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4학년 실전 평가 (3)
“파견지는 오가장의… 광산 마을? 그럼 일단 북이현으로 내달려야겠군.”
흑객은 파견 지령서를 갈무리하고, 탁자 옆에 놓인 물건을 집어 들었다.
투욱.
묵직하게 내용물이 든 배낭. 장비하고 움직이기 쉽도록 제작된 소가백화점의 명품 배낭이었다.
“페미컨, 접이 삽, 발화 도구, 끈. 그리고…….”
내용물까지 충실한 여행 용품을 확인하다가 그는 잠시 멈칫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꿀렁꿀렁.
검붉은 액체로 가득 찬 유리병. 이건 원래 넣은 적 없는 물품이었다.
그걸 넣어 준 사람은 천마였다.
-위급할 때 써라. 웬만한 놈들은 다 처리될 거야.
뻔하다면 뻔한 것.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지만, 흑객은 천마의 피가 든 유리병을 배낭에 조심히 챙겨 넣었다.
“너, 어디 가냐?”
때마침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천마였다.
“아, 그게 임무를 받았습니다. 지금 바로 움직여야 하는…….”
“오. 역시 4학년은 확실히 다르구만. 아주 실전이야 실전.”
한 손에 책을, 다른 한 손에는 페미컨을 집어 먹던 그가 웃어 보였다.
“면목 없습니다. 위대하신 천마 조사께서도 직접 움직이지 않는데, 하찮은 저 따위가…….”
흑객은 이전에 들었던 기억을 잠시 떠올렸다.
천마가 지내고 있는 2학년은 다른 학년과 달리 필기시험으로 대처한다는 걸.
그리고 실기시험도 반 대항전이 끝이라고.
“아냐, 아냐. 난 이렇게 배우는 게 더 재밌어. 몰랐던 세계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고. 교과과정에서 필기시험도 엄연히 중요하다고.”
천마가 힐끗 뒤를 가리키며 말하자, 흑객의 시선이 그곳으로 이동했다.
수북이 쌓여 있는 책자.
매점에 가서 2학년과 관련된 모든 책자를 구해 오란 말에 자신이 들고 온 것들이었다.
‘설마, 저걸 다 보신 건 아니겠지?’
정말이지 놀라웠다.
백여 권에 가까운 책. 그걸 딱 한 번씩 훑어보고는 더는 보지 않는다.
설마하니 저걸 다 외웠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게 천마라면 또 모르는 일이다.
본교에서는 천재 중의 천재, 전설로 일컬어지는 분이 아니신가.
“한동안 북이현에 있을 것 같습니다. 빠르면 며칠 안에 오겠지만…….”
“천천히 다녀와. 나도 할 일이 많다고.”
“예.”
펼친 책을 보고 돌아서는 천마.
그를 보던 흑객은 자연스럽게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이젠 나보다 적응을 잘하시는구나.’
처음엔 좀 소란이 있어 보였다. 주머니에 든 송곳처럼, 어딜 가도 도드라지고 눈에 띄었다.
그런데 이젠 학관 생활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락없이 어린 학관생으로만 보였다.
타아악!
그는 배낭을 마무리한 후, 예를 표했다.
“그럼.”
이후 바람처럼 내달렸다.
몸이 땀으로 끈적끈적했지만, 지금 씻을 필요는 없다.
어차피 다시 땀에 젖을 테고, 목욕은 오가장에서 느긋하게 하면 될 테니까.
* * *
몇 시진이 지나, 동이 트던 아침쯤.
목적지에 도착한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게 무슨…….”
원래 40여 가구로 이루어진 광산 마을.
흑객의 눈에 비친 그곳은 온통 폐허가 되어 있었다.
곳곳에 건물이 부서지고, 대장간은 활활 타올라 전소되어 있었다.
마치 수백 개의 벽력탄을 터뜨렸다고 생각될 정도로, 멀쩡한 건물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몬스터… 최소 다섯에서 많게는 8마리쯤.”
흑객은 일단 파괴 현장을 돌아보며 흔적을 찾았다.
거무칙칙하게 그을린 땅.
거기 새겨진 짐승의 발자국. 네 발 짐승의 흔적을 확인한 후 흑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건 그가 알고 있는 몬스터였던 탓이다.
“코모도 드레이크? 설마 그런 상위 종족이…….”
거대한 도마뱀의 발자국.
습하고 물기 많은 곳에 나타나는 거대 몬스터, 코모도 드레이크의 흔적이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마을은 광산 인근이라, 땅이 단단하고 건조하다. 습한 곳을 좋아하는 코모도 드레이크가 직접 올 일은 없는 것이다.
톡톡. 팅팅.
“그리고 이건… 화염 속성인데?”
