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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89화 (90/310)

89화. 낯선 천무학관의 요원 (1)

피의 연결이 끊긴 곳에서, 흑객은 잠시 헤맸다.

혈흔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한 몬스터를 발견하게 되었다.

으적으적! 와드득!

사방에 흩어진 사람의 시신들. 그리고 그걸 게걸스럽게 뜯어 먹는 거대 도마뱀.

“천한 미물 따위가 감히…….”

쇄액!

흑객은 바로 검기를 날려 보냈다. 바로 목을 날려 버릴 셈이었다.

키잉!

하지만 시체를 뜯고 있던 거대 도마뱀은, 한 번 크게 움찔한 다음, 흑객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슈르르르!

“…막은 건가?”

흑객은 놀랐다.

생각보다 비늘이 훨씬 단단하다.

검기가 핏자국조차 내지 못한 광경에 내심 놀란 것이다.

크와아아아!

“흥!”

큰 덩치로는 상상도 못 할 돌격이었지만, 그는 가볍게 몸을 날려 피했다.

에인션트 가고일의 돌격도 겪어 본 흑객에게, 샐러 드레이크는 좀 더 가볍고 민첩한 정도였다.

“합!”

치지익!

새카만 기운을 뿜는 검이 머리 위에서 내려찍자, 샐러 드레이크는 기우뚱, 하고는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쩌억.

단단하던 놈의 두개골이 반으로 갈라지고, 질척한 녹색 피를 뿜어냈다.

일격에 척살해 버린 것이다.

“생각보다 더 위험한 놈들이 왔군.”

흑객은 혀를 내둘렀다.

그는 원래 이놈을 일도양단으로 두 조각을 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고작해야 머리통만 갈랐을 뿐이었다.

“이것 때문인가.”

서걱.

흑객은 해치운 샐러 드레이크의 시체를 살피며 조금 더 얼굴이 굳어졌다.

죽은 샐러 드레이크의 가죽은, 검기를 버티지 못했다.

하지만 살아 있을 때의 놈은, 분명 검기를 가뿐하게 버텨 냈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건 너무도 명백했다.

“도감의 자료와는 다른데? 진화한 건가…….”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싶었지만, 동시에 이해가 가기도 했다.

몬스터 도감에 떡하니 7급으로 실려 있는 놈이, 8등급 이상의 위험성을 보이다니.

이러니 오가상단의 호위 무사들이 허를 찔려 쓰러졌으리라.

먹고살기 어려움이 없고, 주로 도적이나 사람을 상대하는 이들.

용병으로 굴러먹은 흑객이 보기엔, 오가장의 호위 무사들은 귀하게 자란 도련님들이었다.

“방향이 둘… 셋인가. 어느 쪽이지?”

유혈이 낭자한 산길에서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파 놈들의 협의 운운에서야 사람 목숨에 귀천이 없다지만, 그는 그런 말을 믿지 않았다.

애초에 흑객은 마교도였다.

그리고 용병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그는 임무를 위해 온 몸이다.

상황으로 판단하건대, 오가장의 아가씨, 사천 제일 상단의 직계 혈육을 찾아 보호하고 구출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저쯤이군.’

그가 피의 누런 선을 따라 다시금 움직였다.

크르륵! 콰악! 으아아악!

“이런…….”

불운하게도, 얼마 가지 않아 또 연결이 끊겼다.

아마도 방금 샐러 드레이크에게 잡아먹힌, 가련한 하급 무사가 피의 주인이었던 모양이다.

타악!

흑객은 일단 허공에 몸부터 날렸다.

난장판의 싸움터가 확 눈에 들어오고, 여기저기서 괴수에게 물어뜯기는 사람들이 시야에 잡혔다.

‘…없다.’

빠르게 사방을 훑은 후, 그는 마침 두 마리가 엉켜 있는 곳을 내려 베었다.

이번에는 전력을 다해서.

콰아아앙!

막 사람을 뜯어 삼키던 도마뱀 두 마리가, 폭음과 함께 머리를 상납했다. 질척한 피와 체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추르륵! 퍼엉!

장포에 묻은 도마뱀의 피와 체액을 털어 내며, 흑객은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물었다.

“오가장이오?”

“…….”

“오가장이냐고 묻지 않소.”

싸우던 이들은 전부 남자. 여자는 없었다.

“…누. 누구요? 당신은?”

