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홍매학관 (1)
“이게 다 몇 마리지?”
석벽의 위로 올라온 노달이 짧게 감탄했다.
시야를 어지럽히는 와이번들.
“음, 저놈인가.”
노달은 여유롭게 주변을 살폈다.
거리 대략 50미터. 머리 셋 달린 와이번이 날갯짓을 하며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푸드덕. 푸드덕.
체구는 다른 놈들의 두 배가량. 머리만 이미 셋이 달렸으니, 보통 놈들보다 힘이고 체격이고 월등한 건 당연하다.
하지만 종의 한계는 아직 극복하지 못한 걸까.
“고놈 참 토실토실하군.”
체구는 크지만, 그만큼 후려 팰 면적도 넓어 보였다. 덩치가 커서 힘도 더 강해졌지만, 느려 터진 뚱뚱보를 보는 기분이랄까.
-끼아아아아아악!
때마침, 주위를 경계하던 와이번 무리 중의 하나가 소리쳤고.
화아아아악!- 화아아악-!
사방에서 엄청난 화염 덩어리가 그에게 쏟아졌다.
아마도 암벽 꼭대기에 인간이 당당히 서 있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콰콰콰앙!
불덩이가 연달아 날아와 폭발했다. 물론 노달은 그곳에 없었다.
피이이잇!
환영 하나를 남겨 두고 사라짐과 동시에, 그는 50미터 거리에 있는 머리 셋 달린 와이번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그륵!
하지만 삼두룡, 머리 셋 달린 와이번은 보통 와이번과 달랐다. 놈은 자신을 향해 질주해 들어오는 미상의 존재를 감지했는지, 곧장 허공으로 세차게 날아올랐다.
푸드드득!
“하압!”
그러나 그건, 보통의 적을 상대할 때의 대응 방법.
노달 같은 고수는 노렸던 목표가 갑자기 날아오른다고 해서 놓칠 리가 없었다.
파앗.
그는 크게 몸을 도약시켜, 허공에서 다시 허공을 밟는 허공답보를 펼쳐 냈다.
파파파팟.
공중으로 한참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방심하던 삼두룡은 곧바로 뭔가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다.
오싹!
아니나 다를까, 노달은 이미 와이번의 거대한 머리채 중 한쪽을 잡고 있었다.
“뒈져라, 날파리.”
콰아아아아앙!
손을 내미는 순간, 가공할 위력의 마공이 격발됐다.
천마폭(天魔爆).
장법으로 내지르는 순간 회전의 묘리를 넣어, 타격점 내부에 강렬한 소용돌이가 이는 마공.
이는 일종의 내가중수법이었다.
상대가 어떤 갑옷이나 비늘에 덮여 있든 말든, 안쪽에서 맹렬하게 일어나는 소용돌이가 살점을 찢어발기며 폭발하는 수법이었다.
-키아아아아악!
퍼엉!
이에 적중한 삼두룡의 머리 하나가 터져 버렸다. 놈은 뒤로 쭈욱 밀려 나가며 괴성을 질렀다,
“아아! 머리가 세 개였지…….”
아주 찰나, 노달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머리는 뭇 생물들의 공통적인 급소다.
심장이 터져도 몇 초는 더 움직일 수 있지만, 머리가 터지면 즉각 움직임이 멈춘다.
그래서 한 방 날린 뒤 끝났다는 생각에 무의식중에 멈춰 버렸다.
그 녀석의 머리 두 개를 남겨 놓은 채로.
쾅! 콰콰쾅! 콰콰콰쾅!
노달이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다시 놈을 노리려 하자, 인근 와이번 떼의 무차별적인 화염 공격이 시작되었다.
“훗. 훗. 훗.”
환영이 몇 번씩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더니, 이내 환영이 십여 개로 늘어났다.
얼핏 보기엔 천마가 사용하는 천마군림보와 유사했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었다.
천마유수행.
원전인 천마군림보를 제대로 복원하지 못해, 후대들이 적당히 손보고 끼워 맞춘 보법.
비록 원전만큼 수많은 분신이 나타나는 위력은 없었지만, 그 회피력과 빠름에 대해서는 제법 유사했다.
그리고 이 보법으로 경공술의 극의를 깨달은 노달에게, 와이번의 공격은 손끝만큼도 통하지 않았다.
-고오오오오
그사이 삼두룡, 아니, 머리 하나가 터져 나갔으니 이두룡이 된 와이번은 입가에 강력한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놈은 사방팔방을 활보하는 노달의 신형을 향해 강력한 불을 뿜어냈다.
콰콰콰콰콰!
파이어 블라스트.
3서클 마법인 파이어 볼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수많은 불덩어리가 화살비처럼 쏟아지는 공격이다.
