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클랜 (1)
서창 남이현에 위치한 휴거객잔(休居客殘)은 사람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경내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이기도 했지만, 오늘은 그런 이유만이 아니었다.
목에 붉은 스카프를 걸치고 나타난 사람들.
그들로 인해 평소에도 북적이던 객잔 안은 더욱 시끌시끌해졌다.
“저분들이신가?”
“보면 모르겠나? 붉은 스카프. 브레이커 클랜의 상징 아닌가.”
“내 살다 살다 12대 클랜은 처음 보네. 엄청나게 강하겠지?”
클랜(Clan).
오로지 ‘몬스터들의 사냥’을 목적으로 조직된 연합체를 가리킨다.
과거 무림이 정과 사, 마로 구분되었다면 지금은 학관, 클랜 연합, 각종 연맹으로 나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명실공히 그 세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특히 사람들이 언급한 브레이커는 공식 서열 12위.
클랜 연합에서 인정한 ‘100대 클랜’이라는 것은 몬스터 사냥의 전문가들이라는 증표이기도 했다.
객잔의 정중앙.
시끌시끌한 사람들의 시선을 느긋하게 받는 사내가 있었다.
확실히 그의 복장은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항마의 기운이 담겨 있다는 진은 갑옷과 오른손에 낀 그의 건틀렛(Gauntlet)은 쉽게 볼 수 없는 아이템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주변에 와이번 소굴이 있단 말이지?”
원홍(原洪)은 뭔가 갑갑한지 목을 긁어대며 말했다.
항상 브레이커 클랜 중 최전선에 서는 자로, 눈가엔 형형한 안광이 새어 나올 정도로 심후한 내력을 가지고 있었다.
“믿을 만한 정보통에게서 들은 얘기니 안심하라고.”
맞은편에 앉아, 자신의 가죽신의 끈을 묶어대는 중년인.
정후(正厚)라 불리는 그는 브레이커의 정보 역할을 담당하는 자였다.
가죽 갑옷을 입은 모습 외엔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았지만, 그를 마주하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녹안(綠眼).
보통 중원인들이 검은색 눈을 한 것과 달리, 이자는 기이하게도 동공이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그나저나 지켜보는 눈길 때문에 귀찮군. 괜히 큰 객잔에 왔어. 고객은 언제 온대?”
원홍이 투덜거리자, 정후는 피식 웃었다.
“천무학관의 남궁호? 그라면 곧 도착할 거야. 그리고 일표(一漂)는 즐기고 있는 것 같은데?”
자신들과 달리 이미 한쪽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고 있는 인물.
허리까지 오는 금발에 육 척의 키. 서글서글한 인상까지.
클랜 마스터라 불리는 자로, 이들 브레이커 클랜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물론 옆에 조용한 친구들은 별생각이 없는 것 같긴 하지만…….”
정후의 말에 원홍이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긴 칼을 어깨에 대고, 검신에 두 손을 포개어 조용히 앉아 있는 인물.
또 하나는 기다란 마법 봉을 피풍의에 가린 채 자리에 서 있었다.
무휘(武輝)와 서이(徐利)라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하나.
“넌 아까부터 계속 뭐 하는데?”
머리를 삐죽삐죽하게 산발한 청년이 좌측에 앉아 삐딱하게 생긴 안경을 이리저리 만져보고 있었다.
신비(神祕).
생김새는 여느 무림인과 다름없었다.
단지 손가락에 낀 반지와 기기묘묘하게 생긴 목걸이 같은 장신구가 눈에 띌 뿐.
“며칠 전 우라칸 던전 때 얻은 걸 확인해 보고 있지.”
“아, 오우거(Ogre) 잡았을 때 나왔던 그거?”
“맞아. 보면 볼수록 이 아이템은 참 재밌어서 말이지.”
신비는 그것을 벗었다 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가 손에 든 안경은 조금 특이했다.
한쪽의 알은 평범했지만, 다른 한쪽은 암염처럼 백색이었다.
“내공을 측정할 수 있는 아이템이라. 그거 이름이 뭐라고 했지?”
“여행자의 안경(Glass of traveller).”
“그렇군. 그래서 여기 쓸 만한 녀석은 있어?”
“보고 있긴 한데…….”
신비는 고개를 돌렸다.
그가 가리킨 곳은 창가 쪽에 다닥다닥 앉아 있는 12명의 무리들.
흔히 보이는 조복(朝服)의 무인들로, 특이한 점은 옷섶과 소매에 붉은 모양의 띠를 감고 있었다.
“저놈들, 홍매학관 아닌가?”
클랜 정보통인 정후가 끼어들며 말했다.
