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그리핀의 알 (1)
환기구로 들어갔다는 오정은은 금방 만날 수 있었다.
구조대가 올 걸 예상한 것인지 여기저기 표식이 새겨져 있었으니까.
타탓. 타닷.
마름모꼴의 투명한 유리관을 통해 컴컴했던 광산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생선 기름을 연료로 해서 빛을 내는 랜턴.
세상이 바뀌면서 도입된 서역 문물 중의 하나로, 동굴에서 쓰기 특히 편한 물건이었다.
중원 고유의 제등이나 좌등은, 덩치가 커서 휴대하기 불편했고, 연기도 많이 났었으니까.
“호위 무사들이 전부……?”
오정은은 무표정하게 되물었다. 충격이 너무 커서 실감이 나지 않은 것이다.
괴물들은 물리쳤지만, 오가장의 피해는 극심했다. 상단의 호위 무사 수십 명이 전멸.
단영과 오청운. 무위가 가장 높은 두 사람만이 살아남았다.
특히 어깨를 다친 오청운에 비해 단영의 부상은 심각했다.
화상과 창상에 가벼운 골절까지 있었다.
심지어 진원지기까지 끌어다 썼기에, 이십 년은 늙어 보였다.
“진원지기까지 쓰셨다면…….”
“죽는 것보다는 남는 장사지요. 저는 그래도 운이 좋은 겁니다. 아가씨.”
안타까운 얼굴의 오정은에게, 단영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사천 제일 상단인 오가장은 호위 무사들에게 돈을 아끼지 않았다. 무기도, 치료약도, 최상급을 고집했다.
덕분에 단영은 힐링 포션 여러 병과, 진통제를 물처럼 들이켜고 난 후 사람 꼴을 되찾았다.
오정은을 대피시키며 챙기게 한 비상약 덕분이다.
쓰게 될 사람이 둘밖에 남을 줄은 몰랐지만.
“한동안은 기다려야겠습니다. 주변 독기가 너무 지독합니다.”
잠시 바깥에 나갔다 온 오청운이 절레절레 고개 저었다.
샐러 드레이크들이 뿜어낸 독은 맹독이었다.
특히 킹이 사방팔방으로 뿜어낸 양은 소나기를 연상케 했다.
사람이 맞으면 죽거나 녹아내리고, 돌이나 금속도 지글지글 타오르며 연기를 뿜었다.
그 연기도 독. 이 정도면 전설 속에서나 전해지는 칠대 극독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독의 성분이 뭔지 파악해야 해요.”
오정은의 눈이 파랗게 타올랐다.
독지가 되어 버린 은광은 오가상단의 자금줄이었다.
이렇게 돼 버리면 해독제를 만들기 전에는 다시 운용할 수 없다.
“당장은 안 됩니다. 시간이 좀 지나야 합니다.”
오청운이 손을 내저었다.
광산 인근에 감도는 독기는 농도가 너무 짙었다.
연구 같은 한가한 말을 하기 이전에, 밖으로 나가는 것만 해도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다.
“피해 규모가… 얼마나 될까요?”
상단의 후계자이기도 한 오정은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이들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마을에서 도망쳐 샐러 드레이크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사실 여기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알 수 없지요. 좀 시간이 지나야 집계가 가능할 테지만…….”
침묵이 이어지자 분위기를 바꿀 셈인지 단영이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께 소개가 늦었습니다. 흑객 대협. 저와 청운이의 목숨을 구해 주신 분입니다.”
단영이 턱짓으로 가리키자, 오정은은 그제야 벽에 기대 좀 떨어져 있는 사내를 발견했다.
충격이 너무 컸던 데다, 단영과 오청운이 함께 데리고 들어왔기에, 같은 오가장 무사인 줄 알았었다.
“천무학관의 흑객이라 하오.”
정식으로 대면하는 자리가 되자, 흑객은 조용히 두 손을 말아 쥐어 예를 갖췄다.
“경황이 없어 인사가 늦었습니다. 소녀, 오가장의 장녀 오정은입니다.”
오정은은 역시 소매를 모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말끄러미 흑객을 바라보았다.
꽤 오랜 시간을.
“…소저?”
