 터.
“참. 저번에 집 받은 값 있지. 이 정도면 되나?”
소진은 속으로 놀랐다.
그저 호의를 받은 것으로 여길 줄 알았는데, 이런 것도 정확히 셈을 할 줄이야.
소진은 상인 집안의 자제.
그는 준다는 이한의 말을 거부하지 않았다.
“…충분해. 오히려 한참 남을 거 같은데?”
더욱이 눈앞의 고급 아이템을 보고, 재빨리 그 값어치를 계산했다.
“다행이군. 받은 건 무조건 갚는 게 내 신조라서.”
천마는 답을 듣고 돌아섰다.
소진이 학관 일이 아니라 돈이 걸린 문제에선, 빠릿빠릿하기 짝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딸랑딸랑.
이한이 나가고 난 뒤, 소진은 작은 종을 울려 집사를 불렀다.
외알 안경을 낀 중년의 장한이 재빠르게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이 공자님, 부르셨습니까?”
“음. 응접실 좀 준비해 두도록. 귀한 가문에서 손님이 좀 오실 것 같아.”
“알겠습니다. 어느 댁의 손님이실지?”
심히 뜬금없는 지시에도, 집사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정중히 묻자 소진은 피식,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었다.
“여기 이 아이템들의 주인들. 수배해서 파악해.”
달그락.
고가의 아이템. 가문의 망나니들이 멋대로 가져온 귀한 물품.
천마의 말대로 아무렇게나 팔지는 못 할 물건이었다.
그랬다간, 저 가문과 원수를 지게 될 테니까.
그러니 주인에게 돌려주면 된다. 그게 가장 깔끔한 처리다. 대신.
“천무학관의 교칙. 한 부 필사해서 준비하고.”
합의금으로 단단히 뜯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을 불문에 붙이는 조건으로.
소진은 흐뭇하게 웃었다.
이러나저러나 그는 상인 집 아들.
이문에 밝은 건, 어쩔 수 없었다.
* * *
“으… 급하다. 급해.”
중간고사를 하루 앞둔 날.
천마는 수업이 끝나고 거처로 돌아가는 중에 소변이 마려웠다. 그래서 적당히 눈에 보이는 변소를 찾았다.
뭉클뭉클.
가까이 가자마자 오래 묵은 오물의 냄새가 코를 톡 하고 찔러 왔다.
“어이구. 이건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를 않냐.”
지독한 악취. 천무학관 안에서는 수세식이라는, 신형 화장실이 있으므로 가끔 잊곤 했다.
아직 세상에 저 신문물이 퍼지기에는, 비용도 노역도 많이 들어간다는 것을.
“…허, 이 녀석들. 포기를 모르네.”
그런데, 막 화장실 문을 열자마자 머리 쪽에서 간질간질한 느낌이 나는 것이다.
‘대충 다섯 놈인 것 같은데…….’
천마는 올려다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디에 있는지 뭘 하는지 너무도 잘 알았다.
‘매복인가?’
기본은 되어 있어 보였다.
원래, 매복을 하며 기습하는 가장 첫 조건은 인내력.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서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대단하네.”
천마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이 냄새나는 오래된 화장실에, 이놈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대기하고 있었는지.
오늘도 갑자기 소피가 마려워지지 않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 얼마 안 되는 가능성에 걸고, 저 독한 냄새를 참고 기다리다니.
“이제껏 본 놈들 중 가장 훌륭하구만.”
툭툭, 대충 털고 선 천마는 뒤돌아섰다.
아마, 가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을 향해 공격해 올 터.
그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하앗!”
“핫!”
사방에서 달려드는 아이들.
천마가 예상했던 대로 머리 위로 두 명, 좌우로 둘, 뒤쪽 하나. 총 다섯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습은 이번엔 너무도 쉽게 무력화되었다.
퍼퍽!
그들보다 몇 배는 빠른 발차기.
퍼퍽!
목표점도 정확했고.
퍽!
마지막 시간 차 발차기까지 완벽했다.
“으으윽.”
“끄아아아--!”
텀벙. 텀벙. 철벅!
천마의 발길질에 맞은 학관생들이 비명을 질렀다.
힘을 적절하게 배분한 공격에, 녀석들이 그대로 구멍에 ‘빠져’ 버린 것이다.
“쯧쯧. 기회가 왔을 때는 과감히 덮쳐야지. 고민하니까 그리 당하는 거야.”
그나마 한 명. 어쩌다 보니 기침을 콜록콜록하는 여학생은 남겼다.
“괴물 같은 녀석……. 역시 다른 반 아이들이 쓰러진 게 거짓말이 아니었어.”
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소녀.
그녀에게 천마는 가볍게 물었다.
“너희들은 몇 반이야?”
“내가 그걸…….”
“생각 잘해서 대답하고.”
천마가 손짓으로 구멍을 가리켰다.
오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청년 네 명이 악다구니를 쓰고 있는 똥통을.
“…12반이다.”
소녀는 곧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엄두가 나지 않은 것이다.
“12반. 좋아.”
천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녀를 보며 말했다.
“시간 나면 직접 한번 찾아갈게. 그땐 모두 덤벼.”
“……?”
“그래야 좀 재밌어지겠지. 아직은 너희들 너무 싱겁거든,”
탁.
말과 함께 천마는 역한 냄새의 화장실 문을 닫았다.
뒤에서 으드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