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파견 보고 (1)
흑객 일행이 오가장까지 가는 데는 하루가 걸렸다.
그사이 단영과 오청운은 요상으로 원기를 회복하는 데 집중했다.
외상이야 포션으로 바로 치료했지만 내상, 충격으로 뒤틀린 혈맥을 다스려야 했기 때문이다.
“아가씨! 살아 계셨군요!”
“호위 무사들의 헌신 덕분에요.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산을 내려 온 뒤에는 운이 좀 따랐다.
광산 마을이 샐러 드레이크의 습격을 받았을 때, 마침 바깥에 나가 있던 상단의 인물들을 만난 것이다.
오정은은 필요한 만큼의 정보를 풀었다.
샐러 드레이크는 모두 처치했지만, 광산 인근에는 독기가 남아 있으니 아직 접근하지 말라고.
조사단과 복구 인원이 올 때까지, 우선은 본가로 복귀하라고.
그리고 그 김에 말과 마차를 얻었다.
오가상단의 장원까지 거리도 거리지만, 새끼 그리핀을 숨길 곳이 마땅찮았기 때문이다.
끼이이이! 끼이이이!
덕분에 마차를 타고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지만, 흑객은 심히 불편했다.
그리핀.
이제껏 이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된 사달이, 지나치게 자신에게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이놈 이거, 왜 이러는 거요?”
“글쎄요…….”
오정은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리핀이 자꾸 달라붙으니 흑객이 난처해하는 모습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대협을 아빠로 생각하나 봐요.”
“그럼 오 소저에게도 붙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오?”
“다른 이유가 있나 보죠. 이를테면…….”
끼르르륵! 끼르륵!
오정은이 말고기 육포를 손에 수북이 올려놓고 내밀었다.
그러자 그리핀은 언제 흑객에게 달라붙었냐는 듯 바로 오정은에게 달려가 손바닥을 콕콕 쪼아 댔다.
“대협의 마기 때문이 아닐까요?”
“…무슨?”
흑객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공을 숨기진 않았지만, 직접적으로 그녀에게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던 것이다.
바질리스크와 싸울 때 마공을 쓰긴 했지만, 그녀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다.
단영과 오청운은 몰라도, 마기는 일반인들이 쉽게 느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경계하실 필요 없어요. 사실 마의 기운을 몇 번 경험해 봤거든요. 그리핀의 알을 부화시키려고, 저희는 온갖 수단을 다 썼으니까요. 그중에 마공이 가장 효과적이었고요.”
고수를 초빙해서 알에다 진기를 불어넣기도 하고, 마법사를 불러 생장이나 활력의 마법을 쓰기도 했다.
그때마다 실패했지만 마교의 마공은 달랐다.
마기를 주입했을 때 그리핀의 알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반응을 보였었다.
“그럼 왜 도중에 멈춘 거요?”
“아쉽게도 그때 초빙한 분은, 계약한 날짜만 채운 후 바로 떠나셨어요.”
“돈을 좀 더 주면 잡을 수 있었을 텐데.”
“그때는 몰랐으니까요, 어쨌든 그 뒤로 본가는 강호에서 활동하는 천마신교분들을 수소문했죠.”
“흠.”
흑객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외에도 강호에서 활동하는 신교의 인물들은 몇 있었다. 용병이나 식객으로.
그들은 딱 돈 받은 만큼만 일하려고 했다. 돈 버는 목적이 신교의 자금 조달이었기에 항상 빠듯했다.
그랬으니 며칠만 하고 바로 그만뒀을 터였다.
근사한 경력이나 이력이 남는 것도 아니고, 뭔지 모를 알에다 내공을 불어넣는, 그냥 단순노동 아닌가.
“사실, 처음 뵈었을 땐 경황이 없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중에 대협의 소식도 있었어요. 아, 오해 마세요. 저희 상단에서는 예전부터 천마신교의 후예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렇구려.”
흑객이 표정이 굳었다.
누구든 모르던 사람이 갑자기 자신을 조사했다는 게 그다지 달갑지는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알을 부화시키는 건 신교의 분들을 모셔서 해야 했어요. 괜히 던전을 자극해서…….”
오정은이 뼈아프게 한숨 쉬었다.
이제껏 테이밍 연구에는 너무도 많은 자금이 들어갔다.
상인답게 지출을 좀 줄여 보려다, 던전이 터지는 대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뭐, 단순히 돈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테이밍 연구는 원래 극비로 진행 중이었기에…….”
단영이 변명하듯 머리를 긁적이며 한마디 했다.
“뭐, 그렇다고 칩시다. 어쨌든 이놈들은 마기에 잘 이끌린다는 거요?”
꾸르르륵.
흑객은 배불러 잠에 빠져든 그리핀을 가리켰다.
그는 오가상단의 사정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장사치가 돈에 매달리는 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마공, 천마신교의 마기가 몬스터에게 친근감을 준다는 것이 신경 쓰였을 뿐.
“그런 것도 있고, 깨어나기 전에 대협께서 바질리스크와 싸우는 걸 감지했을 거예요.”
“그게 가능하오? 알 상태였잖소?”
“추정일 뿐이지만, 그렇게 보면 간단히 설명돼요.”
던전의 기운을 먹고 무럭무럭 커 온 그리핀의 알.
녀석이 자신을 노리는 샐러 드레이크와 바질리스크의 존재를 느꼈다면, 그놈들과 싸우며 흑객이 뿜어낸 강력한 마기에 영향을 받았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알을 깨고 나와 처음 본 것이 오정은, 다음이 흑객이었으니 당연히 깨어나기 전에 자신을 지켜주던 아빠였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을 거라고.
“하, 졸지에 무슨…….”
설명을 들은 흑객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사실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듣기에는 제법 그럴싸했다.
