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바질리스크 (1)
바질리스크.
대격변이 일어난 이후에도 한참 뒤에나 알려진 개체.
중원 모든 몬스터들을 기록한 몬스터 도감에 따르면, 강철보다 강한 비늘이 전신을 덮고 있으며, 그 비늘에는 극독이 흐르고 있다고 한다.
그 독이 얼마나 지독한지, 창으로 찔렀다간 독이 창대를 타고 올라와 사람을 중독시킨다고 할 정도.
때문에 이론상으로는 원거리 무기를 써야 그나마 바질리스크를 상대할 수 있다고 한다.
추정 위험 등급은 10에서 13급 사이.
30년 전, 현경의 고수 일대도호(一代刀號) 유장위(柳長爲)가 맞닥뜨려 제압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로 이따금 목격했다는 소문에 그칠 뿐, 실질적인 목격자나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몬스터.
보통 습하고 어두운 습지, 혹은 인간이 들어가지 못하는 깊은 지저에서나 산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 바위산처럼 높고 건조한 지대에 등장하는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파아앗.
그 바질리스크를 상대하며 흑객이 가장 신경 쓴 것은 바로 음파 시야였다.
띠이이이- 띠이이이-.
세상을 가득 채운 녹색의 파문.
소리는 곧 진동이며, 움직임에서 비롯된다.
바질리스크의 비늘이 마찰하며 나는 소리는, 놈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 것인지를 색채로 표현해 주었다.
피피피피핏!
움직임을 예측한 즉시 무영화마신법이 펼쳐졌다.
단순에 지근거리까지 거리를 좁히자.
쿠우웅!
바질리스크의 머리가 암벽을 박살 냈다.
그로 인해 흑객이 있는 중심에서 돌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하지만 그는 애초부터 그 공격의 범위에 들어 있지도 않았다.
피피피핏! 쏴아아악!
오히려 대놓고 약 올리듯, 바질리스크의 머리 근처에서 알짱거렸다.
분노한 바질리스크가 이번엔 입을 벌려 강력한 독액을 뿜어냈고.
츄우우우웁! 촤아아악!
강력한 바람을 함께 생성해 냈다.
그뿐만 아니라, 맹렬하게 뿜어진 독액은 사방으로 튀고 비산하며 공기에 지독한 독기까지 머금게 했다.
피잇!
하지만 이번에도 흑객은 피해 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놈이 독액을 분사하기 전 이미 배가 부풀어 오르고 가슴과 목에서 근육이 수축하는 소리를 ‘보고’ 반응한 것이다.
“하아아압!”
그랬기에 바로 역습의 기회를 잡았다.
싸아아아악!
검으로 변한 손에 소수마공을 담아 날렸다.
대부분의 파충류는 변온동물이라, 냉기나 빙공에 취약점을 보인다.
따라서 흑객은 자신이 아는 음한기공(陰寒氣功) 중에 가장 강력한 소수마공을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제대로 먹혔다.
쩌저적. 콰직!
냉기가 바질리스크의 몸통을 강타하고 번져 나갔다.
타격당한 부위는 새하얗게 얼어붙고, 검은 비늘 위에는 급속도로 서리가 퍼져 나갔다.
“먹혔……?!”
미소를 짓던 흑객의 표정이 다음 순간 굳어졌다.
빠지직! 빠지직!
얼어붙어 마비되었어야 할 비늘에서, 맹렬한 파열음이 일어났다. 음파 시야로 보이는 그 소리는 피처럼 붉고 위험한 색채였다.
빠가가가각!
균열이 일어났다.
얼어붙어 있던 건 바질리스크의 비늘이 아니었다. 비늘 위에 번질번질 흐르고 있던 독이었다.
얼어붙었던 독액이 깨어지며 거대한 바질리스크가 몸을 굽혔다. 시커먼 얼음 조각이 탄력을 머금고 튕겨 화살 비처럼 흑객을 향해 쏘아졌다.
“헛!”
피잇!
흑객은 반사적으로 공간을 도약해서 허공으로 솟구쳤다.
기껏 잡은 기회는 허무하게 날아갔지만 아쉬워할 시간이 없었다.
곧장 바질리스크의 반격이 날아든 것이다.
키에에에에!
‘이런!’
