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천마의 제자 (1)
“이럴수가...”
지켜보던 흑객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놀랍다.
그리고 충격적이다.
자신의 사부를 상대로 두 번의 공격을 피해 낸 것이다.
하지만 자신보다 더 큰 충격을 토해 내는 이가 바로 옆에 있었다.
“우아아아……!”
전투를 지켜보던 소진은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이건 사람의 싸움이 아니다.
마법을 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반적인 무공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움직임 자체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까지 전해져 오는 기의 충돌과 상식을 벗어난 폭발.
과연 자신이 보고 있는 게 맞나 싶었다.
“눈으로만 보면 움직임을 놓칠게다.”
“…예?”
“지면을 봐야 한다.”
흑객이 한쪽 바닥을 가리키자 소진의 급히 육안을 돋우었다.
노인의 발끝에서 퍼져 나가는 음각의 문양.
기괴스러운 형태를 보이는 그것의 의미를 모르는 소진이 보기에도 섬뜩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사람이 아무리 빨리도 기공(氣功)을 격발시키는 속도보다 빠를 순 없을 테니까.”
“그럼 이한은 앞으로 어떻게…….”
“글쎄.”
흑객은 담담히 지켜보았다.
싸움이 어떻게 되든, 사부는 이것 한 가지는 알려 줄 것이다.
그가 교주가 맞는지 아닌지를.
* * *
“끝이다.”
노달의 노호성이 터졌다.
그와 동시에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열기가 들판 사이로 치솟았다.
콰아아아아앙!
그것은 불꽃의 항연이었다.
거의 이십 장에 달하는 곳이 화염으로 치솟았고, 지상 위로도 십여 장까지 치솟아 올랐다.
‘피했다!’
거대한 화마가 공간을 완전히 집어삼키던 사이, 노달의 표정은 급격히 굳어졌다.
청년은 거대한 공간을 집어삼키던 화마의 범위를 벗어났다.
불꽃이 터져나가는 속도보다 청년이 더 빨랐다는 얘기다.
‘저, 저건?!’
그러던 그때 그의 눈에 다시금 투영되는 잔영.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열두 개의 잔영이 자신을 향해 사방에서 질풍처럼 날아들고 있었다.
“감히! 하아앗!”
하나, 노달은 극마의 고수.
상식을 벗어나는 보법을 보고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노달의 몸이 거짓말처럼 불어난 것이다.
팔로마현(八路魔現).
동서남북 방향으로 네 개의 환영, 그리고 또 그 사이를 메운 네 개의 환영이 무려 여덟 방향을 점했다.
촤르르륵. 쩌정 쩡! 쩡!
격발하는 불꽃 속에서 무려 이십여 합이나 교전이 일어났다.
불꽃이 용솟음치고, 땅이 쩌적 갈라지다 터져나가기를 몇 차례.
콰캉!
마지막 불꽃의 격발과 함께 둘은 다시금 떨어졌다.
츠으으으.
연기가 걷히며 먼저 모습을 드러낸 천마.
부분부분 불에 탄 상의를 드러냈지만, 아직 열기가 수그러지지 않은 채였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흑객의 사부, 이름을 노달이라 말한 노인.
천마는 그냥 극마 고수 수준이겠거니 했으나, 싸워보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흔히 본교에서 극마를 하나의 경지로 통칭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3가지 구간이 존재한다.
바로 초입(初入), 통달(通達), 정점(頂點)의 벽.
창피하게도 천마 자신은 아직 초입에 머무는 데 반해, 제자의 제자 중 말석에 있을 법한 이 녀석은 통달의 구간까지 근접했다.
그러니 움직임, 반응속도, 내공에서 모두 밀리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전투경험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대등하게 싸운 것처럼 보일 뿐.
“너, 너는 누구냐! 어찌 본교와 유사한 보법을 쓰는 것이냐!”
하지만 노달 역시 다른 이유로 충격을 받은 모양새였다.
흑객에게 이한이 아마도 본교 출신인 것 같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다.
하지만 믿지 않았다.
어느 단체에든 이단(異端)이 있고, 그건 마교에서도 일어났던 일이다.
소림의 파계승처럼, 편법으로 마공을 익히거나 교단을 나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자들이 분명 있어 왔으니까.
하지만 조금 전 천마가 쓴 보법을 보고 깨달았다.
저 보법은 틀림없이 정통에 가까웠다.
특히 12개의 잔영의 움직임은 본교의 실전된 보법인 ‘천마군림보’를 떠올리게 했다.
“알려 주면…….”
“……?”
“빨래할래?”
으득.
노달은 화가 머리끝까지 피어올랐다.