삼두룡은 원래 세 머리로 세가지 방식의 화염 공격이 가능했다.
머리 셋 중에 하나는 강사(强射). 느리지만 강력한 일격으로 파이어 볼급의 위력을 낼 수 있었고, 다른 머리들은 각각 연사(連射), 속사(速射)가 가능했다.
그중 중앙의 머리, 강사를 쏘아 낼 수 있는 삼두룡의 머리 하나가 죽으면서 연사와 속사가 펼쳐진 것이다.
콰카카카카카아!
쏘아지는 불의 비는 위력적이었다.
하나하나는 2서클 마법 정도의 위력이었지만, 그 수가 수십에 달하니 거의 6서클 불의 비(Rain of Fire) 마법에 가까운 화력. 인근 지역이 초열지옥으로 변할 정도로 광범위했고 파괴적이었다.
“빠져나와. 빨리!”
“손잡아! 여기!”
“윽!”
심상치 않은 폭발과 충격에, 브레이커 클랜 마스터와 대원들은 급히 동굴 밖으로 빠져 나왔다.
쿠쿵! 콰쾅!
그리고 그들은 거대한 불길이 일어나는 능선을 목도했다.
“이거… 죽은 걸까?”
“아냐.”
정후가 걱정스럽게 묻자, 일표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시선은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움직이는 신형을 담고 있었다.
팟.
사방이 불바다인 땅 어디를 딛고, 공중에서 포횰히 나타난 노인. 그는 허리춤에 있는 검을 꺼내 들었고.
“하아아압!”
이내 그의 검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칼날이 되어 머리가 둘 남은 와이번에게 날아갔다.
촤아아아악!
“검강이라니…….”
그 칼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와이번의 남은 두 개의 머리를 그어 버렸다.
그리고 온통 불바다로 변한 지면으로 떨어져 내려오며 태연하게 자세를 잡은 노인.
그렇게 괴이한 자세를 잡은 그의 뒤로.
쿠우웅!
머리가 잘려 나가고 터진 삼두룡이 바닥에 떨어졌다.
“크… 손맛 좋고. 어떤가?”
노달은 클랜원들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그에 브레이커 클랜원들의 얼굴이 와지직 굳어 버렸고.
“허헐, 걱정 마시게. 나는 귀하들을 해칠 생각은 전혀 없으니. 그저 한 가지 내 생각을 말한다면…….”
“뒤! 뒤!”
“…위를 보라고!”
“어?”
그런데 아무래도 클랜원들이 놀란 이유는 전혀 달랐던 모양이었다.
쾅! 쾅! 콰아아앙!
아차 하는 순간, 화염 덩어리 십수 개가 떨어져 내렸다. 그와 함께 치솟는 불길로부터 2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노달이 나타났다.
“크으읍…….”
아무리 그라 해도, 이번엔 너무 방심한 탓이었을까.
얼굴 쪽에 약간의 화상이, 그리고 오른쪽 소매가 불길에 타고 있었다.
“이놈들 어떻게…….”
와락 표정이 구겨지는 노달.
-끼이아아아악!
-까아아아악!
격렬한 저항.
와이번들이 마치 죽일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분명히 눈앞에서 놈들의 수장을 처리했는데도, 이놈들은 도망은커녕, 멈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마치, 철천지원수를 대하는 것처럼 이리 달려들 것이라곤.
노달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 * *
“후우…….”
한편, 오거가 쓰러진 후 천마는 두 팔을 내려다보며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각의 순간.
주위의 자연의 기운이 몸속을 파고들 때, 그는 잘하면 탈마까지 바로 올라갈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통달의 벽을 뚫고 정점의 벽에 오른 순간, 경지의 상승은 막혀 버렸다.
아쉬웠다.
‘아직 대자연의 질서를 이해하기엔 어렵구나.’
대충 무슨 이유인지는 짐작이 갔다.
나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주위 대상을 이해하는 것. 이것까지는 깨달음으로 얻어 냈다.
하지만 주변의 자연 만물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바람의 흐름, 공기의 밀도, 자연의 변화 등등.
이는 과거에 올랐던 경지에 바로 오르지 못한 이유와도 같았다.
상단전의 개화.
여기에는 몸으로 체득하는 걸 넘어서, 만물을 이해하는 그 어떤 것이 더 필요했다.
“명상하면서 다스릴 시간이 필요해…….”
그래도 극마의 극까지는 도달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벽은 얇디얇은 계란의 껍질 정도.
범인들이라면 여기까지 올라서도 탈마에 이르기 위해서는 평생을 더 수련해야 하겠지만, 천마에겐 이미 한 번 지나갔던 길이다.
