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기습 공격 (4)
스으으윽.
이제야 확실히 보이기 시작한다.
상대의 움직임도, 반응도. 힘의 측량까지.
이제 와서 짐작하건대, 오거의 공격에는 ‘권능’이란 것이 스며든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이 몬스터의 힘은 상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저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뿐인데, 그 위력은 극마에 오른 이가 전력으로 힘을 가했을 때에 준하는 공격이다.
“나름 잘 버텼다. 전 주인.”
온몸이 성한 상태가 아닌 천마가 일어섰다.
그의 온몸에는 피와 상처가 가득했다.
두근. 두근.
그리고 가슴은, 어느새 공포를 넘어서서 침착하게 고동하고 있었다.
약한 만큼, 죽음을 인식한 이한의 몸이 상황에 빠르게 적응하고 사선을 넘어 냉정을 찾은 것이다.
이것으로 겨우 준비가 끝났다.
“마지막으로 시험해 볼 게 남았군.”
천마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스윽.
오거가 휘두르는 통나무를 막아 낼 힘이 자신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하는지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저 녀석의 힘에 6성의 비혈장(飛血掌)으로 대응한다면, 손가락은 죄다 부서지고 어깨에 금이 갈 것이다.’
상대의 사고와 반응, 움직임까지 예상했다면 이제 남은 건 하나.
힘의 측량이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자신은 극마에 존재하는 세 가지의 벽 중 두 단계는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크오오오오!”
오거가 통나무를 내려치는 순간, 천마의 눈이 빛났다.
그는 피하는 대신, 손바닥을 펼쳐 올렸고.
쩌어어어엉.
그대로 바닥에 내리찍혔다.
흙먼지가 폭풍처럼 피어오르고, 전장의 바람이 먼지를 걷어 내자 천마의 모습이 드러났다.
땅바닥은 거미줄처럼 온통 금이 가 있었다. 그 가운데 종아리까지 땅에 박혀 있고, 오거의 통나무 몽둥이에 한쪽 팔을 박아 넣은 채로.
천마는 서 있었다.
“크… 크크크큭.”
그는 웃고 있었다. 팔에서는 피가 물처럼 흘러내리고, 어깨는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끔찍한 고통에 몸이 진저리를 침에도.
툭. 툭. 주르륵.
그의 팔은 여전히 하늘을 향해 있었다. 위태위태하긴 했지만 쓰러지지 않고 서 있었다.
쿠우우웅!
잡고 있는 통나무의 일부가 부서져 나갔지만, 오거는 다시 내리찍기 위해 통나무를 좀 더 강하게 쥐어 들었다.
그러느라 놈은 몰랐다.
그 짧은 사이.
천마의 몸속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던 것을.
-스으으으으.
그의 주변, 사방에서 기이한 기운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 기운은 곧 천마의 몸에 스며들었고, 곧이어 전신 365개의 세맥을 단번에 뚫어 버렸다.
우드드드득!
극마의 마지막 구간.
정점에 도달하며 생기는 변화였다.
뿌드득. 뚝. 뚝.
터억.
천마는 종아리까지 푹 파묻힌 땅을 딛고 걸어 나왔다.
그걸 본 오거가 재빨리 통나무를 내리쳤고, 그길로 놈은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퍼억!
천마의 손에 통나무 몽둥이의 반이 잘려 나갔고, 연거푸 펼친 그의 강력한 장공은 육상 몬스터의 제왕이라는 오거의 몸을 꿰뚫어 버렸다.
쿠웅. 우당탕!
“드디어 뚫었다.”
한숨과 함께 천마의 시야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5갑자의 내공이 빛으로 변해 사방을 밝혔다.
극마의 마지막 단계.
탈마의 바로 전 단계에 오르는 순간 일어나는 반응이었다.
* * *
“헉, 헉. 이 정도면 되긴 한 거 같은데…….”
와이번 몰이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클랜장인 일표의 기지가 빛을 발한 것이다.
정확히는 일표가 가진 아이템 덕분이었다.
헤르메스의 부츠. 복숭아뼈 자리에 작고 하얀 날개가 달린 이 아이템은 명실상부한 아티팩트(Artifact).
