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낯선 천무학관의 요원 (3)
‘저게 인간인가?’
쿠쿵. 쿵!
단영은 멍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천무학관에서 온 요원. 그가 경천동지할 무위로 샐러 드레이크들을 처치할 때만 해도 상당히 뛰어난 무인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드레이크의 우두머리 녀석과의 싸움은 상상을 초월했다.
쾅! 쾅!
3장이 넘는 꼬리에 얻어맞는 순간, 단영은 그가 죽었을 거라 확신했다.
고수도 그 자리에서 즉사시킬 수준의 충격이었으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 전의를 불태웠다.
불도마뱀의 대장은 다가가기도 어려운 존재였다.
단 한 방에 상대를 짓밟아 버릴 거대한 발. 기상천외한 공격 방식과 맞았다 하면 단숨에 중독시키는 독 안개.
그런 위험한 조건임에도, 천무학관의 무사는 대등할 정도로 싸우고 있었다.
‘대체 저건…….’
시잉!
그리고 그때 다시금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있었다.
신체가, 한 손이 무기처럼 변하는 모습.
마법인지, 저주인지 알 길이 없는 저 형태로 싸움을 하려는 듯 보였다.
“저… 인간이 맞을까요?”
상처가 심한지 어깨를 부여잡은 오청운이 물어 왔다.
안색이 시퍼런 것이, 전형적인 드레이크의 독에 당한 증세였다.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인간이든 아니든.”
마침 녀석에게 바짝 접근한 천무학관 사내는, 무기처럼 변한 손으로 놈의 머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촤아아아악!
위협을 감지한 드레이크 두목은 반사적으로 독액을 뿌려 댔고, 그 독액에 휩싸이기 직전, 사내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어떻게든 제발 물리쳐 줬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전투가 다시금 시작되었다.
크르륵! 푸화악!
확실히 샐러 드레이크 킹의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무기화된 흑객의 왼팔이 막 놈의 머리에 박히려는 순간, 예상이라도 한 듯 허연 독액을 맹렬하게 뿌려 댔다.
솨아아아아!
쏟아지는 빗방울처럼, 삼 장 내에 있는 모든 것에게 퍼부어지는 독액.
핏. 핏. 핏.
하지만 흑객은 빗방울 사이를 지나는 바람처럼 그 독액의 비를 피해 냈다.
무영화마신법(無影化魔身法).
마교의 무수한 보법 중에서도, 가장 신형을 찾기 어렵다는 신법.
주로 앞뒤가 아닌 좌우로 움직일 때 빛을 발한다.
그리고 이 보법은 흑객의 장기였다.
본래부터 능숙하던 것이, 이제 세상 모든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덕분에 보법의 능력이 더욱 극대화되었다.
크르륵! 쿠와아아!
계속해서 공격이 빗나가자, 킹은 이제 제가 가진 모든 독액을 쏟아 냈다.
쏴아아아! 지이이익!
독액이 비 정도가 아니라 물줄기처럼 퍼부어졌다. 온 대지를 덮으려는 듯한 허연 독수.
치이이익!
독이 끼얹어진 바위와 흙이 단숨에 타들어 가며 누런 연기를 피워 냈다.
그 연기조차 독연이었다.
그르르륵.
그렇게, 주변의 모든 것을 독으로 덮어 버렸다고 생각하던 킹.
그렇게 안심한 녀석의 머리, 그 바로 위에서, 어떻게 된 건지 별안간 흑객이 나타나 창을 찔러 넣었다.
꾸에에에에에엑!
검기도 통하지 않던 그 단단한 비늘이 찢겨 나갔다. 그 까닭은 흡혈귀의 피의 권능.
놈의 비늘을 뚫은 창은, 창으로 변한 흑객의 팔이었다.
무기화된 팔로 그는 샐러 드레이크의 킹을 찍어 눌렀다.
패애애액!
괴성을 지르며 킹은 반사적으로 꼬리를 휘둘러 흑객을 후려쳤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휙!
이미 저만치 먼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인 블링크 만큼이나 재빠른 이동이었다.
‘너무나도 쉽다.’
흑객은 눈을 반쯤 뜨고 있었다.
지금 그에겐 세상 모든 것이 입체적인 구도로 담기고 있었다.
인간이 아니라 박쥐들이 세상을 보는, 이른바 음파 시야(音波視野)가 그걸 가능하게 했다.
띠이이이. 띠이이이.
돌아보지 않고도 옆에, 뒤에, 어떤 벽과 바위가 있는지 손금 보듯 뚜렷하게 알 수 있는 시야.
위치라는, 싸움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요소를 시작부터 쥐고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물며 흡혈귀의 권능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부우우웅!
검으로 변한 손이 기묘한 소음을 냈다.
피가 곧 생명이자 무기인 흡혈 마족은, 아쉽게도 소드 오러(검기)를 쓰지 못한다.
