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오가장 (1)
“아가씨, 제 말을 잘 들으십시오. 지금부터는 따로 움직일 겁니다.”
호위 무사 대장인, 단영의 결단은 빨랐다.
그는 땅에 주저앉은, 오가장의 여인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말했다.
오정은(吳正殷).
오가장주의 무남독녀이자 금지옥엽으로, 단순히 핏줄 때문만이 아닌, 오가장의 미래이기도 한 재녀.
“괴물 도마뱀들은 저희들이 맡겠습니다. 아가씨는 싸움에 휘말리지 않게 몸을 빼십시오.”
“승산은… 있나요?”
오정은이 물었다.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쉽지 않군요. 잘되어 봐야 반반입니다.”
“아…….”
오정은은 탄식했다.
최측근으로 자신을 계속 호위하던 단영.
그가 이탈한다는 건, 그만큼 저 몬스터들이 위협적이라는 말이다.
그르륵. 그르륵.
굼실굼실 바위산을 기어오르는 도마뱀들은 악몽이었다.
이제껏 몇 번이고 방향을 바꾸고 거리를 벌리는 등, 충분히 따돌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놈들은 집요하게 추적을 계속해 오곤 했다.
“…저도 함께하겠어요.”
“안 됩니다.”
“아뇨, 어차피 저 녀석들은 이걸 노리는 거예요. 차라리 내주고 나면 안전할지도…….”
툭툭.
오정은은 어깨에 멘 작은 배낭을 매만졌다.
그 모습에 단영은 얼굴이 심각하게 굳은 채로 말했다.
“그건 제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단영 아저씨?”
갑자기 단영의 말투가 바뀌었다.
오정은이 놀라서 올려다보자, 그는 또박또박 한마디 한마디를 끊어 말했다.
“지금 아가씨가 짊어진 건, 오가장 전체가 수년간 자금과 노력을 퍼부은 연구의 결실입니다. 여기서 내버리면, 이제껏 죽은 사람들의 희생까지 헛되게 하는 겁니다.”
“…….”
“전에 아가씨께서 말씀하셨었지요. 이건 언제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희망의 씨앗이라고. 저희는 그런 아가씨와 장주 어르신을 믿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저희를 믿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누굽니까? 본 가에서 제일가는 창술의 달인 아닙니까? 이 정도의 어려움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몸을 떠는 오정은의 어깨를 잡았다.
지금은 다독여 줄 여유도, 이것저것 따질 시간이 없다.
그는 한쪽을 가리키며 빠르게 말했다.
“저쪽에 하얀 바위가 보이십니까? 그 주변에 환기구가 있습니다. 그걸 타고 들어가면 광산으로 진입할 수 있을 겁니다.”
오가장의 은광.
사천제일 상단의 자금줄 중 하나다.
광산은 깊이 파들어갈수록, 공기가 탁해지기에, 중간 중간 환기구를 만들어 나쁜 공기를 빼낸다.
그 통로를 말하는 것이다.
“갱도의 지도입니다. 가급적 좁은 통로로 움직이시되, 길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부스럭.
단영이 품에서 두루마리 한 장을 꺼냈다.
채광을 오래 하다 보면, 광산의 갱도는 마치 미로처럼 구불구불하게 변한다.
통로도 여러 곳이고, 높낮이와 방향도 바뀌기에, 자칫하면 길을 잃고 헤매다 굶어 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오정은을 대피시킬 수 있는 곳은 이 은광뿐이었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져도, 저 괴물들은 덩치가 커 환기구로는 쫓아 들어가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광산의 입구로 들어올 수 있지 않을까요?”
“그곳 역시 좁습니다. 저놈들 크기로 봐서는 1통로 중반에서 몸이 끼어 옴짝달싹 못 하게 될 겁니다.”
단영이 스윽, 턱짓으로 기어오는 도마뱀들을 가리켰다.
길이가 3장을 넘는 거대한 덩치. 투실투실하고 육중한 전차 같은 몸.
싸우기에는 좋은 몸이지만, 좁은 바위 굴로 기어 들어갈 수는 없는 몸이다.
놈들이 어찌저찌 오 소저의 기색을 따라 추적해 들어간다 한들, 좁디좁은 광산의 갱도를 제 몸에 맞게 죄다 새로 파야 할 터.
“정면은 피해!”
