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홍매학관 (3)
한편, 노달은 열심히 와이번을 때려잡고 있었다.
“한 놈. 또 한 놈. 엿차.”
대규모 와이번의 일제 공격은 무시무시했다.
쉭! 쉭! 쇄각!
보법의 극한에 달한 노달의 검에, 와이번들은 닭이 칼잡이에게 목이 날아가는 것처럼 목을 잃었고, 그렇게 순식간에 사분지 1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일단 수가 줄어들자 그때부터는 매우 쉬웠다.
“하앗!”
브레이커 클랜이 기운을 차리고 반격에 나선 것이다.
클랜장 일표 역시 초절정에 오른 무인.
그의 표횰한 반격이 시작되었고, 정후와 원홍은 그를 따라 와이번을 상대했다.
“하압!”
특히 원홍의 건틀렛(Gauntlet)으로 쏘아내는 권기는 치명적이었다. 일단 한 번이라도 맞은 와이번은, 몇 초 후 몸을 경련하며 바닥에 떨어졌다.
쿠웅! 크르르르㎝㎝.
바로 마비(Paralyze) 효과.
권기로 비늘을 살짝 벗겨 내고, 뒤이어 마비 독이 살을 파고든다. 직접 당해 보지 않으면 영문도 모를 암수였다.
끄륵? 끄륵! 끄륵!
땅에 떨어진 와이번은 당황했다. 몸이 멋대로 경련하니까.
“잘했어! 원홍!”
“하핫! 이 정도야!”
사실 원홍의 마비 독은 대단한 수준이 아니었다. 짧은 순간, 가벼운 경련을 일으키는 정도다.
애초에 맞히기만 하면 무조건 마비시킬 수 있는 독이라면, 전설급의 무적 아이템이었을 터.
동급의 육상 몬스터, 특히 흑객이 상대했던 샐러 드레이크 같았으면 가렵지도 않았을 공격이다.
하지만 와이번은 비행 몬스터였다.
끄르르르… 서걱!
비행은 대단히 정교한 움직임을 요하는 법.
근육에 약간의 비틀림만 일어도, 바로 추락을 면치 못한다.
그래서 땅에 쓰러져 단 몇 초를 뒹구는 사이, 일표를 비롯한 클랜원들이 열심히 놈들의 모가지를 수확해 댔다.
서걱! 서걱! 서걱!
이제껏 낭패를 당해 분노한 브레이커 클랜.
“어허, 분명 여기쯤 떨어졌던 것 같은데…….”
그 세 명이 혈투를 벌이는 가운데, 노달은 땅을 내려다보며 걷고 있었다.
아까 전, 그는 삼두룡을 처리한 순간 뭔가 툭 떨어지는 걸 목격했다.
사실 와이번의 일제사격에 화상을 입은 것도, 실은 그 떨어진 무엇에 정신이 쏠렸기 때문이다.
콰아앙! 콰앙!
걸어가던 그의 옆으로 화염이 터졌다. 열 마리 가까이로 줄어든 몬스터지만, 마지막 발악으로 한 와이번이 불길을 뿜어낸 것이다.
하지만, 노달의 시선은 오로지 위가 아닌, 땅을 향하고 있었다. 한참을 서성이던 그는 불에 반쯤 그을린 나무 밑에서 반짝이는 물건을 찾았다.
‘여기 있다!’
삼두룡이 죽으면서 토해 낸 아이템.
그간의 오랜 수련과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이런 기형적인 놈들은 꼭 하나씩 좋은 것들을 토해 내게 마련인데…….
“이건 뭐야?”
노달의 눈에 비친 아이템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크기는 어른 주먹만 한 정도.
생김새는 돌덩어리 같았고, 빛깔은 은은한 적색을 띠었다. 그 외에는 뭔가 특별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애초에 이곳에 떨어지는 걸 보지 못했다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정도.
“음… 일단은 챙겨야지.”
주섬주섬.
그래도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을지 모르니 배낭을 열어 그것을 챙겨 넣었다. 여차하면 버리는 건 언제든 가능하니까.
“위험해!”
그사이 어떤 이의 목소리가 들렸고, 돌아보던 노달의 눈엔 자신의 앞으로 입을 벌린 채 날아오는 와이번의 아가리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이 몬스터의 마지막이었다.
쾅!
순식간에 머리채가 잡혀 땅에 박힌 와이번은 신음 소리도, 고통에 떠는 몸짓도 없었다.
지면에 부딪히자마자 즉사해 버린 것이다.
“자, 다 끝났는감.”
어느새 배낭을 메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씨익 웃는 노달.
그는 얼떨떨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브레이커 클랜원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럼 다음에 보자고.”
* * *
쿠르릉. 쿠르르릉.
몬스터 웨이브는 이제 마무리 단계였다.
천마는 놈들의 군세가 차츰 줄어들자, 적당히 자리에서 빠져 한쪽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저 멀리, 좀 떨어진 언덕의 작은 숲을 보면서.
