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오크로드의 권능 (1)
쿠구궁!
천마와 노달은 매령지관의 외벽을 뚫고 들어갔다.
예상대로 보호 마법진도 없고, 원래라면 항상 있어야 할 교관급 보호 인원도 없었다.
아마도 한참 주변이 싸움 중이라서 그쪽으로 투입된 모양이다.
“이게 뭐야?”
“…어.”
건물 내부를 둘러보기도 전에 천마의 신형이 아래로 푹 꺼졌다.
노달도 떨어지듯 지면에 안착하고는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홍매학관의 금고라는 매령지관은 박살이 나 있었다.
깊고 푹 팬 구덩이로 보건대, 내부가 거의 폐허 수준으로 무너진 것이다.
이래서야 기껏 도둑질하러 찾아온 의미가 있을까 의심하게 될 정도.
“아무래도 먼저 온 놈이 단단히 분탕질을 쳐 둔 거 같습니다만.”
“왜?”
“거기까지는 저도…….”
꼭 절반만 알아내는 노달.
천마는 그를 보고 혀를 차다가 눈에 안력을 돋워 주변을 살폈다.
“흐음…….”
사방에 쫘악 뻗은 강력한 파괴의 흔적. 그리고 그 흔적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그 오크로드인가 하는 놈이 왔다 갔군.”
“…그게 보이십니까?”
노달이 묻자 천마는 끄덕였다.
“짐작은 그래.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기다 잔뜩 화풀이를 하고 간 것 같다. 뭔가 분노를 급하게 토해 낸 느낌이야.”
“하긴, 외벽이 멀쩡했었으니. 그럼 나름 소득은 있겠습니다.”
노달이 끄덕이고 펄쩍, 아래로 뛰어내렸다.
타닥. 타닥. 우드득.
매령지관은 지하로 뻗은 금고 건물이었다.
본래 1층에서 지하 3층까지 단단하게 준설되어 있었는데, 먼저 들렀다가 간 놈이 있는 죄다 부숴 버린 바람에, 깊이는 지하 2층에 그쳤다.
와지직! 와드드득!
아마도 최하층. 가장 깊이 보관되어 있을 고가치 아이템을 보려면 품이 많이 들 듯했다.
부서진 잔해에 아이템들이 죄다 파묻혀 있었기에 천마와 노달은 무너진 바닥과 벽의 잔해들을 부수고 밀어냈다.
한참 그러다 보니 그나마 층계참, 계단 주변에서는 그나마 파괴가 안 된 아이템 전시대를 볼 수 있었다.
그드드득! 쿵!
“호오!”
폭 3미터가량의 석판 몇 개를 밀어내고 나자, 조금 예상했던 모습이 보였다.
척 봐도 값비싼 아이템들이 즐비했다. 그저 많은 수준이 아니라, 넓고 다양했다.
절그렁. 절그렁.
전시대는 박살 나 있었지만, 원래 벽에 걸려 있었던 무기들, 그리고 전시대에 올려진 아이템 중에 내구도가 뛰어난 것들은 거의 손상을 받지 않았다.
자그락. 자그락. 빠드득!
좀 깨진 유리 때문에 번거롭긴 했지만, 잘 살펴보면 원래 뭐 하는 아이템이고,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그 사용처와 사용 방법이 적혀 있는 것도 있었고.
“야, 뭐 하냐? 빨리 주워 담아. 빨리.”
시간만 있었다면 작정하고 골라서 챙겨 갈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놈의 시간이 없는 상황이다.
천마는 일단 성해 보이는 아이템들을 마구잡이로 배낭에 넣기 시작했다.
우선은 느낌. 뭔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것.
위험하거나, 혹은 찌릿찌릿하거나 하는, 척 봐도 이거 보통 아니구나 싶은 그런 아이템으로 골라서 배낭 하나를 채웠을 때쯤.
“…뭐 하냐? 너?”
노달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생각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 그게… 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 판국에 뭔 생각? 시간 없어. 경비 서는 놈들이 언제 올지 모른다고.”
천마의 말에 노달은 고뇌하는 얼굴로 고개 저었다.
“그게… 제자님, 여기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값비싼, 보통이 아닌 아이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값비싼 아이템이니까 최대한 챙겨 가는 게 좋은 거 아냐?”
“그게… 처분에 문제가 생깁니다.”
“…처분?”
“예, 좋은 아이템, 귀한 아이템은 분명 높은 값을 받을 수 있고, 쓰임새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아이템은 당연히 기록이 되어 있을 겁니다.”
노달이 고민하는 까닭은 그것이었다.
