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클랜 (2)
“방금 뭐라 하셨어요?”
리그웨더가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비단, 목소리만이 아니다.
평소 밝던 그녀의 얼굴에도 그늘이 진 것이다.
“말씀드린 대롭니다. 남이현에 수십 마리의 와이번과 함께 수백의 트롤과 오크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
리그웨더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다.
와이번 떼가 동시에 움직이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인데, 그와 함께 오크와 트롤이 함께 움직였다고 했다.
서로서로 다른 종족. 인간이 보기엔 이것도 저것도 몬스터일 뿐이지만, 트롤과 오크는 서로 다르다.
부족 성향이 강한 그들이 무슨 연유로 함께 움직인단 말인가. 심지어 와이번 떼까지.
“사실, 개인적으로는 보고 내용을 그대로 믿기가 힘듭니다.”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리그웨더를 보며 교무처장 구용천은 조심히 입을 열었다.
“보통 트롤과 오크들은 사냥 영역을 다른 몬스터들과 공유하지 않습니다. 여차하면 먹을 것이 없다고 동족도 잡아먹는 놈들입니다. 여기에 와이번은 식탐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 하지 않습니다. 이래서는 정보의 신빙성이…….”
“원래라면 그렇죠. 하지만 그들을 모두 부리는 자가 있다면?”
“부리는 자라면 어떤…….”
“검은 깃발의 오버로드 정도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검은… 설마, 쿠아토?!”
구용천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검은 깃발의 오버로드 쿠아토.
4대 수호장 아락취의 오른팔.
가장 주의해야 하는 몬스터 중 하나로 지목되어 있는 몬스터를 거론한 것이다.
위험 등급은 무려 14급.
이놈은 수많은 그린스킨들을 다룬다.
피부가 녹색인 몬스터. 총칭하여 그린스킨은 개개인의 능력은 강호 고수들에 비해 부족하다 할 수 있지만, 세력을 이루면 결코 무시 못 할 힘을 가진다.
여기에다 오버로드들의 친위대인 오우거.
단일 개체만으로도 9등급 이상이라 불리는 놈들이 합류한다면 이는 일개 개인이 아닌, 문파가 덤벼들어야 할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다.
“그럼 어서 빨리 조치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여나 학부생이 주변에 있다고 한다면…….”
“이미 늦었어요. ‘폭식’의 쿠아토. 그가 죽이려고 한다면 접촉한 이들 중 누구도 살아나지 못할 겁니다.”
“이런…….”
구용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쿠아토라면 분명 그럴 것이다.
웬만한 무인들은 수많은 오크와 트롤조차 어찌 감당할 수 없을진대, 그의 장기인 광폭화 마법까지 쓴다면.
거기다 그걸 와이번에게도 건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헌데 쿠아토가 왜 갑자기 등장한 걸까요? 대격변의 날까진 아직 4년이나 남았는데 말입니다.”
리치왕의 4대 수호장 아락취.
그리고 쿠아토 같이 그 수호장을 따르는 행동대장들은 여간해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10년 전 딱 한 번.
데스나이트의 수장, 칼베스가 종말을 예고할 때 등장한 것 빼고는.
“그러게요. 갑자기 나타난 이유를 알아보는 게 좋겠죠? 남이현 주변에 파견 나가 있는 조교가 있나요?”
학관에 대부분 머물러 있는 교두들과 달리 천무학관 조교들은 항시 주변에 포진하고 있었다.
명분상 몬스터 치안을 담당하기 위해서이지만, 정보를 물어오거나 민생치안을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심이견(深李堅). 포고(浦告)가 있습니다. 하지만 연락되는지는…….”
“아, 생각해 보니 적합한 사람이 있네요.”
“…예?”
드르륵.
리그웨더는 서랍을 열어 사람 머리만 한 수정 구슬을 꺼냈다.
이내 그걸 가볍게 슥 매만지며 눈을 감았다.
‘마법 통신구다!’
엄청난 거리에서도 의미를 전할 수 있는 마법 수정구.
이 수정구와 연결된 작은 수정구를 소지하면, 마법 수정구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전언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거의 천 리 밖에 떨어진 자에게도 전음을 보낼 수 있는 능력은, 오직 리그웨더 이 여인만이 지니고 있었다.
“미리 얘길 해 두었으니, 곧 움직일 겁니다. 경과는 나중에 듣기로 하죠.”
“누구에게 전달하신…….”
“뇌천벽 교두요.”
“아!”
구용천의 눈이 커졌다.
일단 사전에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감탄했다. 하지만 뒤이어 의혹이 피어올랐다.
왜 학관에 있어야 할 그가 그 주변에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리그웨더는 그의 반응을 이해했다.
“설명하자면 길어요. 일단은 그가 원인을 찾고 올 때까지 기다려 보죠. 진상을 파악해야 계획도 세울 수 있는 거니.”
“알겠습니다.”
