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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96화 (97/310)

96화. 바질리스크 (2)

두근두근.

심장이 맹렬하게 박동했다. 흑객의 눈에 붉은 섬광이 떠올랐다.

흐려졌던 시야가 회복되고, 마치 미친 듯한 느낌. 이제껏 겪어 보지 못한 오만 감정과 쾌락이 파도처럼 몰아쳤다.

두구두구두구둥!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하며, 온몸에 피를 보냈다. 석화되어 소실된 부분까지 다시금 피가 전달되며 통제를 재개했다. 잃어버린 신체의 통제력이 돌아왔다.

“크으으…….”

피의 권능.

흡혈귀의 정체성이자, 영생 불사를 가능하게 하는 힘.

그들은 피를 마실수록 강해진다. 그건 피에 담긴 양분을 흡수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흡혈귀는 피에 스며든 영기, 생명력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그 권능으로 이번에 마신 피는 천마의 것.

한때 신마경을 넘보던 절대자. 그 피에는 수백 명분의 생명력에, 반쯤 신선으로 향하던 때의 영기가 남아 있었다.

“크윽! 칵! 크윽!”

조금 전 공격을 당할 때, 이대로라면 죽는다고 느꼈을 때,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간 무언가가 있었다.

공간 도약도, 음파 시야도 방해받았다. 엄청난 폭음 때문에 눈이 가려지고 움직임도 느려졌다. 하지만 그건 상쇄할 수 있었다.

‘피가… 좀 더 있었으면.’

마비와 석화의 이능은 분명 무서웠다. 그저 시야에 들었을 뿐인데 몸이 돌로 변하다니. 과연 위험 등급 11급의 몬스터라 할 만했다.

하지만 흑객 역시 피만 있다면.

만약 막대한 피만 주어진다면, 이따위 것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닌 것이란 걸 직감했다.

‘좀 더. 피, 피가…….’

블라드는 천마가 보증했듯이 어마어마한 놈이었다.

찰나 간에 떠오른 놈의 권능. 당장은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그 힘을 모두 쓸 수 있게 되면 위험 등급 11급이고 뭐고 단매에 처죽일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딱히 정기 어린 피가 아니라, 일반인 백 명 정도의 피만 있다면, 그 정도면 충분했다.

“흐으으으으…….”

그랬는데 그 피가 보충되었다. 흡혈귀가 원했던 막대한 양의 피는 아니었지만, 질은 오히려 까마득히 높았다.

한때 신마경을 향해 정진했던 천마의 피는 최소 수백 명의 생명, 그 이상의 힘을 흑객에게 뿌려 주었다.

그 풍성한 생명력에 흡혈귀는 몸을 떨었다.

꾸에에에엑!

“꺄아악!”

오정은은 비명을 질렀다. 잠시 비척 대던 바질리스크, 충격에 몸을 가누지 못하던 거대 몬스터가 다시 그녀를 향한 것이다.

슈우우욱!

전장 40미터짜리 거대 괴수가 휘우듬하게 몸을 꺾으며 다시 공격해 왔다. 이제 피할 엄두도 몸을 뺄 힘도 없어 그저 눈만 감아 버린 순간.

키드드득!

귀를 찢는 기음이 울려 퍼지고, 온몸을 저릿저릿하게 만드는 진동이 느껴졌다. 그저 그것뿐. 예상했던 죽음이나 고통은 없었다.

“아……?”

눈을 떠 보니 흑객이 일어나 있었다.

끊겨 나간 팔도, 잃었던 두 다리도, 모두 다시 붙어 있는 채로.

“대. 대협? 몸이 어떻게…….”

“이젠 좀 다를 거다. 놈.”

흑객은 오정은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싸늘하게 웃고만 있었다.

촤아악!

거대 괴수의 박치기 공격을, 수많은 핏빛 창이 돋아나 막고 있었다. 가시덤불에 스스로 머리를 처박은 꼴로 바질리스크는 노호성을 터뜨렸다.

쿠어어엉!

질척한 독수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왔다. 동시에 흑객의 눈에서 불길한 검은빛이 타올랐다.

지금 그의 눈에는 세상이 느리게 보였다. 그를 향해 쏟아지는 바질리스크의 독수, 그 물줄기와 독액 방울을 일일이 다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암흑대천마공…….”

그에 흑객은 다시 한번 힘을 끌어올렸다. 손에서 무기 사이로 응축된 기운이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건 이전과는 달리 아주 거대했다.