“흠.”
원래는 벽을 넘은 뒤, 안전한 곳에서 깨달음을 반추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자신에게 향해진 날카로운 시선을 느꼈다.
방향은 언덕의 숲.
자신이 감지했던 쿠아토 쪽에서 뭔가 경계의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었다.
‘이상하네, 이 몸은 아직 경계할 대상이 아닐 텐데…….’
기척으로 어렴풋이 느낀 놈의 경지는 극마의 마지막 단계.
혹은 탈마와 극마의 경계에 든 녀석이다.
그런데도 놈이 보낸 시선은 분명히 경계, 혹은 그 이상의 어떤 감정이었다.
‘저놈이 아락취의 부하라면… 예전보다 더 성장했다는 건데.’
천마는 당시 리치왕을 수호하던 아락취를 떠올려 보았다.
상대해 본 바로는 그 당시 그는 탈마의 능력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 녀석은 이미 그 단계를 넘보고 있다.
이 말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적들이 이전보다 더욱 강해졌다는 것을 뜻했다.
쿠르르륵! 슈륵!
“어?”
그렇게 놈들을 예의 주시 하고 있는데 저 멀리 떨어진, 대장 놈들 앞에 갑자기 거대한 도마뱀 한 마리가 땅속에서 기어 나왔다.
놈이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자 몬스터들이 그 입으로 제 발로 들어갔고, 그 뒤에는 순식간에 땅을 파고들어 사라졌다.
잡아먹힌 건가? 스스로? 그렇게 의아해하고 있을 때, 뒤에서 의문에 답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쿠아토, 놈의 이동 수단입니다.”
흔들흔들.
노달이 뭘로 채웠는지 빵빵해진 배낭을 메고 다가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땅속을 파고 움직이는 정체 모를 몬스터. 전투에는 가담하지 않지만, 장거리 이동에는 와이번보다 더 빠르다는 놈이지요.”
“…신기한 게 많군.”
천마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상하군요. 분명 싸움 초반에는 정찰 삼아 보내는 느낌이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최후의 공세를 취하다니. 뭐, 저놈이 당장 붙자고 달려들지 않은 게 다행이긴 합니다만.”
노달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교단의 원수 쿠아토. 놈을 직접 본 터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죽자고 붙고 싶은 상대이지만, 실제로 붙었다간 극마에 불과한 그로서는 개죽음만 당할 터.
그래서 놈이 물러가는 걸 보고만 있어야 했다. 당연히 기분이 가라앉을 수밖에.
“뭐,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봐야지.”
“…꿍꿍이요?”
“그래. 나도 어떤 건지는 모르지만…….”
천마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땅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추정키로 아마도 탈마를 넘보려는 경지에 이른 놈이야. 그런 놈이 아무 이유도 없이 천이나 되는 부하를 죽였을까?”
“…….”
그 말에 노달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화경의 마지막 벽, 현경을 넘보는 무력은 스스로 어느 정도의 지능을 갖추지 않으면 가질 수 없다.
강한 힘을 얻으려면, 타고난 신체적 역량 외에 스스로 단련하고 자신의 힘을 활용하는 깨우침은 기본으로 갖춰야만 한다.
그렇다면, 그런 지능이 있는 놈이 아무 이유도 없이 부하들을 개죽음시킬 리는 없을 터.
뭔가 생각이 바뀌었다거나, 아니면 애초에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고 할 수밖에.
“그런데 제자님…….”
“왜?”
천마가 뒤돌아보자, 노달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뭐야. 싱겁기는.”
천마의 말에 노달은 씨익 웃었다.
하지만 미묘하게 자신의 몸이 떨리는 건 숨길 수 없었다.
‘깨달으셨군요.’
그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천마의 목소리, 행동, 그리고 움직임까지.
기운이 차분하게 갈무리되어 있었다. 지난번 상대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 * *
“크흠. 크흠.”
사천의 관도 수비대가 세운 막사에서, 클랜장 일표는 불편한 헛기침을 해댔다.
수비대장 조삼은 그를 보자마자 절을 할 정도였다.
애초에 그들이 나섰기에 인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몬스터 웨이브를 차단한 건 온전히 브레이커 클랜만의 활약이 아니었다.
아주 큰 공을 세운, 사실상 마무리를 지어 버린 더 대단한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다름 아닌, 천무학관과 홍매학관의 교두들.
브레이커 클랜으로서는 감히 말도 걸기 힘든 강자들이자, 마침 서로서로 사이가 안 좋은 한 지역의 패자들.
‘아니, 좀 언질이라도 주지. 괜히 껴 버려서…….’
그런데 하필이면 그들 사이에 브레이커 클랜이 끼어서 앉게 된 것이다. 좌불안석이 따로 없었다.