하지만 영원히 사는 그들은, 소드 오러 대신 절삭력만큼은 훨씬 뛰어난 다른 수단을 찾아냈다.
바로 초음파 블레이드(Ultrasonic Blade).
피의 검을 날카롭게 빚어내, 초음파로 진동시킨다.
1초에 수만 번의 진동을 일으키는 검. 이 검이 사물에 닿으면, 대상은 그냥 베이는 것이 아니라 깎여 나간다.
아름드리나무를 검으로 베는 것은 절정 고수도 어렵지만, 삐죽삐죽한 톱날로 써는 것은 무인이 아니라도 가능한 것처럼.
꿰에에엑! 꾸에에에엑!
대장이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자, 주변의 샐러 드레이크들이 모여들어 주위를 감쌌다.
우두머리의 위험을 인지하고 최대한 방어를 하려는 모습이었다.
쉬이이이.
놈들이 사방으로 독 안개를 뿌려 댔다.
이미 해가 저물어 어두침침해진 협곡에, 희뿌옇게 피어오른 독 안개는 완벽하게 시야를 차단했다.
하지만 지금의 흑객에겐 어둠 따위, 독이 깃든 안개 따위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제 끝내지.”
스스스스슥.
마치 박쥐처럼, 입이 열린 순간 모든 게 감지되었다.
위치, 동작, 비늘과 발톱, 머리와 꼬리, 관절과 근육, 세세한 머리의 높낮이까지.
어느 놈이 다음에 움직이려는지. 어느 놈이 다음에 독을 뿜으려는지. 수백 번 본 경극의 다음 순간처럼 훤히 보였다.
타타타탓.
흑객은 달리기 시작했다.
독이 가득한 안개 속으로.
핏!
안개가 몸에 닿으려는 순간 그는 공간을 이동했다.
쉬프트(Shift).
가고일의 왕 카르삭을 상대할 때 블라드가 선보인 공간 도약. 그 권능의 일부가 반사적으로 펼쳐진 것이다.
* * *
“아, 안 돼……!”
단영과 오청운은 그저 입을 쩌억 벌렸다.
저 안개에 사람이 닿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수십 번을 보았다.
그 하얀 지옥을 향해 자신들을 구해 주던 천무학관 인물이 달려드는 것을 보자 비명부터 터져 나왔다.
하지만 상대는 말릴 새도 없이 거침없이 달려들었고.
휙!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는지, 아니면 그 앞에서 사라진 건지 헷갈렸던 잠시의 순간.
기묘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퓨 슈슉! 슈슈슈슈슉!
슈슈슈슈슈슉!
파고드는 바람 소리. 뭔가 꺼지는 소리.
그런 소리가 한참이나 일어난 후.
스팟.
다시 천무학관 사내가 나타났다. 본래 있던 자리로.
휘이이이이.
협곡에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천천히 걷히는 안개.
그리고 안개가 걷힌 지면 위에는.
퍼득 퍼득.
킹을 포함한 샐러 드레이크의 절단된 사체들. 경련을 일으키는 육편이 즐비했다.
휘익!
사내가 창을 휘둘렀다. 끈적한 파충류의 체액이 흩뿌려지고, 교관이 미소를 지었다. 그와 함께 길게 돋은 송곳니가 드러났다.
“참 대단하군, 블라드. 이런 무기를, 이런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니.”
오싹!
그 모습에 단영은 소름이 끼쳤다. 상대는 분명히 자신들을 구해 준 사람인데. 갑자기 무시무시한 악귀처럼 느껴진 것이다.
휘익. 탁.
흑객이 광산 입구로 날아오자 단영과 오청운, 만신창이가 된 두 사람이 급히 손을 모아 잡고 고개를 숙였다.
“대. 대협! 참으로 놀라운 무위를…….”
“구명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됐소. 됐소. 별것 아니오.”
극도의 공경을 비치는 마지막 생존자들. 그들에게 흑객은 손을 내저어 보였다.
“오가장의 여식께 안내를 부탁드리오. 대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나도 좀 압시다.”
일단, 이래저래 임무 실패는 면한 것 같았다.
* * *
늦은 밤.
교무처에 올라온 던전학과 월산 교두는 옷을 벗었다.
던전학과는 2학년이 아닌, 3학년에 있는 필수과목이다. 그래서 3학년들의 실전 평가 진행을 보고받다 보니, 퇴근이 조금 늦은 것이다.
스윽. 펄럭.
옷을 갈아입고, 매무새를 정리하고 나가려는데, 교무처 한 쪽에는 아직 환한 불빛이 남아 있었다.
월산 교두는 돌아가던 걸음을 그곳으로 돌려 말을 걸었다.
“퇴근 안 하는가?”
“…아.”
랜턴을 여러 개 켜 놓고 한참 뭔가에 몰두해 책들을 읽고 있는 교두.
몬스터 학과의 하청청이었다.
