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몬스터의 반격 (1)
제운비는 제운비대로 홍매학관에 악감정이 많았지만, 홍매학관도 제운비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다.
정확히는 제운비가 아니라, ‘천무학관’에 대해 앙금이 쌓여 있었다.
사실, 천무학관의 존재가 홍매학관이 파산을 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였으니까.
“말을 가려 할 줄 모르는군.”
“그러는 그쪽은 표정 관리 하나 못 하고.”
제운비가 점잖게 나무라자 천극태가 신랄하게 받아쳤다.
서로서로 눈초리가 더욱 사나워지고,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질 때쯤.
짜악!
일부러 요란하게 손뼉을 치는 사람이 있었다. 홍매학관의 마법학 교두, 지민이었다.
“아아, 이 분위기 싫네요. 지금 학관끼리 쟁투라도 벌이자는 건가요? 두 교두님, 왜 그렇게 서로 불편하게 보시는지 모르겠네요. 지금 우리는 공동의 적을 처리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
“…….”
“지금 몬스터가 쳐들어와서 도시 하나를 쑥대밭을 만들어 놨는데, 서로 협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지민 교두가 날카롭게 나서자, 뇌천벽이 끼어들었다.
“지민 교두의 말씀이 맞소. 제운비 교두, 지금 우리는 천무학관의 얼굴이기도 하오. 자중하시오.”
“크흠…….”
교두 둘, 아니, 셋에게 지적을 받자 제운비는 헛기침을 했다.
그도 단순 개인감정으로 학관 간의 관계를 악화시킬 만큼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었다.
“사과하리다. 실례했소. 싸움의 여파가 남아서… 좀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나 보오.”
제운비가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했다.
싸움의 흥분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지만, 이런 때는 대충 이렇게 둘러대는 법이었다.
상대도 그걸 알면서도 넘어가 주는 법이고.
“뭐… 알면 됐소. 나 역시 잘한 건 없으니.”
와각와각.
천극태는 스스로 분을 삭이려는 듯, 탁자 위의 다과와 과자를 모조리 집어삼켰다.
그런 그의 모습에 지민 교두는 안쓰러운 얼굴을 했다.
‘쯧쯧. 자존심 내세울 상황도 아닐진대…….’
툭툭.
뇌천벽은 화제를 돌리려는 듯 탁자를 몇 번 두들기더니 입을 열었다.
“자, 일단 현 사태부터 봅시다.”
지금은 몬스터 웨이브에 대한 분석과 대처가 우선이었으니까.
“네.”
뇌천벽은 아직 열이 덜 식은 제운비와 천극태를 제외하고, 냉정한 지민 교두에게 말했다.
애초에 마법학과라, 홍매학관의 과거와 큰 관련이 없는 그녀에게 물었다.
“우선 마법사의 지식을 빌리도록 하지요. 지민 교두? 오크, 트롤, 거기에 와이번까지. 이번처럼 몬스터들이 유기적으로 협력해서 공격해 온 사례가 있소이까?”
“없어요. 결코.”
지민 교두는 즉각 답했다.
“규모 자체는 천 단위가 넘은 적이 많이 있죠. 당장 이번 달만 해도 하북 이남 지역의 구울, 광동에서 나타난 수십 마리의 오크 샤먼 등. 큰 침공이 여러 번 있었어요. 하지만.”
“하지만?”
“여러 종이 동시 협력 하는 경우는 없어요. 역사적으로도 드문 일이죠. 그중 가장 최근에 일어난 건.”
스으윽.
그녀는 탁자 위의 지도를 가리켰다. 가느다란 손끝이 짚은 중원의 한 도시를 짚었다.
“여신(余烬)이라고, 상주 인구 최소 1만 이상의 소도시가 하루 만에 사라졌죠. 여러 종의 몬스터가 합세해서 온 공격에.”
여신, 그 뜻은 잿불. 잿더미 속에 숨은 불씨라는 의미로, 이들은 모르지만 옛 마교의 개척 마을 중 하나였다.
“폭식의 쿠아토였지요.”
제운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크로드에서 변형된, 그린스킨 여러 종을 지휘하는 오버로드. 예전에도 오버로드가 없던 건 아니었지만, 이놈처럼 이능까지 가진 놈은 없었어요.”
지민 교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산발적인 몬스터 웨이브라면 이제껏 여러 번 있었다.
그래도 지능 낮은 괴물들의 침공은 막으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이번 일에 뭔가 강력한 지휘력을 가진, 통솔력이 높은 우두머리가 있어 보인다는 것.