관도 수비대가 은혜에 보답하겠답시고 각종 음식과 다과들을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 왔지만, 입맛은 애초부터 싹 사라져 있었다.
“허… 음. 커흠! 어.”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결국 일표는 입을 열었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하고, 사과를 하든 감사를 하든 하며 그 핑계로 빠져나가는 게 낫겠다 싶은 것이다.
“브레이커 클랜의 클랜 마스터 일표라고 합니다. 명성이 자자한 두 학관의 교두님들을 보아 일생의 영광입니다.”
“…….”
“…….”
불꽃 튀는 눈싸움을 하고 있던 교두들이, 입을 연 일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주르르륵.
일표는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혀가 얼어붙었다.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까 싶어서.
“브레이커 클랜이 나서 주어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소. 크게 감사드리오.”
홍매학관의 천극태가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췄다.
“명성대로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지민이 따라 두 손을 모았다.
“천무학관은 앞으로 브레이커라는 이름을 기억하겠소이다.”
이에 질세라 뇌천벽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강호에 아직 협의가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소이다.”
제운비까지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했다.
“어…….”
무려 화경급 고수 네 명이 예의를 표해 왔다.
원래라면 감격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일표의 표정이 더욱 난감해졌다.
찌리리릿!
그저 서로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좀 전의 눈싸움이 더욱 심해진 것이다. 마치 바다에서 고래 네 마리가 솟구쳐 오른 듯한 기분이었다.
“어? 어! 신비야? 뭐라고?”
그래서 결정했다.
일표는 벌떡 일어나서 한 손을 머리에 대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곳에 있으면 죽는다. 끔찍하게 휘말린다. 차라리 미운털이 박히든 말든 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정말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그럼 말씀들 나누십시오.”
“예? 더 계시질 않고…….”
“아닙니다. 지금 클랜원들이… 뭔가 일이 생긴 것 같아서 잠시 실례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붙잡으려는 관도 수비대에게 손사래를 쳤다.
“어?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어떡해!”
후다닥!
그리고 다른 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급히 줄행랑을 치며 막사 밖으로 나갔다.
“…….”
“…….”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것은 홍매학관의 교두였다.
“귀한 분들을 여기서 뵙는구려. 3년쯤 됐습니까?”
체격이 다부지고, 매우 거친 인상의 소유자.
긴 장발을 묶은 그는 천극태. 홍매학관을 대표하는 전투학과의 교두였다.
특히 위험 등급 11급인 데스나이트 셋을 혼자 처리했다는 일화는 경쟁학관인 천무학관의 교두의 피를 끓게 했다.
“굳이 셈을 해 보지 않아 모르겠구려.”
편히 받아도 될 말을 제운비는 딱딱하게 받았다.
사실, 그는 경쟁이고 뭐고 없이 홍매학관과 마주치는 것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변절자들 같으니.’
홍매학관.
본래는 화산파, 정도 문파에서도 명문 중의 명문이던 곳.
화산의 자하신공과, 24수 매화검법을 익힌 매화검수들이 주축이 된 학관이었다.
하나 교관도 교두도 역량이 뛰어났으나, 홍매학관은… 망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대격변의 날 이전, 화산파의 도사들은 도관에서 경문이나 외며, 시주나 보호세를 받던 지역 유지였다.
그들은 학관의 경영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스승의 가르침이 어려우면 제자들이 다른 스승을 찾아 떠난다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덕분에 봉문도 아닌, 파산이라는 치욕적인 일을 두 번이나 겪고, 학과장이 화병으로 명을 달리하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이후.
정통성보다는 효율성. 명분보다는 실리를 따지는 이가 학관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정파보다 사파를, 협의보다 돈 잘 버는 사람들을 학관에 끌어모았다.
대표적인 게 송문고검이다.
적전제자에게만 전해지던 이 검은, 이젠 찾기만 하면 누구나 살 수 있는 흔한 검이 되었다.
그러다가 30년 전에는, 기어코 홍매(紅梅)라는 이름을 버리고 홍매(紅魅)학관이라 개명했다.
그건 더 이상 정파로 남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한때 청정과 수양에 힘쓰던 명문이, 학관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장사치가 되어 버린 것이다.
‘명문의 이름을 스스로 내버린 이들. 지하에서 선조들께서 통곡하고 계실 것이다.’
그래서 제운비는 그들이 불편했다.
당연히 말도 시선도 곱지 않았고, 그런 태도는 당연히 홍매학관에게 전해졌다.
“천무학관이 대단하긴 대단하군.”
천극태가 제운비의 차가운 눈길에 얼굴을 굳혔다.
탁. 바지직.
탁자 위에 있는 과자를 가루로 만들어 입에 털어 넣고는.
“통보도 없이 구역을 넘어오고는,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없으시다니. 주변에서 검왕, 검왕이라고 치켜세워 주니까 정말 제왕이라도 된 줄 아시나 보오?”
어떻게 봐도, 이건 명백한 시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