규수의 뚫어질 듯한 시선에 흑객이 불편해하자, 단영이 픽 웃으며 받아 주었다.
“대협께서 조금 이해하시지요. 저희 아가씨는 상단의 공부와 연구 개발을 너무 어려서부터 하셔서… 성격이 좀 각별하십니다.”
“…….”
성격이 각별한 게 아니라 예의를 모르는 거 아닌가? 하며 생각하는데, 오정은이 빠르게 다시 한번 인사를 해 왔다.
“흑객 대협, 덕분에 오가장의 무사 두 분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사천 제일 상단은 천무학관의 이번 배려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예? 아, 예.”
흑객은 다시금 인사를 받았다.
떨떠름하게 반응하는 그와 다르게 오정은의 속마음은 복잡했다.
‘이 사람에게 오가상단 전체가 은혜를 입었구나.’
천무학관은 전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문학관이다.
오가 상단 역시 평소에 꾸준히 후원금을 넣고 있었다.
물론, 투자한 만큼의 실익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천무학관은 너무 명문이기에, ‘재난’이나 ‘위험 지역’과 관계되지 않는 사적인 이익, 즉 상단과 상단간의 분쟁에 대해서는 일절 중립으로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으니까.
오가상단도 그걸 알기에 서운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사천 제일 상단의 돈에도 움직이지 않는 학관이라면, 어차피 다른 상단의 편의를 봐줄 일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이번 상단 분쟁에도 딱히 대단한 고수가 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런 초특급 고수를 지원해 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설마하니 샐러 드레이크 킹이라니.’
오정은은 조금 전의 일을 털어놓은 단영의 말을 떠올렸다.
저 괴물들의 덩치가 커서, 광산 안에까지 들어오지 못할 거라는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캄캄한 어둠속에서 여인의 몸으로 하염없이 혼자 구조를 기다린다는 건 사람을 미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정말 다행스럽게도 흑객이라는 이가 나타나 사천 제일 상단의 위기를 막은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인데.’
그래서 고맙지만 오정은은 걱정도 되었다.
천무학관은 이번 일로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
위기를 피하게 해 준 대가로, 사천 제일 상단을 무엇을 내어줘야 할 건지.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으니, 당연히 흑객에게서 눈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커흠. 그래서 흑객 대협께서는 천무학관 어느 과목의 교관이신지?”
계속해서 오정은이 흑객을 보고 있자, 단영이 요란하게 헛기침을 했다.
덕분에 흑객의 얼굴이 불편해졌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데, 저는 교관이 아닙니다.”
“역시! 교두님이셨군요?”
“그것이…….”
흑객의 얼굴은 더욱 불편해졌다.
이제 단영까지 공손하게 자신의 두 손을 맞잡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학관의 조교, 교관, 교두의 직급 체계는 기본 상식이다.
그리고 샐러 드레이크들과 킹을 단신으로 제거하는 실력자라면, 몇몇 교관을 제외하곤 대부분 교두급 인물이다.
“저는… 그게, 학관 4년생입니다만.”
“아, 학관 4년… 으윽!”
별생각 없이 말을 받던 단영이 신음하며 어깨를 비틀었다.
너무 놀라서 등에 담이 결린 것이다.
“학관… 4년생이시라고요?”
오정은의 눈길이 가늘어졌다.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아무리 천무학관이 명문이라, 인재가 많고 고수들이 즐비하다 해도.
한낱 학관생이 최소 교관, 어쩌면 교두급의 실력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설령 가졌다 해도, 그런 전력을 학관생으로 놀려 둘 만큼 천무학관이 멍청한 곳이던가?
거기까지 생각한 오정은은 문득 뭔가를 떠올렸다.
“저… 혹시 학관생 외의 다른 신분이 있으신지요?”
“다른 신분? 무슨 소린지 모르겠소만.”
흑객이 어리둥절해하자, 단영이 뭔가를 떠올렸는지 헉! 하고 질겁하여 고개를 숙였다.
“대협, 저희는 이미 구명의 은혜를 입었으니 이 자리에서만 듣고 평생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감찰조, 혹은 정보조직 쪽에 계셔서 신분을 숨기시는 것 아닙니까?”