매령지관은 홍매학관이 두 번의 파산을 겪은 후, 수전노니 돈맛을 보고 타락한 학관이니 하는 많은 오명을 들어가면서까지 온갖 기진이보를 모아 놓은 보물 금고다.
입 딱 벌어지는, 탁월한 성능의 아이템이 분명 많겠지만, 그런 것들은 홍매학관에서도 가장 신경 쓰는 물건들일 터.
“제자님, 저희가 이곳을 털러 온 것은 신병이기나 기진이보를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아실 겁니다. 교단을 운용할 자금 확보가 제일 큰 목적이죠.”
“그렇지.”
“예. 그러니까 너무 귀한 것, 너무 뛰어난 아이템은 오히려 가져가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홍매학관에서 추적을 해 올 테니까요.”
너무 먼 앞일을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노달의 걱정은 합당했다.
홍매학관은 사천에서 천무학관과 함께 1, 2위를 다투는 학관이다.
당연히 세력도 크고, 휘하 무관들도 많다.
지금이야 운 좋게 안에서 싸움이 나서 매령지관까지 털 수 있게 되었지만, 이번 일을 수습하고 나면 홍매학관은 도난당한 아이템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될 터.
그러니 역설적으로, 가장 귀하고 값나가는 것들은 가져가면 안 된다.
지금의 천마신교는 홍매학관과 전쟁을 벌일 여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흐음. 듣고 보니 그렇군.”
천마는 노달의 말을 듣고 납득했다.
이건 그가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무래도 그가 강하고 천마신교도 강했던, 전성기 때는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으니까.
“네 말이 맞다. 노달, 원래 목표대로 하자.”
툭툭.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약을 먹여서 환골탈태시키는 것도, 기본 체력이 있고 어느 정도 단련이 되어야 할 수 있는 거지. 준비 안 된 본 교의 놈들에겐 영약은 독이나 다름없다.”
귀하고 값비싼 아이템을 제값 제값 받고 팔려면, 경매를 통해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건 세상에다 우리가 홍매학관을 털었네 하고 사방에 알리는 격이 될 터.
“금괴, 보석, 마정석, 포션 같은 바로바로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들만 챙겨라. 네 말대로, 애초에 우리가 온 목적을 기억하자.”
“…알겠습니다.”
척!
천마가 지시하자 번민이 사라진 것일까, 노달이 예를 표해 보이고, 급하게 건물 잔해들을 뒤졌다.
와지직! 콰드드득!
그 손속은 재빨랐고, 망설임이 없었다. 보석, 마정석, 기타 값나가는 물품들을 흡입하듯 배낭에 밀어 넣는 모습을 보고 천마는 피식 웃었다.
“자아, 그럼 나는 어디…….”
와지직! 와지지직!
노달에게 환금성 좋은 아이템을 찾게 하고, 천마는 따로 강력한 이능을 가진 아이템을 찾았다.
철컥! 철컥!
실드 마법이 영구적으로 걸려 있는 방어구.
1단계 클래스를 올려 주는 마법 목걸이 등등.
아이템의 가치가 높아서 경매로 팔 수야 없다고 쳐도, 당장 전투나 전력 상승에 고급 아이템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가?
홍매학관의 추적? 그냥 안 들키면 그만이다.
천마나 천마와 극히 가까운 인물들에게만 쓰게 한다면, 홍매학관이고 뭐고 알 게 무언가?
“무기… 병기는 아무래도 좀 그렇고. 장신구, 반지나 목걸이, 팔찌… 이런 게 좋겠지?”
철렁. 철렁. 탱그랑!
시퍼렇게 예기를 뿜어내는 검, 창, 방패를 배낭에서 꺼내 던졌다. 아쉽기는 하지만 당장 쓰기에는 부담스럽다. 무엇보다.
찌리릿!
‘이거, 뭔가 걸려 있단 말이지. 분명.’
아마도 추적 마법, 혹은 그 비슷한 것일 터.
천마는 마법에 대한 조예는 낮았다.
하지만 극마의 극에 이르게 되면서, 예전과는 다른 감지능력을 얻었다.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민감함.
그걸 통해서 본 결과, 대개의 강력한 아이템. 특히나 무기나 방어구 등, 덩치가 큰 아이템들은 예외 없이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잘그락잘그락.
“음… 이거, 이거, 이거는 괜찮고.”
반대로 반지, 귀걸이, 목걸이 등의 장신구들. 이런 것들은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 없었다.
‘애초에 크기 자체가 작으니까.’
장신구는 대개 크기가 작다.