그리고 더는 대화를 포기하고 내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이제 더는 날뛰지 못할 것이다.”
스캉!
그는 자신의 애검인 귀류검(鬼柳劍)을 꺼냈다.
은은한 비취색을 뿜어내며, 검신의 처음과 끝에 기묘한 문양의 혈린(血鱗)이 새겨진 검이었다.
“진검 승부인가! 나도 이번에 구입 한 게 있다!”
철컥.
천마는 기다렸다는 듯, 잡화점에서 구매한 바스타드 소드를 드디어 꺼내 들었다.
‘바스타드 소드?’
노달은 눈쌀을 찌푸렸다.
삼류 무인들이 들고 다니는 평범한 아이템.
어떤 부가 기능도 없어 보이는 맨 검을, 그것도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았는지 검집 사이에 허연 천 같은 것이 딸려 나온 검을 들고 있었다.
“내 기필코 너는 죽인다!”
팟.
노달은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천마를 향해 질풍처럼 달려들었다.
쩌저정! 쩌엉!
두 개의 기류가 한 지점에서 머물다,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둘은 대여섯 번 맞부딪쳤고, 이후 속도전으로 전개되었다.
천마의 신형이 여러 명으로 불어나다 이내 한 명으로 줄어들고. 이번엔 상대방이 불어나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기공의 흔적들.
놀랍게도 검기가 아닌, 죄다 강기(罡氣) 다발이었다.
‘까다롭다. 상당히…….’
놀랍게도 천마는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상대가 압도적인 내공으로 밀어붙이는 탓에, 무턱대고 막거나, 맞부딪히는 걸 최대한 피하고 있었다.
‘뒤를 잡는다.’
상대의 일정한 형태를 지켜보던 천마의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처음부터 과할 정도로 보법과 신법, 초식들을 연거푸 펼쳐내고 있었다.
극마라는 절대적인 믿음에서 생긴 자만심 때문이리라.
그리고 상대가 수세에 몰린 모습을 보면 그 자만심이 결국 일시적인 틈을 만들 터.
천마는 그것을 노릴 예정이었다.
“하하핫! 으하하하핫!”
상대가 위축됨을 느낀 노달은 더욱 신이 났다.
그냥 이미 승리에 취해 있었다.
상대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것도 그에게는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가히 전장의 악귀, 나찰수(羅刹守)란 별호가 왜 붙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쩌어엉! 쩌어어엉!
단 반 호흡 만에 강기 십수 다발을 상대를 향해 미친 듯이 뻗어 냈다.
쩌저정! 쩌정!
피하는 방향으로.
쩌쩡.
도약하는 지점으로.
쩡!
물러서는 지면으로 줄기차게 강기를 뿜어냈고, 상대가 그 속에서 달려들고 물러서기를 반복하다, 잠시 주춤거리는 그때.
쿠웅!
거짓말처럼 노달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가 있던 자리에는 천마가 주먹을 내지른 채 서 있었다.
“…허!”
“…우와!”
지켜보던 흑객과 소진.
흑객은 눈이 튀어나올 듯 경악했고, 소진은 그냥 감탄만 할 뿐이었다.
‘괜히 교주님을 의심한 것일지도…….’
흑객은 머리에 식은땀이 났다.
교주가 계속 펼치던 보법.
속도가 극도로 빨라, 움직임까지 놓칠 수 있는 보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사부는 그것마저 막아냈고, 교주는 거기서 한 번 더 응용했다.
분명 뒤로 물러서던 일반적인 움직임처럼 보였지만, 사실 눈속임이었고, 실질적으론 공간을 베듯 질풍처럼 달려가 장법을 휘갈긴 것이다.
거기다 알 수 없는 장법의 힘은, 사부를 무려 오 장 밖이나 날려버렸다.
“이게……. 뭐야?”
한데, 당황한 건 오히려 천마였다.
내공의 3할이 넘게 담긴 장법으로 복부를 후려쳤는데도, 상대가 아무렇지 않게 일어났다.
“크흑!”
저 멀리서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노달.
낭패를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큰 피해는 받지 않은 듯한 모습이다. 이건 말이 안 되었다.
제아무리 극마에 올라 호신강기가 발휘되었다 하더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하, 아이템 때문이군.”
천마는 노달의 찢어진 옷자락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처음 보는 금속, 그 가운데 투명한 막이 형성되어 있는 것을.
쉐도우 아머(Shadow Armor).
최상급 아이템으로, 통상의 갑옷의 방어력을 아득히 능가하지만, 그 실체는 물리적인 갑옷이 아닌 살아 있는 기생체다.