성능은 이동 속도 증가에 약간의 체중 감소, 그리고 하루 세 번, 짧은 시간 동안 플라이 마법을 쓸 수 있다.
이제까지 일표의 목숨을 구해 주고, 그의 전투력에 상당 부분을 담당하던 귀중한 부츠.
이 부츠 덕분에 일표와 나머지 두 사람은 공중을 선회해, 북쪽의 능선으로 와이번을 유인할 수 있었다.
“되긴 됐는데! 이젠 우리 목숨이 위험하다고!”
앞을 뚫던 원홍이 와이번의 떼를 보면서 외쳤다.
크아아아아!
위험 등급 6급의 와이번. 이놈들의 브레스는 자신들에게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한두 마리라면 분명 그랬다.
문제는 놈들이 수십 마리 단위로 달려들고 있고, 한낱 일반인 궁병조차 수십 명이 일제히 활을 쏴붙이면 어지간한 고수도 위험에 처한다는 것.
그리고 이 와이번들은, 한 마리 한 마리가 일반인 궁병 수백은 몰살시킬 만한 놈들이라는 거였다.
“크오오오오오!”
뒤에서 달려드는 와이번의 포효에 원홍의 눈이 빛났다.
“차압! 신룡파미!”
푸화악!
그의 주먹에서 권풍이 치솟아 올랐다. 백 블로. 원래라면 뒤로 휘두르는 손등 공격. 물리적으로 닿지 않는 이상 피해를 주지 못하는 공격인데.
캐애애액!
길게 J자를 이루며 솟구치는 권풍은 일반적인 권풍과는 달랐다. 허공에서 달려들던 와이번의 날개가 찢겨 나간 것이다.
신룡파미.
옛 강호에서는 개방의 적전기예였던 무공, 항룡십팔장. 원홍은 그중 하나를 극성으로 터득했다.
그 덕분에 부릴 수 있는 재주였다. 뒤에서 달려드는 놈들의 기습에 대해서만큼은, 확실한 카운터를 먹여 줄 수 있었다.
“이리로!”
미리 대피할 곳을 찾던 정후가 그들을 불렀다.
능선 아래, 골짜기처럼 거대한 암석으로 가려진 공간이 있었다.
동굴이라 하기에는 위가 너무 트여 있었지만, 그래도 들어오려면 좌우로 몸을 비집고 억지로 억지로 구겨 넣어야 들어올 수 있는 지형.
창졸간에 와이번이 공격하기도, 들어오기도 어려운 지형을 찾은 것이다.
자기 몫을 톡톡히 해냈다고 할 수 있었다.
“어서…….”
정후 다음으로 도착한 원홍이 고개를 돌려 대장을 찾았다. 그 순간.
콰아아아앙!
위쪽에서 생각지 못한 거대한 폭발이 터졌고, 거대한 먹구름이 피어오르며 주위를 뒤덮었다.
말없이 그 지점을 바라보던 원홍과 정후는 연기가 걷히면서 비척비척 달려오는 대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장! 여기!”
“큭!”
이들의 안내에 따라 은신처로 이동한 일표.
우당탕!
겨우 삼면이 막힌 공간에 들어오자 그는 벽에 쑤셔 박히듯이 하며, 그제야 숨을 돌렸다.
“괜찮아?”
클랜원 두 명이 그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자 헉헉대며 잠시 숨을 돌린 그가 콜록콜록 잔기침을 내뱉은 뒤.
“핫, 당연하지.”
오른손으로 느릿하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행동에 둘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조금 전에는 정말 아슬아슬했다.
일표는 미련할 정도로 마지막까지 와이번을 유인했고, 맹공을 피하며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 하루 세 번이라는 아티팩트의 사용 한계를 모두 썼고, 그것도 모자라 최후에는 경공술로 몬스터들의 공격을 따돌린 것이다.
끼아아악!
까아아아악!
“어우, 이쪽으론 들어오지 않는 것 같은데…….”
원홍이 입구로 슬쩍 나가 주변을 살폈다.
반쯤 동굴인 이 지형을 둘러싼 와이번들. 하지만 둘러싸기만 했을 뿐, 놈들은 들어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말이 동굴이 아닐 뿐, 위로는 비좁은 틈이라 몸을 겹쳐서 낑낑대야 겨우 들어올 수 있고, 거기에 각종 기암괴석이 솟아올라 방패 역할을 하고 있다.