어둠을 넘어 암흑에 가까운 검은 번개. 불규칙적인 기의 흐름이 삼 장, 오 장까지 길어졌고.

“섬(閃)!”

그의 외침과 함께 바질리스크의 머리를 정확히 강타했다.

콰가가강!

그리고 이변이 일어났다.

바질리스크의 몸체가 공중으로 튀어 오르더니, 몇 장이나 멀리 날아가 바닥에 처박힌 것이다.

쿠드드등!

“아!”

오정은은 눈앞의 광경에 그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힘으로 밀어냈다.

무려 전장 40미터에 달하는 거대 몬스터를.

돌격해 오는 충격은 수백 톤에 달했을 터인데, 그걸 막아 내고 그러고도 모자라 저 거체를 날려 버린 것이다.

“이젠 도망갈 필요 없소.”

흑객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내 저놈을 제압할 테니까.”

파팟.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흑객.

그녀는 멍한 눈으로 그의 뒤를 뒤쫓았다.

후드드득!

배트 폼.

신체를 수십 마리의 박쥐로 바꾸어 고속 이동 하는 블라드의 권능.

그 권능은 단순히 회피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박쥐의 형태를 취했기에, 여러 겹의 음파 시야를 상시 활용할 수 있었고, 타격 무효화 효과를 동시에 받는다.

크아아아아!

또한 수십 마리의 박쥐로 몸을 작게 분열시켰기에 쉬프팅, 공간 도약의 권능을 아무 부담 없이 쓸 수 있었다.

치익! 칙! 파박!

바질리스크가 독액을 쏘아 댔다. 박쥐 몇 마리가 그 독의 비를 맞고 타들어 갔다.

파드득!

하지만 그렇게 사라진 박쥐는, 다른 박쥐의 그림자에서 다시 나타났다. 애초에 흡혈귀는 박쥐 형태로 변이했을 때는 공격을 받아도 무한하게 되살아난다.

피만 있다면.

‘한 번에 끝낸다.’

파드득!

수십 마리의 박쥐로 화했던 몸을 흑객은 다시 되돌렸다.

온몸에 솟구치는 무한한 힘.

혈액을 통해 손에 넣은 힘은 시시각각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애초에 흡혈귀 따위가 받아들이기엔 천마의 격이 너무 높았다.

두 손으로 물을 받은 것처럼, 당장은 힘이 가득하지만 이건 일각도 지나지 않아 금세 흘러내릴 터.

“체페슈(Ţepeş)!”

화악!

흑객이 왼손을 내밀자 긴 핏빛의 창, 아니, 한없이 날카롭고 기분 나쁜 꼬챙이가 뻗어 나왔다.

과거 블라드에게 붙었던 학살자라는 이름. 적을 꼬챙이에 꿰어 죽였다는 악명은, 훗날 저주를 받아 마족이 되면서 오히려 권능으로 바뀌었다.

쾅! 쾅! 쾅! 쾅! 쾅!

상대가 박쥐에서 사람 모습으로 돌아오자, 흥분한 바질리스크는 앞발을 내리찍으며 흑객을 향해 다가왔다.

더욱이 벌린 입으로 퍼져 나오는 바람.

콰아아아아!

이번엔 독수가 아니었다. 소용돌이치는 맹렬한 광풍이었다. 독기가 스며든 강력한 태풍이었다.

하지만, 흑객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무기화된 손, 불길한 꼬챙이를 땅에 쑤셔 박았다.

쩌저저적.

지면으로 파고든, 꼬챙이가 그의 몸을 지탱했다. 태풍에 날아가지 않게 단단히 붙들었다.

크아아아아!

그렇게 멈춰 선 그를 바질리스크는 찍어 버리려 들었다. 거대한 앞발이 흑객이 있던 지면을 완전히 뭉갰다.

투두두둑.

하지만 거기서 변화가 일었다. 놈이 내려찍은 지면에 쩍쩍 금이 가더니 사방팔방으로 균열이 생기고, 그 균열은 점점 광범위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추아악! 추아악! 추아악!

그 균열에서 수십 수백의 꼬챙이가 솟아 나와 바질리스크를 꿰뚫었다. 강철 같던 비늘을 갈가리 찢어발기고, 턱 밑의 약점이고 단단한 머리통이고 할 것 없이 전신에 꼬챙이 형이 퍼부어졌다.