구용천은 깊게 인사를 한 뒤 조용히 물러났다.
그 와중에도 리그웨더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버로드 쿠아토가 모습을 드러내다니…….’
그린스킨의 통솔자.
전면에 나서는 걸 극히 꺼리는 그가 나타났다는 것은 분명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쿠아토 배후에는 당연히 아락취가 있을 터.
모종의 계획 없이 수호장의 부대장쯤 되는 이가 행동하진 않을 것이다.
‘혹시 벌써 시작이 된 것이 아닐까.’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었다.
웨이브(Wave).
과거 인간 세상을 밀어낼 때 썼던 것으로, 압도적인 군세로 지형을 밀어 영역을 공고히 하는 것.
그건 그린스킨의 가장 무서움 점이었다.
‘아냐. 아직은 아닐 터.’
리그웨더는 입술을 깨물었다.
계산상으로 리치왕이 깨어나는 시간은 앞으로 4년 뒤.
절대로 그 전에 깨어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는 일이지만, 오직 리그웨더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대격변의 날, 리치왕이 입은 피해는 심대했다. 자칫하면 그가 가진 모든 마나를 잃어버릴 정도로.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봉인하여 완벽한 회복기를 가진 것이다. 여기에도 분명한 위험은 있었다.
절대 수의 제곱인 144년 안에 억지로 깨어난다면, 마나는 물론 정신까지 소멸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그저 사전준비 단계일 터.
“최대한 모아야 해. 우리 쪽 병력을…….”
그녀는 벽 한쪽을 툭 밀었다.
그러자 거대한 칠판과 함께 제조된 중원지도가 한눈에 펼쳐졌다.
특이하게도 지도의 위.
절반이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4년 내 현경의 고수를 더 양성해 내야 해. 적어도 열다섯은 되어야 비등하게 싸울 수 있어.”
그녀는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의 평화로운 풍경과 달리 그녀의 시선에는 무수히 많은 전투가 일어나고 있었다.
웨이브가 일어나고 이를 막아내는 중원의 수천, 수만의 무인들.
그리고 수호장과 대면하는 무림의 절대 고수들.
그 중심엔.
리그웨더, 그녀가 있었다.
* * *
-까아아악!
-크르르르!
한 편의 광란이었다.
하늘을 뒤덮은 와이번 무리와 군세를 이루며 전진하는 오크 및 트롤 때들.
천여 명으로 이루어진, 관도 수비대의 3분의 2가 그들로부터 잔혹한 죽임을 당했다.
“적들의 유인에 속지 마라!”
“먼저 달려들지 말라고!”
“대열 먼저! 대열을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환란 가운데서도 적들의 공세를 늦췄다는 사실이었다.
돌진하는 트롤과 오크의 발을 묶고, 때론 반격을 가하며 그들의 힘을 분산시켰다.
다만 하늘 위에서 공격해 오는 와이번 무리가 문제였다.
특히나 머리가 세 개나 달린 와이번.
그놈의 공격은 도저히 막기가 불가능했다.
“대장, 이대로 가다간 마지막 전선이 무너질 겁니다!”
3층 높이의 망루(望樓)에 서 있던 조삼(趙三)의 앞으로 중년인이 다가와 보고했다.
목과 가슴의 보호대인 경흉갑(頸胸甲)을 입고 견갑(肩甲)과 완갑(腕甲)을 찬, 그의 얼굴은 매우 상기되어 있었다.
“삼두룡(三頭龍)이라…….”
조삼의 시선이 하늘의 한 지점에 머물렀다.
세 개의 머리를 움직이며 날아다니는 와이번.
흡사 전설 속에 나오는 용의 형상을 한 마물은 방어진을 형성한 수비대의 대열을 매우 강렬하게 무너뜨리고 있었다.
“저놈을 잡을 방법이 없는 건가…….”
저건 지금까지 알려진 일반적인 와이번이 아니었다.
불을 뿜어내며, 몸통도 보통의 와이번 서너 배쯤 되었다.
적어도 상위 몬스터 중에도 포식자에 위치한 놈일 터.
최소 위험 등급 8급 이상의 위험도였다.
“저 와이번은 움직임이 너무 날쌥니다. 평소에는 닿을 수 없는 높이로 날면서 몸을 피하는 데다, 오직 불을 뿜어낼 때만 지상 주변으로 내려옵니다. 모두 다 떼죽음을 당하기 전에 철수하시는 것이…….”
“그냥 갈 순 없다!”
조삼은 강하게 거부했다.
“저기 뒤에 마을이 안 보이느냐? 이곳을 버리면 바로 뒤, 적어도 수천 명의 보금자리가 없어질 것이다. 특히나 여긴 곡창지대. 곧 곡식을 수확해야 하는 상황에서 수만 명이 먹을 양식을 저들에게 뺏길 순 없다!”
“하지만 싸울 수도 없습니다. 필시 이대로라면 곡식을 모두 뺏기는 건 물론이고, 전부 전멸당하고 말 겁니다!”
