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홍매학관 (2)
천무학관 학과장 리그웨더는 이번 일을 듣자마자 심상치 않게 여겼다.
같은 그린스킨이라 불리지만, 오크와 트롤은 서로 반목하는 편이다. 거기에 와이번까지 합세하다니?
이건 아무래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몬스터의 본능도 억누르는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존재가 출현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서로 물고 뜯고 싸워야 할 놈들이, 조직적으로 힘을 합쳐 협공을 하게 할 만큼.
뇌천벽 역시 사안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리그웨더에게서 말을 듣자마자 즉각 움직였다.
다만, 좀 짜증 나는 얼굴을 보는 게 배알이 뒤틀렸다.
“그런데 고고하신 검왕께서, 던전 토벌의 최전선에 안 가시고 왜 여기까지 오셨나?”
“학과장께서 호출하셨다.”
“무슨 소리야? 학과장께서 호출한 건 나인데?”
“생각이 바뀌셨나 보지. 당신 혼자선 무리라고.”
“뭐라?!”
뇌천벽은 발끈했지만, 제운비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너와 입씨름할 때가 아니다, 뇌 교두. 학과장께서 염려하시는 바가 사실이면, 우리 두 사람으로도 모자랄 수 있어.”
“…….”
뇌천벽은 오만상을 찌푸렸지만, 그 말에는 수긍했다.
폭식의 쿠아토. 원래 단순한 지휘관급 개체였다가 어떤 계기로 인해 오버로드로 변이한 놈.
놈의 위험성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알려져 있던 바다.
당시 화경의 고수들이 힘을 합쳐,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몬스터.
그때 분명 쓴맛을 보았을 텐데, 지금 다시 기어 나왔다는 건…….
나름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아마 놈 역시, 성장했거나 또 다른 진화를 겪었을 터.
“일단 이놈들 처리부터 하지. 내가 좌측을 맡을 테니 넌 우측을 맡아 줘.”
철컥.
검을 들고 나서는 제운비의 말에 뇌천벽이 인상을 썼다.
“하여간 오만방자하군. 내가 당신 부하로 보이나?”
“…쓸데없는 소리.”
뇌천벽의 비난에 싸늘해진 제운비의 표정.
하나 그는 아군끼리 기세 싸움이나 하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그저 기분 나쁘다는 듯 콧바람을 일으키며 검에 기를 주입했다.
“할 시간에 몬스터나 잡아!”
스르르릉!
아지랑이처럼 희끄무레한 기운이 피어올랐고, 이내 다시 사라지더니 더 선명한 흰 빛이 덧씌워졌다.
강기.
무학의 절대 경지라고 하는 검강을 펼치고 있던 것이다.
“취이익! 가라! 취이익!”
“끼끼기기기긱!”
좀 전에 동료들이 그렇게 죽는 모습을 보고도, 오크와 트롤 무리는 전의를 상실하지 않은 채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흥. 여전히 잘난 척은.”
제운비가 도발을 무시하자, 뇌천벽도 검에 기를 불어넣었다.
쉬이이잇.
그의 검에도 회색 광망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뇌천벽 역시 화경의 고수. 검강과 검풍을 잔뜩 일으켜, 바로 몬스터들의 군세를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 * *
쿠르릉! 콰르릉!
콰우우우우!
지축이 울리고 섬광이 폭발한다.
넓게 퍼져 나간 강기의 칼날이 수십 마리의 몬스터를 도륙하고, 힘을 다해 깜박깜박할 무렵에는 산산조각이 났다.
콰드드득! 키에에엑!
그 조각난 강기의 파편조차 몬스터의 목숨을 끊었다.
단 일격에 백 마리 가까운 몬스터를 잡아 내는 절대적인 위용.
“…저게 사람이야?”
“내 말이.”
이제껏 열심히 몬스터를 상대하던 브레이커 클랜원들은 맥이 빠진 얼굴이었다.
일격에 검기를 수십 다발 쏘아 내는 고수.
한 번 쏘아 낸 도풍을 유성추처럼 직선으로 뿜어낸 다음 옆으로 크게 돌려서 적을 후려치는 기예라니.
도무지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경지였다.
“그러니까… 천무학관의 제운비, 뇌천벽이지?”
“아마도.”
무휘가 한탄하듯 흘린 말에 신비가 냉랭하게 끄덕였다.
검왕 천무학관의 제운비.
사천의 도제란 칭호로 알려진, 천무학관의 체육학과 교두 뇌천벽.
천무학관을 대표하는 이들로, 무림맹 공식 천하 오십대고수 안에 드는 절대 고수들이다.
그리고 그중 제운비는 천하 삼십대고수 안에 들 거라고 공공연히 예상되는 인물이었다.
애초에 검왕(劍王)이라는 호칭은, 실력 없이 천무학관의 이름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아니, 그런데 여기는… 엄밀히 말하면, 천무학관의 관할 지역이 아니지 않나? 일단 와 줘서 일이 수월해지긴 했는데…….”