캬아아악!

바질리스크는 고통 속에서 당황했다.

놈은 이제껏 이런 아픔을 겪은 것이 처음이었다. 놈의 비늘은 수많은 암석과 지반 속에서 단련된 것. 강철로도 뚫지 못하고, 검기도 튕겨 내던 것이었다.

쩌적! 빠지직! 쫘아악!

하지만 이 꼬챙이들은 놈의 비늘과 그 아래의 살을 두부처럼 쉽게 뚫었고, 안에서 다시 수많은 가지를 뻗었다.

초음파 블레이드.

초고속으로 진동하는 날카로운 창이 바질리스크의 내부를 마구 휘저어 놓았다. 놈은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안간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우드득! 우드드득!

억지로 꼬챙이에서 온몸을 뜯어낸 바질리스크. 놈이 전신에서 피를 뿜어내며 다시금 꼿꼿하게 몸을 세웠다.

“제길. 조금 모자랐다.”

흑객이 혀를 찼다. 바질리스크의 솟구친 머리가 다시금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콰쾅! 우드득! 꽈드득!

그야말로 사력을 다한 끔찍한 충격이었다. 땅이 쩍쩍 갈라져 나가고, 사방으로 깨진 암석이 날았다.

핏!

공간 도약으로 허공에 솟구친 흑객. 그는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생명력을 모아 마지막 반격을 준비했지만.

“……?”

우드득. 우드득.

바질리스크는 다시 솟구치지 않았다. 놈은 단단한 암석을 두부처럼 뚫고 들어가며 한순간에 수십 미터의 지저로 파고들기만 했다.

“뭐, 이런…….”

도망친 것이다.

흑객은 남은 힘이 거의 없었고, 쓴다 해도 아까 같은 위력은 낼 수 없었지만, 바질리스크는 그걸 몰랐다.

그저 태어나 처음 겪은 고통에 질겁하며 안전한 땅속, 지저로 숨어든 것이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잡을 수 있었다.

피만 더 있었으면.

그렇게 생각하다가 흑객은 고개를 내저었다.

욱씬!

지금은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싸움으로 올랐던 열이 사그라들자, 뒤늦게 온몸에서 통증이 마구 일어났다.

휘청. 와당탕!

“아…….”

오정은은 그동안 답답했던 숨이 트였다.

바질리스크가 땅속으로 사라졌다.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생각한 몬스터가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간 것이다.

저 괴물 같은 사내, 흑객을 버티지 못하고.

“괘… 괜찮아요?”

후다닥 달려서 흑객에게 다가온 오정은.

신체는 회복되어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리고 온몸을 잘게 경련하고 있었다.

“으…….”

“정신이 들… 어……?”

흑객을 보던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머리 쪽에서 다량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란 그녀는 자신의 배낭을 뒤졌다. 힐링 포션. 바로 상처를 치유하는 회복약을 급히 꺼내려는 때.

콕콕콕.

무언가 따듯한, 포실포실한 깃털 뭉치가 다리에 달라붙어 콕콕 쪼아 대고 있었다.

“악!”

철퍼덕!

오정은은 너무나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언젠가 일어날지 모를 거라 기대했던 일. 하지만 전혀 기대 하지 못한 상황에, 준비되지 못한 때에 일이 벌어졌다.

끼익. 끼익.

동글동글한 눈에 앙증맞게 벌어진 부리. 깃털은 하얗고 몸집은 포실포실했다. 하지만 병아리처럼 생긴 상체와 달리 그 다리는 강아지, 정확히는 어린 사자의 것이었다.

새끼 그리핀.

이 난리 통에 놀라서 부화해 버린 것인지, 마노처럼 붉은 알 껍질을 깨고 나온 새로운 생명이 눈앞에 있었다.

끼---이!

놈은 오정은과 흑객을 보며 덜 여문 날개를 파닥거렸다. 뭔가를 바라는 것처럼 요란하게 소리 내고 있었다.

“이게 무슨…….”

“…허?”

뒤늦게 정신을 차린 흑객 역시 당황했다.

이제껏 이 모든 사달의 근원이자 핵심이었던 그리핀의 알.

꺄우우우!

그게 깨어나 자신과 오정은이란 여인을 보며 활짝 웃고 있는 것이다.

몸까지 비벼 가면서 한없는 친밀감을 드러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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