제일 수준이 나아 보이는 무사 하나가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흠칫!

그러다가 안색이 하얗게 되어 몸을 덜덜 떨었다.

실력은 고만고만한 정도지만, 안목은 제법 좋은 모양이다.

“늦지 않아 다행이군. 나는 천무학관에서 왔소.”

흑객은 늦지 않았음에 안심했다.

그리고 희망도 보았다.

구하러 온 자신에게서 위협을 감지할 정도라면, 오히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천무학관! 어느 곳의 교관이십니까!”

“정말 사람을 보내다니.”

“아……!”

장포 아래의 학관복. 선명하게 천(天) 자가 쓰인 것을 보고 무사들이 환호했다.

“아니. 음…….”

4학년인데. 라고 말하려다 흑객은 고개를 저었다.

한 줄기 희망의 끈을 잡는 심정의 눈을 보고 있으니 괜히 사실을 말했다가 골치 아파질 것 같았다.

“지금 내 신분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 것 같소만.”

파츳! 쉬이잇!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휘둘렀다.

막 덤벼들려던 샐러 드레이크가 시허연 기공에 후드려 맞았다.

키이이이익!

꽈드득! 꽈드득!

그러고는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이… 일격에?”

“맙소사!”

“아직 잡은 게 아니오.”

오가장 무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진 가운데, 흑객이 건조하게 말했다.

쉬익! 콰드득!

뒤이어 시커먼 검기가 서린 검이, 딱딱하게 굳은 샐러 드레이크의 턱 아래, 약점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파파팍!

더러운 초록빛 얼음 조각이 떨어지고, 시커먼 살점이 쏟아진다. 그 아래서 서리가 낀 검을 휙! 뿌리며 흑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게 잡은 거지.”

“비. 빙공(氷功)?”

단영이 놀라서 외쳐 물었다. 흑객은 고개만 까닥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슈르르르. 슈르르르.

긴 혀를 내두르며 주변을 에워싼 샐러 드레이크들.

숫자는 얼추 열 마리 남짓.

오가장의 무사들이 나름 분발했었는지, 예닐곱 마리는 시체가 되어 뒹굴고 있었다.

스르르르. 크르르르.

그리고 좀 전까지 위협적으로 달려들던 놈들이 새카만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그건 명백히, 이제 합류한 흑객을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호위하라 들었는데… 그대들인 거요?”

“아닙니다. 아가씨가 계십니다.”

“어디에 있소?”

“아, 광산 안으로 피하셨습니다. 거긴 안전합니다.”

흑객은 눈을 돌리지도 않고 물었고, 단영이 황급히 대답했다.

“알겠소. 우선 급한 것부터 처리하지.”

스윽.

흑객은 오른손의 검을 뒤로 빼고,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소수마공을 운용했다.

스으으윽.

치리리릭! 치리리릭!

그러자 주위를 둘러싼 거대 도마뱀들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긴가민가했는데, 시험해 본 결과는 명백했다.

“빙공이… 저놈들의 약점입니까?”

“저놈만이 아니라 대개의 파충류는 냉기를 싫어하오. 이 주변에 물웅덩이가 있소?”

“…예?”

단영은 끄덕이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물웅덩이가 여기서 왜 나온단 말인가.

스으윽. 치리릭! 치리리릭!

흑객은 소수마공을 더욱 끌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저 거대 도마뱀들은 코모도 드레이크의 아종이오. 코모도는 냇가, 습지, 늪지대 등에 주로 서식하지. 물을 좋아하고 물과 친한 놈들. 도마뱀의 속성이오.”

단영은 곧장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그는 그제야 왜 그런 말을 꺼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나 저놈들은 변종이오. 샐러 드레이크. 샐러맨더에서 이름을 따온, 화염 속성의 도마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오시오?”

단영이 크게 끄덕였다.

화염 속성이 물을 맞으면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특히 저런 종류의 몬스터는 오히려 물에 강한 충격을 받는다.

그는 바위산 한쪽을 가리켰다.

“아! 그렇습니다. 저쪽이 광산의 입구인데, 그 아래쪽으로 가면…….”

거리는 대략 40장.

시커멓고 걸쭉한,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 광산 폐수가 작은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자, 이동하시오.”

흑객은 단영의 말을 끊고, 전면에 나서서 소수마공을 끌어올렸다.

스으윽. 스으으윽.