“맞아. 이 인근은 홍매학관… 왔군.”
끄덕.
여행자의 안경을 쓰고 있던 신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장의 한쪽 구석에서.
휘이이이잉.
폭은 작지만 높이가 엄청난 돌개바람이 일어나, 천천히 전장 한가운데로 이동하고 있었다.
“저건…….”
“7서클 광역 마법 토네이도. 그리고 3서클 윈드 커터인데… 멀티플 수식이군.”
무휘가 입을 벌릴 때, 서이가 간결하게 설명했다.
“둘, 아니, 세 마법을 조합한 마법이야. 최소 7서클 중급의 고위급 마법사가 등장했나 보네.”
무휘가 화경의 고수들을 보고 허탈해한 것처럼, 그녀 역시 꽤 허탈한 얼굴이었다.
“끝났네. 이거면.”
신비의 냉막한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 * *
고오오오오오오!
토네이도는 점차 크기를 키워 나갔다.
무시무시한 흡입력. 맹렬한 폭풍에 끌려 수많은 오크와 트롤들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드드득! 드드드득!
크와우우! 캬우울!
땅에 엎드리고 바닥을 붙잡고 했지만, 자연을 이용할 줄 아는 마법사의 마법이 그 정도로 넘어가질 리 없었다.
와드드득! 트드드득!
토네이도는 굼실굼실 이동하며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고, 그 이동 경로에 있던 대부분의 오크와 트롤들은 허공으로 솟구쳤다.
지지지지직!
뒤이어 토네이도의 머리 위에 수많은 하얀 초승달이 생겨났다.
윈드 커터. 3서클만 되어도 사용할 수 있는, 바람 칼날의 마법.
하지만 그 수가 무려… 수백이나 되었다.
수백의 칼날이, 토네이도에 끌려 들어가 잔뜩 뭉친 몬스터들에게.
쐐애애애액! 서걱! 서걱! 서걱!
그대로 날아가 피보라를 만들었다.
옅은 회색이던 토네이도의 기둥이 벌건 핏빛으로 물들어 버릴 정도로.
그리고 그러기를 한참.
투투툭. 투투툭. 투투투툭.
하늘에서 오크 ‘조각’들이 떨어졌다.
죄다 사지 육신이 잘려 나가거나, 토네이도가 일으킨 마법적 진공에 질식사한 놈들이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마법이란 정말…….”
적당히 거리를 둔 체육학과 교두 뇌천벽이 고개를 내저었다.
단 한 번의 캐스팅으로, 물경 천에 달하던 오크와 트롤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이제는 살아남은 오크와 트롤들의 숫자가 눈에 보일 정도.
사사사사사사삭!
미상의 존재가 신기루처럼 나타나 사라짐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가 움직임을 멈췄을 때.
남아 있던 오크와 트롤은 전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기껏 참전한 것이 무색하게, 수백의 몬스터들이 일시에 정리가 된 것이다.
“천무학관에서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그리고 그 정리를 해 버린 남자가 검을 들어 날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패액! 픽! 픽!
7척에 가까운 키에 서글서글한 얼굴의 검사.
“만나 뵈어 반갑소. 홍매학관 전투학과 천극태 교두.”
뇌천벽이 처억,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했다.
천극태라 불린 이는 무심하게 검을 든 채 물었다.
“천무학관에서 여기까지 무슨 일이냐고 물었소만.”
“아니…….”
뇌천벽은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천극태는 홍매학관의 교두였다.
그리고 홍매학관은 인근에 있는 천무학관과는 다소 잡음이 많은 학관이었다.
“우리는 그저 위기 상황이라고 들어서 도우러 온 것뿐이오.”
“위기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판단하오.”
“너무 까칠하게 굴지 말아요. 천 교두.”
파르륵!
딱딱하게 말하는 천극태 옆으로, 허공에서 날아들어 착지한 로브 차림의 여인 한 명.
살짝 가무잡잡한 얼굴에 진한 화장을 한, 그래서 로브의 흰색과 대조되는 미색.
홍매학관의 또 다른 교두였다.
“마법학의 지민 교두…….”
뇌천벽이 읊조리듯 말했다.
토네이도를 일으키고 윈드 커터로 수백의 몬스터를 썰어 버린 여인.
공식적으로 7서클 중급. 비공식으로 8서클 직전이라는 말이 도는 고위급 마법사.
홍매학관의 마법학 교두 지민(遲民)이었다.
“다들 오랜만에 뵙네요. 일단… 민간인들 피해를 줄이도록 도와주신 것에는 감사드려요.”
그 말에 그녀는 활짝 웃어 보였다.
여전히 검을 집어넣지 않은 천극태와 달리, 그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천무학관에서는 이번 일에 큰 도움을 주셨어요. 깊은 후의에 홍매학관을 대표해서 감사드립니다.”
“아, 당연히 해야 할…….”
