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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104화 (105/310)

104화. 파견 보고 (2)

천무학관 교육처.

낮잠을 자던 기획부장 왕문통(王文通)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실전 평가를 마치고 온 한 학관생이 종이를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뢰주 수결이군.”

오늘 이른 아침부터 몇 명씩 다녀가다 보니, 대충 서류만 봐도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책상에 놓인 인장을 찍고 나서 한쪽 서류철에 옮겨놓았다.

“한데…….”

뒤돌아서는 흑객을 왕문통이 불렀다.

그러고는 서류철에 옮겨 놓던 파견 지령서를 집어 들었다.

오(誤)라는 글자가 눈에 이제야 띈 것이다.

“여기라면 넉넉히 놀다 오면 될 텐데……. 왜 이렇게 빨리 왔나?”

“뭐, 어쩌다 보니.”

흑객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고는 답답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왕문통을 향해 재차 말을 이었다.

“사람이 꽤 많이 죽었더이다. 곳곳에서 곡소리가 나는데 대접받으려고 하자니 가시방석이더군요.”

“흠, 그건 좀 그렇지. 가만, 그러고 보니 오가장의 은광에 몬스터가 나왔다는 소리가 있던데. 피해가 그렇게 컸나?”

“말도 마시오. 상당했소.”

파견 나간 자신까지 죽을 뻔했다.

원래라면 흑객은 그것도 상관에게 단단히 따질 생각이었지만.

“여기 내용을 보면…….”

파령 지령서 앞, 보고서를 살펴보던 그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오가상단의 극비라고 쓰여 있는 건 뭔가?”

“모르겠소이다. 애초에 관심도 없고. 어차피 장사치들이 비밀리에 하는 수작이란 게, 돈벌이 아니겠소?”

“뭐, 그건 그렇지.”

오가상단은 이번 일을 최대한 함구해 주길 바랐다.

새어 나가는 걸 원치 않는다고.

흑객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에 따른 보상을 해 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천무학관은 교주만 아니었다면, 찾아오지도 않았을 곳이니.

“나는 그냥 몬스터만 잡았을 뿐, 자세한 것은 그쪽에 물어보시오. 용무가 끝났으니 난 그만 가 보겠소.”

“어… 음. 그러게.”

척. 척.

교관은 일을 마친 흑객이 돌아가는 것을 보며, 파견 지령서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좋은 일 있나?”

4학년생은 꽤나 성가신 일을 맡은 거로 보였다.

그런데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미미하게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 * *

“이거 주시오!”

“어서! 어서 빨리!”

저잣거리를 방문한 흑객의 동작은 빨라졌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천마께서 천천히 다녀오라고 하셨지만, 갑자기 변덕을 부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식사를 제때 못 하면 눈 돌아가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으니.

“양파는 좀 깎아 주시오!”

“어허, 나를 속이려고! 저번에도 왔잖소!”

그는 바쁜 와중에서도 흥정하는 걸 잇지 않았다.

여기 상인들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올려치기를 당한다.

저잣거리에서 몇 번 실랑이를 경험한 그에게 있어 이것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팟. 팟.

시간이 없어 일단 먼저 내어 드릴 간단한 요깃거리를 산 흑객은 이내 경공술을 펼쳤다.

정말이지 시간이 없었다.

거리가 멀지 않았지만, 그에겐 한시도 지체해선 안 되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끼이이익.

투욱.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던 그는, 곧장 자리에서 멈췄다.

놀랍게도 방에는 천마가 있었다.

표정이 굳어진 것이, 탁자 앞에서 우두커니 선 그는 매우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주, 죽을죄를 졌습니다. 하필 일이 꼬이느라…….”

흑객은 급히 잘못을 시인하며 부복했다. 그러고는 빠르게 음식으로 화제를 돌렸다.

“빨리 음식을 만들겠습니다. 정말이지 오늘만큼은 그 어떤 날보다 맛 좋고 환상적인…….”

“흑객아.”

‘…어?’

흑객은 잘못 들었나 싶었다.

밥 안 차렸다고 화를 낼 것 같았는데, 이제 보니 그런 이유가 아닌 모양이었다.

흑객은 고개를 들어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는 그의 안색을 살폈다.

“저…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이리 와 보거라.”