마나를 먹고 살아 착용한 자의 내공만 충분하다면, 내공을 소모할 뿐 절대로 내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아이템 10등급 이상으로 평가받으며 어두운 곳에 있으면 추가적으로 공격 무효화의 효과를 가진 아이템.
천마는 노달이 입고 있는 방어구가 범상치 않음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노오오오오옴!”
개구리처럼 발딱 일어선 노달은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배수진.
죽지 않으면 자신이 죽겠다는 신념이 배어 있었다.
콰아앙! 콰아아앙!
필시 벼락이 내리치는 듯한 소리가 주변을 뒤흔들었다.
빠른 것과는 조금 형태가 달랐다.
한쪽은 뿌려대고, 터뜨리고, 격발시켰고.
다른 한쪽은 피하고, 막아내고, 받아냄의 연속이었다.
아니, 나중에는 피하는 걸 보지도 않고 그저 정신 나간 사람처럼 휘둘러 대고 있었다.
쩌엉! 콰르릉!
쩌어엉! 쾅! 쾅! 쾅!
하늘에서 우레가 몇 번이고 내리치는 장면이 보이고, 그러기를 반복하던 어느 시점.
콰아아앙!
지면을 뒤흔들 정도의 굉음이 터져 나오기를 한 차례.
콰아아앙!
두 차례.
콰아아앙! 콰아아앙! 콰아아앙! 콰아아앙! 콰아아앙! 콰아아앙! 콰아아앙! 콰아아앙! 콰아아앙! 콰아아앙!
이번엔 십여 차례.
노달은 무인이라면 한 번도 구현해내기 어려운 마공을, 그것도 무려 강기를 다발로 엄청나게 찍어내고 있었다.
‘큽! 흐흡!’
그로 인해 천마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냥 단매에 처죽이면 모를까, 상대는 같은 천마신교의 일원이다.
특히 흑객의 사부라는 놈이다.
죽이지 않고 적당히 손을 봐줘야 했는데, 이놈이 반쯤 실성한 상태이다 보니 방어고 공격이고 뭐고,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이었다.
“크하하! 크하하하하!”
그럼에도 이 정신 나간 놈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는지도 모른 채, 강기 다발을 뻗어냈고.
쩌어어엉!
심지어 천마가 아닌 하늘로 쏟아내는 검무를 펼쳐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종국엔.
콰아아앙! 콰아아앙! 콰아아앙! 콰아--------앙!
거의 수십 차례의 강기 다발을 쏟아내는 기현상까지 보여 줬다.
“…….”
그때쯤에야 주변이 잠잠해졌다.
이후, 잠시간의 정적 속에서 천마와 세로로 검을 맞댄 노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까지.”
그는 몹시 후련해 보였다.
모든 걸 쏟아냈는지 치밀어 오르던 분노도 이제 다 식은 듯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생각 없이 뽑아내던 진신 내력이 이제 간당간당해 왔기 때문이다.
가공할 만한 내공도 수많은 강기 다발을 뽑아내고, 천마의 일격을 보호하는 데 전부 사용했는지, 낯빛은 파리하고 이마에서 식은땀까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해서 그는 바들바들 떨리는 검을 간신히 붙든 채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대충 짐작이 간다. 그대는 본교의 숨겨진 고수이니 이쯤에서 싸움을 그만두…….”
“누구 맘대로…….”
그런데 가로로 검을 맞댄 천마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옷은 불에 그을리며 타고 찢기고, 얼굴은 죄다 긁혀 성한 데가 없었다.
“누구 맘대로 그만둬?”
그 모습에 노달의 낯빛이 점차 굳어졌다.
“허허허, 노부가 너무 몰아붙였구려? 알겠소, 미안하오. 내 사과하리다. 좀 거친 면이…….”
“아니, 사과하지 마.”
머리부터 다리까지 타고 그을린 자국.
심지어 무엇보다 머리카락까지 죄다 타 버려 아주 상거지의 몰골이었다.
“아, 젊은이. 왜 이러시오. 이미 입교를 했으니 오늘부터 본 교 식구끼리 사이좋게 지내지…….”
“안 가. 방금 퇴소했어.”
“……!”
노달의 얼굴이 급변했다.
지금 청년의 눈알이, 사팔뜨기처럼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젊은이, 살려 주게. 아니, 고인. 노부의 무례를 용서하시게!”
그는 이제 살고 싶어졌다.
아니, 죽더라도 고통 없이 죽고 싶어졌다.
눈앞의 눈깔 뒤집힌 미친놈에게서.
“빨래 하겠습니… 컥!”
뻐억!
청년의 주먹이 자신의 죽통을 갈기는 순간, 그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쯤엔, 마나가 다 떨어져 쉐도우 아머도 발휘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