제아무리 와이번이 저돌적인 몬스터라도, 이런 곳으로 먼저 들어오진 않을 터였다. 그쯤 되면 저돌적인 게 아니라 무식한 것이니까.
“아직 좋아하긴 일러. 이놈들. 아직 이동할 생각이 없어.”
정후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는 위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뭐, 적당히 시간 보내면 이동하겠지. 어차피 군단으로 쳐들어온 놈들 아냐?”
하지만 원홍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하긴, 그 말도 맞지.”
지금 당장 위협이 되는 와이번. 이놈들은 오크와 트롤의 군세와 함께 움직였다. 원래라면 터무니없는 일이며, 일어날 수 없는 일.
달리 말해 어떤 요인이 작용했고, 그 요인만 사라진다면 다시 원래대로 그린스킨들과 싸움을 할 터였다.
아니면 전략적으로 움직여서, 자신들을 두고 가 버리든지.
즉, 자신들은 여기서 잠깐 숨을 죽이다 밖으로 나가면 된다.
* * *
쾅!
두두두둑.
“뭐야?”
“아!”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천장이… 아니, 지반 전체가 흔들렸다.
적당히 간만 보다가 물러설 줄 알았던 와이번들이 머리로 석벽의 틈에 박치기를 해대기 시작한 것이다.
콰아앙!
그리고 두 번째 공격은 더욱 강했다.
콰아아아앙!
공간이 사방으로 흔들리며, 강한 굉음을 동반했다.
동시에 입구 쪽에서 불이 붙으며 시꺼먼 연기를 만들어 냈다.
“이놈들…….”
일표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가 알기로 와이번들은 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몬스터 중 누군가 지휘력을 발휘하는 놈이 있다는 것이다.
쿠쿵! 쿠쿵!
한두 마리면 모를까, 숫자만 이십여 마리. 몸을 사리지 않는 와이번들의 돌격은 서서히 위기를 불러오고 있었다.
화르르르륵!
또다시 검은 연기가 공간 사이로 들어왔다. 어떻게든 자신들을 끌어내려고 하는 의지가 느껴졌다.
체력이 바닥난 클랜원들의 눈빛이 점점 암울해졌다.
“어떡하지?”
“계속 있는 게 나을까?”
원홍과 정후는 대장에게 물었다.
와이번의 숫자가 워낙 많다.
괜히 몰래 빠져나가다가는 이들의 먹이가 될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체력이 바닥난 상황에서, 호흡하기 힘든 연기를 계속 마시며 이 안에 있는 것도 답은 아니었다.
“난처하게 됐군.”
요새가 오히려 고립이 되는 역효과를 불러오고 있었다.
일반적인 몬스터들이라면 계속 이런 식으로 집착하지 않을 테지만, 이놈들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혹여나 이 석벽이 무너진다면, 그들 셋은 곧바로 위기 상황에 처할 것이다.
“…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고민을 거듭하던 일표의 눈에 한 노인이 잡혔다.
얼추 보기엔 육십 대. 온 얼굴이 주름투성이에 머리가 벗겨진 그는 뒷짐을 쥔 채,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저 노인은…….’
객잔에서 봤던 인물.
여행자의 안경으로 파악한 수치로는 360만 이상의, 상당히 고강한 인물. 그가 이곳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대체 어떻게…….’
일표는 의아했다.
그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도 그렇고, 지금 상황도 그랬다.
석벽 밖은 와이번으로 꽉 차 있는 상황.
땅을 뚫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 많은 와이번을 뚫고 들어왔다는 말이 되는 거다.
“당신은 객잔에서…….”
“오, 우리 구면이었던가?”
그를 알아본 원홍의 말에 노달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일표가 신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여길 오셨소?”
아무리 생각해도 수많은 와이번들을 뚫고, 여기에 왔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재주가 있는 건지, 무슨 목적이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왜 왔겠나? 그대들에게 도움을 주러 온 것이지.”
노달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그 행동이 일표에겐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쿠쿠쿵! 콰르르릉! 퍽! 퍽!