천마의 손짓에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재료를 놓아두고 재빨리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어떤 일로… 응?”

자연스럽게 탁자를 내려다보던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시험지였다.

천무학관이라 대문짝만 하게 적힌 걸 보니, 아마도 중간고사 시험지일 터.

천마는 바로 그 시험지를 보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너, 여기 앉아 봐.”

“예? 아, 예.”

흑객은 무슨 일인지 아직 모르지만, 우선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자, 풀어 봐.”

“…이 시험지를요?”

“그래.”

‘제가 왜 이런 걸’이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교주의 표정을 보곤 이내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는 의자에 바르게 앉으며 시험지의 첫 장을 들었다.

시험지 맨 윗줄에 적힌 ‘무협학’이라는 과목명을 확인하며.

한 식경이 조금 넘었을까.

흑객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문제에 집중했다.

한 문제 한 문제를 놓치지 않고 정성스럽게 읽어 나갔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생각한 답을 적는 걸 잊지 않았다.

이후, 시험지에 적힌 교주의 해답과 비교하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 더 시간이 흘렀을 때쯤.

“과연.”

흑객은 짤막한 탄성을 내질렀다.

어느새 한결 개운한 표정이 된 그는 옆에 서 있던 천마를 보고 씨익, 웃었다.

“다 맞히신 게지요?”

“…….”

그런데 천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흑객의 확고한 생각을 조금 흔들리게 만들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적는 것 없이 보느라, 한 문제를 놓친 것 같습니다.”

흑객은 사과했다.

그러고는 다시금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한 문제 틀리셨군요?”

그런데.

“…….”

이번에 대답이 없었다.

그 순간 흑객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그럴 리가요!”

콰직.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설마하니 이렇게 완벽한 답을 내놓고도 세 개나 틀렸다고 한 겁니까!”

한 번은 그러려니 해도 두 번은 믿기 힘들었다.

어떻게 상대의 질문의 의도를 파악해 완벽하게 쓴 답이 여기서 더 틀릴 수 있단 말인가.

흑객의 분노에 천마는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 짤막하게 들려온 그의 대답은.

“다 틀렸다.”

“예?”

“…싹 다 틀렸다고.”

“…예엣?!”

흑객이 경악했다.

눈이 커지고, 갑자기 원치 않게 손발이 떨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책상에 놓인 시험지로 시선이 이동했다.

“그럴 리가요. 이 어찌…….”

그는 다시 시험지를 봤지만,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질문의 답은 완벽했다.

흠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이렇게 완벽한 답을 써 냈음에도 0점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가.

“하아.”

천마는 눈을 질끈 감고 뒤돌아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은 자신의 인생의 큰 오점이었다.

실전 평가를 마치고, 복도에서 확인했던 등수와 점수표.

소진의 말대로 무협학이 0점이었다.

그가 살면서 처음으로 느껴 보는 좌절감이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든 것이다.

“…역시 죽여야겠지?”

“예……. 예엣?!”

흑객은 대수롭지 않게 답하다가, 갑자기 기함했다.

죽이다니.

누굴?

“무협학 교두 말이다. 문제를 이따위로 내놓고 맞는 답을 틀렸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죽어야지. 아주 갈기갈기 찢어 죽여야지.”

“아, 교주님.”

흑객은 급히 붙잡았다.

확실히 지금 정상적인 눈빛이 아니다.

당장 가서 닥치는 대로 교두를 죽일 그런 눈빛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살인까지 하려 하다니.

“말리지 말거라. 이런 개자식들과 이 땅에서 함께 숨 쉴 수 없다. 그들은 나를 회롱했다. 그에 걸맞은 대접을…….”

“아, 교주님!”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가려는 천마의 다리를 흑객이 붙잡았다.

그러고는 뒤돌아서는 그를 향해 급히 말을 이었다.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습니다.”

천마의 고개가 돌아갔고, 흑객은 이내 대답했다.

“이번에 갔었던 오가장 일로 말입니다.”

* * *

흑객은 그간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오가장 무사들을 만났을 때부터 시작하여 바질리스크의 등장까지.

얘기를 듣던 천마의 표정은 그다지 반응이 없었다.

‘어서 빨리 무협학 교두의 목을 따야 하는데’랑 ‘따는 김에 다른 녀석의 목도 딸까’라든가.