보통의 경우는 규격이라는 게 있다.
마법에 능한 몬스터라면 물리적 타격, 검에 약하고, 오버로드 같은 지휘력이 뛰어난 몬스터는 개체의 무력이 약했다. 그게 상식이었다.
그래서 쿠아토 출현 사태 때는 피해가 컸다.
이놈은 그 상식을 벗어난, 규격 외의 존재였으니까.
“오면서 급히 살펴봤는데… 이번 웨이브는 산발적인 일반 웨이브가 아니오. 전투 직전까지, 이놈들은 행렬을 지어 움직였소. 몬스터가 제식을 갖춘 거요.”
천극태가 툭툭, 과자 부스러기 묻은 손으로 탁자를 두들겼다.
그 말에 제운비가 끄덕이며 동의했다.
“내가 본 것도 같소. 아마도 훈련. 오거나 와이번 같은, 종이 다른 몬스터들과 하는 합동 전술 훈련 같았소이다.”
“잠깐만요. 그 말은 곧…….”
지민 교두가 창백해진 얼굴로 손을 들었다.
“전쟁을 위한 연습이라는 거예요? 본격적인 공습을 알리는?”
“지금으로선, 그것밖에 예상할 수 있는 게 없소.”
뇌천벽이 답했다.
그린스킨.
그중에서도 오크는 인류에게 있어 최악의 적이다.
놈들은 괴물이지만 이성적으로, 차근차근 전쟁 준비를 할 줄 아는 놈들이다.
즉 이놈들이 움직이는 게 보인다는 건, 이미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 쳐들어오기 직전이라는 뜻이다.
“다만, 한 가지 의아한 건.”
뇌천벽이 톡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적이 너무 쉽게 무너졌다는 거요. 여러 종의 몬스터 연합이 말이오. 만약 이런 놈들이 오크 샤먼들 같은 체계적인 조직 형태를 갖췄다면… 오히려 우리가 당했을 수도 있었을 거요.”
“…나 역시 생각이 같소.”
천극태가 뇌천벽의 말에 수긍했다.
그는 야전에서 몬스터 대군을 상대한 경험이 아주 많았다.
그중 정말로 목숨을 잃을 뻔한 경우가 몇 있었는데, 그게 바로 오크들을 상대했을 때. 몬스터 간의 유기적 협동이 일어난 경우다.
“그러고 보니.”
제운비가 턱을 쓸며 진중하게 물었다.
“우리 중 야전에서 오크로드를 직접 상대해 본 건 천극태 교두가 유일하군. 대체 어떤 놈인지 겪었던 경험을 공유해 주시겠소?”
“상식을 넘어서는 위험한 종족. 딱 그 말이 어울리오.”
천극태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오크로드(Orc Lord).
천, 혹은 만 단위의 오크가 모이면 자연 발생하는 ‘초특급’ 위험 개체. 놈은 타고난 리더다.
오크의 진짜 위험성은 로드가 탄생하면서 드러난다. 개체가 아니라 군체인 오크의 집단 전술은, 로드가 있고 없고에 따라 고양이와 호랑이 정도의 차이가 난다.
특히 군주의 권능, 오크로드들이 가지고 태어나는 기본 권능. 이게 정말 골치 아팠다.
“분명히 잡병들이었는데. 제기랄. 딱 하루, 하루가 더 흘러서 놈이 각성하는 바람에, 부족 전체가 전사가 되어 버렸지. 덕분에 다 이긴 거라 생각한 싸움에서 완벽히 패배했소.”
“그 정도요?”
“그 정도요.”
천극태가 예전에 파견 근무를 나갔을 때 방랑 오크, 유랑 오크 수백 마리가 도적 떼로 움직이는 걸 발견한 적이 있었다.
몇 번 손을 나눠 본 후에, 그는 확신했다.
이번 일은 정말 간단하다고.
그냥 일반적인 도륙이 가능하다고. 그도 그럴 게, 무리에서 쫓겨난 약한 오크들은 행동이 굼뜬 데다 투지는 거의 없는 겁쟁이들뿐이었으니까.
그때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겨울이라 날이 빨리 졌지. 야간 전투는 무리하다가 피해를 볼 수 있으니, 숙영지를 세워 하루를 쉬게 했소. 잘 먹이고 정비해서 바로 아침에 쳐들어가려고. 그랬는데.”
밤새 다른 무리가 합류했다.
수백에 수백이 더해지다 보니 천을 넘었다.