홍매학관(紅魅學官).
중원 전역에 있는 수십 개의 학관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명문 학관.
교두와 교관, 조교의 숫자는 정사의 모든 학관을 통들어 가장 많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거기다 천무학관과는 오랜 기간 경쟁 관계였다.
그 때문인지 홍매학관은 학관생들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위험한 임무를 맡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고 했다.
“내공은?”
원홍이 신비를 보며 물었다.
“최고가 35만 정도.”
“오, 35만도 있어?”
원홍이 제법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전 신비의 설명에 따르면 보통 1만의 수치는 내공으로 1 갑자.
10만은 2갑자라 했다.
물론 이는 오로지 내공의 양만 판별할 뿐, 그 사람이 가진 전투 경험이나 깨달음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그가 가진 내공. 즉 마나의 양을 알 수 있다는 건 상대의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 대략적인 판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눈앞의 홍매학관의 무리가 그 정도 마나를 가지고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차림새로 보아 분명 학관생일 텐데.
“4학년이겠지. 홍매학관은 사파의 천무학관이라 불리잖아. 사파 한정으로 한 손에 꼽는다며?”
“아깝구만. 학관생들만 아니면 우리 클랜으로 몇 명 영입하는 건데…….”
“아서라. 애초에 저들의 목적은 우리처럼 돈벌이가 아니잖아.”
뛰어난 용병이 클랜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학관생들은 학관의 교관이나 교두를 목표로 한다.
한쪽은 돈이고, 한쪽은 명예.
넓게 보면 비슷할지 모르나, 추구하는 방향은 다르다고 봐야 했다.
“그럼 이 객잔엔 저들이 최상인가 보군.”
원홍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곳 휴거객잔은 천고가 높고 계단식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어, 2층은 1층이 훤히 보일 정도로 높이 솟아 있었다.
그래서 내려다보기엔 좋았지만, 지금은 아쉽게도 특별하게 보이는 무인들은 없었다.
“…어?”
그때 갑자기 안경을 매만지는 신비.
원홍은 다시 물었다.
“왜? 뭔가 있어?”
신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계속 움직이는 수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띠리리릭.
10만, 20만, 30만.
눈앞에 나타나는 수치가 계속 변동되고 있었다.
그 숫자는 일정 부분을 넘어서자, 흐릿하게 껌뻑이고 있었다.
“뭔데? 엄청난 고수라도 있어?”
이번엔 정후가 물었다.
그의 입가에 웃음기가 맴도는 것이, 신비가 장난이라도 치는 것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런데.
“더는 안 올라가네. 수치 360만 이상.”
“…….”
듣고 있던, 원홍과 정후가 소리 없이 경악했다.
“뭐?!”
뿐만아니라, 옆자리에서 침묵을 지키던 무휘의 시선도 같이 움직였다.
360만.
3갑자를 넘어서는 수치다.
“야, 너 얼마 나오지?”
“내가 67만이던가… 무휘, 너 82만이지?”
“으음…….”
2갑자와 3갑자의 차이가 고작 1갑자이지만, 무게감은 완전히 다르다.
일반적으로 무인이 3갑자가 되려면, 반드시 화경의 경지를 뚫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템이나 내공심법에 따라, 실제보다 더 많은 수치를 잡아주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고장 났네.”
정후가 단정 짓듯 말했지만, 그럼에도 궁금했다.
“어느 놈인데?”
그의 말에 신비는 스윽, 한 곳을 가리켰다.
벽에 딱 붙은 탁자에 앉은 일행들.
노인과 사내 한 명, 젊은 청년 둘로 보이는 일행이었다.
“저 노인이야?”
노인을 바라보며 묻자 신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 믿을 수 없군. 대체 무슨 이유로 이 정도 고수가 여기에 발걸음을…….”
“하나가 아냐.”
“…어?”
원홍의 눈이 커졌다.
듣고 있던 정후도, 무휘도.
심지어 로브를 둘러쓴 서이의 시선도 그에게로 움직였다.
“두 명. 저 옆에 있는 청년도 함께다.”
“……!”
* * *
“클랜? 그게 무슨 말이지?”
쩝쩝.
오리 다리를 하나를 집어 든 천마가 말했다.
대부분의 시선이 중앙에 앉은 사람들에게 모이자, 그 연유를 궁금해 했다.
그리고 브레이커 클랜이라는 얘기에 재차 물은 것이다.
“그냥 문파라고 이해하면 쉬워. 차이점이 있다면 사승(師承)으로서 연결된 세력이 아닌, 단순 연합체이고 상황에 따라선 무림맹 같은 상명하복도 이뤄지는 곳이야.”
