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2학년 중간고사 (3)
“다들 고생이 많으시오. 학관생 제군들.”
4교시 무협학 시험.
앞서 잡아먹을 듯하던 과목과 달리, 이번 시험은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조금 특이한 건, 나이가 육십이나 된 노인의 직급이 교두가 아닌 교관이었다는 것.
하지만 이건 무협학 과목의 특성이었다.
협의를 가르치려면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있었던 수많은 협객의 역사와 그에 해당하는 유교의 충의를 들 수 있어야 한다.
때문에 무협학은 나이가 많은 자들이 교관으로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뜻이 높은 사람일수록 성과도 큰 법. 무협학은 오늘 친 네 과목 중, 학관생 여러분 모두가 좋아하는 과목이기도 하지요. 여기서 모두가 고득점을 얻어 가시길 바라오.”
시험 문제지가 나누어지고, 학관생들은 배부한 시험지를 읽으며 빠르게 기입했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무협학은 기본적으로 정파의 인물들이 갖춰야 할 도덕에 대한 것.
덕분에 학관생들은 다른 시험과 달리 막힘없이 기입 하고 있었다.
다만, 한 명.
이전과 달리 난처한 표정을 한 자가 있었다.
‘아, 씨…….’
천마는 첫 문제부터 걸렸다.
그에게는 별 같잖지도 않은 문제가 나타난 것이다.
1. 협(俠)을 다방면으로 해석하시오.
‘애초에 거짓을 부르짖는 놈들이 회피하려고 만든 게 협이지. 무슨 다방면씩이나.’
어이가 없어 한참을 들여다본 천마.
다시 문제지를 주욱 훑어보자 그중 몇 개는 괜찮은 질문도 있었다.
5. 당신은 천 명을 이끄는 수장입니다. 어느 날 산행을 하고 돌아오던 중, 수하 하나가 없는 걸 발견했습니다. 마침 다른 수하 하나가 던전에 들어가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그 안에는 본인들 능력으로써 제압하기 쉽지 않은 위험한 몬스터들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판단을 내리겠습니까?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이런 문제도 있었고.
12. 곤궁에 처한 가난한 마을을 지나가다 굶주려서 쓰러진 노인을 발견했습니다. 지금 당신에게는 금 한 냥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흥미로운 문제도 보였다.
“뭐. 대충.”
그런 것들을 시작으로, 천마는 이내 빠르게 답안을 쓰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사사사삭.
한번 작심을 하니 누구보다 빠르게 손을 움직이는 천마.
1교시, 2교시, 3교시까지 전부 빠르게 풀기 1등인 그였다. 별 의미는 없지만, 이번에도 최초로 제출할 생각.
사사사삭!
“됐다!”
그렇게 시험 시간 종료까지 일각(15분)을 남긴 채, 이번에도 최초를 달성했다.
* * *
“와아아아!”
“끝났다! 이제 해방이다!”
필기시험이 끝나자, 반 아이들이 환호성을 울렸다. 이건 비단 3반뿐만이 아니었다.
“와아아아!”
“드디어 끝났다!”
옆 반도, 다른 반도, 2학년 학관생들이 모두 다 함성을 질러 댔다.
몇 시간에 걸친 시험. 머리 아프고 피 마르는 필기시험이 겨우 끝난 것이다.
“다들 식사하며 쉬도록. 내일은 시험 발표날이니, 잊지 말고 출석하도록. 오답 정리는 중요하다!”
책임 교두들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알렸다.
“근데. 오늘 급식 뭐 나오지?”
“아. 나 알아. 아마 동파육일걸?”
“빨리 가자!”
두두두두두!
책임 교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학관 아이들은 이내 식당으로 몰려갔다.
격한 긴장에서 벗어나,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이다.
수백 장의 답안지를 채점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하루.
채점이 이토록 짧을 수 있는 이유는, 1학년부터 4학년까지의 모든 교관들과 교두들이 달라붙기 때문이다.
수업할 인원들이 채점에 다 달라붙으니, 다른 학년은 수업을 할 수 없다.
2학년 시험 때, 다른 학년생들이 학관에 나오지 않는 이유는 이 때문이기도 했다.