난데없이 몬스터의 아빠가 되다니.
불편하기도 하고 거북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꾸르르. 꾸르르르.
정작 눈앞에 잠들어 있는, 털이 보송보송한 노란 병아리(?)를 보니 기분이 또 묘해졌다.
“뭐, 아무리 몬스터라고 해도…….”
나쁘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며 흑객은 그리핀에게 눈길을 주었다.
푸훗.
그리고 이제껏 냉막하던 그의 얼굴에 훈훈한 미소가 감돌았다.
오정은은 그런 그를 보다가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좀 미안한 말이긴 한데, 당신들로서는 시선을 끌어 봐야 한두 방이면 박살이 날 거요.
-내가 유인을 할 테니 당신들이 그새 도망치시오. 당신들만 빠져나가고 나면 나도 몸을 뺄 테니.
거대한 몬스터를 상대로 한 치의 두려움도 없이 나선 무인.
때로는 한없이 차갑고 위험해 보이지만, 가끔은 저런 의외의 모습도 있었다.
거기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고도 자랑을 내세우지 않는 성격.
‘…지금 내가 무슨 생각하는 거야?’
절레절레.
오정은은 뜬금없는 설렘에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이 낯선 기분을 냉정하게, 상인의 입장으로 보려고 애썼다.
‘그러니까… 마교와는 앞으로 지속적인 협력관계를 만들 필요가 있어. 여러모로.’
하늘을 나는 군대.
태생이 몬스터인 그리핀으로 부대를 운용하려면, 녀석들이 친근하게 여길 탑승자가 필요하다.
그리핀 라이더(Griffin Rider).
높은 하늘에서 사나운 몬스터를 타고 용감하게 싸울 수 있는 무인.
그게 가능한 후보군이 눈앞에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 근사한 광경일 거야.’
두근두근.
그러니까 이건 꿈의 실현이라고. 그걸 앞둔 것 때문에 가슴이 뛰는 거라고, 오정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원대한 계획을 이루려면 더더욱 이 사람의 협력이 필요했다.
“저어, 대협.”
“음?”
“이번 일… 천무학관에 어떻게 보고하실 건가요?”
잠깐의 침묵.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을 뜸 들인 끝에 오정은이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제일 중요한 대화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 * *
“다 왔습니다. 저기가 오가장입니다.”
마차로 하루를 꼬박 달린 끝에, 일행은 오가상단의 정문에 도착했다.
마부석에 앉은 오청운이 창문을 열자, 단영이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이제 좀 쉬겠군요. 아가씨.”
“뜨거운 물로 좀 씻고 싶어요.”
오정은은 긴장이 풀려 푸욱 늘어졌다.
그간 생사의 위기에 처했기에 겨를이 없었지만, 그녀는 규수다.
남자들 사이에서 씻지도 못하고 며칠을 지내니 불편함이 많이 쌓여 있던 것이다.
“그럼 가기 전에, 여기 서명 좀 해 주시겠소?”
부스럭.
흑객이 배낭에서 파견 지령서를 꺼내 그 마지막 장을 내밀었다.
그에겐 제일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천무학관에서 받은 호위 임무를, 파견 무사가 잘 수행하였음.
의뢰주. 인
오가상단의 후계자를 무사히 구출했고, 그녀를 장원까지 잘 데려왔다.
임무가 드디어 끝이 난 것이다.
“대협? 이대로 그냥 가시려고요?”
오정은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당연한 거 아니겠소.”
흑객이 말하자, 단영이 끼어들었다.
“아. 안 됩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부디 본 장에 들러 주십시오! 은공을 이렇게 돌려보내면 장주께서 크게 노하실 겁니다! 바로 연회를 준비할 테니…….”
그는 매달리려 들었지만, 흑객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바로 그게 질색이라서 말이오.”
상단주를 직접 만나면, 아마 상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흑객은 이런 방식을 알고 있다.
나름 보답한답시고 마련하는 선물은 시간이 한참 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여는 잔치는 시끄러울 것이고.
무엇보다.
‘교주님의 밥을 해야 하는데…….’
이게 제일 컸다.
며칠째 집을 비웠으니, 단단히 대로하고 계실 터.
“전에 말했지만, 나는 번거로운 형식을 싫어하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거면 더더욱.”
“아, 그래도 저희의 체면은…….”
“돈으로 주시오.”
“…예?”
“……?”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말에 단영과 오청운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감사하기 이루 말할 수 없으나, 이렇게 대놓고 물질적인 보상을 바라니 또 그게 듣기에 이상했다.
하지만, 오정은은 달랐다.
뭔가 웃음을 참으려는 듯 입가를 가리며 대답했다.
“그럼요. 단단히 준비하고 있을 게요.”
“아가씨…….”
그런 황당한 분위기 속에서 상대의 말을 너무나 덥석 무는 오정은을 보자니 단영이 또다시 놀랐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럼 언제쯤 준비해 놓고 있으면 되나요?”
“흐음, 그게…….”
상대가 이렇게 나오자 오히려 난감해진 쪽은 흑객이었다.
잘 준비하고 있을 테니 다시 방문해 달라는 말이 아닌가.
왠지 그들의 의중을 내비친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제가 따로 언질을 드리겠소.”
흑객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괜히 서류를 좀 더 들이밀었다.
오정은이 싱긋 웃으며 파견 지령서에 수결을 찍었다.
“학관에 올릴 보고는 당신들이 청했던 대로 하겠소. 인연이 되면…….”
잠깐 뜸을 들인 흑객.
오정은을 한 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봅시다.”
덜컥. 타악!
한마디를 남기고 마차 문을 연 흑객은 그대로 몸을 날렸다.
한 줄기 검은 바람이.
언덕을 길게 그으며 그들의 시야 밖으로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