“사파놈들이 만드는 방(幇)이나 당(黨)과 비슷한 거 구만?”
“맞아, 공동의 이익을 위해 뭉친 곳이지.”
친절히 설명한 소진은 자연스레 앞과 옆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노달과 흑객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여기까지 따라온 것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였다.
조용히 다가와 ‘빨래는 누군가 해야 하는데, 내가 이 나이에 손에 물 묻히기엔 좀 그런데……’라든지.
‘빨래 때문에 굳이 피까지 봐야 하겠는가’ 하는 말을 흘리니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이들과 동행하여 겨우 목적지 부근까지 도착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 클랜이란 게 저놈들이란 말이지?”
천마의 질문엔 이번엔 흑객이 대답했다.
“예. 그중에서도 브레이커 클랜은 100대 클랜 소속입니다. 나름 상급 몬스터들만 노리는 사냥꾼들이지요”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천마는 시선을 대각으로 돌렸다.
그곳엔 꼿꼿한 자세로 앉아 음식을 음미하던 인물이 있었다.
“어이 대머리, 우리가 제대로 찾아온 것 맞아?”
빠직.
순간적으로 노달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대머리에게 대머리라 부르면 대부분의 대머리는 분노하는 법.
그러나 불타오르는 가슴과, 머리에 새겨진 고통스런 기억은 별개였다.
“하하하, 그렇습니다. 이 주변으로 활동했으니 천천히 탐문해 봐야 합니다.”
노달은 어느새 누구보다 밝은 얼굴로 천마의 질문에 화답했다.
“그럼 빨리 먹고 일어나지. 벌써 나흘 동안 수업을 빼먹었으니.”
“…예, 그러믄요.”
천마는 다시 탁자 위에 가득 차려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스쳐 가는 생각에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건 누가 사는 건가?”
“…….”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건.
뭔가 확신에 찬 노달의 목소리였다.
“그러게요. 누군가는 사지 않겠습니까. 아, 물론 천마 제자님을 제외하고요.”
그의 시선은 흑객으로 향해 있었다.
매우 강렬하고도, 위압적인 눈빛.
그 눈빛을 받은 흑객은 피식 웃었다.
“어딘가에 분명 있을 겁니다. 천마 제자님과 사부님을 제외하고도.”
그리고 흑객의 이어진 시선은 바로 소진이었다.
소진이 한숨을 내쉬며 품속을 뒤졌다.
“안 그래도 제가 사려고 했습니다. 여기…….”
처억.
흑객은 자연스럽게 잡았던 검 자루를 내려놓았다. 그때였다.
“도와주시오!”
쾅!
갑자기 문이 세차게 열리며 남자 하나가 다급하게 들어온 것이다.
그는 객잔 안 시선이 자신에게로 몰리자,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와이번이, 와이번이 떼를 지어 몰려왔소이다! 맹에 구조를 청하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하오!”
부러진 칼을 짚고 있는 마흔 중반의 남자의 옷에는 피가 흥건히 묻어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급습을 당한 모양이었다.
“이 근방의 경호 무사들은 뭘 하고? 그들이 있지 않은가!”
가까이에 있는 탁자의 한 사내가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경호대는 모두 뚫렸소이다.”
“거짓말하지 말게! 고작 와이번에게 그 많은 경호대가...”
“거짓말이 아니오! 평상시의 와이번과 달랐소이다! 크기도 훨씬 더 크고 움직임은 상상도 못 하게 빨랐소!”
“얼마나 방심을 했으면…….”
“방심한 게 아니오! 못 믿겠거든 직접 보시오! 벌써 관도 수비대의 3분의 2가 몰살당했고, 수비대장도 이미 죽어 버렸으니!”
“……!”
“……!”
그 말에 놀라움은 빠르게 번져갔다.
관도 수비대.
각 지방에 있는 수비대와 달리 이곳은 관도 수비대가 직접 상주한다.
특히 곡창지대인 남이현의 수비대장은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다고 알려진 인물.
그런 그가 와이번 떼에게 죽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몬스터 사냥이라면 우리가 제격이지.”
스스스슥.
자리에서 일어나는 브레이커 클랜.
그리고 다른 쪽에서도 무인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거, 힘들게 찾을 필요가 없겠는데?”
탁.
지켜보던 천마가 젓가락을 놓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우리도 가지.”
천마의 움직임에, 노달과 흑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진도 엉겁결에 그들을 따라 일어섰다.
“이게 총 얼마죠?”
그러고는 다시 뒤돌아 계산했다.
아무래도 빨래는 어쨌건, 그가 여기에서 할 일에는 돈 계산도 포함되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