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기습 공격 (2)
스으윽.
치렁치렁한 로브 아래로 완드(Wand)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손으로 쓰는 스태프(Staff)가 아닌, 한 손으로 쓰는 짧은 마법 봉이다.
“후우…….”
서이는 5서클 마법사로 활동한 지 6년이 넘었다.
그냥저냥 서클만 겨우 만든 반쪽짜리 마법사가 아니다.
마탑(魔塔)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진짜배기 마법사였다.
쿵! 쿵! 쿵! 쿵!
그렇기에 십여 미터 앞까지 다가온, 거대한 군세.
보기만 해도 압도적인 위용의 몬스터 군단 앞에서도 그녀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41, 65, 88, 102…….’
주눅 들기는커녕, 기계적으로 적을 눈에 담았다. 광범위하게 퍼진 몬스터들을 하나하나 명확하게 인식했다.
그리고 마법 봉을 휘둘렀다.
“어스퀘이크.”
비잇.
끝이 수정으로 마감된 마법 봉이 수차례 빛을 발하며 허공에 빛나는 선을 그었다.
대지가 움찔, 하더니 몸을 떨어 댔다.
-구구구구구.
백 장 너비의 지면에 파문이 일어났다.
좌우로 흔들리고, 위아래로 흔들리더니, 드문드문 바닥이 꺼졌다.
대지에 짙고 긴 금이 그어졌다. 그리고 흥분한 말의 안장처럼, 격하게 튀어 올랐다.
드드드드드득!
“쿠어어어어!”
“피해라! 취이익!”
움직이기는커녕,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인위적인 지진. 이 정도로 꺼지고 들썩이는 진동을 경험해 보지 못한 오크와 트롤들이 공황에 빠졌다.
커어어어어---.
불운한 몇몇은 무너진 지반 안으로 떨어졌다.
여기저기서 피가 튀고, 극도의 혼란과 비명이 일었다.
단 한 수에 적 진형을 괴멸시켜 놓은 서이는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아직은 아냐.’
어스퀘이크는 기본적으로 살상 마법이 아니다.
적 진형을 무너뜨리고 혼돈으로 빠뜨리지만, 그게 바로 직접적인 피해로 이어지진 않는다.
애초에 광역 마법 중에서 실질적 피해를 주는 마법은 몇 되지 않는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땅을 뒹구는 오크와 트롤들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어떻게든 적응하는 거다.
“쓰읍.”
그녀는 빠르게 마법을 중단했다.
대지의 흔들림이 멎자, 중심을 못 잡고 기어 오던 오크와 트롤들이 일어섰다. 자세를 가다듬은 놈들이 거칠게 숨을 내쉬며 도끼를 부여잡았다.
-쿠에에에엑.
그러고선 미친 듯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일부는, 마법의 주체인 서이를 알아차리고 괴성을 지르며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접근해 오는 적을 향해, 그녀는 마력을 모은 두 손을 내밀었다.
지금 캐스팅하는 마법은 어스퀘이크보다 더욱 방대한 마력이 필요하다. 그러니 시간이 더 필요했다.
20미터. 15미터. 10미터.
수십 마리의 오크와 트롤이 거대한 망치를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서이 뒤에 있던 무휘가 앞으로 나서려던 순간,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입이 열렸다.
“파이어 월!”
촤아아악!
딱 한 발짝 앞에서부터 화염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 화염은 쭉쭉 앞으로 뻗어 나가, 말 그대로 거대한 불의 장벽을 이루었다.
화르륵! 타다닥!
불의 장벽은 맹렬한 기세로 타올라, 달려들던 몬스터들을 구워 버렸다.
크에에에엑! 캬아아아악!
“우와…….”
무휘가 감탄을 내뱉었다.
화염에는 마력이 섞여 있었다.
데여서 화상을 입는 정도가 아니라, 몸에 닿기만 하면 엉겨 붙어서 통째로 감싸 버리는 집요한 불꽃의 벽.
분명 5클래스인데, 위력만 놓고 보면 6클래스 못지않았다.