“어떻게 될 것 같애?”
“너는 잘 봤어?”
“야. 야. 뭘 물어? 운소령이잖아.”
한편 딱히 급식을 먹으러 가는 대신, 자기 도시락을 준비한 학생들도 있었다.
시험이 끝난 후, 학우들의 관심은 운소령에게 몰려들었다.
다름 아닌 2학년 수석. 특히 필기 부분에서 만점을 받은 그녀는, 최고점이 가장 유력한 학관생이다.
시험을 친 학생이라면, 누구나 자기 답이 얼마나 맞는지 궁금하게 마련. 평소 자존심 강한 당무련도 이때만큼은 운소령 앞에서 사근사근하게 굴었을 정도다.
“서문영, 너는 몇 점 될 것 같애?”
“아까 4번 문제가…….”
여자들은 그렇게 몰려가고, 남자들은 서문영에게 향했다.
운소령이 전교 1등이라면, 서문영 역시 전교 2등. 특히 무과 수석이기도 하니 신빙성이 크게 높았다.
하지만 몰려드는 기대에 찬 눈빛에, 서문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크게 기대하지 마라. 나도 쉽지 않은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태도에 학관생들은 쭈뼛쭈뼛 하며 그에게서 물러섰다.
그리고 다음으로 찾은 대상은 놀랍게도 이한이었다.
“이한, 치유학 5번 문제 중에 1번 소문제 좀 물어볼까 하는데…….”
운소령과 서문영에게 달라붙지 못한 이들.
원래라면 반장인 방윤 중심으로 모여들었을 터였다.
“후우욱… 크윽! 크윽!”
한데, 그 반장인 방윤이 극도로 저기압이었다.
얼마가 화가 났는지, 털 오라기 하나 없는 매끈한 머리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자칫 시험문제 물어보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를 지경.
원인은 있었다.
너무도 태연하게 대답하는 인물이.
“그거? 중부(中府)지. 쇄골 아래 늑간 신경과 전흉 신경이 분포하는 곳. 주치증이야 폐에 순환을 하는 탓에 관련된 병명이 붙겠지. 뭐, 천식이라든지 아니면 폐부종이라든지.”
이한은 묻는 말에 바로바로 답을 알려 주었다.
평소에 거들먹거리는 성격이, 가르쳐 줄 때는 오히려 더 속 시원하게 느껴졌다.
“…와. 맞네.”
“어. 그럼 내가 적은 게 맞는 거야?”
덕분에 그의 주변에는, 어느새 운소령만큼이나 많은 학관생들이 모여 있었다.
이 답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둘째 치고, 물었다 하면 술술 해석이 나온다.
“첫 시간 병기학 시험 때 나왔던 선장(禪杖)은 대체 뭐야? 제미곤(장대)인가? 아니면 방편산(삽)?”
“야, 그걸 모르냐? 소림사 땡중들 대표 무기잖아. 쯧쯧. 길이는 제미곤과 같은데, 쇠고리가 몇 개 달려 있어.”
가끔은 무식하다고 타박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대로 멋이 있었다.
애간장이 타고 있던 학관생들은 너무도 술술 풀어 주는 천마의 답변에 다들 반색했다.
“무기로 쓰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주변의 길 잃은 영혼들 인도하기 위한 용도. 그리고 무에 몸을 담았다고 본인이 승려라는 걸 잊지 말라는 의미로 달아 둔 거야. 뭐… 요즘 땡중들이 그걸 알려는지는 모르겠다만.”
“와…….”
“정말 대단하다!”
“과연!”
큰 대맥부터 시작해 지엽적인 사설까지.
거듭된 질문에도 물리지 않고 대답하니, 그런 반응 때문에 아이들의 관심이 끊이지 않았다.
“병기학 시험 때…….”
“몬스터학 시험 때…….”
“아. 그거?”
물었다 하면 대답이 술술 나오고, 듣고 있다 보면 사리에 맞다.
이쯤 되니 점점 이한 주변의,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녀석들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제일 먼저 나가길래 시험을 포기했다고 여겼는데…….’
‘이 녀석, 설마하니 진짜……?’