‘죽인 걸 들키면 학관 생활은 이제 못 하는 건가’와 ‘실종 처리로 하면 괜찮지 않을까?’ 같은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돈을 받으러 오실 날에 맞춰 준비하겠다’는 말에 관심을 보였고, 그리핀과 오가장의 테이밍 연구 이야기가 나오자 눈빛이 달라졌다.

“이거 꽤 놀라운데?”

천마는 턱을 괴였다.

테이밍. 몬스터를 길들여 타고 다닌다는 건 정말이지 획기적인 생각이다.

천마도 예전에 혈교 녀석들이 특이한 영물들을 길들이는 걸 봐 왔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유용한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리핀이라니, 하늘을 나는 몬스터라니.

듣기로 녀석들은 와이번을 능가하는 속도에, 체구가 작아 선회력이 기가 막힌다고 한다.

하늘 높은 곳에서 몬스터를 타고 쏟아붓는 공격이라니. 이건 전투력이 몇 배나 증가한다고 봐야 했다.

“잘됐구나. 거기 갈 때 나와 같이 가자꾸나.”

천마의 말에 흑객은 곧장 동의했다.

교주와 함께 찾아가는 거라면, 오가장에 들러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 그러시겠습니까? 언제쯤?”

“천무학관이 알게 되고 난 뒤에.”

“예?”

갑자기 천무학관이 언급되자 흑객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천마는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생각을 해 봐라. 많은 사람이 죽었고, 던전 브레이크? 그런 게 일어났다며?”

“아… 예.”

“천무학관이 바보가 아니라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거고, 결국 집요하게 여러 가지를 캐묻겠지. 오가장은 최대한 숨기려 하겠지만, 결국에는 다 털어놓게 될 거고.”

“그렇군요.”

그리핀의 테이밍.

이건 대몬스터 전투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칠 만한 사안이다.

천무학관뿐만 아니라, 중원 전역이 이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몰려들 터.

그리고 오가장은 결국 상단이다.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모를 리 없으니, 나름 시간을 끌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취할 것이고.

“제일 큰 문제는 이번 던전 브레이크야. 너, 11등급쯤 되는 몬스터, 바질리스크를 혼자 처리했다면서. 당연히 너에게 시선이 몰릴 테고, 감시를 받을 수도 있지. 그리되면 우린 앞으로 상당히 귀찮게 될 가능성이 높다.”

“…아, 죄송합니다.”

흑객은 그제야 뭔가 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싸운 건 좋은데, 너무 잘 싸워 버렸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내가 그간 좀 들은 소문이 있는데… 이 천무학관의 학과장? 리그웨더인가 있지?”

“예.”

“그 여자… 좀 느낌이 안 좋아. 이건 그냥 감인데, 너나 나를 마주치면, 바로 우리가 누군지 알아차릴 거 같다.”

“문제가 됩니까?”

“문제가 되지. 너, 흡혈귀잖아.”

“아.”

흑객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바질리스크를 상대할 때는, 온전히 자신의 무공만이 아닌 흡혈귀의 권능이 더 크게 쓰였으니까.

“최소 탈마. 내 예전 힘의 약간만 있었으면 피할 이유가 없을 텐데… 쯧.”

천마는 잠시 생각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지금 이한의 몸으로선 현경은 물론이고, 화경의 정점에 도달한 무인만 상대해도 승산을 점치기 어렵다.

그런 와중에 까마득한 손자뻘 무인에게 패하기라도 한다면? 그건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다.

“음 그래, 그게 좋겠군.”

천마의 말에 흑객이 시선을 들었다.

“그래, 이렇게 정리하자. 너는 앞으로 나를 천마의 제자라고 생각하고 대해라.”

“예?”

“그러니까 천마의 숨겨진 제자. 그 후손. 천마보다는 싸움을 못 하지만, 그래도 한 방이 있는 녀석으로.”

“…….”

흑객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하시는 거지?

이게 왜 이런 식으로 결론이 나는 걸까?

“이건 누구를 막론하고다. 혹여 본 교 사람에게도 한동안은 그리 말하도록. 알겠냐?”

이어진 말뜻도, 의도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차이인지 말이다.

“…그리하겠습니다.”

아무튼 흑객은 이렇게 이해했다.

학과장 리그웨더는 가급적 만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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