“더 빨라졌네. 이 정도면, 뭐. 내가 할 게 없겠는데?”
마법사는 근거리전이 약하다.
마법사를 상대할 때는 거리와 시간을 빼앗으면 손쉽게 이긴다.
하지만 그것도 마법사 나름.
서이처럼 광역 마법으로 적을 느리게 만들고, 파이어 월과 같은 공방 일체의 광역 마법을 연달아 쓰면, 어설픈 전사는 수백이 달려들어도 잡아 낼 수 없다. 지금처럼.
쾌애애애액!
고위급 마법을 연달아서 펼치니 마나가 걱정되기는 한데… 덕분에 시간은 확실히 벌고 있었다.
-상황은 순조로워.
신비의 텔레파시가 전해졌다.
일표와 원홍, 정후가 플라이 마법으로 와이번 떼를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고.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전장에 이변이 일어났다.
-꾸에에엑!
멀리서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 그와 함께 불의 장벽에 몬스터들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크와악! 콰아아악!
등불에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불에 덤벼들고 타오른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타 죽는 몬스터들.
그리고 점점 그 숫자가 늘어났다.
처음에는 빈약해 보이는 체구의 작은 오크나 트롤들이 몸을 던지더니, 점점 덩치가 크고 심지어 갑옷으로 무장한 놈들이 뛰어들었다.
화르르륵! 치이이익!
그 숫자가 수십을, 백을, 이백을 넘어가자 불의 장벽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아무리 부나방이라 해도 수십 수백 수천에 달하게 되면, 등불도 꺼지게 마련.
-소모전 양상이야. 조금 전에 그거, 지휘력 있는 놈의 워 크라이(War Cry)였던 거 같아.
신비의 텔레파시가 무휘의 귀에 꽂혔다.
“와, 이런 무식한 새끼들…….”
치지직! 치지지직!
오크와 트롤이 불에 타들어 가며 길을 만들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계속 죽어 가며, 시체를 발판 삼아 화염의 벽을 뚫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몬스터이기에 가능한 무식한 작전이었다.
크아아아!
심지어 마법 내성이라도 있는지, 별 피해 없이 뚫고 나온 놈들도 있었다. 물론 그에 대한 대비는 되어 있었다.
“하압!”
쇄애애액!
쇄애애액!
무휘의 검이 그들의 목을 날려 버린 것이다.
한 마리씩, 한 마리씩, 다가오는 몬스터들은 이미 파이어 월에 피해를 받아 움직임이 둔했다.
그리고 검술의 달인인 무휘에게 그런 놈들은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투투툭. 치이이익!
문제는 그 숫자였다.
처음에는 한두 마리만 겨우 불꽃을 넘어왔지만, 나중에는 너댓 마리가 넘어왔다. 그다음에는 두 자리 수가 넘어오기 시작했다.
-퀘에에엑! 취이이익!
“이런.”
무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쇄애액! 패애애액!
그의 검과 신형이 점차 빨라졌다.
한 동작, 한 동작을 취할 때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오크들과 트롤들의 목을 가차 없이 베었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어, 점점… 이것들이 정예인가 본데?”
화염을 뚫고 달려오는 오크와 트롤은, 덩치가 처음 것들의 근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손맛이 달라졌다.
베어 냈는데 아슬아슬하게 피해 내고, 분명 찔렀는데, 급소를 피했는지 다시 일어나는 놈도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신비의 다급한 텔레파시가 귀에 꽂혔다.
-서이, 무휘. 조심해. 와이번이 붙는다.
까아아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날아드는 와이번.
유인조를 쫓아가던 무리의 일부가 몰리고 있었다. 높이는 대략 20미터. 검이 닿을 수 없는 거리다.
“쳇, 서이. 이제 물러서자.”
“안 돼.”
무휘의 말에 서이는 즉각 고개를 내저었다.
싸움에서 기세는 대단히 중요하다. 기껏 유지하고 있는 마법을 거두면, 놈들은 사기가 크게 오를 터.