손가락으로 두들겨 보니, 발자국이 난 땅은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마치 도자기로 구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흑객은 그 자리에 코를 대고 흠, 하고 냄새를 맡았다.
“물기로 질척해진 땅. 그걸 밟아서 자국이 남았고.”
뒤이어 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죄다 불타고 부서진 건물들. 벽력탄을 연상한 게 무리가 아니었다.
집이고 창고고 어마어마한 충격량에 휩쓸려 터져 나갔고, 뒤이어 강렬한 화염에 휩싸였다.
잠시 당시를 상상해 보던 흑객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킁!
폭심지라고 해야 할까, 불타고 산산조각 난 폐허의 중심에서 달콤하고 짭조름한 향기가 풍긴 것이다.
“사람의 피구나.”
* * *
콱! 퍽! 퍽!
배낭에서 접이식 삽을 꺼내 땅을 팠다. 잿더미와 돌 부스러기를 한참 긁어내자, 불쑥하고 피 묻은 손이 솟구쳐 올라왔다.
꿀꺽!
“끄으으으…….”
“…정신 차리시오. 숨! 숨을 쉬시오!”
사람이었다.
아마도 지하실에 있다가 건물이 무너지면서 깔린 모양이다.
흑객은 파묻힌 사람을 끌어내고 목에 손을 대어 맥을 짚었다.
그리고 얼굴이 찌푸려졌다.
맥이 약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회생은 불가.
판단이 내려지자 그는 이를 사리물고, 구해 낸 사람의 백회혈에 엄지를 쿡, 쑤셔 박았다.
지이익.
지금 그가 하고있는 시술은 인위적인 회광반조. 사혈을 자극하여 사람을 확실히 죽게 하는 수법이다.
하지만 어차피 가망 없는 부상자에게, 마지막 활력을 낼 수 있게 만드는 시술이기도 했다.
“끄으으으… 연구소, 연구소가…….”
진기를 밀어 넣자, 얼마 후 백지장 같던 안색이 발갛게 돌아오며 피투성이 남자가 눈을 떴다.
“…이봐! 정신 차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다, 당신은?”
“천무학관에서 온 요원이다. 오가장 요인은 대피했나? 몇이나 되지?!”
흑객은 바쁘게 물음을 던졌다.
“크윽… 헉, 헉… 아가씨가… 아가씨가 위험하오! 불타는 거대 도마뱀들이…….”
“불타는 거대… 샐러 드레이크?!”
시술 덕에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상대는 샐러 드레이크. 거대 도마뱀 코모도 드레이크의 변이체. 화염과 맹독을 뿜어내는 위험 등급 7급의 몬스터.
“그… 맞소. 그 이름이 몇 번… 크윽, 연구가… 이제 결과물을 내는데… 하필!”
연구. 아가씨. 샐러 드레이크.
세 단어를 입속으로 되뇌며 흑객은 주입하는 진기의 양을 늘렸다.
“아가씨? 거기 여인이 있었나? 어디로 대피하셨지?”
“으윽… 큭… 광산으로… 호위 무사들이…….”
“광산! 호위가 아직 있군! 괴물의 규모는 얼마나 되나!”
“열 마리가 넘… 크어억!”
주르륵! 푸쉭!
한계가 왔다. 연구원이라 추정되는 인물은, 피를 와락 쏟고는 숨을 거뒀다.
“하아… 젠장.”
흑객은 혀를 차며 그의 눈을 감겨 주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폐허. 시신조차 없는 마을.
생존자는 없다. 더 정보를 얻어낼 방법이 없다.
남은 흔적들을 찾아 뒤지면 추측은 가능하겠지만, 당장 오가상단의 무남독녀가 목숨이 위험하다.
“제기랄……. 할 수 없군.”
우득!
흑객은 입술을 물어뜯었다. 진득한 선혈이 목으로 넘어갔다.
찌리리릿!
그의 동공이 고양이처럼 세로로 길게 찢어졌다.
혹여나 발작이라도 일으킬까 하여 꺼내지 않았던 그 능력을, 이제는 제대로 써 보려고 했다.
“크으으으…….”
눈가가 붉게 물들고 시야가 변해 갔다.
이제껏 누르고 있던 흡혈귀의 힘.
피의 권능이었다.
‘젠장. 아무리 그래도 블라드의 능력을 빌려야 한다니…….’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었다.
우드득!
동시에 잔혈마공을 운용했다.
위험한 흡혈귀의 본능에, 살기가 미친 듯이 강한 마공. 둘의 조합은 불에다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혼자서 써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제껏 천마가 인도해 주곤 했으나 지금은 흑객 혼자서 해내야 했다.
투둑. 투둑. 툭툭.