아무리 마법적인 힘이라 해도, 부피와 질량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장신구는 애초에 작은 크기와 면적으로, 한계까지 힘을 꽉꽉 담아 둔 물건이다.
여기에 추적 마법이든, 뭐든 간에 더 붙이긴 쉽지 않을 터였다.
기껏 추적 마법을 걸어 봐야, 아이템 자체의 마력에 튕겨 나가거나, 혹은 추적 마법에 아이템이 망가지거나 할 수 있었으니까.
“확실한 건, 이놈들이 부담이 없다는 거지. 뭐, 이거… 또 이거… 또… 응?”
잘그락.
그렇게 한참 챙기던 중, 천마의 눈에 거무튀튀한 팔찌와, 그 아래에 적힌 주석이 눈에 들어왔다.
미사의 정수.
-정령에 감화하여, 그들의 능력을 더욱 끌어올려 주며, 정신적인 힘을 보강해 준다.
-아이템 등급: 미정
“…….”
뭐라고 해야 할까. 이끌림? 운명? 그런 단어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 팔찌는 미묘하게 천마의 신경을 잡아끌었다.
“호오.”
잘그락.
바닥을 뒹구는 팔찌를 집어 올렸다.
그렇게 들고 보니 그건 일종의 일체형 건틀릿이었다.
차라락.
두터운 손목 보호대는, 짙은 회색의 금속에다 여러 가지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결이 다른 금속이 상감되어, 두 손가락이 포개진 형상이 보였다.
반투명한 재질로 만들어진 손등 보호대를 지나, 다섯 손가락을 끼게 되어 있는 부분에는 무언가 지릿지릿한 힘이 담긴 반지가 박혀 있었다.
기운을 넣어서 살펴보니, 팔찌와 반지 서로서로가 능력을 강화하는 이끌림 같은 게 있었다.
“…이런 걸 세트 아이템이라고 했던가?”
세트 아이템.
하나하나도 나름 유용하지만, 서로 함께 있어야 온전한 제 힘을 낼 수 있는 아이템.
아마도 팔찌와 반지가 서로 한 세트로 기능하고, 그래서 후대가 가운데에 손등 보호대를 덧대 하나로 만든 모양이었다.
자세히 만지면서 감지해 보니, 손등 보호대는 약간의 견고함을 부여하는 외에 다른 기능은 없었다.
찌익! 우드득!
천마는 과감하게 아이템을 쪼개, 팔찌와 다섯 개의 반지로 핵심만 추출했다. 그리고 그걸 장비하는 순간.
슈르륵.
순간적으로 눈앞이 어둠으로 혼탁해지는 것을 느꼈다. 온몸을 검은 기류가 감싸는 듯한 기묘한 느낌.
‘아…….’
그건 이전에 겪어 본 감각이었다.
필리아가 정령 소환 의식을 치르고, 그 후 잠에 빠져들면서 몸이 이상한 곳으로 이동한 그때의 그 감각.
‘놈이다.’
페이탈리스트.
천마는 직감했다. 놈과 자신의 연결이 한층 강하고 진하게 맞춰졌음을.
팔찌와 반지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힘. 아마도 정령사의 힘. 그것이 시릿하게 팔을 타고 올라와 상단전에 안착되었다.
스으으윽.
그림자에서 새카만 불꽃이 물방울처럼 피어 올랐다.
하지만 당장은 하지만 어떠한 압력이나 힘의 요동이 없었다.
그저 새로운 ‘문’이 생긴 것 같은 감각.
‘…….’
이대로 손을 내밀면, 문을 열어젖히면, 바로 페이탈리스트를 만날 수 있다.
그때의 그 굴욕을 맛보게 한 놈과 다시 대면해서 제대로 싸워 볼 수 있다.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천마는 스스로 거부했다.
지금 당장은 안전한 상황이 아니었다.
현재 천마는 적지나 다름없는 곳에 있었고, 얼마 남지 않은 천마신교의 후예들을 위해 급하게 해야 할 일을 마저 마무리해야 했다.
다다다다닥. 덜렁덜렁.
때마침, 잔해를 뒤지고 이것저것 배낭에 잔뜩 주워 담은 노달이 달려왔다.
“다, 다 챙겼습니다! 제자님!”
“…그래. 고생했다.”
헉헉대는 노달.
그가 등에 멘 배낭은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품도 불룩하고 팔에다, 다리에다 주렁주렁 뭔가를 묶어 둔 게, 저래서야 가다가 죄다 흘리지 않을지 걱정될 정도였다.
“자, 그럼.”
천마는 들어온 벽 쪽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노달을 천천히 응시하며 씨익 웃었다.
“튀자.”