그러면서 천천히, 살아남은 오가장 무사들을 뒤로 돌려 보호했다.

“……!”

슬금슬금 그를 따라가던 오가장의 무사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흑객 옆에 있던 단영이 말했다.

“물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렇소. 그저 물을 퍼다 끼얹기만 해도 저놈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게 되오. 물 또한 아군 전력이 되는 것이오.”

스으윽. 스으으윽.

슈르륵. 슈르르륵.

흑객이 소수마공을 위협적으로 뿜어내자, 샐러 드레이크들이 차마 달려들지 못하고, 주춤주춤 따라왔다.

“……!”

흑객의 말에 살아 있던 오가장의 무사들이 눈을 빛냈다.

되갚아 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바닥을 기던 사기는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빌어먹을 뱀 대가리들…….”

“이봐, 괜찮나? 조금만 힘을 내게.”

으드득!

부상자를 옮기는 무사들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심지어 부축받는 부상자들의 눈까지 새파랗게 독기를 피워 올렸다.

이제껏 무력하게, 계속해서 도망치기만 했었던 오가장 사람들.

그들이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대 먹이고 말겠다는 무사의 투지를 되살렸다.

쉬이이이익. 쉬이이익.

흑객의 소수마공을 방패로 삼아, 일 장. 그리고 또 일장을 이동했다. 그러기를 한참.

슈르르르! 케르르륵!

광산 입구에 가까워지자, 샐러 드레이크들이 요란하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놈들도 알아차린 것이다.

이대로 폐수 웅덩이까지 가게 되면 자신들이 불리해진다는 걸.

크르르르!

그에 참지 못한 것인지, 샐러 드레이크 한 마리가 몸을 날려 덮치려 들었다.

“어딜!”

쉬익! 파사악!

하지만 흑객은 대비하고 있었다.

한순간 소수마공을 얻어맞은 샐러 드레이크는, 몸 일부가 뻣뻣하게 얼어붙어 바위 위를 뒹굴었다.

콰드득! 파삭!

그렇게 드러난 턱 아래를 흑객은 놓치지 않았다. 바로 약점을 찔러 숫자 하나를 줄여 버렸다.

“흥. 이제 와서 발악해 봤자 늦었…….”

“대, 대협! 저기 과, 광산 입구에!”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자신감이 넘치던 흑객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고는 딱딱하게 굳었다.

쿠----르르르…….

이제껏 향해 왔던 광산의 입구. 그 안에서 거대한 붉은 도마뱀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무슨…….”

모양새는 샐러 드레이크와 같았다.

하지만 머리에는 두 개의 뿔이 달려 있고, 크기는 다른 놈들의 세 배는 되어 보였다.

슈---오오오!!!

그 특대형 샐러 드레이크가 포효하자, 후끈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몇 장 거리를 두고도 뜨거움을 느낄 정도였다.

“두… 두목으로 보입니다. 이 드레이크의들…….”

“우린 이제 어쩝니까.”

전의를 상실한 오가장 무사들의 목소리가 이어졌고, 단영 역시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찰칵. 사악.

그 가운데서 흑객이 자세를 바꿨다.

검을 든 오른손을 앞으로, 소수마공을 운용하는 왼손을 뒤로.

사사삭.

위치도 바뀌었다.

이제껏 샐러 드레이크들을 견제하던 뒷자리에서, 새로 나타난 초거대 샐러 드레이크를 상대하러 나선 것이다.

‘전부 구하는 건 포기해야겠군.’

흑객은 생각했다.

이제는 까닥 잘못하면 본인의 목숨도 부지하기 힘들다는 것을.

상대는 킹급 몬스터. 던전에서 나타나는 보스급 몬스터다.

“그대는 아는 바 없소?”

동시에 이제야 저 미친 샐러 드레이크들의 강함이 이해가 갔다.

사막에서나 나올 화염 속성 몬스터가, 바위산에 출현해서 마을을 습격하고 규정 등급 이상으로 강해졌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애초에 이런 기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던전 브레이크.

오래 묵은 마경이 마나를 축척한 끝에 터져, 내부의 몬스터들을 꾸역꾸역 쏟아내는 현상.

“아무래도 여기, 던전이 하나 터진 모양이군. 아님…….”

슈----오오오!!!

흑객은 어지간한 저택보다 큰 불덩이의 괴물을 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단영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묘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당신들이 불러들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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