긴 몸을 용수철처럼 웅크렸다가 일시에 펼치며 쏘아져 오는 돌격.
족히 수백 톤은 될 충격이었다. 맞는 순간, 날아가고 튕기고 어쩌고 없이 공중에서 육편으로 분해될 정도였다.
핏! 핏! 핏!
흑객은 뒤늦게 경공술을 펼쳤다.
위치가 공중인지라, 그가 쓸 수 있는 것은 도약밖에 없었다. 하지만.
캬르르르…….
“……?!!”
흑객이 도약한 그 지점으로 거대한 앞발이 날아들었다.
마치 여기로 올 줄 알았다는 것처럼, 집채만 한 머리통에선 길고 시뻘건 혀가 날름거리며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어떻게……?’
쾅! 쾅! 쾅!
앞발이 암벽을 찍자, 막대한 충격파와 소나기 같은 돌의 비가 퍼부어졌다.
흑객의 시야가 흔들렸다.
음파 시야는 소리로 세상을 보는 것. 한데 끔찍한 충격파와 폭음이 터지고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소리의 반사가 너무 커서 사물의 위치와 크기가 왜곡되었다.
“칫!”
흑객은 시야를 강제로 되돌렸다.
박쥐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안으로. 그리고 그러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바질리스크의 거대한 안면. 핏빛 채찍 같은 놈의 혀였다.
“하앗!”
흑객은 반사적으로 자신이 쓸 수 있는 최강의 마공을 썼다.
암흑대천마공(暗黑大天魔功).
천마에게 직접 사사받은 무공으로, 천마신교의 수많은 마공 중에서 가장 정수라 할 만한 것이었다.
거기에 흑객은 거의 일 갑자에 달하는 내력을 담았다.
지이익!
무기처럼 변한 팔을 따라 새카만 어둠이 번져 나갔다.
암흑의 검기가 화살처럼 치솟아 올랐고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바질리스크가 머리를 흔들었다.
“뒈져라!”
목표는 단 하나.
샐러 드레이크 때도 그랬지만 몸을 단단한 비늘로 덮고 있는 몬스터들은 대개가 턱 아래, 거기가 약점이었다.
크어어엉!
거대한 크기가 무색하게, 바질리스크의 머리가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여, 암흑의 검기를 피해 내려 했지만.
패애애액!
검기가 목표 지점을 향해 방향을 틀었고, 바질리스크의 턱에 정통으로 작렬했다.
쿠와앙!
이번만큼은 충격이 컸다.
놈의 거대한 몸체가 흔들렸고, 주춤 물러나며 괴성을 질렀으니까.
쿠에에에에엑!
‘성공이다.’
흑객은 속으로 환호했다.
암흑대천마공은 시전하는 목표점을 향해 날아가는 전격류 중 하나.
직선으로 곧게 날아가는 내기 발현과는 또 다른 형태의 수법이 먹혀든 것이다.
사아아아아악!
한데, 틈을 타서 추가 공격을 하려던 흑객의 눈앞에 하얀 아지랑이가 일어났다.
‘이게 뭔…….’
흑객은 잠깐 의아했지만, 그걸 그대로 뚫고 나갔다.
충격파든 무엇이든, 잠깐만 버티면 이 끔찍한 놈을 척살할 수 있었다.
휘영청 뒤로 기울어진 바질리스크.
놈의 몸통 아래에서 다시 한번 턱을 향해 마무리를 지으려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는 단순히 멈춘 게 아니었다.
감각이 사라지고 거죽부터 안까지 딱딱하게 굳는 게, 마비 현상이었다.
그리고 점점 몸의 색이 변했고, 이제는 숫제 돌로 만든 석상처럼 변해 가고 있었다.
“석화? 그럴 리가. 언제 당한…….”
말하는 도중 흑객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바질리스크의 또 하나의 위험한 권능.
눈이 마주친 것을 돌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했던가.
물론 잊지는 않았다.
이제껏 놈을 공격할 때도 정면으로 눈을 쳐다보는 건 피해왔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냥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만 발동하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꽈드득. 뿌드득.
마비와 석화는 점점 더 심해졌다.
흑객의 다리에서부터 허리까지는 이제 회색빛 화강암처럼 되었고, 어깨와 가슴에서도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
촤아아아악.
그리고 그는 하얀 안개 속에서 직감했다.