“바위를 밀어! 떨어뜨려!”
쿠드등! 캬아아악!
단영이 오정은에게 지도와 식량이 든 배낭을 건네는 사이, 나머지 대원들이 행동을 개시했다.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제껏 도마뱀에게서 도망만 쳐왔던 이들의 마지막 반격이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그만 가십시오.”
“…….”
“어서요! 아가씨가 안전해져야, 저희가 발을 뺄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 저희를 위험에 두고 싶으십니까!”
“반드시…….”
꾸욱.
오정은이 입술을 깨물며 단영을 노려보았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온다고 약속해요. 그러지 않으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테니!”
홱! 타다닥!
그러고는 단영에게 짧게 목례를 하고는, 하얀 바위를 향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깨에 짊어진 배낭에 목숨이라도 걸린 것처럼 단단히 둘러매고.
“그랬으면 좋겠군요. 아가씨.”
단영은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히 웃었다.
단영에게 오정은은 단순히 고용주의 딸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아장아장 걷는 모습을 보았고, 글을 읽으며 상단의 일을 맡는 것을 보았다.
‘여기가 마지막이 될 줄은…….’
때로는 귀여웠고, 때로는 대견했다.
피로 이어지진 않았어도, 그에게 그녀는 동생, 혹은 질녀였다.
그렇기에 반드시 지켜야 했다. 그녀의 목숨만이 아니라, 그녀의 업적, 미래까지.
“…부디 행복하시기를.”
오 소저에겐 반반의 확률이고, 여차하면 발을 뺄 수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반의 반. 아니, 그보다 더 낮은 확률.
무찌를 가능성은 없고, 도망칠 확률도 많이 잡아 2할이다.
아마 오늘 그는 이 바위산에 뼈를 묻을 터였다.
미련하기 짝이 없는, 그의 다른 동료들과 함께.
“자. 가자. 전우여.”
휘리리릭!
그는 들고 있던 장창을 바람개비처럼 휘둘렀다.
구원창(久遠槍). 이제껏 수많은 사선에서도 자신을 지켜 주던 녀석이, 이번에도 제 몫을 해 주기를 기대하며.
“타아!”
파앗!
그는 다시 수하들이 있는 곳으로 그렇게 몸을 날렸다.
* * *
츄릅!
츄우우우우-!
단영이 도착했을 때, 상황은 한참 절체절명이었다.
쿠웅! 쿵! 와드득!
오가장의 호위 무사들은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 준비했다. 높은 곳에서 바위를 굴리고, 활을 쏘고, 창을 내던졌다.
크르르르르!
하지만… 그 공격은 놈들의 성미만 돋구었을 뿐, 제대로 된 타격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수백 근은 될 바위에 깔리고도, 좀 버둥거릴 뿐 금방 빠져나오는 모습에 이쪽이 기가 질릴 정도다.
‘대체 몸이 얼마나 단단한 거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짤막한 절벽 아래에서, 바로 기어오르려고 하는 놈들은 창대로 어찌어찌 밀어낼 수 있었다.
샤아아악!
하지만 작정하고 우회하는, 울창한 수목으로 기어 들어가는 덩치를 보면 그저 신음만 흘러 나왔다.
저 녀석들, 분명히 멀리 돌아서 이쪽의 뒤를 노릴 터였다.
“대장.”
단영이 다가오자, 체구가 좋은 장년인 하나가 맞이했다.
“몇 명이 당했는가?”
“여섯입니다.”
얼굴이 굳은 그는 오청운(吳淸雲)이었다.
피가 섞이지 않은 단영 자신과 달리, 오가장의 직계.
원래는 삼 장로의 자식이지만, 상재보다 무재에 더 소질을 보였다.
하여 오가장에서 전력을 보태 키우던 무인 중 하나로, 젊은 나이에 호위대의 부대장으로 승승장구하던 이다.
지금은 불운하게도, 다 같이 죽을 처지가 되었지만.
“부상자는?”
“저기, 두 명입니다.”
단영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최대한 몸을 편하게, 바위와 나뭇등걸 사이에 파묻히다시피 뉘어진 두 사람.
“으으윽…….”
지글지글.
한 사람은 어깨에, 또 한 사람은 다리에 극심한 화상을 입고 있었다.
저 빌어먹을 도마뱀이 뿜어낸 독액에 맞은 것이다.