“…….”
흑객은 이들이 무슨 오해를 하는지 알아차렸다.
생각해 보면, 천마는 블라드의 완전한 능력이 극마급, 즉 정도 무림 기준으로 화경급의 고수라고 했다.
자신이 처리한 몬스터의 수준을 유추해 본다면 이들의 반응은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저는 정말 학관 4년생입니다. 좀 괴이한 인연이 닿아서 이능을 얻게 되었을 뿐이고요.”
물론 그는 블라드의 힘을 완전히 다 소화하진 못했다.
그럼에도 이번에 쓴 이능만으로 학관생은커녕 조교 수준을 아득히 넘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학관생이…….”
“아뇨. 흑객 대협의 신분은 본인 말씀대로 학관생이 맞으실 겁니다.”
“…아가씨?”
오정은의 말에 오청운과 단영은 당황한 표정으로 변했다.
“두 분 장사님 말씀대로 대협께서 교관, 혹은 교두급의 인력이라면, 천무학관이 이번 상단 분쟁에 그간의 불간섭 원칙을 어기고 대협을 보냈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건 그렇지만 이번 사태는 다릅니다. 본가에서 급히 구조 요청을 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기엔 시일이 맞지 않아요. 날짜상 오늘, 혹은 내일 경에 천무학관 조교급의 전력이 당도할 예정이었죠. 그렇게밖에는 설명되지 않는데요. 두 분도 아시다시피.”
스윽.
오정은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단영과 오청운을 보며 말했다.
“아버님은, 아니, 오가상단의 상단주께서는 이번 일을 극히 중요히 여기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과연, 천무학관에 전모를 밝히셨을까요?”
“아, 아가씨! 상단주께서는 그럴 분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하나뿐인 딸을 포기하실 만큼 비정하시지는…….”
“비정한 게 아니라 현실적이신 분이죠. 그 이면에는 호위 대장님과 부대장님의 실력에 대한 믿음이 있기도 하고요. 상대가 예상을 벗어난 몬스터들이었다는 게 더 큰 문제였죠.”
오정은의 말에 오가장 무사 두 사람이 신음을 흘렸다.
확실히 그녀의 말이 맞았다.
이번 사태는 오가장에서 제대로 사태 파악을 하기도 전에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연구소는 순식간에 불타고, 마을 사람들은 몰살당했다.
운 좋게 살아남아 본가로 간 사람이 있다 해도, 거리상 빨라야 오늘 밤, 혹은 내일이 되어서야 당도할 터.
그사이 오가장에서는 소문이 나가지 않을 신뢰할 만한 곳에 의뢰하거나, 본가의 병력을 꾸려 충분히 구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어쨌든, 산 게 중요한 거잖아요?”
“…후우.”
단영과 오청운은 대답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그렇다고 해도 아가씨가 섭섭할 거라는 걸 어찌 모르겠는가.
그렇게, 우울한 침묵이 한참을 흘렀다.
“한데…….”
침묵이 불편해진 흑객이 입을 열었다.
원치 않게 오가상단에 뭔가 비밀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게 뭔지는 물어도 쉽게 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상단에서 무슨 중요하고 비밀스런 연구를 하든 말든 자신과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돈벌이에 관련된 것일 텐데.
다만.
좀 짜증이 났을 뿐이다.
‘귀찮은 곳에 엮어 버렸군.’
유람 삼아 가는 파견 임무라고 들었는데, 자칫하면 뼈를 묻을 뻔했으니. 임무 전달자에게 항의하고 보상이나 뜯을 생각이었다.
“근방에서는 찾으려고 해도 보기 힘든 샐러 드레이크가 지상에 왜 출현했는지 오가장에서 아는 게 있소?”
“…….”
“…….”
“…….”
흑객의 말에 우울하던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졌다.
“그것이…….”
“흐음…….”
단영, 오청운은 괴로운 얼굴이 되었다.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괴로운 얼굴.
마치 고의는 아니었지만 큰 사고를 치고만, 그런 사람들이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아마도 저희 때문에 터진 것 같습니다.”
“아가씨!”
오정은의 말에 단영이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외인에게 알려선 안 되는 내용을 말하려 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