“그리고 그저 후의로 오신 거라면 전리품 분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시겠죠?”
말이 끊긴 뇌천벽은 인상을 찌푸렸다.
“흥.”
제운비 역시 불편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 * *
“오버로드, 제 부족함을 용서하십시오.”
푸욱.
오크로드 마나트는 쿠아토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느 종족을 불문하고, 무릎을 꿇는다는 건 상대를 윗사람으로 존중한다는 의미.
“전과가 너무 부족했습니다. 모처럼 나눠 주신 병력을 낭비하여 들 낯이 없습니다.”
“되었다. 마나트. 애초에 정예도 아닌 떠돌이들을 모아 만든 반쪽짜리 군대였으니.”
쿠아토는 그다지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리며 향해 말을 이었다.
“저기 합류한 자들, 누군지는 알고 있느냐?
“학관의 교두들로 추정됩니다. 인물들의 면면을 보건대, 아마도 홍매학관과 천무학관입니다.”
오크로드 마나트는 이미 인간들의 정보를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그는 무력보다는 지능이 발달한 존재. 무리에게 기운을 솟구치게 하고 힘을 나눠 주는 대신, 인간 수준으로 사고할 줄 알며, 정보의 가치를 아는 특이한 오크로드였다.
덕분에 전술만이 아닌 전략을 짤 수 있었고, 싸움에는 지더라도 목표 달성은 놓치지 않는 지휘 특화의 오크로드. 이번 관도 수비대 습격 작전 역시 그가 짠 전략이었다.
지능이 유달리 높았기에, 사천에서 가장 유명한 두 학관을 모를 리 없었다.
“홍매학관이라… 뭐, 오히려 잘된 일인가.”
쿠아토는 멀찍이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놈의 안력은 이미 무림인들보다 월등히 좋았다.
그의 눈에는 수백 미터의 거리도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가깝고 자세했다.
“꾀주머니 마나트. 다음 계획을 말하라.”
“예, 시선은 충분히 끌었습니다. 관도 수비대의 거점과 이곳 곡창지대의 식량 창고도 인간들에게는 중요한 요지. 이 정도로 흔들어 놨으니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지 못할 것입니다.”
“좋군.”
책사격인 마나트의 말에 쿠아토가 몇 가닥 나 있지 않은 턱수염을 쓸어 보였다.
“우리 그린스킨의 어버이, 아락취 대족장께서는 이번에 인간들의 기세를 크게 꺾어 놓으라 하셨다. 내 권능과 네 꾀주머니가 하나가 되었으니, 누구보다 뛰어난 성과를 보일 터.”
그린스킨 아락취.
오크로드 중의 오크로드.
과거 천마와 맞서 싸운 4명의 수호장 중 하나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쿠아토는 그 수호장의 직계 무장이었다.
“제 부족한 머리를 받아 주신 오버로드께 영광을. 그럼 이제 출발하시렵니까?”
“…….”
“…오버로드?”
“아니, 아니다.”
쿠아토의 찌푸린 눈에는 한 청년이 잡혀 있었다.
그저 시선을 끌 목적으로 보낸 잡졸들이기는 하나, 그래도 천 가까이 모은 군세 속에서 수많은 그린스킨을 베었던 인물.
혹여나 하여 오거를 보내고 난 후, 그는 느꼈다.
저 청년에게서 매우 친숙한, 그러면서도 거북스러운 기운이 느껴진다는 걸.
‘분명 먹어 본 적 있는 기운인데…….’
한참을 떠올려 봤지만, 아쉽게도 쿠아토는 그게 뭐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분명 우월하고 지혜 역시 있었으나, 마나트만큼의 기억력은 가지지 못했으니까.
“대단한 곳은 아니었을 게다. 대단했다면 내가 기억했겠지.”
그는 목에 맨 피리를 들어 강하게 숨을 불어넣었다. 인간의 정강이뼈로 만든 피리는, 보통 사람이 들을 수 없는 기이한 음향을 자아냈다.
---!
구드드득. 푸왁! 푸드덕!
그러자 잠시 뒤, 바닥에서 거대한 드레이크 한 마리가 땅을 파헤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핏빛의 불타는 비늘을 가진 샐러 드레이크. 하지만 흑객이 상대했던 놈들보다 몇십 배나 큰 종이었다.
“그럼 가자.”
“옙.”
크게 입을 벌린 드레이크의 아가리로, 쿠아토와 마나트가 걸어갔다. 뒤이어 오거들이 차례차례 이동해서 드레이크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히잇.”
100㎝ 남짓한 키에 쿠아토의 발밑에서 눈치를 보던 대주술사 토루스가 지팡이를 들고 따라가고 있었다.
드드드득!
뒤이어, 샐러 드레이크가 맹렬하게 땅을 파고 들어갔다. 그 속도는 와이번의 비행만큼이나 빨랐다.
하지만, 노달은 방심으로 인한 단 한 번을 빼고는 피해를 허용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