“증상이 어떤가.”
“마비. 그리고 용혈입니다. 말 그대로 최악입니다.”
도마뱀이 뿜어낸 독액에 맞으면, 처음에는 맞은 부위가 마비된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피가 독을 타고 내장으로 향하고, 사람을 내부에서부터 녹여 버린다.
단영은 그 말에 한참이나 기억을 되짚어서, 겨우 상대가 어떤 놈인지를 알 수 있었다.
“역시 이놈들은… 샐러 드레이크였군.”
코모도 드레이크의 아종인 샐러 드레이크.
몸길이만 무려 8미터에 달하는 녀석이고, 화염 속성을 가지고 있어 샐러맨더 비슷한 이름이 붙었다.
위험 등급은 7급으로 분류되지만, 보통 위험 등급은 공격성에 우선해서 매겨지는 법이다.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해 올 때의 등급은, 최소 한 등급을 올려 봐야 했다.
당장 놈들의 몸을 뒤덮고 있는 비늘. 이것부터 다른 몬스터들과 차원이 다른 방어를 가지고 있다.
물리적인 공격은커녕, 내공 발현을 한 검기나, 창기 같은 기공 발출도 통하지 않는다.
“…사막에 출현하는 놈들이 왜 여기서 튀어나온 거지?”
단영은 예전에 보았던 몬스터 도감의 내용을 떠올렸다.
놈의 약점은 턱. 독액을 쏘아 내는 주머니 탓에, 턱 아래의 부드러운 살이 약점이다.
하나 거기를 노리기란 쉽지 않았다.
샐러 드레이크는 악어처럼 엉금엉금 기며 땅에 거의 인접한 곳에 턱을 두고 있다.
거기를 노리자면 아예 바닥을 기어야 하는데, 그랬다간 당연히 수백 근의 충격을 지닌 앞발에 찢겨 나갈 터.
혹은 이따금씩 아가리를 열어 뿜는 독액을 정통으로 맞을 수 있다.
“으음…….”
결국 방법은 둘.
하나는 모든 것을 베어 내는 강기급 무공으로 공격하는 것.
또 하나는 불 속성에 치명적인 얼음 속성 마법, 혹은 병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 단영에겐 둘 모두 해당 사항이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전원 모이도록. 이곳에 방어진을 친다.”
“……?”
단영의 말에 다들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괴물들이 바로 아래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 도망이 아니라 방어진이라니.
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물으려고 할 때.
“아가씨가 대피 중이시다. 녀석들의 시선을 끌어야 해.”
“아…….”
오청운과 대원들의 얼굴이 잠시 흐려졌다.
아는 것이다.
그 말의 의미를.
“괜찮다. 나도 그냥 죽을 생각은 없으니까. 딱 이각. 이각만 버티면 된다.”
“이각…….”
가당치도 않은 말에 누군가가 숨을 들이마셨다.
괴물 도마뱀의 아가리에 목이 찢겨 나가는 데는 촌각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이각?
말이 버텨라지 그냥 죽으라는 말과 진배없었다.
“옙.”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청운과 대원들은 즉각 움직였다.
“여기서 이렇게 죽으면 뭐…….”
“처자식들 걱정은 없으니까.”
오가장은 보살핌이 후했다.
사천 제일 상단의 명성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상단을 위해서 손해를 보거나, 죽은 이들은 철저하게 가족의 안위를 챙겨 주었다.
그랬기에, 죽음밖에 답이 없는 상황에서도 오가장의 무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누군가 구해 주러 오지 않을까요?”
대원들 중 하나가 말했다.
웃자고 하는 얘기였지만, 단영은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았다.
“당연한 소리! 이제껏 우리를 키우는 데 들어간 돈이 얼마냐! 손해 보는 게 싫어서라도 상단주가 구조대를 보낼 거다!”
“와하하하!”
“그러게요! 그 어르신 손해 보는 거 절대 못 참으시지!”
왁자한 웃음과 함께 분위기가 밝아졌다.
하지만 단영은 본인 말처럼 되기란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연구소가 불탔다는 보고를 받은 즉시 증원 요청을 했다고 해도.
오가장은 너무 멀었다.
‘헛된 희망이라도…….’
사건 현장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들을 찾기란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했다.
그의 상식으로는 말이다.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