머릿수가 늘어나자 오크들 사이에선 싸움이 벌어졌다. 새로 우두머리를 뽑느라고.
당시에 천극태는 이를 느긋하게 관람했다.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 서로 물고 뜯는 게 보기에 웃겼으니까.
“그때는 몰랐지. 그 시간이 유일한 기회라는 걸.”
다음 날.
서로서로 쳐 죽이던 싸움이 끝나고, 오크들의 우두머리가 새로 정해졌다.
놈은 피에 젖은 도끼를 쳐들고 크게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기세가 완전히 돌변했다.
천극태가 턱을 쓸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수백 마리의 고양이들이 죄다 호랑이로 변해 버린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소.”
로드의 카리스마에 감화된 오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저 그것만으로도, 인간 징집병보다 못한 수준이던 오크 잡병들이, 최정예 부대 수준으로 돌변했다.
눈앞에 창칼이 있어도, 불타는 마법 방벽이 있어도, 명령이 떨어지면 미친 듯이 돌격한다.
“끔찍하군요. 정말… 죽음을 겁내지 않는 군대라.”
장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천극태가 말해 준 오크로드. 그 위험성을 다시 한번 새기며, 모두들 지도를 보고 있었다.
“일단, 이번 일을 다시 봅시다. 이상한 건 더 있소. 이게 훈련이었다면, 패퇴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병력들을 물리는 게 기본이지. 그리고 천극태 교두의 말대로라면.”
제운비가 툭툭, 탁자를 두들겼다.
“오크로드는 타고난 지휘관이겠지. 그렇게 보면 좀 이상해. 내 입으로 말하긴 뭐 하지만, 나와 뇌천벽 교두는 화경의 고수요. 우리가 참전한 순간에 그린스킨은 이미 패배가 확정된 상황이었소.”
“그렇지. 그런데 목숨을 도외시하고 돌격해 왔었고. 솔직히 말이 안 되는 상황이오. 그건 오크로드가 아니라, 전략 전술을 모르는 무조건 돌격만 아는 머저리나 할 짓이지.”
뇌천벽이 그 말의 뒤를 이었다.
“그럼 혹시… 저쪽의 오크로드가 난전 중에 사망했다는 건가요?”
지민 교두가 살짝 얼굴이 밝아졌다.
“그건 말이 안 되는데. 만약 그랬다면 이판사판으로 돌격해 오는 게 아니라 갑자기 지리멸렬하게 무너졌어야 해.”
천극태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 지역은 천무학관과 홍매학관 사이의 공동경비구역. 특히 지리적으로는 홍매학관에 더 가깝다.
즉 이곳에서 발생하는 피해는 홍매학관의 재정에 바로 악영향을 준다.
어떻게든 희망적으로 생각하려는 지민 교두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현장의 책임자는 항상 최악의 가능성을 따져 봐야 한다.
그래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으니까.
“정말 모르겠군요. 후우… 분명 관도 수비대의 말로는, 발견된 오크의 사체 중에 로드는 없다고 하고… 산발적인 일반 웨이브라고 보기엔 그 기민한 움직임이 신경 쓰이고…….”
“일단은 순찰조를 늘려서 급습에 방비해야 하오. 진짜 쿠아토 그놈일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지.”
“…이미 하고 있어요. 사방 백여 리를 교관급으로 편성해서 순찰을 돌고 있다고 해요.”
톡톡.
지민 교두는 자신의 머리를 두들겼다. 원거리 텔레파시로 보고를 받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뇌천벽은 그때 문득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잠깐. 사방 백여 리를 교관급 순찰대가 돌고 있다고 했소?”
“네. 뭔가 문제라도?”
“그럼… 홍매학관에 지금 남은 교두, 교관이 몇인 게요?”
“…지금 아주 무례한 질문이신데요?”
지민 교두가 눈살을 찌푸렸다.
학관은 기본적으로 학습 기관이지만 병영의 역할을 함께한다.
그렇다 보니 한 지역의 성주처럼 그 지역을 보호하는 무력 집단의 성격도 띤다.
때문에 당신 학관의 현 전력이 어느 정도냐고 묻는 것은, 그것도 소속이 다른 학관의 교관이 그리 묻는 것은, 너희들 지금 얼마나 약하냐는 식의 도발이 될 수도 있었다.
그때였다.
“큰일 났습니다! 홍매학관이… 홍매학관이…….”
갑자기 급하게 뛰어 들어온 관도 수비대장 조삼.
그는 터져 나오는 거친 호흡을 내쉰 뒤,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몬스터들에게 침공을 당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