천장에서 돌덩이가 떨어지며 바닥에 박하기 시작했다. 또한 입구에서부터 강한 열기와 연기가 또다시 들어왔다.
“윽!”
“제길!”
클랜원 셋은 난감해졌다.
여기에 계속 있다가 석벽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깔려 죽을 것이다.
거기다 연기와 열기가 계속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숨을 점점 쉴 수 없을 정도로 매캐한 연기는 그들을 더욱 여유가 없게 만들고 있었다.
“…도움을 주러 오셨다고 하셨소?”
결국 일표는 상대에게 물었다.
달리 방도가 없고, 노인의 능력은 여행자의 안경을 통해 어느 정도 유추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을 터.
“끄응, 그냥 빈손으로 하기엔 좀 그런데…….”
그런데 갑자기 도와주겠다는 노인의 태도가 바뀌었다.
뜬금없이 무릎을 굽혔다가 펴질 않나, 허리를 툭툭 치며 고개를 올리는 행동을 보인 것이다.
“왜 그러시는 거요?”
이해를 못 한 일표가 다시 물었다.
“그, 있지 않은가. 모든 원인에는 결과가 있는 법. 빈손으로는 좀 힘든 상황이니…….”
“…….”
“그러니까, 에헴.”
노달의 말에 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노인은 혀를 고개를 저었다.
“요즘 젊은이들이란……. 뭐든 해 달라고만 하는군. 내가 어릴 땐 누가 조금만 도와줘도 있는 것 없는 것 다 가져다주었다. 부족하면 귀금속을 팔아서라도 줬다고.”
“아, 그거였습니까.”
정후가 퍼뜩 그의 말뜻을 알아채고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보석이었는데, 빛깔이 영롱한 것이 마정석으로 보였다.
“토파즈입니다. 파이어볼 10회용 아이템인데… 드리겠습니다.”
“저도 이 아이템이 있습니다.”
그 모습에 원홍도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건 작은 지도 같은 거였다.
“이 작은 목걸이 위에 덧쓰인 것을 펼치기만 하면 사천 내 지도가 매우 자세히 그려집니다.”
“오. 이건 어디서 만들었는감?”
그리고 노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일표에게 향했다.
펄럭.
일표는 급히 바지춤을 풀어, 무릎 아래의 각반을 벗어서 내밀었다.
“마법 내성을 가진 체인 메일입니다. 제가 쓰던 것이긴 하나 그럭저럭 손보면 좋은 값을 받을 겁니다.”
“음, 크기가 좀… 착용하기 그렇지 않은가?”
“지금이야 좀 크지만, 귀속 의식을 치르면 사용자의 몸에 맞게 줄어듭니다.”
“흠흠, 그래그래.”
주섬주섬.
노인은 품에서 가죽으로 만든 배낭을 꺼낸 다음, 아이템들을 하나하나 넣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이들에겐 매우 중요한 보물을 다루는 듯 보였다.
“그래, 어느 정도를 원하는 건가?”
“…예?”
노달의 말에 이들은 재차 집중했다.
“한 마리인가. 아님. 완전히 다 제거하는 것인가.”
“허…….”
그 말에 정후가 나섰다.
“가급적 다 물리쳐 주시면…….”
“에잉, 그건 이런 걸로 안 돼… 어디 보자.”
노달이 부정적으로 손을 젓더니 뭔가 생각에 잠기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머리 셋 달린 와이번. 그놈만 잡아 주지. 그 정도면 되겠지?”
그리고 슬쩍 뒤돌아 입구를 보며 말했다.
이게 지금 말인가 방구인가. 터무니없는 소리에 일표 일행은 입을 다물었다.
“…….”
“어어, 걱정 마. 대가리만 잡으면 남은 와이번은 알아서 흩어질 거야. 원래 무리라는 것이 그렇지.”
도무지 대화가 되질 않았다.
혼자서 제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노달은 파박! 발을 박차 석벽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하늘 위에서 배회하는 놈. 지상에 내려와 우뚝 서서 노려보는 놈. 펄쩍펄쩍 뛰어서 날다가 다시 땅을 디디는 놈. 아주 제 세상 만난 듯 멋대로 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