누웠다가 급히 일어날 때처럼, 눈앞에 반짝이는 선들이 흘러내렸다. 기묘한 흐름의 도형들.
부르륵. 부륵부륵.
얼굴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실핏줄이 죽죽 그어지며, 동공이 점차 확장되었다.
그러던 한순간.
파아아아아앗-.
시야가 한없이 확장됨과 함께 가시거리의 경계가 없어졌다.
동시에 그의 눈에만 보이는 흉악한 색채들.
피 냄새였다.
끈끈한 냄새. 끈적한 냄새. 살가운 냄새. 차디찬 냄새.
형형색색의 피 냄새가 여러 형태로 눈앞에 드러난 것이다.
세상 모든 마물 중에 흡혈귀만이 가지는 힘. 피의 권능.
“…….”
핏.
흑객은 바닥을 바라보다 어느 핏자국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둥실. 둥실.
딱 한 방울 정도. 바닥에 섞여 있던 약간의 피가 허공으로 떠올라 흑객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텁. 흐릅!
흑객은 입을 열어 그 피를 담고, 혀로 자신의 피에 섞었다.
“으으으음… 크으으으!”
흡혈귀는 피를 빨 때 단순히 혈액만을 마시는 것이 아니다. 혈액에 담긴 생기를 마시고, 그 생기를 오염시키면 누군가를 부하로 만들 수 있다.
“벌써, 저만치 멀리 간 건가…….”
지금 그가 삼킨 단 한 방울의 피는 생자, 아직 살아 있는 자의 피.
피는 생명이다.
피의 주인이 생명을 유지하는 이상, 피를 마신 흡혈귀는 그 주인의 위치를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찌르릇.
흑객의 고양이 같은 동공이 한쪽을 향했다. 그의 눈에는 선명한 황색 실선이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불운한 연구원의 말과 일치했다. 황색 실선이 이어진 곳은 저 멀리 길이 다져진 산. 아마도 광산이 있을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었다.
“좋아. 따라가자.”
팟!
하나 거리가 적게 잡아도 80리는 되었다. 흑객은 전력을 다해 발을 박찼다.
이제껏 내공 없이 죽어라 단련해 온, 다리 근육이 힘을 쓸 때였다.
* * *
천무학관 중간고사.
이 시기에는 2학년 학관생들의 대외 활동이 금지된다.
시험 날 출석은 필수이며, 2각(30분) 이상의 지각은 결석으로 처리. 바로 유급 처분을 받는다.
또한, 1학년은 시험 기간 동안 등교가 금지되고, 3, 4학년들은 모두 대외 활동을 보내 버린다.
학관에 남는 것은 오로지 2학년뿐.
그만큼 2학년 중간고사는 2학년만 아니라, 천무학관을 운영하는 책임자들에게도 중요한 시험이었다.
스윽.
평소와 다른 긴장감으로 가득한 2학년 3반.
병기술 교관인 조적상은 학관생들 사이로 시험문제지를 배부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매서운 얼굴이던 그는, 중간고사 기간이 되며 더욱 매서워져 있었다.
“시험 시간은 3각. 서역식 계산으로 45분이다. 타 학관생의 답안지를 훔쳐보는 이는 발각 즉시 퇴학이니, 절대로 하지 말도록. 수상한 행동만 해도 적발이다. 괜히 의심받을 행동은 하지 말고, 나중에 억울해하지 마라.”
그는 슬쩍 뒤를 돌아 감독관을 쳐다보았다.
대머리의 사내가 한 손에 뭔가를 들고 조용히 주시하고 있었다.
교도관(矯導官)의 눈.
주로 죄수들이 딴 짓거리-탈옥 시도, 계획- 하는 걸 파악하는 데 쓰이는 아이템이다.
하루아침에 탈옥하는 죄수란 없다. 미리 감옥의 틈을 살피거나, 사람들의 시선을 살피며 흘끔흘끔 눈을 굴린다.
교도관의 눈은 이런 행동 심리를 파악하여 사전에 탈옥 시도 자체를 못 하게 만든 아이템으로, 지금 교실 내 모든 학관생들의 시선 처리를 파악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수험생이라면 자기 앞에 놓인 시험문제에 집중한다. 그 시야는 좌우 1척(30센티).
이 범위를 넘어가면 적색 점이, 생기며 적색 점이 다섯을 넘어가면 교관들이 그 학관생을 대놓고 주시한다.
이쯤 되면 부정행위를 하려고 들었던 학관생도 포기하게 마련.
“시간이다. 시험 시작!”
슥슥슥.
조적상의 허락이 떨어지자, 학관생들은 빠르게 답안지를 기입해 나갔다.
천무학관 2학년생. 강호 어디에 나가도 무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수재들의 시험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천마의 첫 중간고사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