드디어 이긴다는 생각. 승리감과 격한 흥분은, 몬스터들을 더 흉포하게 만들 터였다.
자신들이 몸을 빼고 나면 와이번을 유인했던 이들, 유인조가 완전히 고립된다.
아무리 클랜장이라 하더라도 위기에 처할 수 있었다.
“제기랄!”
무휘는 욕을 내뱉었다. 그의 눈은 목을 부풀리고 있는 허공의 와이번을 향해 있었다.
화아아아악.
놈이 기어코 불길을 뿜어냈다. 그 불길을 향해 무휘가 검을 휘둘렀다.
사각. 파삭!
날아들던 화염은 곧 허공에서 반으로 잘리고, 맥없이 꺼졌다.
-무휘! 조심해!
“젠장…….”
하지만 그 대가는 비쌌다.
검기로 와이번의 화염을 파훼하느라 몇 호흡을 놓쳤고, 덕분에 수십의 트롤과 오크에게 둘러싸인 무휘.
하나하나는 상대도 되지 않는 놈들이었지만, 죽여도 죽여도 계속 달려드는 몬스터는, 역량 차를 무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금 무리를 해야겠는데.”
서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혼잣말을 했다.
-뭘 쓰려고?
“플레임 필드.”
-안 돼. 서이, 너무 위험해.
신비가 텔레파시로 제지했다.
아무리 서이가 베테랑 마법사라 해도 불타는 대지. 플레임 필드(Flame Field)는 본래 6서클의 광역 마법.
이미 고위급 마법을 연속해서 쓴 서이가, 본신의 능력 이상의 고위 마법을 쓰는 것은 위험성이 크다.
-자칫 마나 폭주로 이어지면 손도 못 쓰고 당할 수 있어. 우선은 시간을 끌고 물러선 다음에……?
그때였다.
신비의 텔레파시에 의아한 기색이 서렸다.
“이쯤에서 돌파하면 되려나…….”
사방이 죄다 죽고 죽이는 심각한 분위기에, 갑자기 뜬금없이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
서이의 눈이 그 방향으로 돌아갔다. 왠지 모르게 낯익은 청년이었다.
아는 사람은 아닌데, 어디서 봤더라? 그렇게 생각하는 서이에게, 신비의 경악에 찬 텔레파시가 꽂혔다.
-그때 그 녀석이야! 내공 수치 수백만의 괴물!
“……!”
듣고 보니 기억났다. 객잔 안에서 보았던 인물. 노인과 같이 있던 네 명의 일행 중 하나.
그런데 이자가 왜 뜬금없이 여길 온 것일까.
“자, 그럼.”
고개를 까닥이며 몸을 풀던 청년.
그는 서이를 한 번 씨익 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가 볼까.”
* * *
천마는 전세의 한가운데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지반이 흔들리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득!
‘누구지?’
한 오크의 머리를 밟고 선 그는 전장의 맨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싸우고 있는 이들의 인상착의를 파악했다.
‘아. 그 클랜이란 놈들이군.’
쿠르르르릉!
광역 마법 어스퀘이크.
지반을 뒤흔들어 적의 발을 묶는 것.
수업 시간에 배운 적은 있지만, 직접 보니 상당히 놀라웠다. 무인이 이 정도의 위력을 내기 위해선 최소 극마는 넘어야 할 터인데 마법은 그걸 손쉽게 펼쳐 냈다.
‘상당히 효율적인데?’
“파이어 월!”
그게 다가 아니었다.
파이어 월. 공방 일체의 광역 화염 마법.
마력이 깃든 화염의 벽은 놀라웠다. 달려드는 것들을 모조리 집어삼키고, 뒤에서 달려드는 몬스터들까지 용광로처럼 녹여 버리고 있었다.
천마는 감탄했다. 제대로 된 마법사가 어떤 힘을 낼 수 있는지 처음으로 목도한 것이다.
“멋진데… 그런데 오래는 못 가겠군.”