적당히 몸을 수습하고, 폐관수련 한 번 거치며 이번에 얻은 깨달음을 복기하다 보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내에 현경, 탈마의 초입에 발 정도는 걸칠 수 있을 터였다.
“그럼 뭐, 대충 이쯤에서 빠질… 응?”
그렇게 중얼거리던 천마의 시선이 주변으로 향했다.
멈칫. 멈칫.
주위에 있던 오크와 트롤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는 아무런 생각 없이 달려들던 놈들이, 지금은 자신을 보며 뭔가를 꺼려 하고 있었다.
‘뭐지?’
그 생경한 모습에 천마는 왠지 모를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크오오오오!”
때마침 그들의 중심에서 대장으로 보이는 오크 한 마리가 외쳤다.
“카아아아악!”
그리고 또다시, 트롤 쪽에서 창이 유독 긴 녀석이 외쳤다.
그리고.
우두두두두.
그들은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회군이 아닌, 조금 전 마법을 썼던 클랜원 쪽으로.
촤아악. 츠읏! 촤악! 책!
천마는 검을 들어 자신에게 달려들어 오는 오크들을 손쉽게 베었다.
‘뭐야?’
그러면서 조금 의아했다.
몬스터는 강자를 보면 피한다.
이 정도 보여 줬으면 알아서 물러가야 하거늘, 자신으로도 그렇고 저곳으로도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그냥 정찰이 아니었어?’
원래는 그린스킨들의 위력 정찰.
적당히 간만 보다가 만만해 보이면 작정하고 달려드는, 그런 움직임으로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지금 상황은 그게 아닌 것으로 보였다.
* * *
“대체 저 사람…….”
“저따위 싸움 방식이 있다니.”
천마의 무위를 본, 신비와 무휘는 그저 감탄의 연속이었다.
육상 몬스터의 제왕, 오거를 상대로 맞서서 힘으로 이겨 버리는 모습은 정말이지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저거 뭐야. 싸움 중에 환골탈태한 것 아닐까?”
서이가 말했다.
분명 다 죽어 가는 듯 보이던 청년의 몸에서 변화가 일었다. 오거와의 피 터지는 싸움 끝에 겨우 이긴 것.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이기고 나서 이전보다 더 성장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아니, 환골탈태는 화경의 경지에 올라야만 쓸 수 있어. 그리고 뼈와 살이 재구성되는 데에만 반나절이 걸리지. 그저 내공만 많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무휘가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오거를 쓰러뜨리는 건 놀랍긴 하지만, 저 남자의 실력이 화경이란 건 믿기 힘들었다.
그는 조금 전부터 여행자의 안경조차 신뢰하지 않았기에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뭐지?”
크오오오오!
카아아아악!
그때, 갑자기 군세 속에서 괴성을 지르는 오크와 트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몬스터들이 갑자기 엄청나게 날뛰기 시작하더니 이내.
“어? 온다.”
한 발 물러서 있는 그들 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일단 후퇴해!”
“잠깐만! 그랬다간!”
“클랜장과 대원들은…….”
무휘의 말에 신비가 다급히 외쳤다.
그들의 시야 속에 잡힌 저편의 능선 위에는 와이번들이 한데 모여 불을 쏘아 대고, 머리를 박아 대고 있었다.
보나마나 동료들이 고립된 상황으로 보였다.
“제길, 그럼 어떻게 해. 일단 뒤로 간 다음…….”
“내가 더 시간을 벌어 볼게.”
무휘의 말에 서이가 다시금 시동어를 읊기 시작했다.
아까의 위기 상황에서 한숨 돌린 덕에, 마나와 집중력에 약간의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때.
피이이애애앵!
맹렬한 바람 소리와 함께 거대한 검풍이 등 뒤에서 쏘아져 나왔다.
덕분에 지근거리까지 왔던 몬스터들 십여 마리가 일시에 몸에 구멍이 뚫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슈슈슈슈슉!
수십 개의 검기 다발들이 허공에 나타나, 화살처럼 쏟아져 내렸다.
크아악! 쿠어어억!
한 발 한 발이 초거대 발리스타를 쏘아 내는 급의 공격력.
주변에서 몰려들던 트롤과 오크는 거의 벌집이 되어 떼죽음을 당했다.
“참나. 갑자기 웬 오크, 트롤들이 떼로 들어온 거지?”
그들의 시선이 올라가자 그곳에선 어깨에 도를 걸친 중년인이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던 잘생긴, 그리고 매우 고집스러운 얼굴의 중년인이 답했다.
“그만큼 위험 신호라고 봐야지.”
그들은 천무학관의 뇌천벽과 제운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