무예가 급상승한 것만으로도 관심 대상인데, 필기에서까지 막힘이 없다. 질문을 하는 학관생들도, 멀리서 그런 그들을 보고 있는 다른 학관생들도 비슷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야, 언규. 어쩌냐? 만약 이한이 만점을 받으면…….”
“…닥쳐. 종천도.”
“클클클클.”
종천도의 놀림을 받은 언규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말도 안 될 일이라 여겨 내뱉은 농담인데, 지금 말도 안 되는 사태가 점점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한이 만점을 받으면 내가 그놈 신발을 핥겠다.
‘빌어먹을. 그럴 리가 없어. 절대…….’
언규가 분노 반, 두려움 반으로 노려보는 동안, 동급생들에게 설교를 해 대던 천마가 결국 손을 내 저었다.
“그만, 그만. 야, 나도 밥 좀 먹자. 시간 다 갔잖아. 어차피 내일 오면 결과를 볼 수 있다고.”
훠이훠이.
뒤늦게 매점 식당으로 배를 채우러 가는 천마.
학관생들은 한숨을 쉬며 더는 그를 붙잡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 대신에.
“소진아, 너는…….”
“야, 삼음절맥. 너 다 알지? 몬스터학 5번 문제 답 뭐냐?”
“어… 나는 잘 몰라. 미안.”
옆에 있는 소진에게 쏠렸고, 그는 손을 내저으며 웃어 보였다.
“말이 삼음절맥이지, 다들 내 성적 알잖아? 이제껏 내가 만점 받은 적은 없다고.”
‘설령 답을 다 알아도 말이지.’
뒷말은 속으로만 했다.
소진은 약자다.
약한 자가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 곤궁에 처할 뿐이다.
1학년 배치고사 때, 아는 대로 답을 썼다가 백무룡 패거리에게 찍혀 숙제나 과제를 대필해야 했던 경험은 끔찍한 교훈을 주었다.
‘적당히, 필요한 만큼. 80점에서 90점 정도로.’
그 이후 약자의 처세술.
답을 아는 문제가 있어도, 주변 학우들의 성적을 예상하며 일부러 답안을 비워 두곤 했다.
일부러 성적을 떨어뜨려 1년을 지내자, 학관생들은 더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 삼음절맥 이름값도 못 한다고 비웃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한…….’
그랬기에 소진은 너무도 부러웠다.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삶. 알면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생활. 그런 건 언제쯤 할 수 있을까, 하고.
* * *
흑객은 화살처럼 내달리고 있었다. 광산이 있다고 한 검은 바위산은 이제 지척이었다.
‘놀랍구나.’
흑객은 변화된 자신의 신체에 감탄했다.
마을에서 광산까지는 자그마치 80리 길. 그 거리를 달려오는 데 이각도 걸리지 않았다.
지금 그가 가진 내공은 2갑자가량.
하나 그 내공을 일절 쓰지 않고서도, 오로지 육신의 힘만으로 달려서 이 정도였다.
‘난감하군.’
하지만 향상된 신체에 대한 놀라움은, 동시에 꺼림칙한 불안도 함께 가져왔다.
블라드.
새삼 자신에게 깃든 흡혈귀가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 알게 된 것이다.
소름 돋게 강인한 신체적인 능력. 그리고 까마득히 떨어진 사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피의 권능’.
이 두 가지만 해도 실로 놀라운 이능인데, 이는 원조라 할 수 있는 블라드의 능력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단련과 수련을 계속할수록, 극마에 가까워져 갈수록, 흡혈귀의 능력을 점점 쓸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극마에 이른 블라드, 그놈의 능력을 온전히 쓸 수 있게 되면 자신은 어떻게 될 것인가?
피잇!
“음?”
그때였다. 이제껏 달려오면서 눈앞에 진하게 그려 보이던 노란 실선.
피의 권능으로 확인 가능한, ‘생자의 기척’이 사라졌다.
잠시 무슨 일인가 당황하던 흑객의 눈이 빛났다.
‘누군가가 죽었다. 뭔가 일이 생기고 있다!’
파앗!
그는 이제 전력으로 달렸다. 막 연결이 끊어진, 검은 바위산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