위력이 강하긴 한데, 들어가는 마나가 너무 많다. 저 마법사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의 마법을 계속해서 펼쳐 낼 수 없을 터.
타닥! 챙! 크아악!
장벽의 틈을 막고 있는 사람은 둘이었다.
하나는 마법사. 한 손에 마법 봉을 든 여인이었는데, 그녀가 화염의 벽을 유지하는 모양이었다.
또 하나는 무사. 검을 휘두르는 그의 주변에는, 오크와 트롤 수십 마리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아마도 몬스터 특유의 저돌적인 돌진으로 화염 벽이 뚫리는 중일 터.
“자, 가 볼까.”
바스타드 소드를 든 천마는 그들에게 한 번 미소를 보내 준 뒤, 전장을 향해 다시금 달려 나갔다.
팟.
오크와 트롤들이 잔뜩 밀집된 곳으로 달려들자, 놈들이 곧장 반응했다.
츄유육! 취이이익!
좁은 공간으로 이동한 천마에게 도끼 십수 개가 동시에 날아들었다.
카카캉!
그 공격을 거대한 검신으로 한 번에 막은 뒤.
“읏짜!”
힘으로 들어 올리며, 동시에 검을 잡고 원형으로 한 바퀴 돌렸다.
“쿠에에에엑!”
지근거리에 있던 오크 목이 여섯 개가 떨어져 나갔고, 검신에 맺힌 검기로, 뒤쪽에 있던 열 이상의 목이 떨어졌다.
그러자 즉각 몸을 움직여 대열의 구멍을 채우는 몬스터들.
“호오, 이놈들. 책에서 보던 대로 전의를 상실하지 않는구만.”
천마는 약간 놀라워했다.
분명 눈앞에서 학살에 가까운 무위를 보았음에도, 놈들에겐 후퇴가 없었다.
“그럼 뭐, 겁먹을 때까지 쳐죽여 보자고.”
그리고 천마는 그 점이 좋았다.
불굴의 투지가 일면 일수록, 그의 전투 본능을 더욱 끌어내니까.
패애애액! 쇄애액! 팩!
-취이이익! 인간! 취이이익! 막아!
그때부터였다.
천마의 무용이 미친 듯이 발휘되었다.
피이익! 슈슈슉!
도끼가 날아오고, 긴 창이 찔러 오고. 오크고 트롤이고 모든 그린 스킨들이 협력해서 적을 죽이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
크워어어!
무기가 다가 아니었다. 질량의 공격. 몸으로 밀어붙여 상대를 눌러 죽이려는 전법도 시도했다.
패애액. 푸욱. 피이이익!
그런데 그때마다 천마의 대검은 사방을 활보하고 다녔다.
틈이 있으면 노리고, 틈이 없으면 만들었다. 공간의 좁고, 넓음은 문제가 아니었다.
피할 수 없는 공격이나,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을 파훼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호흡.’
천마의 머릿속에 수십 개의 싸움 형태가 그려지고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 옛날,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기 전. 익혔던 수련법.
적의 능력을 예상하고, 싸움의 투로를 읽는 싸움 방식을 몸에 익혀 나가는 것이다.
‘그래, 이 방식이…….’
천마의 눈에 들어오는 시야가 점점 넓어짐에 따라, 그의 사고 역시 확장되기 시작했다.
탈마의 기준이 되었던 싸움법.
이것을 잠깐이나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지이이이이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검의 공명. 극마에 오른 그에게 또 다른 차원의 경지가 넓혀지려 한다는 신호였다.
주춤! 터턱!
‘어?’
그리고 그때, 갑자기 달려들지 않는 몬스터들.
한참 흥이 올랐던 천마가 의아한 시선으로 고개를 들자.
-우어어어어어!
귀를 찢는 괴성이 울렸다.
초록빛 오크와 트롤. 놈들의 대열이 벌어지고, 그리고 그 틈으로 걸어 나오는 한 몬스터.
-우어어어어!
육상 몬스터의 제왕이라 불린다는 오거(Orge)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