필기시험 채점 중이었는지, 그의 탁자에는 2학년이 제출한 문제지가 수북하게 올려져 있었다.
“채점하다 말고 좀 살펴볼 게 있어서.”
“흠.”
잔뜩 충혈된 하청청의 눈을 보고 월산 교두는 끄덕였다.
그 역시도 과거에 지금의 그처럼 고생했던 기억이 났다.
필기시험은 학관생에게만이 아니라, 교두와 교관들에게도 힘들었다.
애초에 2학년들의 시험을 하루 만에 채점까지 마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되바라진 녀석들이 많지?”
“뭐, 그렇지.”
그리고 문제에 대한 답에 이것저것 제 소견을 집어넣어 참신한 궤변을 적어 놓는 놈들도 있었다.
다른 학관이라면 정해진 답이 아니라면 틀렸으니 무조건 붉은 선을 그어 버리지만, 천무학관은 다른 학관들과 달랐다.
대부분은 모자라고 어린 생각이지만, 그들이 우겨대는 궤변 중에서도 참신한 것이 있다.
조교나 교관으로선 너무 당연해서 잊고 있는 것. 반면 머리가 굳지 않은 어린 학생들은 오히려 아는 것이 없기에 던질 수 있는 질문.
이런 시각은 교관, 교두들에게 오히려 큰 깨우침도 주곤 했다.
때문에 시험 문제 채점은, 힘들지만 가끔 그런 것들을 찾아내는 보람이 있는 일이었다.
“뭐 재미있는 것 있나?”
“으음. 놀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생각이 있는 학생이었던 것 같으이.”
팔락.
하청청이 2학년생들의 답안지 중 하나를 들어 보였다.
3반의 이한.
그런 이름이 적힌 답안지 아래에는, 하청청이 몇 번이나 붉은 동그라미를 그려 둔 문장이 하나 있었다.
-…사체이지만, 생자처럼 움직인다. 현재까지 중원 무림의 연구로는 흑마법의 <암흑 마나>가 일으킨 현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가설은 잘못되었다.
-애초에 구울은 왜 죽지 않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어째서 죽은 것이 산 것처럼 움직이는지, 그리고 그 죽음이 어떻게 전염을 일으키는지 말이다.
-그렇기에 구울이 아닌, 언데드 몬스터 전체를 보아야 한다. 스켈레톤, 데스나이트, 리치 등 심지어 리치왕이라는 존재도. 이 힘의 원천은 언데드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걸 모르는 듯하다.
-결국 천무학관의 노력이 부족함이 드러난다. 언데드에 대해 지금보다 더 많은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미친놈 하나가 들어왔네.”
월산 교두는 마지막 문장을 보고 혀를 찼다.
고작 학관생 2년 차가, 천무학관 전체를 도발하고 있었다.
이 답안으로 조교, 교관, 교두 모두에게 찍히게 생겼는데, 겁이란 걸 상실한 것일까?
“참 재미있지 않나?”
풀썩.
하청청이 의자에 몸을 묻으며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중얼거렸다.
“보통 세상을 뒤집어엎는 것들은, 말 잘 듣는 우수생들이 아니야. 머리 한 구석이 돌아 버린 미친 것들이지.”
“…이 답안이 그만한 화두를 품고 있다고? 칭찬이 너무 과한 것 아닌가?”
월산 교두가 어이없어 했지만 하청청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이지… 천무학관 몬스터학 교관이야. 건방진 말이지만, 구울에 대해서는 중원을 통틀어도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고 자신하네. 그런데…….”
펄럭.
하청청이 이한의 시험지를 내던졌다. 그리고 그 아래에 막 작성 중인 연구 논문이 있었다.
<리치왕: 어둠으로 물든 땅에 도사린 존재에 대하여>
“그런 나도 어둠 땅에 있는 몬스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 가설이나 추측도 세워 보지 못했고.”
“그건 당연하지. 가 보지도 못한 곳이니까.”
청해(靑海).
과거에는 곤륜파가 있던 지역이었으나, 지금은 어둠의 땅이 된 것이다.
갔다 하면 돌아오지 못하는 곳. 죽거나 괴물의 먹이가 되거나, 아니면 괴물로 변해 영원히 거하게 되는 곳.
모든 재앙의 근원인 리치왕이 잠든 곳이 십만대산이 있는 신강 지역이라면, 그의 모든 부하들이 자리 잡은 지역이 바로 이곳 청해성이다.
“그런데, 겁도 없이 이런 추측을 하는 맹랑한 놈이 있단 말이지. 아무래도 자극을 받을 수밖에.”
타악.
하청청은 웃으며, 이제까지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랜턴의 환한 빛 아래, 붉은 가죽으로 덧씌워진 책의 제목이 드러났다.
<또 하나의 언데드: 뱀파이어, 흡혈귀, 드라큘라에 대한 전승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