상대가 공격해 오고 있음을.
“제길, 배…….”
콰아아아아앙!
다음 순간, 끔찍한 충격이 흑객을 그대로 덮어 버렸다.
머리 박치기.
이제껏 바질리스크가 여러 번 시도했던 공격이, 드디어 제대로 먹힌 것이다. 이제껏 보여 줬던 힘보다 몇 배는 더 강한 파괴력을 싣고.
구르르릉!
엄청난 충격파가 산 전체를 뒤흔들고 바질리스크의 주변으로 쩍쩍 금이 갈라져 나갔다.
끄으르르릉!
돌바닥에서 머리를 치켜올리며 놈은 승리의 환호를 울렸다.
* * *
“아. 안 돼!”
오정은은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보기에 저런 공격을 받고도 살아 있을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
“으윽… 윽…….”
그녀 옆에서 신음하는 단영과 오청운.
바질리스크를 피해 달아나다가 머리 위에서 공격을 받은 그들은, 단번에 초주검이 되었다.
그나마 직격의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죽을힘을 다해 후려갈겼다.
자칫 자기 손으로 식솔을 죽일지 모르는 행위였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저기 뒹구는 돌 더미처럼, 그냥 박살이 났을 터. 시체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누, 눈을 좀 떠 봐요…… 제발. 제발.”
덕분에 살아나긴 했지만, 오정은은 심각하게 질린 얼굴로 식솔들을 흔들었다.
그녀의 손은 떨리기만 했다.
바질리스크를 상대로 흑객의 최선을 다한 무위는 놀라웠다.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잠깐만 보더라도 숨이 막힐 정도로 거대한 몬스터.
체장 40미터의 거대한 거물을 상대로 사람이 싸울 수 있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었다.
‘이길 수 있을지도…….’
검은 칼날이 번개처럼 괴물을 후려갈길 때, 그녀는 처음으로 공포에서 벗어나며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그 희망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던 흑객은, 갑자기 비틀대며 몸이 굳어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잠시 빈사 상태로 휘청이던 바질리스크는 곧 몸을 일으켜, 흑객을 대지 자체에 쑤셔 박아 버렸다.
“끄, 끝났어. 이제 전부…….”
파드득.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던 오정은에게 새카만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자그마한 박쥐였다.
퍽, 와당탕!
“악!”
그리고 그 박쥐는 사람이 되어 나뒹굴었다. 그건 피투성이가 되어 몸이 반쯤 날아간 흑객이었다.
배트 폼(Bat form). 블라드의 권능 중 하나로, 몸을 수십 마리의 박쥐로 바꾸는 절대 회피로 목숨을 건진 것이다.
“오 소저…….”
“대, 대협?”
그럼에도 흑객의 모습은 처참했다. 두 다리는 날아가고 팔 하나도 없었다. 몸통과 오른팔만 남아 있었다.
전투 불능. 아니, 회생 불능. 그런 모습이 된 채 그는 오정은에게 손을 뻗었다.
“내 배낭… 내 배낭에서 유리병을 꺼내 주시오…….”
“네……?”
배낭? 유리병?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는 오정은에게.
“빨리……! 시간이 없소! 지금 충격이 남아 있을 때 저놈을 죽여야 하오!”
흑객은 아직 포기하지 않은, 강렬한 투쟁심을 드러냈다.
후다닥. 뒤적뒤적.
그 끈질긴 의지가 오정은을 움직였다. 그녀는 마침 주변을 뒹굴고 있던 흑객의 배낭을 찾아, 그 안의 내용물을 마구 쏟아냈다.
“이. 이거요?”
유리병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검붉은 액체가 가득 담긴, 내용물이 뭔지 모를 병. 어찌 보면 약인 듯했고, 어찌 보면 누군가의 피인 듯했다.
“이. 이게…….”
“오지 말고 던지시오! 어서!”
오정은이 다가오려 하자 흑객은 즉각 소리 질렀다. 아직 자신의 몸에 독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휘르륵. 탁!
병이 날아들었다. 흑객은 그걸 받자마자 즉각 입에 대고 목으로 들이켰다.
꿀꺽꿀꺽! 크으으!
천마 구옥경.
고금을 통틀어 가장 강한 자의 피를, 흡혈귀의 정점에 달한 자가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