“칫.”
조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절대로 내어줄 수 없는 전선이지만, 압도적인 공세 앞에서 그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미 일류고수들은 전멸된 상태였다. 그 안에는 전(前) 관도 수비대장도 있었다.
하지만 세가 불리하다고 해서 일단 한번 전선을 물리게 되면 끝장이다.
여기서 놈들을 막아 내지 못하면,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할 테고, 이제 막 수확 중인 논과 밭은 짓밟힐 터.
설령 후에 다시 이곳을 도모한다 해도, 그때는 늦다.
곡창지대 남이현이 폐허가 되면, 사천 전역이 기근에 시달릴 터. 무인이고 일반인이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나올 것이다.
“피하라고! 거기 있으면 안 된다고!”
“으아악!”
대열은 계속 밀리고 있었다.
포악한 트롤과 오크들은 죽는 걸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들고.
와이번은 진형을 무너뜨리기 위해 끊임없이 공격해 들어왔다.
‘내가 나서야…….’
조삼은 결심한 듯, 검 자루를 향해 손을 가져갔다.
그때였다.
“보고드립니다!”
때마침 망루로 무인 하나가 다가오며 부복했다.
“무슨 일이냐?”
“마침 도움을 구하러 간 경비원 하나가 돌아왔습니다. 그의 말론 객잔에서 머무르던 무인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이 길로 곧장 달려왔다고.”
“…누가 있더냐?”
조삼은 약간은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혹시나 맹이나, 다른 학관에서 지원군이 온 건가 하고.
“정황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도움을 주신다고…….”
“되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곳 남이현에 있는 객잔에 들르는 무인들은 많지 않다.
대부분이 장사치들, 혹은 여독을 풀기 위해 쉬는 도부꾼 정도.
정말 뛰어난 고수들도 나타나긴 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병력을 제4선으로 물려라. 거기서 결정짓겠다.”
조삼은 마지막 전의를 불살랐다.
그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늦긴 했지만, 일단 무림맹에 전갈을 보냈다.
그러니 혹여 그들이 빠르게 결단을 내려 고수들을 급파해 준다면.
실로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다른 방법도 없었다. 그저 버티면서 일말의 희망을 걸어 볼 수밖에.
* * *
“이럴 수가…….”
소진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진정시켰다.
끝도 없이 몰려드는 몬스터들.
흡사 광기를 보는 듯한, 저들의 대규모 공격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흑객 역시 당황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간 많은 경험을 해 본 그로서도 이토록 많은 오크와 트롤 군단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특히 하늘에서 불을 뿜어 대는 와이번은 상위 포식자.
놈에게는 오크도 트롤도 먹잇감이다.
그런 와이번이 이들과 같이 행동하는 장면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거,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군요.”
하지만, 과연 극마 고수인 노달.
그는 그들과는 달리 너무도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신음과 괴성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노달은 너무도 여유롭게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여기까진 그래도 소진과 흑객이 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극마 고수에 오른 노달이기에 이런 상황 자체도 그다지 놀라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옆에 한 놈은 달랐다.
“갑자기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도 그가 던지는 질문의 수준은 범인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저런 놈들을 죽이면, 괜찮은 아이템이 나오는 것 맞지?”
“…….”
“…….”
귀를 의심하는 소진과 어이없어하는 흑객.
하지만 노달이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간혹 떨어지긴 할 겝니다. 특히 저놈.”
그는 불꽃을 뿜어내던 머리 세 개가 달린 와이번을 가리켰다.
“저걸 처리하면 꽤 좋은 결과가 있지 않겠습니까?”
“과연.”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도 천연덕스러운 대화라, 오히려 흑객과 소진이 자신들이 이상하다 여길 정도였다.
“혹 잡을 생각이십니까?”
흑객의 물음에 천마는 잠시 침묵했다.
곧장 달려갈 것만 같던 천마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한쪽을 가리키며 노달을 향해 물었다.
“빨래, 네 생각은 어떠냐?”
“당연히 나서지 않는 게 맞을 듯합니다. 저기 저걸 보면.”
흑객과 소진, 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이 힐끗 보던 시야의 끝, 멀찍이 떨어진 곳에는 희미하게 보이는 나무 몇 그루만 있을 뿐이었다.
‘저게 왜?’
둘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흑객이 내공을 통해 안력을 돋우어 봤지만 결국 그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
“사부님, 누가 있습니까?”
“쯧쯧, 너는 저자가 안 보이느냐?”
그러자 노달은 한심하다는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가 가리킨 곳은 수백 장이나 떨어진 곳이었으니까.
“이놈들의 두목이 있는 것 같다.”
“예?”
흑객의 반문에 눈을 다시 한번 찌푸린 노달이 나직이 말을 이었다.
“저곳에 엄청난 놈이 있다. 최소가 오크로드. 어쩌면 오버로드일 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